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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 제
백제 음악에 관한 사료는 한국측 문헌인 『삼국사기』악지와 중국측 문헌인 『통전(通典)』 ㆍ『북사(北史)』ㆍ『수서』음악지와, 일본측 문헌인 『일본서기(日本書紀)』ㆍ『일본후기 (日本後紀)』 등이 있다. 또한 고고학 자료로는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과 금동용봉봉래 산향로가 있다.
(1) 문헌자료에 의한 백제 음악
『일본후기』권 17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다.
809년 (大同 4) 3월 병인일 가가꾸료에서 정하기를 ·‥(중략)‥ · 고려악사 4명은 횡적ㆍ군후ㆍ막목ㆍ춤 등의 선생이고, 백제악 사 4명은 횡적ㆍ군후ㆍ막목ㆍ춤 등의 선생이며, 신라악사 2명 은 가야고와 춤 등의 선생이다.
『일본후기』에 전하는 백제 음악은 군후(??)ㆍ막목(莫目)ㆍ횡적(橫笛) 등의 악기 편성으로 춤을 반주하는 고구려의 음악과 같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동일악기의 편성으로 음악을 연주하였던 것은 양국이 부여족이라는 동일 민족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궁중에 전해진 백제악은 백제국의 풍속무로 이에 따른 반주음악 역시 관현합주의 백제 민속음악이었을 것이다.
『구당서』음악지에는 당나라 초기에 중국에 파견됐던 백제악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백제악은 중종 때 죽어서 폐했다가, 개원 때 기왕 집안의 범이 태상경이 되자 아뢰어 다시 설치하게 됐기 때문에, 음악과 춤 이 많이 빠졌다. 무용수 두 명은 자색의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 와 치마를 입었고 장포관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현재 보존되 어 남은 악기로는 쟁ㆍ적ㆍ도피피리ㆍ공후가 있는데, 이 악기 들은 대체로 중국 것과 같다.
『수서』의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ㆍ각(角)ㆍ공후(??)ㆍ쟁(箏)ㆍ우(?)ㆍ 지(?)ㆍ적(笛) 등 일곱 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 중 지는 훈(壎)과 함께 오직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에만 사용된 악기이고, 나머지 고와 각을 제외한 4종의 악기도 모두 청악의 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백제악에 사용된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에서 수용된 외래 악기로, 고구려가 중국 북조와 교류하였던 것과는 달리 백제에서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5종의 악기에 의한 백제 음악은 일본에 전한 '백제악 풍속무'에 따른 악기편성보다 수량 면에서도 늘어난 것이고 악기의 내용도 다르다. 이 음악의 쓰임새는 고구려 음악의 경우와 같이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악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외래 음악을 받아들여 중국의 7부기 등에 참가하였던 고려기와는 달리 백제 음악은 중국의 남송과 북위 등에 소개되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吳 - 일본발음으로 구레, 황해도 *山이란 設이 있음)의 기악무를 배운 바 있는 백제인 미마지는 612년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의 사찰을 중심으로 기악무를 가르 쳤다고 한다. 기악무는 교훈적인 불교 이야기를 담은 가면무용극으로 각 장이 독립되어 있는 9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의 봉산탈춤과 양주산대가면극에서 기악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 봉산 탈춤 >
< 양주산대가면극 >
그리고 238년에 천지에 제사할 때 고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고취는 백제 특유의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백제가 대방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중국 한나라의 고취가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으로 백제가 중국과 정식 국교를 개시한 것은 근초고왕때에 해당되는 4세기 말인 동진 시대 이후였다. 하지만 전한 초 중국의 연구식(連丘式) 능묘 형식이 신라 시조의 오능에 영향을 준 것과 같이 백제에서도 이미 고대국가 형성기인 3세기 이전부터 한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경서』와『자사』등을 즐겨 읽고 중국식으로 상고 및 상표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백제 지식인과 관리들의 한학 수준이 매우 높았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 시대의 노래는 그 정확한 시대와 작자, 노래의 내용, 노래의 음악적인 형태등은 알 수 없고, 다만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이 전하는 5곡의 노래가『고려사』악지에 전하고 있는데 정읍 (井邑)ㆍ선운산(禪雲山)ㆍ무등산(無等山)ㆍ방등산(方等山)ㆍ지리산(智異山)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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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고학 자료에 의한 백제 음악
비암사의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은 백제의 멸망 이후인 673년에 건립된 것이다.
