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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20일 토요일 가랑비 오락가락
한국어학교를 취재했다. 한국어학교는 멜번 시내에 있는 Wesley collage를 빌려 토요일에만 운영된다. 비가 내리는 데도 축구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을 보며 축구열기를 실감했다. 월드컵이후 한국을 새롭게 알았다는 호주사람들.
교포들 사이에는 뿌리 깊은 피해 의식이 있었다. 특히 시드니에 비해 한국인이 적은 멜번에 심했다. 이유 없이 비하되고,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낮은 베트남이나 동남아 약소국에 비교되곤 할 때 참을 수 없었단다. 개고기나 먹는 야만인...등
월드컵 때 한국처럼 공원이나 광장 등에 모여 응원을 했다.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호주에서는 보기 힘든 대규모의 군중. 열광적인 응원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청소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광화문에서도 그랬고, 전남도청 앞에서도 그랬다. 또 시드니에서도, 멜번에서도... 무슨 폭동이라도 나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던 호주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준결승전이 열린 날, 또 3~4위 전이 열린 날. 운집한 수백만의 군중이 떠나며 쓰레기를 줍고 질서정연하게 해산하는 모습을 보며... 중계를 마치며 호주의 방송국 아나운서는 “감동적이다. 아름답다. 시드니올림픽 때도 볼 수 없었던 감동적인 광경이다. 어디 호주사람이라면 과연 이런 일은 해낼 수 있었을까? 한국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날 밤 우리 교포들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로 이민의 설움으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밤을 새워 씻어 냈다.
1905년에 문을 연 Wesley collage는 6천명의 학생에 3개의 캠퍼스를 가진 학교로 유치원에서부터 12학년까지 있다. Wesley collage의 한 공간을 빌려 토요일만 운영이 되는 한국어학교는 1985년 문을 열었으며, 입양아반과 이민2세, 그리고 한국말을 배우려는 호주인 반등 150여 명이 재학 중이다. 수업이 있는 날은 학생은 물론 학부모까지 학교에 나와 정보를 교환하고,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한민족임을 확인한다.
올해 나이 17세와 20세가 된 입양아를 알게 되었다. 한국을 모르고 살다가 월드컵을 계기로 모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양부모의 도움으로 서울에도 다녀왔단다. 그래서 앞으로 이 곳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의 문화를 익히고 싶단다. 이들과 함께 멜번아리랑을 부르고 싶다.
다음 취재장소로 옮기기 전에 옥션에 들렀다. 집을 경매로 파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집을 소개하고 미리 공고한 시간이 되어 그 집에 관심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경매를 한 것이다. 경매는 10여 분만에 끝이 났다. 최종적으로 중국계인 듯한 동양인과 호주사람의 경쟁. 집은 60만 A$를 부른 호주인에게 낙찰. 마을이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와 승자도 패자도 부둥켜 안고 기쁨과 아쉬움, 서로 축하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니퍼의 집으로 향했다. 제니퍼는 희원이의 친구로 전통적인 영국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날은 제니퍼의 언니가 성인이 되는 날로 생일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제니퍼의 언니를 위해 꽃다발도 준비를 했다. 집안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도시계획담당 공무원인 제니퍼 아버지는 너무 수수하고 꾸밈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근엄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도 부모보다 먼저 식탁에 않고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에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는 법이 없단다. 흔히 양놈들 하면 무식하고 버릇없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전통이 있는 가문에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보다 더 한다고 했다.
제니퍼의 안내로 뒤뜰로 갔다. 30여 평 남짓의 뒤뜰에는 나무들이 잘 단장되고 바닥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간단히 손을 씻을 수 있는 낡은 씽크대(재활용)가 있고 그 아래에는 물통이 있어 한 방울의 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외세면장세면대 옆에는 커다란 프라스틱통이 있었는데... 제니퍼가 아버지와 함께 음식쓰레기를 이 통에 버리고 통 아래에 쌓인 흙(분변토)을 파내어 화단을 가꾸는 것으로 호주에서의 모든 촬영은 끝이 났다.
오후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멜번시내를 구경했다. 멜번에서의 마지막 날. 일부러 전차를 탔다. 호주에서도 유일하게 멜번에 만 이 전차가 운행된다. 교통흐름을 차단하는데다 만년적자로 한때 없어질 위기의 전차가 투표를 거친 끝에 시민들이 세금을 더 내기로 하고 운행되고 있다니 시사하는 바가 크다.
1834년 유럽 사람이 첫발을 내디딘 이후, 1850년대의 골드러시와 더불어 급속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을 이룬 도시. 현재는 330만 명이 거주하는 호주 제2의 도시. 지역별로 이탈리아, 중국, 베트남, 그리스.... 여피족까지.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지만 한국의 거리는 없어 아쉬웠다. 규모 면에서 시드니 만은 못하지만 호주의 수도 캔버라가 탄생한 1927년까지 연방임시수도가 있었기에 시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19세기의 웅장한 블루스톤의 건물과 1980년대 건축 붐과 함께 지어진 현대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사이를 지나는 트램과 마차... 등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유럽분위기를 풍긴다. 도심을 가로 흐르는 야라강을 바라보며, 주변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태양을 가슴으로 받으며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의 자유로움에서 ‘남태평양의 런던’ ‘낭만의 도시’멜번을 마음껏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