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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대학의 현실과 시민사회와의 연계 방안
최 원 식 (창작과 비평 주간/인하대 국문과 교수)
ꋫ 아래 글은 교수님의 저서 <황해에 부는 바람> 제5부 대학과 지역사회에 실린 글입니다.
인천, 인하대, 지구촌
외바퀴 시대의 마감
인천대의 시립화가 드디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면서 그동안 인천에서 독점적 위치를 누려왔던 인하대의 위상에도 큰 변화가 올 것 같다. 물론 인천대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명실상부한 시립대학으로 자리 잡으려면 앞으로도 넘어야 할 난관이 적지 않지만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적 후원, 시립화로 가는 길을 착실히 닦아 놓은 선인학원 관선 이사회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새 시장 부임 후 인천시 당국의 적극적인 대처 등을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난관은 역대 독재정권과 유착하면서 거대한 뿌리를 내린 비리의 대표적 상징의 하나인 백인엽씨의 전횡을 차단하려고 고투해온 지금까지의 어려움에 비하면 행복한 고민에 속할 것이다. 면모를 일신한 인천대는 새 총장 체제 아래에서 대담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인천대가 인천지역과의 유기적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시립대학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엄숙한 다짐이다. 인천대의 정상화는 인천교육계를 비롯한 인천지역의 각 부문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올 터인데, 이는 인천시민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천의 대학계는 이제 두 바퀴의 온전함을 얻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인천대가 불구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인천에는 두 개의 종합대가 있었지만 거의 외바퀴 또는 1. 5바퀴의 파행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인하인 가운데 일부에서는 인천대의 시립화가 혹시 인하대의 위치에 손상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분명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인하대가 누려왔던 대표성이란 것이 인하대의 잘난 측면 보다는 인천대의 비정상적 운영에서 오는 반사이익에 말미암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인하인 사이에서 인천대가 잘되면 인하대는 더 잘될 것이라는 대승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명문 사학으로서 인하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진지하고도 근본적인 토론을 통해 교풍(校風)을 쇄신할 바로 그 때인 것이다.
인하대의 현주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인하대의 진로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대학의 현주소를 냉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아니 될 터이다. 과연 인하대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지난 91년, 우리 대학은 C급 판정을 받아서 인하인 모두가 분개한 적이 있다. 이 판정을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다시 한번 돌이켜, 우리 대학이 A급인가에 대해서 선듯 나서기가 머뭇거려짐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인하대생들의 학력고사 점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입시지옥으로 표현되는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학력고사 점수라는 것이 물론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을지라도, 무슨 결정적 중요성을 가질까? 아인슈타인이라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 대학생이 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과목에서 팔방미인이 될 것을 요구하는 우리 교육은 타고난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여 개발하는 것과는 반대로 특출함도 모자람도 없는 그저 그런 평균인을 양산하는 데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일정한 수준의 대학 이상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이라면 그 대학에서 유효적절한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할 수 있을 때 오히려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인재들을 기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인하대생들은 그런 자격이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는 학생들 스스로 중등교육의 어떤 결손을 넘어서려는 각고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지만.결국 문제는 교육여건 또는 교육환경을 포함한 그 대학의 지도력이다. ‘동양의 MIT’를 목표로 창립된, 인하대의 모태로 되는 인하공대는 한때 서울공대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꼽혔던 자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종합대로 승격한 이후 양적 팽창을 거듭한 오늘날 인하대는 명문이라고 자부하기에는 어딘지 손색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인하대가 인천에 있어서 그리되었다고 개탄한다. 