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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직설 序 (2)
華嚴에 云하사대
화엄 운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면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라.
지일체법 즉심자성 성취혜신 불유타오
是故로 佛祖가 不令人으로 泥着文字하고 見自本心케하니
시고 불조 불영인 니착문자 견자본심
佛祖가 所以로 德山은 入門便棒 하시고
불조 소이 덕산 입문편방
只要休歇하고 見自本心이라.
지요휴흘 견자본심
臨濟는 入門便喝이야 已是 탄頭太過니 何更立語言哉리요.
임제 입문편할 이시 탄두태과 하용입어언어
或이 曰 然則諸祖出世가 無益群生耶잇가.
혹 왈 연칙제조출세 무익군생야
郡生(군생)! 여러 생령들
그러니까 우리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 군생들에게, 군생! 우리 중생이라 그러지요. 중생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그래서 무리(群)! 중생이라는 생(生)자입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일컬을 때 군생이라 그래요. 우리 여러 중생들! 이 많고 많은 중생들에게 그러면은 무익하다는 말입니까? 아무 이익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저기 태허공처럼 그런 도(道) 자리는 그렇게 탁 트여서 드넓어 가지고 아무 시비거리가 안 된다고 한다면은 그러면은 우리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이익이 없겠네요?
부처님이 천 명, 만 명이 이 세상에 오고. 조사 스님들이 천 명 만 명이 설사 출몰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있어요. 그 다음에 대답입니다. 이제 문답이 일문 또 이문에 두 번째 답이죠.
曰 佛祖出頭에 無法與人이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
왈 불조출두 무법여인 지요중생 자견본성
거기까지 중요한 말입니다.
佛祖出頭(불조출두)에
불(佛)! 저 앞에 부처라고 써 놓았지요. 부처님!
그리고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조사 스님들!
이런 사람들이 出頭(출두)! 머리를 냄에,
뭔 말이냐? 태어난다 이말 이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 머리를 쳐들고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佛祖(불조)가 이 세상에 나오신 것에 대해서
無法與人(무법여인)이라,
법으로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예요.
與자는 줄 여(與)자입니다.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는 게 없어. 부처님이 법을 전했다. 누구에게?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은 아란존자에게 전하고 법을 상제했다 그러지만 주는 것이 아니 예요. 그저 그 사람이 법을 제대로 알았나 시험해보고 인가 할 뿐이 예요.
아는 것을 주기로 할 것 같으면은 선생은 학생들에게 골고루 아는 것 다 주지 그럼,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줘요. 주는 것이 아니 예요. 가르쳐 놓고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검증 할 뿐이예요.
실컷 설명을 해도 제대로 이해 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것이고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주는 것이 아니에요. 주는 것 같으면 똑 같이 나누어 주면 그 뿐이죠,
지식도 하물며 그런데 도(道)야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진리자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는 것은 없고, 뭐냐?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
지요중생 자견본성
밑줄 쫙 입니다. 여기서 공부 잘하면 나중에 태어나서 부모 속 안 썩혀요. 최소한도 태어나서 부모 속 안 썩히는 그런 불자는 되어야지요. 그러니까 죽는 순간까지 평생 공부해야 되는 거예요. 평생 공부 안 하면, 중간에 쉬어버리면 다음에 태어 나가지고 또 부모 속 썩히는 그런 자식이 된다고요.
只要衆生(지요중생)으로
다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중생으로 하여금, 중생에게
自見本性(자견본성)이니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는 거예요.
自見本性(자견본성)
그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기 본성을 보도록 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법을 주는 것이 아니 예요.
