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단법인 한국보훈선교단 강원지부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고난주일 스크랩 가상칠언
sk 추천 0 조회 13 10.01.31 17: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난주간과 가상칠언

● 고난주간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 또는 수난주간이라 하며, 이 주간은 수난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임을 말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21:1-11,막11:1-10, 눅19:28-40, 요12:12-19)이며,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주간에는 더욱 뜻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합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이 됩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주일이 종려주일과 관련되기 이전에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 주일" 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행하는 지원자들의 준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지원자들은 이 주일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를 배웠고 그것을 비밀로서 간직하였습니다. 이날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며 또한 예수님의 고난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요 일

주   제

내            용

성 경 본 문

일요일

개선의 날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 우심

눅19:41-44 눅19:28-40 

월요일

권위의 날

1.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마21:18-19, 막11:12-14

마21:12-17, 눅19:45-48

화요일

변론의 날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

 (두 아들, 악한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과 논쟁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

5. 유다의 반역

 

 

마21:23-27, 눅20:1-8 마21:28-32, 마21:33-46, 마22:1-14

 

마22:41, 눅20:41-44

마24:25, 막13장, 눅21:5-38

마26:14-16, 막14:10-11

수요일

 음모의 날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

마26:3-5, 막14:1-2, 눅22:1-2

목요일

준비의 날

1. 유월절 식사

2. 최후의 성만찬

3.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

마26:17-25, 요13:1-7

마26:26-29, 막14:22-25

요17장, 요13:31-35

 

금요일

수난의 날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

2. 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심

4. 십자가의 죽으심

마26:3036-56, 막14:2632-52

마26:57-58, 눅22:54-55

마27:21-31, 눅23:1-25

마27:31-50, 막15:20-46, 눅23:26-54

토요일

예비의 날

1. 로마병정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마27:62-66 

●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

● 가상칠언이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863] ajfivhmi

발음 : 압히에미 aphiemi {af-ee'-ay-mee}

어근 : *575 히에미(보내다) 에서 유래

어의 : 울부짖다, 용서하다, 버리다, 곁에 두다, 떠나다, 생략하다, 따로 내놓다, 면제하다, 고생하다,포기하다.

문법 : 동사

from 575 and hiemi (to send, an intens. form of eimi, to go); TDNT - 1:509,88

AV - leave 52, forgive 47, suffer 14, let 8, forsake 6, let alone 6, misc 13; 146

1) to send away

   1a) to bid going away or depart

       1a1) of a husband divorcing his wife

   1b) to send forth, yield up, to expire

   1c) to let go, let alone, let be

       1c1) to disregard

       1c2) to leave, not to discuss now, (a topic)

           1c21) of teachers, writers and speakers

       1c3) to omit, neglect

   1d) to let go, give up a debt, forgive, to remit

   1e) to give up, keep no longer

2) to permit, allow, not to hinder, to give up a thing to a person

3) to leave, go way from one

   3a) in order to go to another place

   3b) to depart from any one

   3c) to depart from one and leave him to himself so that all mutual claims are abandoned

   3d) to desert wrongfully

   3e) to go away leaving something behind

   3f) to leave one by not taking him as a companion

   3g) to leave on dying, leave behind one

   3h) to leave so that what is left may remain, leave remaining

   3i) abandon, leave destitute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857] paravdeiso

발음 : 파라데이소스 paradeisos {par-ad'-i-sos}

어근 : 기원은 외래어

어의 : 공원, 낙원

문법 : 남성형 명사

 of Oriental origin cf 06508; TDNT - 5:765,777

 AV - paradise 3; 3

 1) among the Persians a grand enclosure or preserve, hunting ground, park,

    shady and well watered, in which wild animals, were kept for the hunt; it was enclosed by walls

    and furnished with towers for the hunters

 2) a garden, pleasure ground

    2a) grove, park

 3) the part of Hades which was thought by the later Jews to be the abode of the souls of pious until

    the resurrection: but some understand this to be a heavenly paradise

 4) the upper regions of the heavens. According to the early church Fathers, the paradise in which our

    first parents dwelt before the fall still exists, neither on the earth or in the heavens, but above

    and beyond the world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384] mhvthr

발음 : 메텔 meter {may'-tare}

어근 : 기본어

어의 : 어머니

문법 : 여성형 명사

 apparently a primary word; TDNT - 4:642,592

 AV - mother 85; 85

 1) a mother

 2) metaph. the source of something, the motherland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4518] sabacqaniv

발음 : 사박다니 sabachthani {sab-akh-than-ee'}

어근 : 기원은 외래어

어의 : 당신이 나를 버렸나이다, 절망의 외침

문법 : 아람어를 고쳐씀, 음역

 of Aramaic or 07662 with pronominal suffix;

 AV - sabachthani 2; 2

 1) thou hast forsaken me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사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1372] diyavw

발음 : 딥사오 dipsao {dip-sah'-o}

어근 : 딥사(목마름) 에서 유래

어의 : 목마르다, 갈망하다 to thirst, 갈급해하다

문법 : 동사

 from a variation of 1373; TDNT - 2:226,177

 AV - thirst 10, be thirsty 3, be athirst 3; 16

 1) to suffer thirst, suffer from thirst

    1a) figuratively, those who are said to thirst who painfully feel their want of, and eagerly long for,

        those things by which the soul is refreshed, supported, strengthened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내가 목마르다"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신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행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요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5055] televw

발음 : 텔레오 teleo {tel-eh'-o}

어근 : *5056 에서 유래

어의 : 완수하다, 결론짓다, 완전히 하다, 청산하다, 결론짓다, 실행하다

문법 : 동사 

 from 5056; TDNT - 8:57,1161

 AV - finish 8, fulfil 7, accomplish 4, pay 2, perform 1, expire 1, misc 3; 26

 1) to bring to a close, to finish, to end

    1a) passed, finished

 2) to perform, execute, complete, fulfil, (so that the thing done corresponds to what

    has been said, the order, command etc.)

