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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 : 45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종로센터 가을수양회에 충만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주 예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주의 이름을 높이기를 기도합니다.
1. 구원과 부르심 :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전 저는 세상풍조와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1967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100일 때부터 경북 상주에서 자랐습니다. 시골에는 달성 서家 집성촌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300년 전 상주에 내려온 달성 서家 삼형제의 후손들이 보이지 않게 경쟁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당내간이 가장 약해졌다며 입신양명하여 집안을 세우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라고 매우 자주 교육하였습니다. 저는 고교 입학 전까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1등 못하면 반드시 책망 받았습니다. 1등 해도 오래 훈계를 들었습니다. 1등 했는데 왜 책망을 듣고 있는 거지? 생각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거드는 어머니는 “더 잘 하라는 말이야” 결론 내려주었습니다. 마음을 억누르던 부모의 억압과 강제가 고교 때부터 느슨해졌습니다. 고교 때부터 저는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여학생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예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저는 여자친구보다 못한 대학에 들어간 것에 정신이 들어 대학교 때부터 다시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하니 마음이 겸손해졌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이 큰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몸에 병이 생겨 깊이 절망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목자를 보내주셔서 누가복음 5장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으로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86년 여름수양회에서 누가복음 5:27 ‘나를 좇으라’ 말씀을 기초로 지난 삶을 회개하였습니다. 창세기 12:2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말씀을 붙잡고 20대 박사의 꿈과 예쁜 여자친구를 내려놓고 캠퍼스 복음역사에 쓰임 받고자 결단하였습니다.
2. 성장과 연단 : 제가 학생 때 천안UBF에는 풀타임 목자, 인턴목자가 없었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 낮에 캠퍼스에 혼자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은혜였습니다. 목자 없는 캠퍼스에서 혼자 피싱하고 혼자 피싱한 양들을 돌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양들을 도서관으로 모아 살폈습니다. 컴컴한 표정 짓던 양이 말씀 주면 문제를 해결하고 밝아졌습니다. 양들은 일주일에 한 번 말씀공부하고 예배참석이 전부가 아니라 아기를 엄마가 한시도 떠나지 않듯이 돌봐야 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였으며 양 돌보는 사람은 개인 생활을 버리고 희생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양들과 함께 하는 것과 말씀의 능력과 목자의 감당할 희생을 배우고 대학을 졸업 하였습니다.
졸업하고 장교시험 합격하였으나 장교 포기하고 사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군에서는 고참이 말씀공부하고 목자가 되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후임들에게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사명 감당하고 섬기는 것은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참을 대하듯 낮은 자세로 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군에서 일대일로 섬긴 김창동 목자는 마산센터로 가서 목자되고 믿음의 결혼하였습니다.
제대 후 직장생활 1년 한 후 대전센터로 가서 목원대 개척 방향을 받았습니다. 목원대는 당시 개척한지 18년 된 캠퍼스였습니다. 자매 몇 사람이 목자로 세움 받았고, 형제 아브라함 한 명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자매목자 세 사람이 서로 말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서로 말하지 않는 세 사람과 마음을 합하고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저에게도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잘잘못 따지기 좋아하는 저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 말 해주는데 마음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성령의 그릇을 이루고자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산만하고 감성 충만한 자매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매우 복음적인 동역역사를 이루게 친히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 대전 다른 모든 캠퍼스 학생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학생들을 목원대에 보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저의 목자생활 요절이 되었습니다.
3. 개척과 확장 : 대전센터 홍보나 목자님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저의 이름을 ‘만장’이라며 딱 하루 ‘서만장 목자’라 부르신 적 있습니다. 파란만장하게 살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은 오픈 게임에 불과하였습니다. 파란만장한 본 게임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2000년 6월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 앞으로 이사 왔습니다. 2002년 11월부터 자립예배 드렸습니다. 개척 시작할 때, 개척에 필요한 물질 0원, 동역자 0명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돈 없고 동역자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개척역사는 신나게 진행되었습니다.