이 석상에 부조된 악기는 모두 8종인데, 그 중 한 악기는 미상이며 나머지는 요고ㆍ쟁ㆍ퉁소
ㆍ소ㆍ횡적ㆍ생ㆍ당비파 등이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鳳來山香爐)는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1993년 12월 22일에
발굴된 것으로 제작 연대는 6~7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향로에는 완함ㆍ장소ㆍ북ㆍ금(琴) 혹은 와공후(?)ㆍ배소의 5인의 주악상이 있다.
이 두 가지 고고학 자료로 인하여 궁중에서는 중국측 문헌에 산견되는 바와 같이 중국 남조의
청악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ㆍ각ㆍ공후ㆍ쟁ㆍ우ㆍ지ㆍ적 등의 악기가 존재하였다.
이에 비하여 민간에서는 완함ㆍ요고ㆍ장소ㆍ횡적ㆍ북ㆍ금ㆍ생ㆍ비파 등의 악기가 존재하
였음을 알 수 있다.
<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 >
< 금동용봉봉래산향로 >
<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악사들 >
3. 신 라
신라가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6세기 이전까지의 신라 음악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조금 뒤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6세기 이후 가야고의 수용으로 인하여 신라 음악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6세기 이전의 신라 음악에 관한 자료는 고구려에서와 같이 고분의 벽화 등은 없다. 다만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 및 불교유적 등에 보이는 고고학 자료와 문헌자료로서 『수서(隋書)』
의 동이전(東夷傳)과 음악지(音樂志), 『북사(北史)』의 신라전(新羅傳), 『일본후기(日本後
紀)』 그리고 『삼국사기』악지와 『삼국유사』의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악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회악과 신열악은 유리왕 (24~57) 때 만든 것이고, 돌아악은 탈
해왕 (57~80) 때 만든것이며, 지아악은 파사왕(80~112) 때 만
든 것이다. 사내악은 내해왕 (196~230) 때 만든 것이고, 가무는
내물왕 (356~403) 때 만든 것이고, 우식악은 눌지왕 (417~457)
때 만든 것이다. 대악은 자비왕 (458~478) 때의 사람 백결선생
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간인은 지증왕(500~614) 때 사람
천상욱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지악은 법흥왕 (514~
540) 때 만든 것이고, 도령가는 진흥왕 (540~576) 때 만든 것
이며, 날현인은 진평왕 (579~632) 때 사람 담수가 지은 것이다.
사내기물악은 원랑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내지는 일상군
의 음악이며, 사중은 북외군의 음악이다. 이것들은 모두 지방의
사람들이 즐겨하던 음악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악조나
악기의 수자 또는 노래와 춤의 모양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689년(정명왕 9년) 신촌에서의 주악과 807년(애장왕 8년)의 주악을 기록한 것은 그 연주
연대가 비록 6세기 이후의 통일신라시대이지만 그 악무의 발생은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에
속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거의 금(琴) 하나로 편성된 연향악(宴響樂)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음악이 일본에 전하여져서, 『일본후기』에 의하면 일본 궁중에서 신라
음악은 809년까지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소규모이지만 편성되어 있었다.
이 금은 일본에서는 신라금으로, 신라 본국에서는 가야금으로 불렸다. 또한 음악의 형태는
일본 궁중에서 연주되던 신라악과 본국의 음악이 서로 같았고, 중국 쪽에서는 신라 음악의
존재가 극히 미미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다.
< 신라금 >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금의 안족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금의 양이두 부분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금의 전면과 후면
그 까닭은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중국과의 교류관계에서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라
고 생각된다.
불교유적에 발견되는 악기류는 다음과 같다.
● 감은사 유지 탑형기단상 악기 그림 : 동고ㆍ요고ㆍ횡적ㆍ곡경비파
● 연기군 비암사 석비 악기 : 요고ㆍ퉁소ㆍ쟁ㆍ소ㆍ횡적ㆍ고ㆍ곡경비파
● 문경군 봉암사 지증대사 석조탑신의 악기 : 생ㆍ곡경비파ㆍ피리ㆍ적ㆍ박판
● 상원사 동종의 악기 : 공후ㆍ우ㆍ쟁ㆍ요고ㆍ적ㆍ피리ㆍ곡경비파
신라시대의 노래는 『삼국사기』 악지에 실린 18곡의 노래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향가
14수, 『균여전』의 향가 11수, 『고려사』 악지 소재의 7곡, 『증보문헌비고』 등 기타 각종
문헌에 전하고 있는 바, 이들 중에서 노래의 음악적인 형태를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고 그
노래의 이름과 노래를 지은 뜻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토우
가야고를 든 신라의 토우
가야고를 연주하는 신라의 토우
비파를 든 신라의 토우
4. 가 야
가야국은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 및 고령ㆍ 함안ㆍ 고성ㆍ성주 등에 위치하여 약 6세기까지
존재하였던 부족국가이다.
