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정씨(晋陽鄭氏, 진주)
[유래]
진양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도 각각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어 흔히 진양(현재의 진주) 8정이라고
들 일컫는다.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에서 정씨의 분관, 분파가 이루어졌다.
충장공파(忠莊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등은 진양정씨의
4대 봉우리로, 현재의 진양정씨는 이들 후손들이 주류을 형성하고 있다.
본관지 진양은 고려시대에 선조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가문의번영]
고려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 등이 있다.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상신 1명(그의 아들이 정지산(鄭之産)이다),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경세(鄭經世)는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로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성리학 뿐만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鄭起龍)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계 파]
-충장공파(忠莊公派) :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문하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한다.
-공대공파(恭戴公派) : 고려 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 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로 한다.
-첨정공파(僉政公派) : 고려 때 검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한다.
-우곡공파(愚谷公派) :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어사공파(御史公派) :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한다. 정헌(鄭櫶) 계통
-지후공파(祗侯公派) : 고려 때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집성촌]
전라남도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속칭 철야마을.
4백여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덕룡산 기슭 울창한 느티나무 숲속에 철야마을은 묻혀있다. 마을 입구에
지붕을 드리운 만호정(挽湖亨)은 이 마을 유림들이 산수를 노래하며 노닐었던 유서깊은 사교장이다.
마을 뒤 덕룡산은 피비린내나는 의병전적지였다. 나주군 일대의 의병들은 산세가 험한 덕룡산에 숨어
일본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계속했고 밤이면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 폭에 찐감자 등 먹을 것을 감춰
산으로 날랐다고 한다.
[본관지]
-경상남도 진주시
첫댓글 임진왜란때 명장 정기용 장군 / 정기룡 장군 / 룡 자는 한자로는 용 룡자 같은데요.
문진형님! 미안해요.
자료를 복사하여 옮겨오다 보니 미쳐 확인 하지 못했네요...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