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공부합시다.
먼저 고려의 수도 개경에 대해서 이번에 출간된 "지도로 보는 한국사"(수막새, 2004년 7월) 181p에 실린 내용을 먼저 인용을 하겠습니다. (지금 올리는 원고는 초고여서, 편집과 교정을 거친 책의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 고려의 수도 개경
개경은 몽골과의 항쟁 시기에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줄곧 태조 2년(919년) 이후 줄곧 고려의 수도였다. 광종 11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면서, 개경을 황도(皇都)라 칭했던 만큼, 개경의 황궁은 조선시대의 궁궐과는 격이 달랐다.
황궁에는 공식행사가 열리는 정정인 회경전과 천덕전과 업무를 처리하는 편전인 상정전과 중광전, 왕의 침전인 신덕전, 그리고 위봉루와 구정 등의 건물이 있었다. 특히 천덕전은 하늘의 덕이 어린 건물이란 뜻으로 고려가 황제 의식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고려는 불교국가인 만큼 궁궐 건축에서 불교적 색채가 난다. 편전인 중광전은 불교식 이름을 가졌고, 연등회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정전인 회경전에서는 1만 명의 스님을 봉양하는 행사가 열리는 등 궁궐 내에서 정기적인 불교 법회가 개최되었다. 회경전 계단은 불교의 33천과 같이 33개였다. 고려의 왕은 불법의 수호자임을 천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황궁 내에는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는 수문전, 도서관겸 학술토론 장소인 청연각과 보문각, 역대왕의 그림이 모셔진 경령전, 도교와 관련된 오성전과 순복전, 제석신왕과 관련된 내제석원 등이 있었으며, 상춘정, 상화정 등의 휴식을 위한 정자와 후원이 있었다. 정전 앞에 문을 제후는 세 개를 갖는데 비해 천자는 다섯 개를 갖게 된다. 고려의 황궁은 조선 경복궁에 3개 문이 있었던 것과 달리 광화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전문 순으로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궁의 내부 구조나 건물 명칭에서 고려의 황제 의식, 자국 중심주의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음양오행 원리와 불교, 선(仙) 도교적인 원리가 많이 반영되어 궁궐이 지어졌다. 하지만 인종 때 건물명이 개칭될 때에 유교적인 면이 이전보다 강조되고, 또 금나라에 대한 사대관계가 성립되고, 원의 간섭을 받게 됨에 따라, 고려의 황궁은 점차 그 격이 낮아지게 된다.
거란의 침입을 받으면서 고려는 황궁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을 축조하고, 고려의 중앙군을 황궁 주변에 많이 배치하였다. 고려 전성기에는 개경 내에 수많은 거대사찰이 건립되어 있었고, 개경의 바깥 항구인 벽란도를 통해 수은, 향료, 산호 등 다양한 외래 상품들이 들어왔으며, 팔관회가 개최될 때에는 아랍, 송, 일본, 유구 등 다양한 외국인이 내방하는 등 개경은 국제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1231년 무렵 개경에는 약 10만호, 50만 인구가 거주하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도시 인구가 최대 10만 정도임을 고려할 때 개경의 번성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다음은 조선유적유물도감(북한에서 출간)에 실린 개경 황궁 복원도 입니다.
황제의 궁궐 답게 웅장하게 지은 것이 특징입니다.
첫댓글 남북이 통일되면 그 기념으로 만월대의 고려궁궐을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궁궐은 고려도경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네요...별 장식들 다 했다는(예를 들어 솔개꼬리 장식이나 동화(銅花)장식 등등) 그 궁궐과는 조금 거리가 있네요..조선시대의 것을 많이 참고로 한 듯;
모형이니까 말 그대로 간단히.....했겠죠
잘못된 복원은 왜곡이 됩니다.
KBS역사스페셜에서전에 고려궁궐의 기화는 청자로 구웠다던데-그건 진실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