가야국의 음악은 가야금과 우륵의 12곡으로 대표된다.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嘉悉王)이 당나라의 악기인 쟁(箏)
을 본으로 삼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편, 『삼국사기』 진흥왕 12년(551년)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금이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가야금의 모양은
오늘날의 풍류가야금과 같이 12줄과 양이두(羊耳頭)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土偶)의 가야금과 일본 나라(奈良) 정창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라금의 모양에
서도 알 수 있다.
<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 >
1997년 7월 광주시 신창동 저습지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현악기(기원전 1세기)와 1997년
3월 경북 경산 임당동 택지개발지구 목관묘(木棺墓)에서 발굴된 목제 현악기는 그 재료인
나무가 썩어 없어지고 옻칠만 남은 상태로 첨단 보전처리 방법으로 처리된 후 공개(1998. 6)
된 바 가야금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길이가 짧아서 꼭 가야금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가야의 악사 우륵(于勒)은 가야국이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551년(진흥왕 12)에 제자 이문
(泥文)과 함께 신라로 투항하였다.
진흥왕은 그 다음 해에 우륵을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머물게 하고 대내마(大奈麻) 법지
(法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우륵은 악 ㆍ가ㆍ무를 겸비한 악인이었을 것이다.
우륵에게 배운 이 세 사람은 우륵에게서 12곡을 배운 다음 이 음악은 번차음(繁且淫)하여
아정(雅正)하지 못하다 하여 그 곡들을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은 그 말을 듣고 처음에 몹시 노하였으나 다섯 곡의 음악을 다 듣고 나서는 '樂而不流'
하고 '哀而不悲'하니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마음을 상할정도로 비감(悲感)하지
아니하다) 가히 바른 음악이라고 탄복하였다.
이와 같은 가야금 음악은 노래하고 춤을 추던 연향악이었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신라의 궁중
음악(大樂)으로 채택됨으로써 가야의 멸망 이후에도 가야 음악의 맥을 잇게 되었다.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ㆍ상가라도(上加羅都)ㆍ보기(寶伎)ㆍ달기(達己)
사물(思勿)ㆍ물혜(勿慧)ㆍ하기물(下奇物)ㆍ사자기(獅子伎)ㆍ거열(居烈)ㆍ사팔혜(沙八兮)ㆍ
이사(爾赦)ㆍ상기물(上寄物) 등이다.
우륵의 12곡은 양주동씨에 의하여 그 당시의 지명이었다고 밝혀진 바 있다.
또한 우륵의 12곡은 굿에 12거리가 있듯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면기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열국시대의 음악은 부여계의 고구려와 백제 음악이 삼한계의
신라와 가야 음악과 함께 공존한 시대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하였던 시
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금 >
『삼국사기』악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가야국의 가실왕은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
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획일화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성렬현 사람인 악사 우륵에게
명령하여 열두 곡을 짓도록 하였다. 나중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
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의탁하니, 진
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에서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대내마 법지와
계고 그리고 대사 만덕을 보내서 그 업을 전수시켰다. 이 세 사람들은
그의 열산 곡을 전수받고 난 뒤 서로 말하기를, '이곡들은 번거롭고 음
란하여 아담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줄여서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은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마침내
그 다섯 곡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며 이르기를,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아니하며 애처로우면서 슬프지 아니하니 바른 음악이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후에 그 악곡을 임금 앞에서 연주했더니 왕이
듣고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 때 간신이 헌의하기를, '이 악곡들은 멸망
한 가야국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하였더니 왕이 가로되,
'가야왕이 음란해서 자멸한 것이지 음악이 어찌 죄가 되겠느냐?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은 인정에 연유하되 준절케 하는 데 있거늘, 나라
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음악에 연유되지 않느니라'고
하면서, 드디어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가야고 음악은 대악으로 발전되
었다.
가야고음악에 두 가지 악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이고, 둘째는 눈
죽조였으며, 가야고 악곡은 모두 185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열두 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기,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이다. 이문이 지은 세 곡
은 첫째 까마귀, 둘째 쥐, 셋째 메추라기이다.
남북국시대의 음악 1 (통일신라)
제 3 절 南北國時代의 音樂
1. 통일신라
(1) 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는 예부(禮部)에 속하였다.