    2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ubject matter, to carry out the contents of a command

    2b) with reference also to the form, to do just as commanded, and generally involving

        the notion of time, to perform the last act which completes a process, to accomplish, fulfil

 3) to pay

    3a) of tribute ----------

 "It is finished or paid" John 19:30  Christ satisfied God's justice by dying for all to pay for

  the sins of the elect. These sins can never be punished again since that would violate God's justice.

  Sins can only be punished once, either by a substitute or by yourself.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요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계20:1-3)


-------------------------------------------------------------------------------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908] parativqhmi

발음 : 파라티데미 paratithemi {par-at-ith'-ay-mee}

어근 : *3844 *5087 에서 유래

어의 : 나란히 놓다, 제시하다, 저축하다, 진술하다, 명령하다, 위임하다, 제안하다, 제시하다, 옆에 놓다, 앞에 놓다

문법 : 동사

 from 3844 and 5087; TDNT - 8:162,1176

 AV - set before 9, commit 3, commend 3, put forth 2, commit the keeping of 1, allege 1; 19

 1) to place beside or near or set before

    1a) food, i.e. food placed on a table

    1b) to set before (one) in teaching

    1c) to set forth (from one's self), to explain

 2) to place down (from one's self or for one's self) with any one

    2a) to deposit

    2b) to intrust, commit to one's charge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세상 것만 좋아합니다. ------------------------------------ (갈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롬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롬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③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14:6)


 가상칠언(架上七言) I: '용서를 위한 절규' <눅 23: 34> 


 사순절은 십자가를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절기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절기입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도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는 매년 3 만명 정도의 죄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들은 주로 로마 정부에 반역을 저지른 정치적인 죄인들과 온갖 못된 죄를 저지른 흉악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이 치욕스럽고 잔혹한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셨습니다.  흠 하나 없는 어린 양 예수께서 달리셨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를 도저히 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드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값과 형벌을 아드님이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사 53: 4-5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흘려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께서 세상 죄를 모조리 뒤집어쓰시고 한 마리의 희생양이 되신 사건입니다(요 1: 29 참조).  그러므로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本―架上之第一言: '용서를 비는 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모두 일곱 마디입니다.  이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부릅니다.  더 많은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복음서는 일곱 마디만 적고 있습니다.  이 일곱 마디는 평범한 유언이 아닙니다.  그 무서운 십자가 형틀에서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외친 피맺힌 절규(絶叫)였습니다.


 앞으로 저는 사순절 기간 6주 동안과 성금요일 등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서 가상칠언을 하나씩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상칠언에 대한 메시지를 통하여 인간 예수님의 고뇌를 느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일 먼저 우리는 눅 23: 34에 나타난 예수님의 절규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죽이려 든다면 우리는 그를 저주할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저주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던 강도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다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저렇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용서의 말 한 마디가 흉악무도한 강도 한 사람의 마음을 뒤바꾸었던 것입니다.


 이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부르짖는 주님의 기도는 네 가지 질문을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① 무엇이 용서인가?

 눅 23장을 보건대 용서의 대상은 크게 세 그룹의 사람들입니다.  먼저 유대 지도자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들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 실질적인 폭력을 가했던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바로 옆에서 십자가형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는 강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실 때 그 용서는 도대체 어떤 용서일까요? 


 예수님은 마 5: 23-24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배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을 때 화해부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화해한 다음에 드리는 예배가 열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용서 개념은 누군가와 틀어진 관계를 바로 잡아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로 가장 흔히 번역되는 희랍어는 'aphiami'입니다.  'Aphiami'의 뜻은 '지우다'(wipe away), '제거하다'(remove), 혹은 '풀다'(release)라는 뜻을 가집니다.  법률적인 용어로서 빚진 사람을 빚진 상태로부터 풀어주어서 형벌을 면해준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빚을 내준 채권자(債權者)와 빚을 진 채무자(債務者)가 서로 화해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성서적인 용서는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나 아픔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내숭을 떨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보복하는 길을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행 7: 59-60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람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인 용서의 한 모범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화해하시겠다는 사랑의 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②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도 용서해야 하는가?

 대구 지하철 사고를 일으킨 범인 김대한 씨를 용서해야 합니까?  수 천명의 죄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든 오사마 빈 라덴을 용서해야 합니까?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168 명의 생떼같은 목숨을 앗아간 티모티 멕베이(McVeigh)를 용서해야 합니까?

 

 아니, 오늘 여러분들의 가슴에 손을 대고 한번 질문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고통을 가져다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여러분들에게 준 상처와 손해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인데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용서받을 자격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인데 과연 용서해야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 위에서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나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용서 못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외치신 절규가 이를 증명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판단으로 용서받을 자격 없다고 섣불리 말하지 마십시오.  용서받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 한 분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범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서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③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도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한테 잘못을 범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뻔뻔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능멸합니다.  조롱합니다.  더 큰 상처를 주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그런데도 용서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도 용서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용서해달라고 외치신 사람들이 용서를 구했습니까?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기세 등등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미쳐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일말의 양심도 없습니다.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 5: 44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상대방이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맘에 자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그 때부터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들어갑니다.  롬 12: 19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들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④ 우리가 자격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용서를 부탁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용서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고 해봅시다.  과연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언제나 "예!"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용서를 구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구원받았음이 확실합니다.  행 2-4장에 보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로마 군병들조차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마 27: 54을 보십시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사형 집행관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채 죄속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서야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결국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내가 기도해봤자 용서받지 못할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까?  성경은 분명히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히틀러와 같은 희대의 살인마도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용서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結―무엇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외치신 첫 번째 절규는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줍니다.  용서 없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를 미워하셨습니까?  용서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보복을 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우셨습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 마음 속에 참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상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9-11 테러 사건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자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제 마음 속에 두 마리의 이리가 싸움박질을 하는 것 같아요.  하나는 분노에 가득 차 오직 복수만 원해요.  다른 하나는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해요.  할아버지 누가 이길까요?" 할아버지가 조용히 대답합니다.  "네가 누구를 택하느냐에 달려 있다."--"The one you feed." 