뭐 부처님 앞에 가서. 관세음보살 앞에 가서. 지장보살 앞에 가서 아무리 목이 터져라고 염불해도, 불교는 타력인 것 같지 만은 전부 자력으로! 끝내는 자력으로 돌아갑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거기서 영험을 얻는 것이 많이 없지. 없지 만은 누가 쭉쭉 걸어 나와서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가 체득하고 자기가 기도한 힘으로 얻는 거예요. 그래서
只要衆生(지요중생)으로
只要(지요)! 다만 중요한 것은 중생으로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부처님이 그렇고 조사가 그래. 부처님이나 조사님이나 그 얼마나 많고 많은 조사 스님들이 있습니까? 그 부처님 이후에 얼마나 많은 그런 부처님 버금가는 그런 조사 스님들이 있었지마는, 그 사람들이 전부 뭐야?
우리 미혹한 중생들에게 중생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지 다른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 그 말 한마디가 아주 제일 중요한 말이네요.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
지요중생 자견본성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 낳아 가지고 키우는 것도 결국은 뭐예요? 재산 물려줘 가지고 그 돈으로 먹고 사는 경우도 있지 만은, 대개가 키워서 공부 시켜놓으면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먹고 살게 하는 거예요. 자기 힘으로 벌어서 자기가 먹고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자견본성 이예요. 우리 세속적으로 이끌어 가서 이야기 하면은 바로 그 말 이예요.
自見本性(자견본성)!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한다. 스스로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먹고 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키우고 교육시키는 것이지, 자식 죽을 때 까지 우리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나요 여러분들! 그것은 안돼요. 수 억을 물려줘도 하루 아침에 날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부모가 먼저 죽으면은 죽은 뒤에 자식이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 어떻게 책임져요?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가 각자 알아서 해야 돼요.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자기일 자기가 알아서 해야 돼요.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불교! 불교는 더 말할 것도 없죠.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관세음보살에게 기도 하지만은, 결국은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그런 힘을 거기서 키워 오는 거예요. 그 힘도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키워 가는 거예요. 어떤 강한 원력과 어떤 기도의 힘으로써 자기가 어떤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그런 힘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
지요중생 자견본성
부처님과 조사가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無法與人(무법여인)이라.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는 것이 없고
다만 중생 자기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는 것,
이 조사 스님들은요. 정말 피나게 공부하고 부처님도 역시 그렇지 만은 말투가 앞 뒤 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남의 사정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소리 하면은 듣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자기 가슴에 담겨있는 말씀 그냥 그대로 쏟아 부어버립니다.
조사 스님들은 그래 가지고 마음에 드는 사람은 거기에 정말 눈이 열리고, 그렇지 못한 인연 없는 사람은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다른 집에 한번 가보라는 그런 식이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활과 같이 말씀하신다. 활은 이렇게 굽잖아요. 그리고 조사 스님들은 활줄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랬습니다.
부처님은 경(經)과 율(律) 같은 데서 보면은 뭐 잔소리가 많아요. 온갖 설명도 많고. 온갖 비유도 많고. 있지도 않은 옛날 내가 과거생애 어떻게 어떻게 했노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지어내서 이야기 하기도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 중생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조사 스님들은 그것이 아니예요. 앞 뒤 가리지 않고 콱, 그냥 바로 쏟아 부어버려요,
그래서 조사 스님들 말씀 그대로라면은 일생에 한 개나 반 개 건지면 다행이고, 못 건지면 말고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표현이 보십시오,
曰 佛祖出頭에 無法與人이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다.
왈 불조출두 무법여인 지요중생 자견본성
그래 놓고는 이것은 내 소리가 아니고 화엄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거예요. 순전히 자기 말만 당토 안 하면 경전에 없는 소리를 하면은 곤란하니까, 화엄경에도 이와 같은 말을 했으니까 너희들 눈이 있으면 보아라.
華嚴(화엄)에 云하사대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면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라.
지일체법 즉심자성 성취혜신 불유타오
거기까지 예요, 거기까지 화엄경 말인데 참 멋진 말입니다. 그 방대한 화엄경 속에서 그야말로 아주 알맹이 중에 알맹이가 되는 그 말을 착 이렇게 이끌어다가, 이 보조스님을 역사적으로 "화엄학자다." 라고 "화엄경의 대가다." 라고 이런 표현을 하는 데는 이런 연유도 많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쭉 이야기 해 오다가 첫 대목에 그냥 화엄경을 인용 하지않습니까?