물론 여기에도 일리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면 평준화 이전에 명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제물포고등학교는 어디 서울에 있었단 말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문제는 그 학교 교육주체의 교육철학 또는 교육이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학교의 교풍은 무엇인가, 혹시 부재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인하공대에서 인하대학교로 승격되면서 오히려 초창기의 소박한 모토 ‘동양의 MIT’ 그것마저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인하대의 몸은 종합대로 승격했지만 아직도 그 정신은 인하공대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인하대를 인하공대로 부르는 일반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인하공대의 옛 명성에 대한 뚜렷한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 종합대학교 인하대가 그에 걸맞은 교풍을 확립하지 못한다는 뼈아픈 증거로 되는 것이다. 10년 반의 재직경험에 비추어볼 때 인하대는 그동안 공대중심으로 운영돼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하대가 옛 공대시절의 명성에서 오히려 손색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하대는 우선 종합대에 걸맞게 새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옛 공대 시절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발전전략, 다시 말하면 공대 중심에 비공대를 구색으로 끼우는 식이 아니라,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 사이의 새로운 학제적(學際的)편제를 고도의 균형 아래 추구할 때 비로소 인하대는 학문공동체로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이와함께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연구소를 창립,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과제가 시급하다고 보인다. 그저 연구비나 나누는 식의 연구소가 아니라, 우리 대학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독자적 연구과제를 중심으로 학제적 협동이 높은 수준에서 조직되는 대표연구소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예컨대 인천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조사, 연구함으로써 인천발전의 종합적 청사진을 제시하는 연구소의 창립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학교만이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구소는 단순한 지역연구소로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천지역은 그냥 특수한 한 지역이 아니라, 최근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환황해권 (環黃海圈)의 거점도시의 하나여서 인천문제연구소는 효율적으로 조직된다면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가 골고루 참여하는 학제적 협동이 가능한 데다가 지역성에 기반한 국제성까지 담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인하대는 대학이 터잡고 있는 인천지역사회와 너무나 관련이 희박하다. 문화적 불모지로 전락한 인천에서 인하대는 마땅히 이 지역사회의 중심의 하나로서 기능했어야 할 터인데, 인천과 인하대는 마치, 억지로 동거하되 실지로는 별거상태의 부부와 같이 살아갔다. 인하인은 우선 우리 대학이 서울의 변두리 대학이 아니라 인천의 중심대학이라는 자부심을 먼저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대학은 지역적 특수성에 매몰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러나 보편성은 뿌리없는 세계주의에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통치로 전락시킨 역대독재정권의 고도의 중앙집권은 지방의 희생 위에서 이룩되었거니와 이제 민주화의 진전 속에서 지방분권화는 하나의 대세로 되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인하대가 이와 같은 흐름에 창조적으로 대처하여 인천과 함께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발전전략을 강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인천과 인하대의 별거상태에는 인천의 책임도 적지않다. 한국의 4대도시라는 허울에도 불구하고 인천은 도대체 살 만한 매력을 갖추지 못해왔다. 나같은 사람은 원래 천성이 게을러서 장거리 통근을 견딜 수 없는데다가 인천이 고향이니 불편을 감수하고도 그냥 습관처럼 살지만 외지사람들이 무슨 낙으로 인천에서 살고 싶을 것인가?그런데 우리는 인천의 몰락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아다시피 남북한을 잇는 허리요 대중국 교역(對中國 交易)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한 인천은 한반도의 분단(1945)과 중국혁명의 성공(1949)으로 황해가 단절의 바다로 죽어감으로써 거의 폐항의 위기에 내몰렸다. 인천이 배출한 지도자들, 예컨데 이승엽(李承燁)은 1953년 북한에서 남로당 숙청 속에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처형되고,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은 1959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처형되고, 1961년 장면(張勉)이 5. 16쿠데타로 실각되는 일련의 사태 역시 인천의 침몰을 정치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그런데 탈냉전시대의 전개 속에서 죽었던 황해가 다시 살아나고 그에 따라 황해의 거점도시 인천의 전략적 요충성이 새삼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인하대는 한반도의 운명,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새로운 재편에 깊은 관련을 가진 인천과 유기적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황해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창조적으로 응전하는가에 인천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고 그를 지원할 THINK TANK가 바로 인하대라는 점이다. 인하대 쇄신의 요구는 지금 황해에서 불어오고 있다.