경덕왕때 그 이름을 대악감(大樂監)으로 바꾸었다가 혜공왕때 다시 음성서로 고쳤다고 하였
을 뿐, 어느 때에 처음 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기관을 다스리는 장(長) 2인을 681년(신문왕 7년)에 경(卿)으로 고치고 경덕왕때
사악(司樂)이라고 했다가 혜공왕(765~780)때 다시 경으로 바꾼점과 651년 대사(大舍) 2인을
두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음성서가 진덕왕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음성서에서 맡았던 임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 통일신라 >
음성서의 등장
음성서는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이다. 예부(禮部)의 한 독립기관이었던 음성서는 음악행정
과 교육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궁중에 설립됐는데, 언제 설립됐는지는 『삼국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음성서에 두었던 한 관리인 대사(大舍) 두 명을 진덕왕
5년(651)에 두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생각하건대, 음성서는 늦어도 7세기 중엽에 설립됐음
이 명확하다. 음성서의 명칭은 경덕왕 (742~764) 때 대악감(大樂監)으로 바뀌었다가, 혜공
왕 (765~779) 때 다시 음성서라고 복원했다.
음성서의 관원은 장(長) 2인ㆍ대사(大舍) 2명ㆍ사(史) 4명으로 구성됐다. 장이란 관직명은
687년 (신문왕 7) 경(卿)으로 개칭됐다가, 경덕왕 (742~764) 때 사악(司樂)이라고 다시 고쳤
고, 혜공왕 때 또다시 경으로 고쳤다. 대사의 명칭은 경덕왕 때 주부(主簿)로 개칭했다가, 후
에 대사로 복원됐다.
『삼국사기』악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신문왕 9년(689)에 왕이 신촌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했는데, 가무(笳舞)에 감 6명ㆍ가척(笳尺) 2명ㆍ무척 1명이
연주했고, 하신열무는 감 4명ㆍ금척 1명ㆍ무척 2명ㆍ가척(歌尺)
2명이 연주했다. 사내무는 감 3명ㆍ금척 1명ㆍ무척 2명ㆍ가척 2
명이 연주했고, 한기무는 감 3명ㆍ금척 1명ㆍ무척 2명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상신열무에서는 감 3명ㆍ금척 1명ㆍ무척 2명ㆍ가척
2명이 연주했고, 소경무에서는 감 3명ㆍ금척 1명ㆍ무척 1명ㆍ가
척 3명이 연주했으며, 미지무에서는 감 4명ㆍ금척 1명ㆍ무척 2명
이 연주하였다. 애장왕 8년(807)에 음악을 연주했을 때, 비로소 처
음으로 사내금이 연주됐는데, 무척 4명은 푸른색 옷을 입었고, 금
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가척 5명은 채색된 옷을 입고서 수
놓은 부채를 들고 모두 금실로 꾸민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
무를 연주할 때,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고,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
다. 위와 같이 말하였을 따름이라고 했으니, 그 상세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신라시대 악공은 모두 다 척이라고 불렀다.
(2) 거문고의 전승과정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옥보고(玉寶高)는 8세기 중엽 신라의 음악기관인 음성서로
가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50여 년 동안이나 거문고를 익혀 30여 곡의 거문고곡을 지은
인물이다. 선가(仙家)계통의 인물로서 옥부선인(玉府仙人)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사기』악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는 지리산의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히고 스스로 새로운 30곡을 창작하였다.
그는 속명득에게 금도를 전했고 득은 그것을 귀금선생에게 전했는
데, 귀금선생이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은 거
문고의 전통이 끊어질 것을 걱정하여 이찬 윤흥에게 방편으로 거문
고음악을 전승하도록 말하고 드디어 남원지방의 공사를 맡겼다. 윤
흥은 남원에 이르러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았는데, 그 소년이 청장과
안장이다. 그들에게 지리산에 들어가 귀금선생의 거문고를 배우도
록 했으나, 선생은 가르키기는 했지만 은미한 기법을 전수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윤흥은 그의 처와 함께 선생께 가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저희들을 남원에 파견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법을 전수하고자 함인데, 이제 3년이 지났으나 선생께서는 비법
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승시키지 않고 있으니, 저희들은 임금에게
복명할 것이 없읍니다' 라고 하고 나서, 윤흥은 술병을 들고 그의
처는 술잔을 들어 무릎으로 걸어서 극진하게 예의와 정성을 다한
후에야 그 비전하는 바 표풍 등 세 악곡을 전수하게 되었다. 안장
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승시켰으며, 극종은 일곱 곡을 지
었다. 극종 이후 거문고로서 업을 삼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의 음악을 보면 춘조곡(春朝曲), 추석곡(秋夕曲), 유곡청성곡(幽曲淸聲曲)등 한문으로 된
곡명을 가지고 있어, 우륵이 지은 가야금곡이나 우리말 가사를 지닌 사뇌(詞腦)와 구분된다.