 오늘 여러분 속에 미움과 사랑, 복수심과 용서가 다툴 때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가상칠언(架上七言) II: '확신의 절규' <눅 23: 43> 


 <序: 불신자의 임종 앞에 선 딜레마>

 목회를 하다보면 난감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교인의 가족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 계셔서 임종예배를 부탁할 때 특히 난감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치고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선 분들은 참으로 아슬아슬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개중에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예수를 영접하는 분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기 일초 직전에 예수를 믿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일입니다.


 <本: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

 가장칠언의 두 번째 말씀은 눅 23: 43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못 박힌 강도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 돌아가는데는 절대로 늦는 법이 없다는 진리를 약속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 네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①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홀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습니다.  좌우에 두 강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한 개가 아닌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섰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날의 사형 집행을 맡은 로마의 백부장이었더라면 두 사람의 강도는 나란히 한 곳에 세우고 예수님은 조금 멀찌감치 따로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강도들 사이에서 나란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흉악무도한 죄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거룩치 못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 때문인 것입니다. 


 사 53: 12은 예수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마구간에서 짐승들에게 둘러 쌓이게 하시더니만, 돌아가실 때조차도 흉악한 죄인들에게 둘러 쌓이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계획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출생해서 운명하실 때까지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철저한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허물과 수치를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대신 뒤집어쓰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날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섰던 것은 우연히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② 천국과 지옥 10미터 앞에 선 두 운명

 두 강도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질이 나쁜 사람들임은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행악자, 즉 'CRIMINAL,' 사회적인 범법자들이었습니다.  남의 물건을 강탈하고 목숨을 빼앗은 무장 강도들이거나 산적들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죄질이 나쁜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둘 다 나쁜 짓만 골라하다가 그 당시 최악의 중범죄자에게 가했던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길목에 와 있습니다.  조금 지나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마치 천국과 지옥 문 10미터 앞에 선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모습은 오늘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병원을 방문해 보면 오늘도 중환자실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입니다.  또 그 중에는 착한 일보다는 악한 일을 더 많이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에 아니 몇 분, 몇 초 후에 최후의 숨을 거두게 되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와 같이 임종을 앞둔 불신자들의 모습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단지 임종을 앞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두 강도의 운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두 강도처럼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남의 물건을 강탈한 적도 없습니다.  남의 목숨을 뺏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냉철히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두 강도와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물질을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내 이기적 욕심을 위해서 썼습니다.  내 정욕을 위해서 허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영적인 강도요 도적이요 행악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 전체가 두 강도와 마찬가지로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두 편이 나뉘어집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비방했습니다.  39절에 보면 그 강도는 예수께서 진짜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강도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죄인처럼 죽어야지만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는 달랐습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 사람은 먼저 자기들과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들은 진짜 죄 때문에 응당 받아야만 할 십자가형을 받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가 전혀 없고 의로우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천국문과 지옥문 10미터 앞에 선 두 강도, 이것은 오늘 인류 전체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것은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예수님으로부터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떨어져서 십자가에 달렸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가 천당과 지옥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세계와 구원받지 못한 세계는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선하고 상대적으로 더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온 인류, 온 세계, 온 문화가 오직 십자가 하나로 구분이 됩니다. 


 십자가 한 편에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다른 편에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③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은 강도

 강도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42절에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의 부탁은 매우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막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에게 상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청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그는 사회적인 중죄인이요 흉악범이었기에 온 사회가 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 따위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가족들조차도 빨리 기억으로부터 지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은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입니까?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강도의 마음 속에 희미하나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스며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은 도저히 그리스도를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셔서 가장 무기력한 상태에 있습니다.  자기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능력이 많으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 만드실 때 예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았을 때가 아닙니다.  부활과 승천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엿보였을 때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자기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지금,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가장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Helplessness!,' '속수무책'(束手無策),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한 가운데 빠진 예수님께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이 강도는 자기와 함께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거짓 없고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라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예수님의 제자들, 즉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조차도 깨닫지 못한 구속론의 비밀을 이 강도는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가 버림받고,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제 목숨 하나 보전하기 위하여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강도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무기력한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모습이 되어 처절히 죽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옳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④ 지상 최후의 동반자요 천국 최초의 동반자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강도의 부탁에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4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도의 부탁은 매우 애매 모호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최초로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일생 동안 못된 짓만 골라했던 흉악범, 강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 첫 번째 손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펄젼(Spurgeon)은 이 강도가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our Lord's last companion on earth)였을 뿐 아니라 "천국에 함께 들어간 최초의 동반자"(His first companion at the gates of paradise)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세례나 성만찬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두 손목과 두 발목에 굵은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이제는 두 손과 두 발로 착한 일을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천국에 들어간 것은 그의 노력이나 선행 때문도 아닙니다. 


 100%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 하나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를 헤아려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일 뿐입니다.  


