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순교자 박의흠 전도사의 맏딸로서 고 김준채 목사님의 부인이신 박신자 사모님의 아버님에 대한 간증과 기타 몇몇 분들의 증언과 교회사 자료를 모아서 고 정찬성 목사님이 집필한 전기(시대를 이긴 사람들 박의흠 전도사 편)를 요약한 것임.
1. 예수 믿게 된 동기
박의흠 전도사는 1901년 11월 13일(음력)에 평북 의주군 고관면 용화동에서 대지주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943년 43세에 순교하셨다.
믿기 전에는 술에 가출에 난봉꾼으로 부모 속도 많이 썩였다.
그런데 그의 나이 30세 되던 1930년. 형수님이 큰 병에 걸려 약도 굿도 많이 해도 도무지 낫지 않던 중 의흠씨의 형님이 아내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가까운 토교교회 김성심 권사님의 소문을 듣고 모셔다가 김권사님의 말씀대로 집안 우상 청산하고 온 가족이 예수부터 믿고 권사님을 따라 찬송과 기도와 통회의 가정부흥이 일어나면서 앓던 형수도 차츰 낫게 되는 것을 보고 온 식구들이 다 함께 기뻐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 형수님이 뜻밖에도 실성한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지금까지 나타난 일이 없었던 딴 짓을 하는 것이었다. 식구들은 다시 근심으로 가득 찼다. 그 형수님은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의흠씨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면서,
"아니! 시동생은 예수 믿으려고 여기에 앉았어요? 여기가 어떤 자린데요. 그런데 시동생 저런 사람은 무엇 할려고 여기에 앉았어요."
하고 사람을 여간 괄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의흠씨는,
"야! 이거 참 마귀가 정말 있기는 있는가 보다. 내가 죄를 제일 많이 지었으니 나를 이렇게 괄시를 하는 모양인데 내가 이제부터 예수를 한 번 잘 믿고 이 괄시를 면해야 되겠다."
하고는 그 때부터 잘 믿어 보기로 굳게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그 권사님에게 바싹 달라붙어서 물어보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을까요?"
"나 하래는 대루만 해요, 먼저 죄 청산 깨끗이 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수 위해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게 되지요."
김권사님과 굳게 약속을 한 의흠씨는 권사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믿음을 키우셨는데, 자기가 이렇게 성심 권사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눈이 많이 흐려지신 성심 권사님을 그 다음부터는 믿음의 어머님으로 삼고 친어머니처럼 잘 모셨다.
2. 전도사 박의흠
의흠씨는 더욱 믿음의 불이 붙어서 그 때부터, 꼭두새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면서 새벽 기도를 빠짐 없이 열심히 다녔다.
교회에서는 의흠씨에게 집사의 직분을 맡겨 주었다. 이렇게 박집사가 된 다음 더욱 열심히 나서 부흥회마다 다 따라 다니면서 예수 믿는 일에 온통 정신을 쏟다 보니 집안 살림과 농사 짓는 일은 거의 아내가 떠맡았고 통 돌볼 줄을 몰랐다.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부모님과 의논도 없이 그 좋은 집과 논밭을 다 팔아 가지고는 훌쩍 선천으로 나가 방을 한 칸 얻어 가지고 성경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밥 먹으면서도 성경을 놓지 않을 정도로 성경공부도 너무나 열심히 하여 삼년을 일등으로 졸업하였는데, 그 열심을 본 선천 미동 병원 원장 최익손 선교사의 권면을 받아 정주 천태동이라는 해변 마을로 개척 전도를 하게 되었다.
이럭저럭 사람이 모일만 한 장소를 하나 마련한 다음 반은 자비량으로 살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미신 풍속에 젖어 전도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 때문에 동네 귀신들이 다 도망간다고 몰려와서는 예배도중에 돌까지 집어던지는 등 핍박이 심했다. 그래서 박의흠 전도사는 저녁 식사 후에는 아예 산으로 올라가 산 기도를 시작하였다. 매일 밤 기도하는 자리엔 소나무 뿌리가 다 빠지고 어느 새에 마당과 같이 반들반들 해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젠 저 예수 미치광이 때문에 정말 잠도 못 자겠고 제사도 못 지내게 되었다고 하면서 핍박이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일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한 밤중에 동네 청년들이 전도사 때려죽이자고 몽둥이 하나씩을 들고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지꺼려가면서 기도하는 곳으로 찾아 올라왔다. 박의흠 전도사는 두려운 생각보다도 그 영혼들이 더 불쌍하게 생각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청년들은 삥 들러 서서 그 기도 소리를 듣고 있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 힘깨나 쓰는 청년이
"야덜아! 우리 다 내려가자! 가만 들어보니끼니 예수 믿구 우리 잘 되게 해 달라구 그런다야! 멀라우 때려 죽이간? 그러다간 우리가 다 죄 받겠다. 내려가자, 내려가자."