옥보고의 거문고 음악은 명득(命得)을 거쳐 귀금 선생(貴金先生)에 전하여졌고, 이후 몇 번
의 금도가 단절될 위기를 거쳐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에 전하여졌다. 이후 안장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여졌는데, 이때부터 금으로 업을 삼은 사람들이 점차 많아
졌다. 금도(琴道)란 말과 함께 당시의 거문고 음악은 선가(仙家)계통의 음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문고 악곡에 두 가지 악조가 있으니, 첫째는 평조이고, 둘째는 우
조였는데, 악곡은 모두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 유전된 악곡으로서
널리 퍼졌으나 기록된 것이 몇 가지 없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졌으
므로 제대로 갖추어 기재하지 못한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 1ㆍ중원곡 1ㆍ하원곡1ㆍ남해곡 1ㆍ
기암곡 1ㆍ노인곡 1ㆍ죽암곡 2ㆍ현합곡 1ㆍ춘조곡 2ㆍ추석곡 1ㆍ
오사식곡 1ㆍ원앙곡 1ㆍ원호곡 6ㆍ비목곡 1ㆍ입실상곡 1ㆍ유곡청
성곡 1ㆍ강천성곡 1이며, 극종이 지었다는 7곡은 지금 없어졌다.
경문왕때 귀금 선생이 비장하고 있던 표풍 등 세 곡이 있었고, 귀금 선생의 제자인 안장의
아들 극상ㆍ극종이 지은 일곱 곡이 있었다고 하나 곡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삼국사기』에 누구의 작품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소개된 거문고곡에는 평조와 우조
두 가지 조에 187곡이 있었다고 하나 그 유곡으로서 기록할 만한 것이 전부 산일하여 싣지
못한다고 하였다.
통일신라의 상층인사들 사이에 수용되었던 거문고는 중국의 칠현금에 의한 금가에 상응하여,
거문고가 후세에 다른 악기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조의 선비들이 표방한 줄풍류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거문고 >
(3) 향악 (鄕樂)
신라에서의 향악이란 당악 수용 이후, 즉 통일신라 후기의 향악을 지칭한다.
『삼국사기』악지에 언급한 향악은 거문고ㆍ가야금 ㆍ향비파ㆍ대금ㆍ중금ㆍ소금ㆍ박ㆍ
대고 등 8종의 악기를 포함하고 있다.
신라의 음악은 삼죽ㆍ삼현ㆍ박판ㆍ대고ㆍ가무로 되었다.
‥· (중략) ·‥ 삼현은 첫째 거문고ㆍ둘째 가야고ㆍ셋째 비파
이고, 삼죽은 첫째 대금ㆍ둘째 중금ㆍ셋째 소금이다.
이와 같은 향악 편성은 가야금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음악에 비하여 매우 확대된
것으로, 고구려의 악기 거문고와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과 대고 등이 복합
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향비파에는 궁조ㆍ칠현조ㆍ봉황조의 세 조에 212곡이 있다.
삼죽의 조에는 평조ㆍ황종조ㆍ이아조ㆍ월조ㆍ반섭조ㆍ출조ㆍ준조 등 일곱조에 대금 324곡,
중금 245곡, 소금 298곡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음악은 전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악지에는 삼국의 음악이라 하여 동경(東京) 등의 신라악 3곡 외에 정읍 등 백제악
5곡, 명주 등 고구려악 3곡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의 음악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승되었을 것이므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의 거문고 등의 악기뿐만 아니라, 삼국의 여러
가지 음악이 함께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향바파 >
<박 >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만파식적 설화
『삼국유사』권 2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681년 (開耀 원년) 신문왕이 즉위하고 나서 선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세운 감은사를 682년에 완성했다. 그 이듬해 5월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 를 향해 떠온다는 해관 박숙청의 보고를 받고,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친 결 과, 선왕인 문무왕과 김유신 두 성인의 혼령이 나라를 지킬 보배를 주려 한 다는 풀이를 얻었다. 그 달 7일에 신문왕이 이견대에 행차해서 사람을 보내 그 작은 산을 잘 살펴보니, 그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된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그날 밤에 감은사에서 왕이 유숙했 는데, 8일에 천지가 진동하고 7일동안 계속되다가 조용해지자, 16일에 왕이 작은 산에 들어가 진동하고 7일동안 계속되다가 조용해지자, 16일에 왕이 작은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주고서는 그 산의 대나무가 합하기도 하고 갈라지는 이유를 묻는 데 대하여 그 대나무를 베어 다가 저를 만들어 불면 동해의 용이 된 부왕과 김유신의 혼령의 도움으로 천 하가 태평할 것이라는 답을 주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나왔더 니, 그 때 문득 산과 용이 사라졌다. 신문왕이 환궁하자 그 대나무로 저를 만 들어 불었더니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낮고, 가뭄에 비가 오고, 장마가 그치 고, 바람이 자며, 파도가 잔잔해 졌다. 그래서 그 저를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여 국보로 삼고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했다. 693년 (효소왕 2)에 부례랑이 기적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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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향악잡영오수 (鄕樂雜詠五首)
향악잡영오수는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온 것이 880년이기 때문에 헌강왕 11년 이후에 쓴
시이다.