 <結: 결코 늦지 않으리>

 예수님은 생전에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19: 10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시간까지 이 정신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평생을 죄짓는 일에 낭비한 강도 한 사람을 마지막 순간까지 건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두 사람의 강도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마지막이 아니라 최초로 주어진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기회를 영영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기회를 잡았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죄가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제약적 사랑은 그를 구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최초로 들어가는 영광까지 안겨주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집에서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오는데는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단 1초 전이라고 할지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천국문이 열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최악의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상칠언(架上七言) III: '자비의 절규' <요 19: 26―27> 



* 필자는 이 시리즈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Erwin W. Lutzer의 Cries from the Cross(Chicago: Moody Press, 2002)으로부터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Seven Words from the Cross III: 'A Cry of Compassion'>    


 


 <序: 자신의 격통중에 남을 배려하기가 쉽지 않다>

 저는 가벼운 수술이지만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 마취가 깨어나기도 전에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들이 문병오신 것은 너무나 감사했지만 그 분들의 말씀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내 고통 때문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큰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을 배려하기가 힘이 듭니다.  더군다나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면서 남을 생각하십니다.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가상칠언의 세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 19: 26-27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정경을 보면 얼마나 동양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잡힙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당신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요 13: 23 참조) 요한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의지할 곳 없게 될 어머니를 제자 요한이 봉양해 줄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대신에 요한이 마리아의 아들이 될 것이요,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가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맏아들의 도리를 다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살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本: 효자 예수>


 ① 모정(母情)의 세월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 바로 전에 나오는 요 19: 23-25절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다섯 깃(pieces)으로 된 옷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사등분해서 한 깃씩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한 개의 옷을 네 파트로 찢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겹으로 된 옷을 하나씩 벗겨서 나누어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속옷(undergarment)이 하나 남았는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했습니다.  솔기가 없는 통옷인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은 군인들이 이 속옷을 누가 갖게 될지 제비를 뽑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속옷은 대개 어머니가 아들에게 지어주는 옷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집을 떠날 때 마리아가 이 속옷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사랑해서 어머니가 사랑으로 손수 정성껏 지어준 옷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서 군병들이 속옷을 나누어 갖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을 건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군병들이 속옷을 앞에 두고 철부지 짓을 하는 것을 보셨을 때 생전에 육신의 어머니가 베풀어 준 사랑이 가슴 깊이 저미어 왔을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줄곧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 때, 다시 말해서 로마 군인들이 당신의 속옷을 가지고 제비뽑기를 할 바로 이 때에, 마리아를 생각했다는 것은 그 속옷이 가슴 뭉클한 모정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날 육신의 어머니요 땅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베풀어 준 사랑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턱을 가슴께로 축 늘어뜨린 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요한을 가리켰습니다.  이 때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 대신 마리아를 모시게 될 요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또한 제자인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실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4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눅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 양친이 예수님을 하루 종일 찾다가 성전에서 발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이후에 요셉의 이름은 성경에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안의 맏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고뇌에 가득찬 일생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마리아는 동정녀(童貞女), 즉 숫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할 때부터 자신의 남다른 운명을 알아차렸습니다.  자기가 'Theotokas,' 즉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후 마리아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눅 2: 35에 보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시므온을 찾아갔을 때 시므온이 마리아를 향하여 이런 예언을 합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찌르듯이 큰마음 고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시므온의 예언 그대로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당장 마 2: 13-18을 보면 헤롯 임금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을 때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때 속은 것을 안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지경 내의 모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자기 가족들 때문에 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부터도 마리아의 가슴을 칼로 후비는 날이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기도 했고 잡아죽이려고 했던 숱한 현장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가슴을 진짜 비수로 도려낸 사건은 십자가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는 정말 자기의 가슴에 칼이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 자주 입맞추었던 이마에 가시 면류관이 짓눌려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 잡아주었던 그 귀여운 손이 굵은 대못에 박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심정으로서 이 모든 비극의 현장을 지켜봤을 때 마리아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듯,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자신의 마음을 피멍으로 물들이고 있을 바로 그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직감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모자관계, 즉  육신의 정은 끝이 나는구나.  이제 예수가 더 이상 자기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구주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려죽는 예수님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국에 찾아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전부 거짓이었다고 말하면 됩니다.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한 사람이니 용서해달라고 빌기만 하면 십자가에서 놓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고위관리들에게 모성애를 자극해서 울며불며 자비를 구한다면 십자가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슴 깊은 곳에 이와 같은 모성애적 충동이 솟구쳤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엄청난 고난을 받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육신의 모정을 구세주에 대한 믿음으로서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위대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를 지켜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② 효자 예수님

 감리교 신학교에서 저를 가르쳐 주신 윤성범 선생님은 「성(誠)의 신학」이라는 책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윤선생님은 예수님을 인류 최대의 효자로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 얼마나 효성을 다했던지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뿐만 아니라 땅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까지 효성이 극진했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로서 선택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여자여' 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와의 인연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 인연임을 분명히 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은 구주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땅의 어머니요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땅위에 계시지 않는 동안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마리아를 돌 볼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서 위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을 다하셨습니다.  또한 제자 요한이 마리아를 잘 모실 것을 부탁함으로서 아래로 땅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다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孝)가, 그리고 수평적으로 땅의 어머니에 대한 효(孝)가 교차해서 이루어진 효(孝)의 결정판으로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야말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역시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위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래로 육신의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잊지 않았던 효자였음을 기억하십시오.        


 ③ 제자의 책임: "누가 내 모친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보면 어쩐 일인지 요한은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한 역시 베드로나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깨닫고 십자가 현장에 나타난 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가장 어린 나이로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많은 사랑을 받은 애제자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이 그를 십자가 현장으로 다시 끌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요한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도 얻지 못할 영광을 얻었습니다.  평생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하게 된 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속 계셨더라면 당신이 하셔야만 했을 일을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맡기신 일을 우리에게도 맡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하셔야 할 일들 대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눅 14: 2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이제는 우리도 질 것을 부탁하십니다.  요한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봉양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더라면 주님은 요한에게 주셨던 부탁을 우리에게도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마리아를 봉양할 것을 부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누가 마리아입니까?  오늘 누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입니까?  막 3: 33-35에 보면 놀랄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남동생들과 여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엄숙하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한 예수님의 친형제요 친자매요 모친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마리아며 누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겠습니까? 