이러면서 모두 슬렁슬렁 내려가려고 하였다. 이 때 박의흠 전도사는 내심 흥분이 되면서 얼른 기도를 끝내시고 일어나,
"형님들 이렇게 모처럼 만났는데 내 말 조금만 듣고 내려가시오"
하고 붙들어 놓은 다음,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얼마나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과 그 반면에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혼이 구원함을 얻는 것인데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 천당에 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얼마나 복 받고 잘 살게 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한참 설명해 주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 시켜주셔서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 믿기로 작정들을 하였다.
박의흠 전도사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그 청년들을 위해 다시 정성껏 기도를 해 주었더니 이번에는 그 청년들이 그 동안 지은 죄까지 뉘우치면서 그 자리에서 통회 자복까지 터져 나왔다.
"내레 조사님네 아이들 옷에 개똥을 발라 주었어요."
"내레 조사님네 고구마 줄기를 다 빼 놨어요."
"내레 예배당에 똥을 쌌어요."
그렇게 하여 그 기도 자리가 눈물 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이 청년들이 온 동네로 돌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하여 한 일년동안 고생한 보람이 나타나 그 때부터 천태동 교회가 갑자기 부흥이 되어 얼마도 안 가서, 양반 행세하는 몇 집을 빼 놓고는 거의 온 동네가 예수를 믿게되었고, 그리하여 후에 거기서 교역자도 여러 명 나왔다.
미동병원 원장이 이번에는 좀더 오래 되고 교회도 큰 동로동 교회와 천태동 교회에서 약 이 십리 거리에 있는 염방 교회를 맡겨 세 교회를 자전거로 번갈아 가며 목회하게 되었다. 그의 열심과 봉사에 어디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박의흠 전도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염방 교회에서는 모두 이 핑계 저 핑계로 함께 교우 심방할 생각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졸랐다.
그 교회에서 제일 열심이지만 집에서 아기나 봐주고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여 집사 한 분이 공연히 등에 등창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되어 이 약도 저 약도 소용없어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박의흠 전도사를 찾아와서 기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사님 왜 등창이 났는지 알겠소? 나하구 심방은 좀 같이 안 하구 애기만 늘 업구 다니니까 등창이 난 거얘요. 등창이 나으면 나하구 심방 같이 다니겠소?"
"등창만 나으면야 심방 댕기구 말구요"
"그럼 나하구 하나님 앞에 약속합니다?"
"고롬요 약속하디요. 어서 기도나 좀 해 주우."
이 집사님은 우선 급한지라 이렇게 약속을 하므로 등창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였더니 그 등창이 터져 피고름이 한 종발 가량이나 쏟아져 나오면서 나았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 집사의 도움으로 마음놓고 심방도 하고 전도도 하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집사가 무엇 때문인지 열심히 차차 식어 가면서 한 두 번 핑계를 대고 심방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박의흠 전도사는 그 집사를 붙잡아 놓고,
"등창 다시 나게 기도할까요"
하였다. 그녀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아니요 아니요, 심방 댕기겠어요. 내 그 동안을 집에서 자식들이 싫어하는 눈치 같아서 그랬디만 욕을 먹는 한이 있어두 같이 심방하디요"
하고는 다시 심방을 열심히 하였다. 염방교회도 얼마 안 가서 크게 부흥이 되었다.
동로동 교회 사택에 살 때에 박의흠 전도사의 부인이 장질부사에 걸려 통 낫지를 않다.
이것을 관가(지서)에서까지 알게 되어 순사들과 면장, 구장까지 새끼줄을 들고 와서는 일반 사람과 격리시켜야 되겠다 한다. 이 때에 박의흠 전도사가 성큼 나서면서 가로막았다.
"이거 새끼줄 치지 마시오 새끼줄 안 쳐도 되요. 사흘 동안만 시간을 주시구려 . 우리가 기도해서 고쳐 놓겠어요."
"아니? 기도해서 장질부살 고치겠다구요?"
"고치고 말고요, 우리 하나님이 다 고쳐 줍니다."
이러한 자신감에 넘치는 말에 그 사람들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 말 믿어도 되우?"
"믿어도 되구 말구요."
"그러면 어디 사흘 동안만 한 번 시험해 봅시다. 그 땐 우리 마음대루 해두 무슨 소리 못해요. 사흘 있다가 열 시에 또 옵니다."