호서대 역사 : 2000년부터 말씀공부 시작한 허준석 형제는 조금 휠 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준석형제가 말씀공부 한 지 5년째 되었을 때, 앞으로 목자님이 권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었을 때, 자고깨고 하는 중에 그의 내면에 심겨진 말씀이 자라난 것이었습니다. 허준석 형제가 하나님 믿고 살겠다고 한 후부터 양들이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양들이 왔다가 쉽게 나갔지만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겠다고 한 후,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5년 만에 목자가 되고 그 후 5년 만에 믿음의 결혼 하고 그 후 5년이 지나 양치는 목자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호서대 출신 이모세 목자는 말씀공부한지 6년 만에 목자가 되고 6년 만에 믿음의 결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서대에 두 가정을 세워 주셨습니다. 호서대학교를 섬기며 겪은 어려움은 학교채플이 강압적이어서 학생들이 자생적인 디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양들이 말씀 공부하면 그 양의 친구들이 자발적 디프로그래머가 되어 반기독교 설득 하였습니다. 좋은 양들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가운데에서 역사하여 생명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나사렛대 역사 : 2005년 나사렛대학교 정보통신학과 겸임교수로 임용 받았습니다. 2008년 대우교수가 되었습니다. 호서대학생들에 비하면 나사렛대학교 학생들은 온순하였습니다. 말씀공부 초청에 잘 응하였고, 감사하며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공부 하러 오는 학생들이 많아서 한 명 씩 일대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양들이 많이 왔습니다. 이때 말씀 공부한 학생들이 말씀의 은혜받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숙사에 돌아가 네이버에 ‘UBF’ 검색하는 일이었습니다. 네이버의 악성글 때문에 양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네이버 악성글 문제를 본부에 보고 하였지만 당시 본부에서 그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서 좋은 양들이 남았습니다. 김병용 목자, 김아름 목자, 이폴린 목자가 열매로 남았습니다. 나사렛대에서 2009년을 끝으로 쫓겨났습니다. 나사렛대 개척에서 어려움은 교수들의 공격이었습니다. 평신도가 왜 학생들을 성경공부 시키는가? 평신도가 왜 자기 집에서 예배를 인도하는가? 문제 삼았습니다. 나사렛대학교에서 쫓겨난 것은 은혜였습니다. 나사렛대에서 학생들 도운 것을 다른 학교에서 알았습니다. 나사렛대에서 한 것처럼 자기학교 와서 해달라고 극동대학교와 남서울대학교에서 인정해주었습니다. 극동대는 천안에서 너무 멀어 학기 중 학생들을 방학 때 천안에 데려와서 도왔습니다. 친구가 이사로 근무하는 건설회사 미분양분 아파트를 임대하여 장막생활로 도왔습니다. 극동대에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학생들이 목자 없는 양이어서 마음 아팠습니다. 한 학생은 극동대 학생중에서 상당히 똑똑했는데, 슬픈 얼굴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삼성의 부장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모임하고 오면 부끄러운 자식이라고 골프채로 때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 위하여 따로 방을 얻어주어야 했습니다. 이 학생이 저도 좀 천안에 데려가 달라고 하는데, 이미 장막방에 학생들이 다 차서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 학생들 중에서 김태호 형제가 아산 삼성전자에서 일하며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저는 그를 이마태 목자에게 붙여주었습니다.
남서울대/공주대 역사 : 극동대 교수들은 저의 학생지도를 인정해주었습니다. 나사렛대에서는 무엇을 열심히 할수록 시비 걸었지만, 극동대 교수들은 열 명의 교수가 제가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각 교수실에 학생들을 두세 명씩 데리고 지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과에서는 다른 학교 가지 말고 극동대에서 정년하라고 추천해주었습니다. 극동대 이사장, 총장 모두 감옥에 가서 극동대는 학교가 망해갔습니다. 2012년 남서울대에 연구교수로 왔습니다. 남서울대에서는 원로교수들이 복음 역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원로교수들은 저를 전임교수로 추천해주었습니다. 남서울대에서는 마음껏 양치고 마음껏 논문 쓰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얻었습니다. 사용할 방을 세 개나 주었습니다. 하지만 남서울대에서는 양들을 많이 얻기만 할 뿐 목자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고난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제센터에서 이마태 목자를 교수목자로 남서울대에 보내주셨습니다. 남서울대는 지금 이마태 목자가 캠퍼스 교수목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남서울대에서 제가 겪은 어려움은 인사상 문제였습니다. 어머니가 총장, 아들이 부총장었는데, 원로교수들의 지원받는 저를 설립자 아들 젊은 부총장이 나쁘게 보고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남서울대 선임 교수 한 분이 위로하고자 공주대 천안캠퍼스 교수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남서울대에 있으며 공주대에는 몇 시간 강의하러 나갔습니다. 공주대 학생들은 말씀을 잘 받았습니다. 2016년 공주대 학생들 20명이 말씀공부하고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최아브라함 목자가 남았습니다. 공주대 천안캠퍼스는 공대만 있습니다. 공주대학교에서는 계승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아브라함 목자는 West LA에 유학생선교사로 나가 그곳 Emily Miller목자와 약혼하였습니다. 정범채 목자가 목자로 세움 받았고 이후 송영기, 한현규 형제가 자라났습니다. 올해도 전기공학과 형제 세 사람이 새로 왔습니다.