 불쌍한 사람을 사랑의 마음으로 도울 때 그가 우리의 형제가 됩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을 찾아 문병 갈 때 그 분이 마리아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니 우리의 친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할 때 우리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마 25: 4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와 같이 우리를 희생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때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結: 효자의 길을 찾아서 >

 미국에서 신앙을 갖는데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대답은 나이와 성과 교파를 초월해서 언제나 한 가지라고 합니다.  "나의 어머니"라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많이 외치며 죽는 말이 또한 "어머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육신의 어머니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마리아의 안부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역시 우리의 육신의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마리아를 모시는 일과 마찬가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가상칠언(架上七言) IV: '고뇌의 절규' <막 15: 34> 



* 필자는 이 시리즈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Erwin W. Lutzer의 Cries from the Cross(Chicago: Moody Press, 2002)으로부터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Seven Words from the Cross IV: 'A Cry of Anguish'> 



 <序: 하나님과 인간이 조우한 자리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정면충돌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추악함이 맞닥뜨린 결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악이 다투는 장소였습니다. 


 가상칠언의 네 번째 말씀이 이를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오늘 봉독한 막 15: 34은 마 27: 46에도 별 차이 없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보다 인간 예수님의 고뇌를 더 깊이 나타내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실망해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절망이나 불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만 한다는 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가상칠언의 네 번째 말씀은 시 22: 1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버리셨다고 부르짖는 시편 기자의 절규는 믿음 없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는 울부짖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는데 이제 모든 인간적인 소망이 끊어지는 데서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100%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뇌가 절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철저히 버려야지 만 당신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왜 나를 버리느냐고 부르짖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이나 존재가 버림받았다는 절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본질적인 유대 관계는 그대로 있습니다.  이 울부짖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100%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교제(FELLOWSHIP)가 일시적으로 끊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버리고 계신 것에 다름아닙니다!   

   

 벧전 3: 18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셨던 것입니다. 


 <本①: 어두움 속에서 외친 절규>

 지금까지 살펴본 가상칠언의 세 말씀은 모두 밝은 대낮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네 번째 말씀은 온 세상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나온 말씀입니다.  막 15: 33을 보십시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 날이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한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전 7시가 됩니다.  그런데 막 15: 25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 시간으로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세 시간 동안 날이 밝아서 환했는데 제 육시, 즉 정오 12시부터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은 제 구시, 즉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 시에 완전히 숨을 거두시기까지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두움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나머지 네 마디 최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여섯 시간 동안 세 시간은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세 시간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대낮에 캄캄해졌을까요?  일식 현상 때문일까요?  이것은 자연적인 일식 현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언제나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낮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불의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악한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이 죄에 대한 형벌로 마땅히 받아야 할 치욕과 고난과 죽음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사 53: 5-6의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한낮에 어두움이 온 천지를 뒤덮었던 그 세 시간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시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으신 시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출 10: 21을 보면 모세가 바로 왕에게 보여준 10 가지 기적 중에서 9 번째가 바로 삼일 동안 애굽 땅 전역에 흑암(黑暗)이 덮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두움의 재앙이 있은 다음에 애굽의 장자를 모조리 친 10 번째 재앙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10 번째 재앙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피 흘려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구원받기 직전에 세 시간 동안 어두움이 천지를 뒤엎었다는 사실을!  어두움으로 애굽인들의 죄악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셨듯이 어두움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어두움 후에 유월절의 어린양 피의 구속 사건이 이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때문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本②: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한 사람들>  

 여러분,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절규를 살펴봅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라는 아람어 발음은 '엘리야'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막 15: 35절에 보면 십자가 곁에 섰던 사람들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착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를 불러서 구원을 요청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하 2: 11 참조).  그래서 말 4: 5-6을 보면 유대인들은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준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막 15: 36에 보면 한 사람이 신 포도주, 즉 포도주에 식초 탄 것을 해융, 즉 스펀지에 묻혀서 갈대에 꿰어 예수님이 마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동정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36절 후반에 보면 이렇게 한 이유가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면서 조롱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엘리야를 불러서 당신을 구원해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더 큰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本③: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신 하나님>

 그 대신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절규하신 것뿐입니다.  여러분, 4 복음서 중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아버지'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 관계임을 알려주는 아주 친밀한 호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 보다 훨씬 더 거리가 먼 호칭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쓰시고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게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죄를 무섭게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온 인류의 죄를 두 어깨에 걸머지신 죄인 예수님의 차가운 법률적인 관계만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버리셨다'(FORSAKEN)는 말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 완전히 내동댕이쳐지셨습니다.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듯이, 자식이 부모를 버리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님께서 떠맡으신 죄인된 온 인류를 버리셨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Representative Forsakenness,' 즉 '대리적 버림받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예수님 개인만이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 1: 6에서 선지자 나훔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신다면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버림받으심으로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속도 위반으로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100불의 벌금을 물도록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가난했기 때문에 100불을 낼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이 때 측은히 여긴 판사가 자기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했습니다.  갑자기 판사석에서 일어나더니만 법복(法服)을 벗고서는 피고석에 가 섰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지갑에서 100불을 꺼내어서 그 남자 대신 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판사 가운을 입고서는 판사석에 가서 앉아서 자기가 그 남자 대신 낸 벌금을 받았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말했습니다.  "벌금 100불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제 당신은 죄가 없으니 자유롭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신 사건이 꼭 이와 같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벌금을 물어야 되는데, 아니 이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저질러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데, 우리가 그럴 처지가 못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위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벌금을 물게 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심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버림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을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 사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結: 빛 안에서 살다가 빛 안에서 죽자>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숨이 가빠져오면서 세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옆에 있는 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을 꺼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안 돼요.  어두움 속에서 돌아가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괜찮단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죽고 싶단다." 