오수(五首)는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 猊)이며
『삼국사기』악지에 전한다.
● 금 환
도칠환이라 하는 공놀이이다. 약 7개의 공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놀이이다. 이와 비슷한
것은 서기 4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팔청리 고분 ㆍ약수리 고분ㆍ수산리 고분ㆍ안악
제3호분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측 문헌인 「수서」,「북사」,「통전」 등의 백제 전에는
백제에 농주가 있었다고 하는 점에서 백제와 고구려에 이미 이러한 놀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廻身掉臂弄金丸 온 몸을 휘두르고 두 팔을 내저어
月轉星浮滿眼着 금환을 떼굴떼굴 힘차게 굴리니
* 有宣僚邦* 此 명월이 굴러가고 별도 반짝반짝
定知鯨海息波瀾 고요한 바다 물결엔 고래도 춤을 춘다.
● 월 전
여러 선비들이 술잔을 다투며 노래하는 우전(지금의 和田 - Kothan)지방의 놀이로서
탈춤의 일종이다.
肩高項縮髮崔嵬 올라간 두 어깨에 목조차 들어가고
壤臂群儒* 酒盃 머리 위에 상투는 뽀족하게 나왔어라.
聽得歌聲人盡笑 노래소리 들리자 웃음소리 요란하며
夜頭旗幟曉頭催 저녁에 단 깃발 밤새도록 휘날린다.
● 대 면
대면은 일본의 우방무(右方舞) 나소리(* 蘇利)의 짝춤(* 舞)인 좌방무(左方舞) 능왕(陵王)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가면무로서 채찍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것이다.
黃金面色是其人 황금색 탈 쓴 사람 누구인지 모를세라.
手抱珠鞭役鬼神 구슬 채찍 휘두르며 귀신을 쫓아낸다.
疾步徐趨呈雅舞 달아나며 춤추다가 으쓱으쓱 늦은 걸음
宛如丹鳳舞堯春 너울너울 춤을 추는 봉황새와 같아라.
● 속 독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악 숙덕(宿德 또는 走禿)에 해당하며,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Tashkent)와 사마르칸트(Samarkand) 일대에 있었던 소그드(soghd)에서 전래한 춤의
일종이라는 설이 있다.
蓬頭藍面異人間 고수머리 남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押隊來庭學舞鸞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난(鸞)새 같이 춤을 춘다.
打鼓冬冬風瑟瑟 북 소리 둥당둥당 바람 소리 살랑살랑
南奔北躍也無端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끝없이도 춤을 추네.
● 산 예
서역지방의 사자춤이다. 구자에서 연행된 것으로서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도 이와 동일한
것이었을 것이다.
遠涉流沙萬里來 서역에서 유사 건너 만리길을 오느라고
毛衣破盡着* 埃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까지 묻었구나
搖頭掉尾馴仁德 머리를 흔들며 꼬리마저 휘두르니
雄氣寧同百獸才 온갖 짐승 어른되는 네가 바로 사자런가.
(4) 향악잡영오수 2
이와 같이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는 모두 외래의 놀이를 주제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향악'이라 자칭하고 있다. 그 까닭은 신라에 당악이 수용되면서 전래의 향악은 물론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외래 음악까지를 한데 아울러 향악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약수리 벽화에 의하면 공 던지기의 농환과 말타기 그림사이에 완함을
연주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곡예에 음악반주가 따랐다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현재도
줄타기ㆍ공던지기 등의 곡예나 양주별산대놀이ㆍ봉산탈춤 등의 모든 탈춤에 있어서는 반
드시 리듬악기 또는 삼현육각의 반주에 의하여 연출되고 있는 점을 상기하면, 신라의 오기
에도 반드시 어떠한 음악이 반주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한편, 고종 30년(1893) 경상도 고성의 부사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默)이 제야(除夜)의 세시
행사를 목격하고 이를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풍운당을 돌아다보니 아전의 무리들이 나악(儺樂)을 갖
추고 유희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해마다
치르는 관례"라고 한다. ‥‥‥ 관아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웠다. ‥‥‥ 조금 있으니 나희배(儺戱
輩)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펄쩍 뛰어오르는 등
시끄러이 떠들며 일제히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온다.