知一切法(지일체법)이
지(知)! 안다 이 말이 예요.
뭘 아는고 하면은 일체 법이
卽心自性(즉심자성)
우리들 현재 그 마음! 그 자성인줄 알 것 같으면은 일체 법은 뭐라고 했지요? 나와 그리고 이 드넓은 우주 공간 저 끝에 이르기 까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또 그 안에서 흘러가는 모든 시간! 또 거기서 이루어 지는 온갖 변화들!
봄이 오고 겨울이 가고 또 여름이 오고 봄이 가고 또 다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이런 계절의 변화! 또 하루과정에서 볼 것 같으면 해가 뜨고. 한나절이 되고 그 다음에 해가 지고. 또 밤이 오고. 또 다음에 또 해가 뜨고, 또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어떤 생활!
또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그런 일들! 밭에 가서 일하는 사람. 공장에서 무슨 일하는 이들. 사무실에서 사무하는 사람들. 시장에서 무슨 물건을 거래하는 일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일체 법이라고 하는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은 이것이 결국은 무엇인고 하면은, 일체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인 줄을 알 것 같으면은
卽心自性(즉심자성) 이라는 말이
즉심이란 현재의 그 마음 이예요. 그 마음이 자성자리다. 자성!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성품이다. 그것을 알 것 같으면은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라.
성취혜신 불유타오
중요한 말입니다.
慧身(혜신)! 지혜의 몸입니다. 지혜의 몸은 뭐죠? 불신 이예요. 부처의 몸이 온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습니다마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일체지자다. 일체지혜를 성취한 사람이다 그런 표현을 해요.
그러면
慧身(혜신)을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부처의 몸을 성취하되, 어떻게?
不由他悟(불유타오)야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서 깨닫지 않는다. 그러면 뭐야? 자기 스스로 깨닫고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주어서 알고 다른 사람이 깨닫게 해서 깨닫고 그것이 아니다 이거 예요. 스스로 깨닫는 거죠. 不由他悟(불유타오) 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꼭 알아야 돼요.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돈벌이를 해도 마찬가지예요. 남 핑게 대지 말라고요. 전부 자기로 말미암아서. 남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럼 뭐냐? 전부가 자기 자신 속에 다 있다.
불교는 더 그렇습니다. 장사를 한다든지 무슨 사업을 할 때도 사실은 근본적으로 따지면은 자기가 큰 원인이 되고, 그 여파 다른 주변 다른 사람이라든지. 세상에 어떤 여러 가지 흐름이라든지.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관계는 있지마는, 더 깊은 원인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 이렇게 이해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앞에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이 이 세상에 와 가지고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중생들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화엄경에 말했듯이 一切法(일체법)이 곧 내 마음이고, 그리고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데 남으로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이 증거문을 갖다가 앞의 당신의 이야기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우리가 공부하는 책이 진심직설이니까 우리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참 마음! 그런 참 마음 하고 그런 거짓 마음! 반대로 망심이 있을 수가 있어요. 망심(妄心)! 여기는 진심(眞心)이라고 그랬으니까 진심의 반대는 망심이예요. 거짓 망(妄)자! 우리가 보통 말할 때도 참 마음과 거짓 마음을 말할 수가 있지요.
“진심은 무엇이냐? 도대체 진실한 마음이 무엇이냐?” 그러는데 여기에서 진심은 그 진심보다도 더 깊은 이면에 있는 마음을 진심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반대로 망심이라고 하면은 우리가 지금 생각을 일으키는 모든 의식 작용이 전부 망심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속이는 생각이 들었던지. 아니면은 우선 우리가 말하는 진실한 말이 되었던지 간에 전부 그것은 망심에 해당 되고. 여기서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진심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되겠지마는, 정말 그 근본이 되는 그런 마음입니다.
