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우르(창 12:1-3)
♣ 아브라함은 '구원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등장합니다.
마 1:1을 시작할 때에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며,
로마서에서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라고 할 때에도 아브라함이 소개됩니다.
♣ 수 24:2에 의하면 '너희 조상들' 즉 아브람의 아비, 나홀의 아비인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 는 증거입니다.
♣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갈대아 우르를 넘어 왔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혹은 아브라함이 '나를 섬겼기 때문에' 꺼내왔다고 해야 되는데, 앞에 있는 조건은 '꺼내 온 것'에 합당한 조건이 아닌 '조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신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꺼냈다'는 말씀입니다.
♣ 하지만 이 여행의 주도(主導)는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일에 주도권을 가집니다. 이것은 이 여행이 아브라함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된 여행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이방신이라도 섬기는 종교심이 있는 데라이니 까, 그렇게까지 찾아오고 나타난 신의 말씀을 거부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입니다.
♣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국가의 법도 아니고, 자국민이나 이웃이 아니 라 자기 자신 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 데라가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지 않았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최소한의 '종교 적인 겁'을 먹은 것 밖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따로 없습니다.
♣ 데라의 이름의 뜻은 '지연시킨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연기(延期)한다'는 뜻입니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갈등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을 감히 할 수가 있는가? 내가 이 꼴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실 리가 없지! 내가 이 꼴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좋단 말인가?' 일 것입니다.
⇒ 이 질문 뒤에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축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 이다'라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 우리 모두에게는 구원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 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믿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 하려면 아예 교만하십시오! 교만하는 것은 좌절하는 것보다 신앙이 좀 있는 것입니다.
⇒ 좌절하는 것은 진실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 '믿음'에는 결코 절망이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 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했다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원인도 조건도 아니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창세기 12장 5절에서 '마침내'는 하나님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일까요, 아브라함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일까요? 이 말은 하나님이 쓰시는 '마침내'입니다.
♣ 그러나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는 하나님이 쓰셔야 합니다.
♣ 하란에 머물었던 것이 아브라함이 그의 신앙으로 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던 방해가 아니 라,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순종치 않은 결과라는 것을 또 하나 확 인하기 위해서 하란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 단언하거니와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가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이어야만 우리들이 이 구원이 복된 것입니다.
♣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것이 축복의 비결이 아닌 데,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기준이라면 우린 아직도 죄가 무엇이며, 죄값으로 사망 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이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 르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의 고백인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라는 것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닌 데, 우리가 여기에 있기 위해 스스로 걸어오거나 하나님 앞에 "제가 졌습니다"라고 항복하 거나 합의한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아 브라함의 이 인생의 시작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출발하시는, 그래서 우리 앞에 내어 놓 은 말씀 앞에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 모든 신자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입니다. 설득 당하는 것 중에 맨 나중에 설득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 '이해'부터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부터 설득하고, 인생을 설득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설득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 우리들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해야 합니다.
♣ 여기는 가나안에 막 들어왔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막 들어와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이 결국 우리들을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이 되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들은 좌절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