 그는 소원대로 어두움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어두움 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 대신 세 시간 동안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빛 가운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요 1서 1: 5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빛 안에서 살다가 빛 안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던 예수님께서 어두움의 절망 속에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 속에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하나로 어두움의 세계는 끝났습니다.  빛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아멘.



 가상칠언(架上七言) V: '목마름의 절규' <요 19: 28> 


 1970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많은 청년 학생들이 애송하던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일부입니다.  유신 체제하에서 자유를 잃고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깊이 갈망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구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타는 것은 언제나 불과 관계가 되어 있는데 반하여 목마름은 물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타는 목마름"이라니, 도대체 왜 불과 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김지하 시인은 옥중에서 진짜 갈증을 느껴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이 갈할 때 입안이 불로 훨훨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극단적인 갈증은 언제나 불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극한 갈증을 느끼게 될 때 입안과 목안이 바싹 바싹 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本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이 타신 예수님>

 "타는 목마름," 여기에 가상칠언의 다섯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외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의 어떤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이 마르다고 부르짖으셨을까요? 


 우리는 목마름과 관련된 말씀을 구약 성경의 시편 69: 2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하시기 수백 년 전에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는 말 그대로 쓰디써서 쓸개입니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더니 원수들이 쓰디쓴 쓸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했더니 역시 시큼한 식초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바로 이 시 69: 21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으로서 해석합니다.  먼저 마 27: 34을 보십시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억지로 마시게 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요 19: 29절을 보십시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목마른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입술에 축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가 말하는 "쓸개 탄 포도주"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때의 쓸개는 독이 든 약초, 즉 아편을 말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쓸개 탄 포도주는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진정제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이 말하는 "신 포도주" 역시 포도주에 식초를 탄 것으로서 잠시라도 통증을 잊게 하는 진통제의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절규하신 것은 성경의 예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本②: 예수님이 목마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목이 말라야 했을까요?  왜 타는 목마름으로 십자가 위에서 괴로워하셔야만 했을까요? 


 ① 예수님의 진정한 인간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타는 목마름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기독교를 위협했던 가장 위험한 이단종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자(二元論者)들로서 영혼과 물질이 정반대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영혼은 무조건 선한 것이고 육신은 무조건 악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은 순수한 영의 상태일 뿐 물질적인 것, 즉 육체적인 것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영지주의자들에게 최고의 걸림돌은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악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악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가현설(假現設, Docetism), 즉 주님이 진짜로 육신의 옷을 입으신 것이 아니고 다만 겉껍데기만 가짜로 입고 오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겉만 그렇게 진짜 육신을 가진 것으로 보일 뿐, 실제는 100%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영지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神性)만 강조하고 인성(人性)은 부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유령(phantom)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땅위를 걸으실 때 땅 위에 그 어떤 발자국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진짜로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잠시 아픈 척 시늉만 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100% 영적인 존재요 신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에 악하고 죄된 육신의 몸을 입을 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부르짖으신 것은 분명히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성서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동시에 100% 인간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연약함을 대신 져주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드셨고, 잠을 주무셨고, 불의한 일을 볼 때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병리학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과다 출혈과 극도의 피로(exhaustion), 노출(exposure), 충격(shock), 그리고 질식(suffocation)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은 탈수(dehydration)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기본적으로 죄수를 서서히 탈수시켜서 죽게 하는 형벌인 것입니다. 


 장장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땀을 다 쏟으셨으니 얼마나 기진맥진했겠습니까?  중동 지방의 불볕 더위는 또 얼마나 혹독했겠습니까?  입술이 바싹 바싹 말랐을 것입니다.  목안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이 마르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목마르다고 부르짖으신 것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진 분임을 입증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②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입니다.  그래서 요 7: 37-38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런데 사람을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이신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다니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100%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저 넘쳐나는 오대양과 수많은 강물들을 창조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물을 만들어내신 분이 목이 마르다니요?  사나운 풍랑을 잠재운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님 아닙니까?  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숱한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서는 목축일 물 한 모금 만들어내시지 않는 걸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하여 목이 마르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시원한 생수를 만들어 내셔서 당신의 타들어 가는 입술을 축일 수 있었지만 순전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돌로 떡을 만드는 기적을 거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시고서는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물 만드는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목말라 죄인의 모습으로 죽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시는 주님의 절규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③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제일 먼저 직면하는 고통이 목마름입니다.  젖먹이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평안히 있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먼저 울음을 터뜨립니다.  목마름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평생 목마름으로 고생합니다. 


 탄광에 갱도가 무너져 오랫동안 갇혀 있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갈증입니다.  배고픔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수분이 있어서 갈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비록 아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도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육신의 갈증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수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적인 갈증이 또한 있습니다.  이 영적인 갈증은 육적인 갈증보다 훨씬 더 무섭고 끈질깁니다.  여간해서는 채워지지 않는 바 그 바닥을 모르는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갈증을 풀기 위해서 술과 노름과 섹스와 도박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육체적인 방법은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을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요 4장에는 영적인 갈증을 풀지 못해서 고민하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 4: 13-14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옳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방법으로 갈증을 풀려고 했지만 목은 점점 더 말라져만 갔습니다.  렘 2: 13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생들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제 우리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 55: 1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또한 계 7: 16-17에 나오는 약속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희가 다시 주리지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심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 목마름이 해결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끝 모르는 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주님께서 목마르셨습니다.  영원한 생수가 되시기 위하여 최후로 목이 마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육욕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께 목이 말라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여러분들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시 42: 1 참조).     