2016년 10월 남서울대학교에서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디스플레이 공학과로 옮겼습니다. 저는 모교에 은사였던 교수님과 나란히 Faculty member로 학과 교수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감격적이었습니다. 저는 파란만장하게 지냈습니다. 미움 받고 쫓겨나고 빼앗기는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참하게 쫓겨났던 저를 아산, 천안 13개 대학의 교수 중에서 영향력 있는 교수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학생 취업실적, 1년 최대 13편, 보통 5편 이상 논문 발표하게 해주셨습니다. 단국대에 와서는 연구 기획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100억~200억대 연구과제를 기획하고,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를 다니며 연구과제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2018년 광주3부 위선화 목자님이 조카를 소개해주어 한국기술교육대학교(코리아텍)에 학생양을 얻었습니다. 2019년에는 저의 셋째 서바울과 위선화목자 가정 장남 서아브라함이 신입생으로 코리아텍에 입학하였습니다. 이재승 목자가 학생목자로 세움 받았으며, 공주대 졸업생들을 코리아텍 대학원에 입학하게 하여 코리아텍이 학생역사 중심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이웃에 살았던 박지현 자매가 전문대를 거쳐 2019년 순천향대학교에 편입하고 캠퍼스 목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안암센터 이창무 목자 첫째 딸이 순천향의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순천향대에서도 캠퍼스 학생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산센터로 하여금 말씀 전하게 하신 캠퍼스는 여럿입니다. 호서대학교에는 연희센터 출신 장선준목자가 교수목자로 와서 학부생들 일대일 말씀공부 해주고 있고 김병용 목자가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전기공학과 박사무엘 형제가 말씀공부하고 센터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나사렛대학교에는 서사라 목자가 외래강사로 나가며 양들을 치고 있습니다. 김아름 목자 믿음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이폴린 목자가 있습니다. 남서울대학교에는 이마태 목자가 교수목자로 임상병리과에서 학생들을 돕고 있으며, 제가 단국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소속 교수로 있으면서 공주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일주일에 한 번 강의 나가며 양들을 초청하고 돕고 있습니다. 공주대학교에서 새로운 양들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세 명의 새로운 학생들을 보내주셔서 학생 트레이닝 센터에 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코리아텍은 학생 목자 두 사람이 6명의 학생 중심 기도모임 이루고 있으며 순천향대학교에는 박지현 목자와 이예진 자매를 도우러 목자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캠퍼스마다 역사의 주역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으며 센터 목자들은 노는 사람 없이 열심히 학생 양들을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이름이 다윗이고 만 25세로 현재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둘째는 은샘이 만 22세, 뉴저지에서 유학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바울이 만 20세 코리아텍 전자공학과 2학년 재학 중입니다. 저는 물질적으로 아이들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호서대학교 아산 캠퍼스 앞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은 태학산과 배방산 사이 골짜기로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봄에 꽃이 늦게 피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여기서 개구리 잡고 거미 잡고 개미굴 파며 자랐습니다. 대학교 앞 원룸촌 골목과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가 아이들 놀이터였습니다. 캠퍼스 옆 논둑 밭둑에서 놀며 자랐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따라 아산에 왔지만, 아이들은 자기들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사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좋은 선생님들을 보내주셔서 재미있고 유익한 학교생활 하도록 은혜 주셨습니다. 아이들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친히 돌보시고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이 나옵니다. 어떤 선생님은 이 아이는 전국에서 노는 아이라 소망 주셨으며, 그분 말씀대로 다윗은 고3 때 모의고사 전국 수석을 한 번 하였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어떻게 커나갈지 오래 지켜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계속 사고치고 사춘기 방황하는 것을 전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학교에서 다 감당해주었습니다. 대학 갈 때 담임선생님 보다 먼저 추천서 써주신 분도 있었으며, 자식처럼 진심으로 돌봐주신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의 아내 서사라 목자는 몸무게가 저의 절반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위한 사명에 대하여 아니오 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헌신하였습니다. 26년 결혼생활동안 우리 식구끼리 살았던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가정을 오픈하였으며, 돈 없어도 양들을 영접하고 먹였습니다. 양들 먹이며 세 아이 키우며 직장 나갔고, 대학원 다녀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섬기는 것이라면 자기를 돌보지 않고 섬겼습니다. 