악당 가운데의 석대(石臺) 위에는 미리 큰 불을 마련해
놓았는데 마치 대낮처럼 밝다. 월전(月顚)과 대면(大面),
노고우(老姑優)와 양반창(兩班昌)의 기이하고 괴상한
모양의 무리들이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나와 서로 바라
보며 희롱하고 혹은 미처 날뛰며 떠든다거나 혹은 천천
히 춤을 춘다.
이와 같이 고성의 오광대 중의 모습을 월전과 대면으로 기록한 바, 장고한 역사를 갖고서
신라오기(新羅五伎)의 모습이 조선조 말까지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범패 (梵唄)
범패는 중국에서 3세기경에 불교의 유입과 함께 들어온 것이라 가정할 수 있지만 뚜렷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이는 음악적으로 자유리듬에 무반주 형태이며, 가사는
한문으로 된 5언 1구 넷으로 이루어진 것(云何於此經偈)과 6언 또는 7언으로 된 것(處世界
如虛空偈)등이 있다.
『삼국유사』의 월명사조에 보면, 월명사가 자기는 국선(國仙)이어서 범패를 부르지 못한
다는 말이 있어, 범패의 존재가 아마 760년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동 쌍계사(雙谿寺)
의 진감선사(眞鑑禪師) 대공탑비문(大空塔碑文)에 의하면, 진감선사가 804년에 재공사(才
公使)로 당에 갔다가 830년에 귀국한 후 수많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범패를 청아하게 잘 불러서, 그 소리가 금과 옥 같았고, 기우는
악절이나 나는 듯한 소리가 상쾌하고 애완해서 능히 제천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하고, 길이 멀리까지 전해지니, 배우려는 자가
집에 가득했으며, 그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
날 우리나라에 어산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코
를 가리는 것과 같이 해서, 옥천사의 여향을 본받으니, 어찌 성
문으로 제도하는 덕화가 아니겠는가.
일본 원인자각대사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중국 산동반도 등주에
있는 신라인의 절 적산원(赤山院)에서 거행된 강경의식(講經儀式)을 보고, 여기에서 불린
범패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운하어차경'은 당풍(唐風)이고 '처세
계여허공'의 음성은 일본의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839년 11월) 22일 · ‥ (중략) ·‥ 적산원에서의 불경강의 의식. 아
침 8시에 불경 강의를 위한 종을 쳐서 대중에게 알리고, 종소리가
그친 이후 한참 있다가 대중이 법당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대중을
안정시키는 종소리가 울렸고, 강사가 법당에 들어와 높은 의자에
앉으려 하자 곧 대중이 합창으로 '칭탄불명'을 불렀는데, 그 곡조
가 아주 신라풍이었고 당풍을 닮지 않았다. 강사가 자기 자리에
앉자 '칭탄불명'을 부르는 소리가 그쳤다. 강사의 아래에 앉았던
한 승려가 당풍의 범패를 불렀는데, 그 가사는'운하어차경' 이란
한 행짜리 게였다. 그 승려가 '원불개미밀'에 이르자 대중들은 합
창으로 '계음정향해탈향'을 불렀다. 범패가 끝난 후 강사는 경전의
제목을 노래했다. ‥· (중략) ·‥ 그 강사가 자기 자리에서 내려오자,
한 승려가 '처세계여허당'이란 게를 불렀는데, 그 노래소리가 본국
것과 아주 비슷했다. 그 강사가 불상 앞의 단상에 오르자, 법당을
나와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원인자각대사가 일본의 성음과 비슷하다고 한 범패는 당시에 새롭게 퍼진 당풍 전래 이전
부터 전승되어온 범패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9세기 전반의 신라에는 새로운 당풍의 범패와 그 이전부터 전승된 범패 두 가지가
있었으며, 진감선사는 새로운 당풍의 범패를 신라에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범 종 >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범종의 공후와 생
재명 선림원 신라 범종의 횡적과 요고
일본 복정현에 전하는 신라 범종의 요고
일본 대분현에 전하는 신라 범종의 요고
전북남원군산내면입석리 실상사 신라 범종의 횡적과 생
(6) 무애와 거사소리
신라에는 전문 범패승에 의한 불교음악 외에 민간 포교를 위한 '무애(無* )'와 '거사소리'
와 같은 불교음악이 있었다. 무애란 본래 원효가 자기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고
불가의 말에 우리 말이 섞인 노래를 지어부르면서 포교를 위하여 촌락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이때 그가 손에 들고 춤을 춘 호리병을 '무애'라 하였고, 뒤에 원효의 춤을
'무애무'라 하였다.