 

 <結: 다시 십자가의 능력 밑으로>

 이제 저는 어떤 책에서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1960년대 말 오하이오의 신씨네티 대학에 다니던 어떤 독실한 크리스천의 간증입니다.  이 학생이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인 촬스 머레이(Charles Murray) 라고 하는 올림픽 다이빙 선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머레이에게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이 다이빙 선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를 갖고 친구의 전도를 들었습니다.  이제 어는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기독교인 친구가 머레이에게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머레이가 얼굴을 밑으로 떨구면서 죄책감에 가득 찼습니다.  그러더니 자기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날이 있은 후부터 머레이는 말수가 적어지고 전도한 친구를 자꾸만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독교인 친구는 머레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신약 성경 어느 곳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전화였습니다.  기뻐한 친구는 즉시 구원에 도움이 될만한 성구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것은 싫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머레이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머레이가 드디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머레이는 올림픽 다이빙 선수였기 때문에 대학 내의 실내 수영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날 밤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머레이는 수영장에 가서 수영도 하고 다이빙 연습도 하기로 했습니다.  그 날은 10월의 아주 맑은 밤으로 큰 달이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학교 수영장은 창유리로 된 천장 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깃불을 켜지 않아도 벽 꼭대기로부터 수영장 주변까지 밝은 달빛이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머레이는 첫 번째 다이빙 연습을 하기 위해서 가장 높은 다이빙 단까지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때 성령께서 머레이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부터 들었던 모든 성경 말씀과 일체의 간증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랐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첫 번째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높은 다이빙 단에서부터 밑으로 떨어져 내리기 위해서 뒤로 물러서면서 균형을 잡기 위하여 두 손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머레이는 달빛에 자기의 그림자가 벽에 비추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모습이었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호흡을 고르는 모습이 달빛에 반사되어서 십자가 그림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 십자가 그림자를 본 순간 머레이는 더 이상 자신의 죄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깨어져서 다이빙 대 위에 주저앉아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달라는 기도였지요.  이렇게 머레이는 지상 20 피트 상공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수영장 안에 전깃불이 갑자기 켜졌습니다.  수영장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수영장 안을 점검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깃불이 환한 수영장 밑을 다이빙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이 다 빠져서 시멘트 바닥이 훤히 내다보이는 빈 수영장이었습니다.  수영장 수리를 위해서 물을 다 빼냈던 것이지요.  머레이가 밑으로 뛰어 내려 죽을 수밖에 없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구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와 같이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 밑에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외치심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오늘도 마른 목을 축이시길 바랍니다.  아멘.                





가상칠언(架上七言) VI: '승리의 외침' <요 19: 30> 



* 필자는 이 시리즈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Erwin W. Lutzer의 Cries from the Cross(Chicago: Moody Press, 2002)으로부터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Seven Words from the Cross VI: 'A Cry of Victory'>            


 


 <序: 뜻을 이룬 사람들>

 얼마 전에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 한 편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작년 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현재 사법연수원에서 법조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김미애(34세)씨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김미애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방직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고 밤에는 야간여상을 다녔습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쇼핑센터에서도 일했고 초밥집을 열어 주방장도 하고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는 1인 3역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고생을 하다가 부산 동아 대학교 법대에 진학했고, 마침내 나이 33 세에 사시(司試)에 합격해서 율사(律師)의 길을 걷게된 것입니다. 


 김미애씨는 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가 아파서 아무 치료약도 써보지 못하자 무조건 리어카에 싣고 교회에 간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김미애씨가 막다른 골목에 빠졌을 때마다 자신을 도와준 유일한 '친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흐뭇한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김미애씨는 역경을 딛고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을 이룬다면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더욱이 일생 동안 계획하고 씨름했던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생일대의 꿈을 이루는 일, 오랫동안 가슴 벅차게 소망해 왔던 숙제를 완성하는 일, 여기에 가상칠언의 여섯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本①: 'TETELESTAI'의 의미>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한번 봅시다.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를 한번 살펴봅시다.  


 희랍 원어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tetelestai'입니다.  한 단어로 된 아주 짧은 말이지요.  19세기 설교가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이 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찍이 말해왔던 다른 모든 말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말은 전혀 측량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높아서 내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너무나 깊어서 내가 도저히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는 말이다."--"This one word would need all the other words that were ever spoken… It is altogether immeasurable.  It is high; I cannot attain to it.  It is deep; I cannot fathom it."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그 높이와 깊이를 우리의 유한한 지혜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짧은 언어로나마 설명은 해봐야 할 것입니다.


 희랍어 'tetelestai'는 '어떤 것을 끝맺는다'(to bring to an end), 혹은 '완성한다'(to complete), 혹은 '성취한다'(to accomplish)라는 뜻을 가진 동사 'teleo'에서부터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행위 과정에 있어서 성공적인 끝맺음을 의미할 때 씁니다.

 

 물건을 사고나서 값을 다 지불한 뒤 이 말을 쓸 수도 있고 달리기 시합을 완주한 뒤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종이 주인이 부여한 사명을 다 완수했을 때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 보고를 할 때도 이 말을 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tetelestai'라는 말은 우리가 시작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 쓰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확실한 주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완수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이것은 'tetelestai'라는 말의 영어 번역인 'It is finished.'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 번역가들이 "I am finished."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은 'tetelestai'라는 말의 모호함을 잘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I am finished."라고 말씀했다고 번역할 경우 "내가 끝났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패배한 채 숨을 거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여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간에 'tetelestai'라는 말은 불특정 3인칭 단수로 "It is finished."라고 번역한 것은 확실히 옳은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성경 전체를 뒤져야지만 해결될 수 있고, 인류 역사가 기록한 모든 책들을 들추어야지만 풀어질 수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을 뜻할 수 있는 막연한 주어 'It'로 번역한 것입니다.