인하대의 건학이념
우리는 여기서 인하대의 건학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하대는 아마도 우리 대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매우 독특한 설립의 역사를 가졌으니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여 이민 동포들의 피땀 어린 기금을 기본으로 인천시가 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거기에 국가의 보조와 전국적 모금운동을 통해서 1954년 전후의 폐허를 딛고 개교되었다. 당시 정부의 주선을 생각하면 국립적인 성격이고 인천시의 공헌을 생각하면 시립적 성격도 있고 그리고 나라 밖의 성금과 나라 인의 모금을 감안하면 그 무엇보다도 민립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니 인하대는 나라가 일방적으로 만든 국립대학이나 종교재단 또는 돈 많은 사람이 학교를 만든 사립대학과는 달리 그야말로 행복한 건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1903년부터 1905년까지 총 7천여 명의 우리 동포들이 정든 고국을 등지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팔려간,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망국의 비운에 빠진 구한말의 슬픈 역사가 여기에는 자욱자욱 배어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왜 우리나라 노동이민을 추진했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와이가 마치 낙원인 양 속이고 대규모로 우리 동포들을 끌고 갔으니 그것은 거의 노예무역에 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당시 하와이와 멕시코 이민의 실상과 참상에 대해서는 나의 논문 「신소설과 노동이민」(1984)을 참조할 것, 이 논문은 인하대 인문과학 연구소 논문집 제 10집에 실렸다가 후에 나의 논문집 『한국 근대 소설사론』(창작사, 1986)에 재수록되었음.) 낯선 나라의 혹독한 농장노동에 고통받았던 그들은 이 때문에 더욱 조국의 독립을 비원으로 삼았으니 더이상 자신들과 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그들이 눈물 속에 떠나갔던 인천항구에 민족의 일꾼을 키워낼 인재를 양성할 대학의 설립을 위해 기꺼이 성금을 바쳤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인하대를 키운 ‘향그러운 흙가슴’이다. 인하인은 다시 건학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인천을 위해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 인하대가 맡아야할 창조적 역할을 다시 한번 새기면서 언제 읽어도 감동적인 우리 학교의 발기 취지서(1953)을 함께 읽는 것으로 두서 없는 글을 마칠까 한다. 회고컨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정의 제1단계에 있어서의 한국에 대한 촉수는 청일전쟁을 거쳐서 더욱 악랄화·노골화하였다. 그 결과는 불가피적으로 제정 러시아 촉수와의 충돌을 재래하게 되었다. 조국의 운명을 근심하는 지사들은 조국의 자주를 전취할 근거지를 구하고저 국외에 망명하였고 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는 소시민 농민들은 자활의 길을 구하고저 국외에 이산되었다. 노일 전쟁 발발 1년 전인 1903년 1월 3일에 하와이를 향하여 정든 고토를 뒤에 두고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인천항을 떠난 이들이 있었으니 그 뒤를 이어서 뜻있는 동포들이 하와이를 찾아간 이가 많았다. 월조(越鳥)가 남쪽가지에 집짓고 호마(胡馬)가 북풍에 울음 우는 회향(懷鄕)의 정을 이기지 못하면서 오직 한 가지 염원인 조국광복을 위해 정신적, 재정적으로 공헌한 바 실로 컸던 것이다. 어느덧 춘풍추우(春風秋雨) 50년을 겪어왔다. 하와이 동포들은 고국을 떠났고 50주년 기념사업으로서 그 옛날 최후의 발자취를 남긴 인천의 공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아!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조국광복을 위하여 사력을 다한 하와이 동포들이 이제는 국내의 공업교육진흥에까지 이바지하겠다는 그 성스러운 결의에 대하여 우리 3천만 민족은 감격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중략) 또한 이 대학은 국립이나 공립보다도 하와이 동포와 국내동포의 합작으로 성립된 재단으로서 설립하는 것에 더 의의 깊은 바가 있는 것이다, 이 대학은 그 이름도 기념적인 인하공과대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50년 전에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떠났던 인천과 그 목적지였던 하와이의 첫 음을 딴 것이다. 동포제위께서는 이 대학의 설립이 3천만 민족의 순수한 독립의식에 귀일되는 정신적 통일의 계기를 짓고 나아가서 남북통일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최대의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