是故(시고)로 이러한 까닭에
佛祖가 不令人으로 泥着文字하고
불조가 불영인 니착문자
사람으로 하여금 문자에 니착하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문자에 니착하지 않고,
니착이란 진흙 니(泥)자, 집착할 착(着)자입니다.
진흙에 빠지듯이, 그러니까
말이라든지 문자 경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경전의 그 어떤 이론 속에 우리가 빠져버릴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이 그런 많은 말씀들을 해 놓았지 만은 그런 많은 말씀 속에 빠지지 않게 하고,
只要(지요) 다만 중요시 여기는 것은 뭐냐?
休歇(휴흘)
망심을 쉬어, 망상을 쉬어 버리는 것입니다.
쉴 휴(休), 쉴 흘(歇)자 입니다.
둘 다 쉬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망상으로 사실은 생활해 가는데, 그 망상을 잠잠하게 이렇게 가라앉히면은 그대로 진심이 드러나죠. 지금 섣불리 그런 이야기를 할 단계는 아니지마는, 우선 조금만 이야기를 한다면은 들떠 있는 이런 망상을 쉬면은 진심이 드러나니까. 그래서,
지요휴흘(只要休歇)이라.
쉬면, 다만 휴흘! 그러니까 말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이것을 너무 취중 할것이 아니 예요. 말을 가지고 우리가 의사전달을 물론 합니다. 그렇지 만은 말에 너무 떨어져버리면은 그것은 또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佛祖(불조)가 不令人(불영인)으로 泥着文字(니착문자) 하고 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문자에 따지지않게 하고, 따지거나 집착하지 않게 하고 다만 요컨대 무엇을 하느냐 하면은 쉬어버린다.
망심을 쉬고 망상을 쉬어서
見自本心(견자본심)케하시니
자기의 본심을 보게 한다.
견자본심! 자기의 본심을 보게 하시니,
자, 여기에 재미있는 대목이예요.
그런 佛祖(불조)가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이 말이나 언어문자 거기에 그냥 현혹 될 까봐, 그것으로 설명을 많이 하면 거기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거기에 떨어져 있어요. 사실은 솔직하게 나부터라도, 그런데 조사 스님들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의 본심을 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십시오,
所以로 德山은 入門便棒하시고
소이 덕산 입문편방
所以(소이)로 그래서
德山(덕산)은 덕산 스님입니다. 아주 훌륭하신 스님이지요. 이 분은 옛날에 금강경을 굉장히 깊이 공부를 해 가지고, 세상에 내 같이 똑똑한 사람이 있나 하고, 아주 크게 자랑을 하고 돌아 다니다가 어떤 노파를 만나 가지고,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하는 그 말에 어느 마음에 점을 치겠습니까? 라고 하는 그 질문에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떡도 못 사먹고 그냥 완전히 망신을 하고는, 그 주변에 용담스님을 찾아 가 가지고 마음을 확철히 깨달았는데, 참 천지를 뒤덮을 만한 기개가 넘치는 그런 분이 였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학문을 그렇게 깊이 해 가지고 누구도 당할 자가 없는 그런 대 학자였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느냐?
入門便棒(입문편방)이라.
덕산은 입문편방이라!
入門(입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이 덕산스님 있는데 불교를 물으러 오기만 하면은, 다짜고짜 물을 떠 다 주러 왔든지. 불교를 물으러 왔든지. 도를 물으러 왔든지 다짜고짜 그냥 방망이로 갔다가 후려쳤어요. 사정없이 머리고. 몸뚱이고. 팔이 부러지든지. 어디 머리가 깨어지든지 그까지 것 생각하지를 않고,
便棒(편방) 이라고 하는 말은
문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그냥 즉시 방망이로 갔다 후려쳤다. 그래서 덕산방(德山棒)! 그래요. 방은 큰 몽둥이 방(棒)자입니다. 이론에 그렇게 밝은 분인데도 막론하고
그 이론을 가지고 말로 설명을 하면은 사람들이 말에 떨어지거든요. 말에 집착하고 말 속에 헤매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그냥 다짜고짜로 방망이를 가지고 사정없이 그냥 후려치는 거죠. 그게 뭐예요? 도대체 왜 그래요? 그 앞에 있잖아요.