  

 <本②: 무엇을 이루셨는가?>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승리 선언인 'tetelestai'에는 무슨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요?  주님이 도대체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일까요?  이루었다는 말은 계획했던 일들이 다 끝났다는 뜻에 다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다 끝났다는 말씀일까요?    핵심적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① 예수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고난'이라는 말을 빼놓고서는 주님의 일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말구유를 잠자리로, 지푸라기를 베개삼아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육과 전도와 봉사와 치유 사역을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언제나 배척과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신 채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예수님이 겪으셨던 수난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이 시간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 처형을 다시 한번 복원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대제사장 가야바와 헤롯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느라고 정신적으로 혹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 곧바로 채찍에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채찍은 무거운 가죽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끝에는 두 개의 납덩이나 혹은 날카로운 동물의 뼈가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채찍에 맞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피부가 상하면서 멍이 들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부 조직이 찢어져 근육 속의 혈관들이 터져나와 몸의 구석구석에 피가 고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극심한 빈혈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을 맞은 뒤 주님은 십자가의 가로대를 등에 메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미 세로대는 갈보리 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가로대만 메고 가셨던 것이지요.  약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십자가를 주님이 제대로 질 수가 없어서 구경나온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다고 막 15: 21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 도착했을 때 옷을 다 벗긴 뒤 가로대에 뉘여 손목 부위에 못을 박습니다.  손바닥에다 못을 박을 경우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손바닥이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 부위에다가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가로대를 세워 올린 후 왼발과 오른발을 포개어 발목에 또 대못을 박습니다. 


 양 손목과 발목에 박힌 세 개의 못이 예수님의 혈관과 신경을 끊어서 다시 극심한 출혈이 시작됩니다.  몸이 쳐져서 손목의 못에 몸무게가 실리게 되면 예수님의 팔과 어깨에 무서운 아픔이 몰아쳐 옵니다.  이 때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몸을 위로 밀어 올리면 이번에는 몸무게 전체가 발에 박힌 못에 쏠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리 죽여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의 극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릎 뼈를 망치로 깨뜨리면 사형수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무릎 관절 주위로 1리터 이상의 피가 새어나와 빈혈 쇼크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 19: 31-37에 보면 예수님 양 옆에 매달린 강도 두 사람의 다리를 꺾은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요 19: 34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아가셨는지 안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 병사 한 사람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 부위, 즉 심낭과 심장이 있는 갈비뼈 주변을 찔러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십자가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수치와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제 이와 같은 극한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일생 동안 점철되어 온 고통, 특히 십자가의 고통이 다 끝났다는 말씀이지요. 


 ② 희생 제사가 다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唯一回的(once for all) 희생 제물이 되셨을 때 그 때까지 지속되어 오던 모든 구약의 짐승 희생제사가 종결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까지 유대인들은 각종 짐승의 희생 제사를 주기적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 제사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결코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상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제사는 예식적인 행사일 뿐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주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바로 이 때문에 히 9: 25-2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단 한번 십자가 위에서 대속 제물이 되심을 통하여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레 16: 6-10에 보면 아사셀의 염소가 나옵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이 아사셀을 위해 제비뽑은 염소 위에 손을 얹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그 위에 뒤집어씌웁니다.  그런 다음에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내 보내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아사셀의 염소가 한 일과 마찬가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사셀의 염소와도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전가시켜서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는 1년에 단 한 차례 오직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해주던 것이 바로 휘장이었는데(레 26: 33 참조), 이 휘장을 걷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 27: 51에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놓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직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단 하루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끝났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벧전 2: 9 참조).


 그러므로 히 10: 19-2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찢어진 휘장은 찢어진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하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살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tetelestai,' 주님의 십자가로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가 끝난 줄로 믿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자기의 죄를 씻는 희생 제사를 드린 후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는 누구다 다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結: 끝까지 'tetelestai'를 다하는 삶을 향하여>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일말의 후회도 없이 이 사명이 영원히 이루어졌다는 말씀이지요.  더 이상 설교하실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병자를 고치셔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떡을 만드시는 기적이나 물이 변하여 포도주 만드시는 기적도 베풀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육신의 예수님이 이제 더 이상 해야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tetelestai'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산 후 값을 다 치를 때 사용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악의 빚이 지불 완료(Paid in Full)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여러분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치러야 할 댓가를 주님이 대신 갚아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 'tetelestai,'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46년에 복음주의자 전국 연합회(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서는 최근 5년 동안 하나님이 쓰신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아티클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첰 템플톤(Chuck Templeton)이라는 젊은 설교가가 제 일 순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교 총장은 템플톤을 "오늘 미국에 설교에 있어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the most gifted and talented young man in America today for preaching--라고 추켜세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템플톤이 언젠가 디 엘 무디(D. L. Moody)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와 같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템플톤은 출발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재능주신 하나님 위해서 쓰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 결과 그는 나중에 학적인 교만에 빠져 결국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에 쓴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안녕」(Farewell to God)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첰 템플톤이 '십자가 선교 사역'(crusade ministry)을 시작했을 때 설교 동역자로 함께 일했던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1946년의 아티클은 이 사람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에게 'Billy'라고 알려진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시골뜨기 빌리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의 나중은 위대했습니다.  템플톤과 그레이엄, 얼마나 뚜렷한 대조가 됩니까? 


 시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끝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하나님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이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물질을 하나님 위하여 귀하게 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립시다.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