박의흠 전도사는 이렇게 다짐까지 하는 순경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온 식구 함께 금식 기도하자면서 사모님은 가까운 친척에게 부탁하여 미음으로 간신히 입술이나 적셔 드리게 해 놓고는 예배당에서도, 산에 올라가서도,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하였다.
기도 내용이라고는 별다른 것도 아니고
"교회 사모님이 사택에서 장질부사에 걸려 병막이나 화장터로 실려갔다고 소문나면 얼마나 예수님께 욕이 돌아가고 전도 길이 막히겠사옵나이까? 하나님 아버지 고쳐 주겠소 안 고쳐 주겠소. 안 고쳐 주면 내 망신이 하나님 망신이고 하나님 망신이 내 망신 아니요? 바꿔놓고 생각해 보구려. 바꿔 놓구요. 바꿔놓구, 바꿔 놓구...."
이런 말씀만을 되풀이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와서 열이 좀 내렸을까 하고 머리를 짚어봐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기한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 날 밤에도 함께 기도하던 열 세살 맏딸이 환상 중에 어머님의 병이 다 나은 것을 보았다고 아버지를 급히 불러 말하였다. 같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와 보았더니 환상에서 본 그대로 사모님은 일어나 앉아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순경들과 약속했던 오전 열 시가 되었다. 다시 찾아와 문을 꽝꽝 두드리자 박의흠 전도사는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신이 나서
"자 다들 들어와 보시오.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큽니다."라고 하자
"아니 이거 무슨 일이야? 무슨 이런 일도 다 있어? 당신네들 딴 사람 바꿔놓고 이러는 거 아니요? 어디 갔다 숨겨놨소?"
의심까지 하는 것이다.
"아니 뭐요? 사람을 숨겼다구요? 숨기면 어디다가 숨기구, 또 몇 시간이나 숨기겠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겠소?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그 따위 소리하면 벌받아요. 당신네들도 다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되요"
방망이에 얻어맞듯 순경들은 대변에 풀이 죽어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른다.
"야! 참 하나님이 있긴 있구나! 예수를 믿으려면 저렇게 믿어야 되"
모두 계면쩍은 얼굴로 무안해 하면서 도망치듯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의주 상단 교회로 전근하였다. 그런데 이 상단 교회도 말썽 많았던 교회였는데 게다가 그 교회에는 장정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서 미쳐 가지고 항상 골칫거리가 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박의흠 전도사가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풀이 완전히 죽어 가지고 사택에서 그 집으로 심방을 떠나기만 해도 마귀는 벌써 알아차리고는 조사님이 오신다고 벌벌 떨면서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숨곤 했던 것을 아버님이 붙들어 놓고 몇 번 기도하여 그 귀신을 몰아내고 완전히 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서울 재건 중앙교회 교인이었고 박의흠 전도사의 조카 되시는 고 박연정 노인 -동 교회 황영룡 장로의 장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 때 이 지방에는 땅이 많아 많은 소작인들을 거느린 부자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삼대 독자 외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는데 그 나마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돈이 많으니까 그 앉은뱅이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일으켜 보겠다고 많은 돈을 들여가며 별별 짓을 다 해 보았지만 모두 돈만 낭비하고 아무 효험이 없어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박의흠 전도사에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교회 전도사에게 기도를 한 번 받아보라고 하는 권면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쓸데없는 짓들이라고 도리질을 했지만 전도사가 병잘 고친다는 소문이 차차 높아지니까 주인 마나님의 마음이 조금씩 동하기 시작해서 한 번 예수를 믿어보자고 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완고한 부자 영감이 쉬이 믿겠다고 대답할 리가 없었지만 그럴수록 부인의 마음은 달기 시작하여 영감님은 자꾸자꾸 조르게 되었다. 부자 영감님도 부인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혹시라도 자식이 일어서게만 된다면야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는데 박전도사는 이런 소문이 들려오는 대로 기회를 맞춰 가지고 이 부자 집으로 전도를 갔다. 먼저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강조한 다음, 고향의 부친님을 들먹이면서, 우리 부친님도 고관면에서 대지주 노릇을 하고 계시지만 돈 가지고 천국을 살 수 없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잘 공경하면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도 걸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성경으로 예증을 들어가면서 전도를 하셨다.