只要休歇하고 見自本心이라.
지요휴흘 견자본심
다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休歇(휴흘)! 쉬어라.
망심을 쉬어버리고 자기의 본심을 보게 하는 거야, 우리도 지금 말로서 이러고 저러고 의사전달을 하고 있지 만은, 말로 하다가 보면은 자꾸 생각만 자꾸 발전하고 생각만 자꾸 많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해라. 화두를 들어라 하는 거예요. 결국은 우리 본성을 보려면은 기도를 아주 많이 해서 마음 집중을 하든지 화두를 들어서 마음을 집중하든지 그렇게 해야 그것이 사실은 제대로 자기 공부가 되기는 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덕산스님 같은 이들은 그저 다짜고짜 무조건 방망이로 후려쳐 가지고, 망상을 쉬고 자기의 본심을 보여주는 그런 소식입니다. 참 좋은 방법이죠.
그리고 또 임제스님은 어떻게 해요?
臨濟는 入門便喝이야.
임제 입문편할
임제스님의 임제록(臨濟錄) 공부할 때 보면은 할이 여러 번 나와요. 하도 그냥 사정없이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고함치는 것이 할인데, 이것을 세속적인 우리 말로 ‘갈’이라 그러죠. 갈! 불교에서는 "할"이라 그렇게 해요.
입문! 불교를 물으러 문 앞에 막 들어 오기만 하면은 곧 바로 큰 소리로 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삼일 동안 귀가 멀었느니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얼마나 고함을 세게 쳤는지 삼일간 귀가 멍멍해서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참 자비롭고 포용력이 뛰어난 반면에, 우리 조사 스님들은 그런 분은 부처님 한 분이면 되었고, 나는 내식으로 할란다 해 가지고, 그냥 인정사정 안보고 자기식대로 그렇게 교화를 했습니다.
포대화상 같은 이들은 평생 거지같이 돌아다니면서 웃음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있고, 임제스님 같은 이는 사정없이 고함을 냅다 질렀어요. 이것 역시 다 목적이 그것입니다.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의 방과 할은 왜 했느냐? 이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이, 망상을 쉬고 자기의 본심을 보게 하는 소식이다. 밑에다 그렇게 해놓아요. 이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이 방과 할은 왜 했느냐? "망상을 쉬고 본심을 보게 하는 소식이다." 그렇게 해 놓으면 거의 80점 짜리 답은 됩니다. 100점 짜리는 다른 소식이 나와야죠. 다시 할을 하든지 방망이를 후려치든지 그렇게 해야죠.
已是(이시) 탄頭太過(탄두태과)니
已是(이시) 이미
탄頭太過라 何更立語言哉리요
탄두태과 하용입언어제
탄두! 이미 머리를 찾는 일이
太過(태과)라.
너무 지나쳤거니
어찌 다시 언어를 세우리요.
탄頭太過(탄두태과)라,
머리를 찾는 일이 너무 지나쳤다.
뭐가 그렇다고? "방"하고 "할"이 그렇습니다.
얼마나 간단명료 합니까?
방망이로 후려치는 것,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면은 장황하게 천수경이 어떻느니. 반야심경이 어떻느니. 오온이 어떻느니. 육근이 어떻느니. 무슨 사성제가 어떻고 그런 질문 안하고 그저 그런 것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할을 하든지 방을 후려쳤는데, 가장 간단명료한 방법이요. 불교를 가르켜 주는 방법으로서는 제일 간단명료한 방법입니다.