헌신적인 동역자 덕분에 저는 거침없이 목자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아산개척을 시작하며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였으나, 가진 것 없어서 역사 섬길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해주셔서 7개 캠퍼스에 목자들이 세움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후배들에게로 계승되고 확장하는 역사가 진행하는 중입니다. 각 목자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에 감동받으며 믿음이 자라고 있으며, 순종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저는 경상도 시골 귀남이로 자라 예수님 믿기 전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고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저는 죄 지으며 살다가 흑암가운데 멸망할 죄인이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빛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으로 저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으며, 인생의 방향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발견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고자 주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죄와 허물이 많고 실수하며 지냈습니다. 사람의 공격을 받았으며 사람을 통하여 주는 고난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고난은 옛날 대전UBF에서 출교 당한 것이었습니다. 징계는 본래 나쁜 짓을 실제로 행하였어야 하는 것이고 나쁜 행위로 인하여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였어야 합니다. 저는 행한 것 없고 피해도 발생한 바 없지만, 앞으로 나쁜 짓 할 것이며 피해를 입힐 것이라며 출교 처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CMI 분열사태가 터지기 직전 저를 미리 구별해주신 은혜였습니다. 저는 지방 중심으로 일어난 분열과 비방에 참여하지 않고 UBF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산개척을 섬기며 고립된 채 지냈습니다. 억울함을 풀어줄 줄 알았던 분이 오히려 이 문제를 20년간 말하고 다녔고 한국대표, 세계대표에게까지 허위사실을 일렀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의 도움 없이 부활의 주 예수님만 바라보며 캠퍼스 역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저의 고난은 주와 복음을 위한 것이며 양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자가 고난 받을수록 양들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을 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높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그런 믿음과 비전을 갖게 도와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비전대로 은혜를 베푸셔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2005년부터 캠퍼스에 교수로 세워주셨습니다. 대학 내에서는 하는 일 많고 외부에서는 문제해결 잘 해주는 지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천안의 주류 인사들에게 여러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전문가로 세워주셨습니다.
고난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 역사를 저의 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섬기는 것이며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저는 파란만장한 목자 행로를 지나오며 주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저는 저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예수님만이 모든 역사의 주인 되시고 예수님만이 양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아산센터는 학생들이 매년 새로 오고 있고 목자들은 노는 사람 없이 학생들을 일대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자들이 양들을 세밀하게 살필 줄 알아야하고 제자양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 목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일대일 해주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자립적인 말씀의 종이자 제자양성가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목자들이 돕는 양들이 다시 목자가 되고 그들이 다시 목자가 되어 양들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젊은 청년 목자들이 믿음이 자라나 지금 학사 목자들처럼 직장 일을 감당하며 개인 신앙생활과 양들 돌보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주권에 의하여 아산센터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목자들보다 제가 더 많이 양들을 데려오고 양들을 돌보며 목자들과 매일 마음 합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산센터는 그동안 미국 덴버에 최요셉 리브가 선교사를 취업차 파송하였으며, West LA에 최아브라함 선교사를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일본 도쿄에 서제임스 선교사를 취업차 파송하였으며, 뉴저지에는 딸 서은샘이 유학생으로 나갔습니다. 이재승 목자가 시애틀에 다녀왔고 정범채 목자는 톨레도에 다녀왔습니다. 송영기 한현규 형제들이 도쿄와 홍콩을 다녀왔는데, 이재승, 정범채 목자는 석사 마친 후 미국으로 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송영기 형제는 일본이 체질인 것 같다며 일본에 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아산센터가 더욱 분발하여 아산과 천안 캠퍼스와 세계선교 위하여 더욱 충성하며 힘껏 말씀전하는 은혜 입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은혜를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한마디 : “도리어 섬기려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