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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기운은 아주 높고 차가워 맹렬한 바람이 부딪치고 뒤흔들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나무가 자란 것들이 모두 동쪽으로 누워있고, 가지와 줄기는 대부분 휘고 굽고 자그맣고 문드러져있다.
4월 그믐쯤은 되어야 숲의 잎이 피기 시작한다는데, 한 해 동안 크는 것이 한 푼이나 한 치 정도에 불과하며, 억세게 고통을 견디어 모두 힘껏 싸우는 형세를 하고 있다.‘어디 거처하느냐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체질이 변한다’라는 것이 물건이나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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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길이 만나는 ‘배꼽’… 전란 피해 스며들던 길
죽령(竹嶺·689m)은 대숲고개란 뜻이다. 하지만 죽령엔 대숲이 없다. 숲은커녕 대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도 드물다. 가끔 고갯마루 가까이 잣나무가 보일 뿐이다. 졸참나무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가 많다.
삼국사기엔 ‘서기 158년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죽령 길을 만들고 지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기려 죽령이라고 한 것이다.
죽령은 경상도 풍기와 충청도 단양을 가르는 고개이다. 영남과 기호지방을 이어주는 3대 관문 중 가장 높은 고개이다. 추풍령(221m·충북 영동∼경북 김천) 문경새재(642m)와 같이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던 길이다. 신라와 고구려가 밀고 당기던 국경이기도 하다. 장수왕(470년) 때는 고구려 땅이었지만, 진흥왕(551년) 땐 신라의 손 아래 들어갔다.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이 ‘옛날 잃었던 땅을 되찾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며 출정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온달은 아차성(단양 온달산성)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었다.
죽령은 대한민국 중동부 산간지대의 모든 길이 지나간다. 중앙선 기찻길, 중앙고속도로, 백두대간 길, 죽령 옛길, 국도 5호선이 한곳에서 만난다. 한마디로 ‘길의 배꼽’이다.
죽령 옛길은 가파르지 않다. 아이들과 손잡고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부부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다. 소백산역(희방사역)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로 오르는 들머리 과수원엔 발그레 익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하늘은 푸르다. 진보라 물봉선 꽃, 푸른 달개비 꽃, 노란 달맞이꽃이 웃는다. 쓰러진 나무다리 밑은 덩굴터널이다. 한낮인데도 어둑하다. 옛날 길손들이 목을 축였던 주막 터가 나온다.
고갯마루 너머는 단양 땅이다. 고개 아래 샛골에는 보국사 옛터가 남아 있다. 목 없는 불상이 짠하다. 주춧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무너진 절터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황홀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다 쓰러진다. 인간도, 식물도, 짐승도 모두 무릎을 꿇는다. 언젠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바닥에 넉장거리로 누우면 편하다. 바닥은 더 내려갈 곳이 없다. ‘바다’의 말뿌리는 ‘바닥’이다. 바닥에서 ‘ㄱ’까지 떨어져 나가면 비로소 바다가 된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안에 받아들인다. 바다 같은 평화가 온다.
가을산이 여위어 간다. 마른 몸에 열매들이 튼실하다. 달콤한 다래가 다발로 열렸다. 바람이 불면 우르르 머리에 떨어진다. 할아버지에게 꿀밤 맞는 것 같다. 농익은 산복숭아가 바닥에 흥건하다. 산밤은 튀밥처럼 알알이 터져 어지럽다. 다람쥐가 청설모 눈치를 보며 잽싸게 밤톨 한 알을 물고 간다. 도토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소백산은 소박하다. 소수서원∼초암사 가는 길은 아늑하다. 외할머니 집에 가는 길이다. 아이들이 장대들고 달 따러 가는 길이다. 추석날 서울 갔던 누나가 선물 안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황도 이 길을 따라 소백산에 올랐다. 길가 죽계계곡 물은 탱자나무 울타리 참새 새끼들처럼 종알댄다. 물 위엔 울긋불긋 ‘나뭇잎 배’들이 떠다닌다.
죽계계곡 입구의 배점마을엔 400살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동네 어귀에 서 있다. 이황의 대장장이 제자 배순의 뜻을 기려 심은 것이다. 배순은 이 마을에서 살면서 그 아래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다녔다. 처음엔 서원 뜰아래에서 서성이며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귀동냥했다. 이황은 주저 없이 그를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이황이 죽자 배순은 삼년복을 입고 스승을 그리워했다.
초암사∼비로사 코스는 산허리길이다. 길은 계곡 따라 이어진다. 물가는 축축하다. 숲길은 바스락거린다. 황갈색 잣잎들이 수북하다. 발길에 채이는 풀냄새가 향긋하다. 산초나무 야광나무 잎들이 슬슬 물들어간다. 애기단풍나무 잎은 벌써 발그스레하다. “구구! 구구!” 산비둘기들이 구구단을 외운다. “찌르르∼ 찌르르∼” 풀여치들이 숲속 음악회를 연다. 하루살이들이 공중곡예를 하며 짧은 하루생애를 불사른다.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경계가 없는 경내/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문을 닫지 않는다//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흐린 안개 속에 잔다’
격암 남사고(1509∼1571)는 풍수 역학 천문에 밝은 조선 중기 예언자이다. 그가 어느 날 소백산을 지나다가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했다. 그러면서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병란을 피하는 데는 제일 좋은 곳이다”라고 말했다.