한번씩 집에 가서 써 먹으세요. 그 동안 불교 공부를 했다는데 어디 불교 한번 가르켜 달라고 하거든, “오냐~ 잘됐다 하고 그냥 방망이로 가지고 후려 한번 쳐~ ,”(ㅎㅎㅎ~) 그냥 자신 있으면 미쳤다 소리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거예요. 그러면 반응이 어떻겠어요? 상대가 화를 내든지 어이없어 하든지 바로 그거예요.
화를 낼 줄 알고 어이없어 할 줄 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있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거예요 . 또 가르쳐주는 사람은 방망이를 가지고 후려치는 그 자리에서 떠나있는 것이 아니 예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떠나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가장 간단명료 하지마는 그것도 이미 너무 지나친 친절이다 이 말 이예요.
탄頭太過(탄두태과)라는 말은 너무 지나친 친절이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아이고 천수경이 어떻느니. 오늘 가서 보조어록에 진심직설은 뭐라고 했느니. 임제록에 뭐라고 했느니. 그런 너절한 소리를 해? 그것은 더 엉터리다 이 말 이예요. 그것은 더 당치 않는 소리다. 여기 진심을 가르쳐 주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그 진심!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알짜배기 마음!
그것을 이해 해야 되는가? 그것을 여기서 근본이라고 했으니까, 어쨌거나 그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그것을 아는 것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입장에 있어서는 방망이로 후려치고 고함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것도 너무 지나쳤다 그랬어요. 왜냐? 그것도 사실은 한걸음 늦은 것입니다.
첫댓글 自見本性......감사 합니다._()()()_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고맙습니다..無影樹님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니... 무영수님 ! 고맙습니다. _()()()_
무영수님의 수고로 저는 너무 행복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_()()()_
只要衆生 으로 自見本性이니... 감사드립니다... _()()()_
_()()()_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다. 無影樹님, 고맙습니다 _()()()_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다.... 다만 중요한것은 중생 스스로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_()()()_
只要衆生(지요중생) 으로 自見本性(자견본성)이니...고맙습니다. _()()()_
只要衆生(지요중생) 으로 自見本性(자견본성)이니...고맙습니다._()()()_
_()()()_ 감사합니다.
自見本性 _()()()_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알짜배기 마음! _()()()_ 감사합니다.^^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이라. 無影樹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저를 살째기 톡톡 깨워서 여기까지 데려오심에 감사감사드립니다^^*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의 방과 할은 왜 했느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망상을 쉬고 자기의 본심을 보게 하는 소식이다...![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0.gif)
_![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0.gif)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스님!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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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見本性(자견본성)-부처님에게 기도하고 관세음보살에게 기도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그런 힘을 거기서 키워 오는 것이다, 그 힘도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키워 가는 것이다. _()_()_()_
항상 하는 고민을 보면 공부를 해야되는데 나가놀고싶고 이 두 마음의 충돌이 항상있는거 같습니다. 어떤게 제 본심일지~ㅋ 자견본성 진심과 망심 더욱 생각해 봐야될거 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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只要衆生 自見本性 이라 ....무영수님 감사 드립니다 _()()()_ ^^ ^^ ^^
지요중생 자견본성이라.....무영수님 녹취덕분에 공부가 솔솔잘됩니다 감사 드려요 _()()()_
無影樹님 녹취올려주셔서 고맙구 감사 드립니다,,![愛](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exticon6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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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只要衆生으로 自見本性...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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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_()()()_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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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감사드립니다... 탄頭太過(탄두태과) --> 探頭太過(탐두태과)
본성을 보려면은 기도를 아주 많이 해서 마음 집중을 하든지 화두를 들어서 마음을 집중해라......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이 방과 할은 " 망상을 쉬고 본심을 보게 하는 소식이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不由他悟 ... _()_
眞心直說 - 無比스님 眞心直說 法門 錄取 第02講 (序文)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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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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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근본마음 찾기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요휴흘 견자본심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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