이 무애무는 그후에 고려조의 궁중정재로 채택되어 노래와 관현반주를 곁들인 2인무로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의 서재(庶弟)인 차득공이 거사의 차림으로 비파를
연주하며 가가호호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차득공이 불경이야기를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며 동냥을 구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후세에 꽹과리를 손에 들고 '부모
은중경'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며 동냥을 구한 소리 '회심곡'과 한 계통의 서사가라고 할 수
있다.
원효불패 ‥· (중략) ·‥ 원효는 이미 파계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
는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
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스님
은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 속에 말한 '아무 거리
낌이 없는 사람은 한 가지 도로써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
다. 일찌기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
서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과 몽매
한 자들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나무
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2. 발 해
발해악은 740년 12월에 일본왕이 발해 사신 기진몽을 위하여 베푼 잔치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그후 749년 발해악은 일본궁중에서 당악 및 오악과 더불어 연주되었다.
이같이 일본 궁중에서 연주된 발해악이 일본의 악공들에 의해 연주되었는지, 발해의 악공
들에 의해 연주되었는지 문헌적인 근거는 없지만 발해의 음악기관이었던 태상시에서 직접
파견했던 악사와 악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에서 연주되었던 음악
에 발해의 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발해악이 인명천황 당시에 아악료의 악제 개편때 삼국악과 더불어 고려악로 통합되어 아악
료의 우방악에 속했기 때문에 발해악에 포함되었던 발해춤도 우무이었던 고려악의 무악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발해악의 성격은 고구려의 음악문화를 바탕으로 말갈족 및 당나라의 음악을 수용하여 새로
운 형태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발해악이 일본의 고려악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송
나라에서 1185년 3월에 발해악의 연습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에 의하면 발해악인들의 후예가
자기 나라의 멸망 후에도 발해악의 전통을 이어가서 송나라 궁중에서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그 연습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송사』에 언급된 발해금도 송나라 궁중에서 발해악의 연주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발해금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거문고로 생각된다. 그것은 삼국시대 일본에 소개된 악기
의 이름에 전래된 나라의 이름을 붙이던 예가 많기 때문이다. 가야금이 우륵에 의해서 신라
에 전해지자 그 악기는 신라 사람들에 의해서 가야금으로 부렸고, 통일신라시대의 신라 악
사가 가야금을 일본에 전하여 일본 사람들에 의해 신라금으로 불려졌다.
또한 발해의 음악이 고려악이란 명칭으로 당나라때에도 중국의 악공들이 파견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금나라 명창간에 발해 교방으로 하여금 겸해서 익히도록 하였다는 기록이나,
발해 교방 30명이 금의 교방 50명ㆍ문수서 50명 등과 함게 활약한 기록은 발해춤이 금나
라의 궁중에서 전승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과 금의 궁중에서 12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던 발해의 악무는 그후에 없어졌는지 송
과 금 이후의 중국문현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
발해 국내의 모든 음악활동을 관장했던 음악기관은 태상시였다. 발해의 중앙 행정 관서 중
에서 의부가 의례와 제사를 관장했던 기관이었는데, 소경 한 명이 예의와 제사에 관한 업무
를 맡았던 관리였다.
예의와 제사는 음악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겠으나 의부는 직접적으로 음악활동을 관장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에 태상시는 신라의 음성서처럼 발해의 왕립음악기관이다.
태상시에는 경 1명이 교묘에 관련된 예악을 관장했는데 나머지 관원들에 대한 기록은 자세
하지 않다.
한편, 1980년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두산(龍頭山)에서 발굴된 발해국의 세 번째
왕인 대흠무(大欽茂 大王, 737~792)의 넷째 딸이었던 정효공주(貞孝公主)의 고분벽화에서
박판ㆍ공후ㆍ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인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 논문 뒤에
첨부된 사진을 통해서는 상기 악기의 연주모습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정효공주의 비문에 의하면, 공주가 792년(大興 57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8세기 후반에
이미 발해금 이 외에 박판ㆍ공후ㆍ비파 등의 악기들이 발해에서 연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