소백산역(희방사역)∼비로사 길은 바로 풍수의 길이요, 사과밭 길이다. 최초의 불교순교자 신라 이차돈(?∼527)이 공부했다는 닭산의 금계바위, 전국 십승지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금계동이 그 흔적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다.
옛날부터 이 골짜기에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봇짐을 싸들고 몰려들어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도 ‘죽령이 보이지 않는 곳’을 으뜸으로 쳤다. 조선 최고의 교통 요충지인 죽령 옆구리에 붙어있는 명당. 임진왜란 때도 이곳은 전란을 피해갔다고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은 셈이다. 요즘은 도회지의 번잡한 삶을 피해 이곳에 둥지를 트는 사람이 많다. 개발이 더딘 이곳이 이젠 ‘영혼의 명당’이 된 것이다.
희여골∼소백산역(희방사역)은 사과밭길이다. 봄에는 사과꽃이 황홀하다. 보름달이 눈부신 봄밤의 사과꽃 십리 길. 눈을 감으면 코끝을 간질이는 사과꽃 향기. 가을엔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들이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낸다. 침이 스르르 괸다. 늦가을 찬서리 맞은 사과가 으뜸이다. 울퉁불퉁 못생긴 사과가 더 맛있다. 그런 사과는 속이 삭고 삭아 ‘아픈 단맛’이 난다.
‘날은 저물었고,/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나무 하나 지나고/나무 둘 지나고/나무 스물, 서른, 마흔 지나고/풀 하나 지나고/풀 둘 지나고/풀 수도 없이 지나고/숲속 거기, 그 자리에 앉는다./멀리 하늘 위 별빛은 반짝거리는데/문득 가슴이 뭉클하다./언제였던가?/내 가슴이 뭉클했던 때가,/너의 그 가슴이 뭉클했던 때가.’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단양·풍기군수 지낸 퇴계권력-인생무상 사무친 땅
1549년 4월, 퇴계 이황은 마침내 소백산에 올랐다. 마흔여덟에 비로소 어릴 때부터 별렀던 꿈을 이룬 것이다. 풍기군수로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군수로 부임한 후에도 소백산 입구인 백운동어구(현재 소수서원부근)까지 세 번이나 갔다가 발길을 돌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무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548년 정월, 이황은 죽령 너머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갑자기 고개 아래 풍기군수로 발령이 났다. 친형인 온계 이해(1496∼1550)가 충청도관찰사로 오는 바람에 이황을 경상도 쪽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
충청도관찰사 이해는 죽령을 통해 고향 예안을 오갔다. 그럴 때마다 풍기군수 이황은 형을 마중 나갔고, 형이 고향에 갔다 돌아갈 땐 깍듯이 배웅했다. 형제는 죽령의 계곡에 앉아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편지도 수시로 오갔다.
이황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다섯 살 위인 이해는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1550년 8월, 이해가 모함에 빠져 갑산으로 귀양 가다가 죽었다. 혹독한 고문 탓이었다. 장독이 온몸에 퍼져 귀양길 도중 서울 미아리 허름한 민가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이황은 당시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예안 도산서원에 있었다. 1549년 12월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대답이 없자, 그만 훌훌 털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는 형의 시신을 죽령고개를 넘어 단양으로 나가 피울음으로 맞았다. 이황은 이미 단양군수로 있을 때 스물한 살의 생때같은 둘째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 이황은 갈수록 속세를 멀리했다.
이황은 단양군수 시절 정을 나눴던 기생 두향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저렸다. 9개월간의 짧은 사랑에 긴 이별. 30년의 나이 차. 두 사람은 모두 매화를 사랑했다. 헤어질 때 두향은 매화 화분 하나를 이황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22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이황은 매화를 정성스레 가꾸었다. 그러다가 1570년 예순아홉에 눈을 감았다. “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두향은 안동 도산서원까지 와서 구슬피 울었다. 단양에서 죽령고개를 넘어 풍기를 거쳐 나흘 동안이나 걸어내려 왔다. 그리고 다시 죽령고개를 넘어 단양으로 돌아가 목숨을 끊었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트레킹 정보|
◇교통 ▽고속버스=동서울, 강남터미널 서울∼영주(2시간 10분 소요) ▽승용차=서울∼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풍기나들목∼영주 ▽기차=청량리∼풍기 영주(1일 8회 중앙선 새마을, 무궁화)
◇숙박 고택체험 선비촌(054-638-6444), 괴헌고택(011-848-6510), 우엄고택(054-637-1537)
◇먹을거리 =한정식돌솥밥 산촌(054-635-6850), 순흥전통묵집(054-634-4614), 횡재먹거리한우(054-638-0094), 풍기삼계탕(054-631-4900), 죽령주막(054-638-6151)
◇특산물 ▽인삼=풍기인삼협동조합(054-636-2714), 부영인삼(054-637-0788) ▽사과=영주농협공판장(054-636-8594) ▽한우=영주축협본점직판장(054-635-4342) ▽인견직=풍기직물조합(054-636-2331) ▽된장=소백산희방전통된장(죽령 입구 민박 가능 054-637-3136)
◇밤 줍기=풍기읍 안정면 내줄리 밤숲(1만8000여 평, 1만 원, 수량 제한 없음, 054-634-3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