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노동열사 (4월)
50년 전 4월, 노동자와 민중은 썩은 정권을 갈아엎었다.
무료 가판신문을 가져가 파지로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구속되는데, 수 조 원대의 사기범죄를 저지른 이건희가 복권에 이어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현실, 노동자와 민중의 피로 세워온 이 땅의 민주주의는 이 봄에 절망한다.
1948년 4월 3일, 외로운 남녘 제주에서 나라의 분단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이 온 나라를 흔들었다. 북의 농지개혁의 영향을 받아 남에서도 1950년 4월 3일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맞서 고등학생이 시작한 시위는 4월 26일, 이승만 하야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세워냈다. 1969년 4월 4일부터 주민등록증 휴대 의무화 법안을 만들어 국민통제를 시작했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붕괴로 33명의 사망은 개발독재가 가져올 위험성을 예고했음에도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 강행 등 과거의 개발독재의 꿈에 젖어있다. 학교까지 병영화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1971년 4월 6일 서울대 고대 등의 교련결사반대가 시작, 시위가 격화되었다. 4월 27일 박정희가 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4년 4월 3일, 서울 10개 대학 1천명 가두시위와 민청학련은 ‘민중,민주,민주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로 맞섰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에 대해 확정판결 20시간만에 사형, 사법살인이 자행되었다. 같은 해 4월, YH 노조결성 투쟁이, 1976년 4월 3일 동일방직의 투쟁이 일어났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적 사건 동일방직 똥물사건과 1978년 4월부터 시작된 복직투쟁은 80년 5월까지 이어졌다. 1980년 서울의 봄, 4월 24일 사북투쟁이 전개되었다. 1982년 4월 26일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로 62명이 살해되는 등 전두환 정권의 불안정이 노출되었다. 26년만에 타살로 판결이 난 허원근은 1984년 4월 2일 군복무중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민주노조를 파괴했지만 1985년 4월 12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와 노동3권 보장 가두시위 벌어졌다. 1986년 4월 28일, 김세진 이재호 서울대생의 분신과 죽음은 반미운동의 불을 지폈다. 1987년 4월 8일 택시노동자들의 완전월급제, 최저생계 보장을 요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1990년 4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었고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4월 13일, KBS노조 파업은 전국을 흔들었다. 1994년 4월12일, WTO 체제가 출범했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서명이 강행되었다. 1997년 4월17일 전두환 무기, 노태우 17년 선고가 확정되었다.
(조직실/교육국장 박석민)
최윤범 (1988.4.30 28세)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고려피혁 성남공장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본조의 공작으로 성남지부 선거과정에서 어용세력에 패하고, 사측의 해고조치 등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에 동지는 천막농성중 협상과정에서 물품을 빼돌리려는 사측에 맞서 분신 운명하였다.
김윤기 (1989.4.3 25세) 1986년 5.3항쟁으로 구속, 노동현장에 투신, 1988년 덕진양행에 입사한 동지는 1989년 노동조합을 결성,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측의 공장이전을 내세운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에 나선 동지는 교섭중 이전철회를 요구 분신, 운명했다.
최완용 (1989.4.9 25세) 저임금, 장시간노동에도 카톨릭 신자로 주일이면 산업재활원을 방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던 동지는 노동재해로 손가락 4개가 짤린 후 재활기술 배우기를 원했지만 회사와 병원은 이를 거부했다. 동지는 ‘죽으면 중앙병원 영안실에 안치해 달라’는 유서를 남겨 죽어서도 산재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한을 품고 분신 산화해갔다.
강민호 (1990.4.4 25세) 한신대생으로 건국대 애학투련 / 구로구청 부정개표 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동지는 대학 졸업을 포기 노동자의 삶을 살기로 결의하고, 대붕전선에 입사한지 7일만에 야간작업 중 안전시설이 미비한 현장에서 기계에 휘말려 운명했다.
정영상 (1993.4.14 37세) 광주항쟁당시 학내민주화투쟁에도 나섰던 동지는 87년 민주항쟁이후 전교조활동에 적극 나섰다. 87년 ‘안동교사협의회’ 활동,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를 간행하는 등 문학활동으로 전인교육에 나섰다. 89년 전교조결성후 해임되고서도 참교육운동에 헌신도중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김낙성 (1994.4.17 39세) 한국통신에서 개혁모임에 참가하고 1992년 대의원에 피선된 동지는 서울지역 ‘노민추’를 결성 하는 등 노조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선 동지는 1994년 한국통신 노조의 민주화를 눈 앞에 두고 백혈병으로 운명하였다.
김기욱 (2002.3.17 42세) 대우종합기계(전 대우중공업) 입사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하며, 노조 간부로 활동하던 동지는 노동문화운동 영역에서 활동, 인천노동문화연대체 대표로 활동, 전국적인 모법을 세워냈던 동지는 간암으로 투병 중 운명했다.
이성도 (2003.4.19 47세) 대우정밀노조 초대위원장으로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한 동지는 부산지역노조총연합 초대의장으로 전노협을 사수하고, 민주노총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누구보다 앞장서던 동지는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다.
박상준 (2003.4.28 34세) 화물연대 포항지부 조합원이었던 동지는 운송노동자들의 고질적인 노동환경 때문에 당하는 고통, 부채 등 고통당하는 화물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투쟁 승리를 염원하며 음독 운명하였다.
허세욱 (2007.4.15 55세) 봉천동 철거민투쟁으로 사회에 눈을 뜬 동지는 한독택시 조합원으로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노동운동뿐 아니라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참여연대 회원으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평통사 회원으로 효순.미선 두 여중생 투쟁, 평택미군기자확장반대 투쟁 등 사회적으로 제기된 투쟁에 가장 낮은 곳에서 실천한 동지는 한미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그의 삶과 투쟁은 우리 모두에게 큰 경적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