이 부자 영감은 앉은뱅이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끌리면서, 만일 내 아들만 고쳐 준다면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어르신께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문제이니 이제부터는 꼭 예수를 믿는 다고 마음으로 굳게 결심부터 하시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꼭 고쳐 주신다고 설명을 하여 결신을 시킨 다음 전과 같이 지금까지 섬겨오던 모든 우상을 끄집어내게 하여 불살라 버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돌아와 준비로써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고 나서 앉은뱅이 아들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과연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 그 앉은뱅이가 그 길로 일어서서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그 부자 영감과 가족 친척, 친지들 할 것 없이 그 기쁨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부잣집 식구들뿐만 아니라 그 집의 땅을 붙여먹는 소작인들까지, 모조리 교회에 나오게 되어 교회가 일시에 부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이번에는 그 부자 영감님이 주동이 되어 지금까지의 조그맣던 예배당을 몽땅 헐어치우고 아주 큰 예배당으로 훌륭하게 지어 놓게 되니, 맨 처음 부임했을 때에는 교인수가 손을 꼽을 정도였던 것이 갑자기 수 백 명 교인으로 불어나 기적적인 부흥을 일으켜 가지고 대번에 아주 큰 교회가 되어 버렸던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교회가 점점 부흥이 되어 한 삼년 동안에 교인이 구백 명이 넘게 되었는데 이 교회에서도 교인들은 병이 나면 약 쓸 생각은 않고 으레 박의흠 전도사에게 기도 받으러 온다. 그러면 여전히 기도부터 해 주지 않고 죄 자복부터 시켰고 교인들도 으레히 죄 자복부터 하고 나서야 기도 받을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기도를 받으면 누구의 병도 깨끗이 나으니까 교인들은 너무나 감사해서 병원 치료비는 으레히 감사 헌금으로 교회에 드리게 되는 것이었다.
박의흠 전도사는 성탄이 되면 어른 아이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그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면서 그렇게나 고생스럽게 태어나셨는데 우리가 그걸 생각하면 감히 어떻게 눈에 잠이 오겠느냐며 성탄절 전날 밤은 아예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초저녁부터 모여 찬송을 부르며 젊은이들은 새벽송을 돌게 했다.
성탄절 낮에는 또 낮대로 축하 예배 후에 그 많은 교인들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끼리 끼리들 모여서 기쁘고 즐겁게 찬송을 부르며 노인들은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고 그러는 동안에 준비해 놓은 음식으로 잔치가 벌어지며 기쁨과 웃음이 종일 지워질 줄을 몰랐다.
어느해 성탄절 저녁이었다. 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셔서 여러 가지 축하 순서대로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데 도중에 어느 여집사 한 분이 무슨 볼일이 있어서 잠깐밖에 나왔다가 사택에 불이 붙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밀려나오다가 큰일 이 날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이고'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벌써 어느 남자 세분이 기와 골에 올라가서는 그 불을 얼른 꺼버리더라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아마 어니 남자 집사들이 먼저 알고 끄셨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다시 예배당으로 들어가 즐거운 시간들을 다 마쳤다. 나중에야 박전도사도 불이 났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쿠! 이거 큰일 날뻔 했구나! 그런데 이불을 누가 껐을까?' 박전도사는 예배당으로 쫓아 들어가 사택에 불났던 것을 누가 껐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불이 났던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불끄는 것을 보았던 그 집사가 앞으로 나서면서
"아니 내레 아까 봤는데 불나는걸 남자 집사님들께 알릴려구 허니까 발쎄 남자 세 분이 기와 골에 올라가 끄던데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르르 사택으로 몰려나와 보니까 사택 옆에 세워 두었던 삼대에 꽂아 놓았던 초롱에서 어떻게 불이 나서 삼대를 태우기 시작하여 사택으로 옮아 처마 밑과 석가래 몇 개를 태우고는 불이 꺼졌던 것이다.
"참 이상도 하지 누가 껐을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 불은 천사가 와서 꺼 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나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그 후에도 아무나 내가 껐다고 나서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니까 온 교회 교우들의 기쁨과 신앙의 불이 펄펄 붙었다.
교회 일에 그렇게나 열심이신 박전도사는 집에 돌아와서도 언제 한 번 옷을 벗고 편히 잘 날이 없었다. 그러니 몸은 항상 고달픈데도 여기 저기 강청에 이끌려 다니며 부흥회를 한 번 인도하고 돌아오시면 기침이 나고 목에서 피가 나오기 일쑤였다.
가정예배 때에 기도를 하시면서도,
"예수를 위해 외치다가 피를 토하고 죽게 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곤 하였다. 그런 기도가 식구들에게 좋게 들릴 리가 없어서 사모님이,
"하필이면 기도를 왜 그렇게 끔찍스럽게 하세요?"
하고 역정 쓰듯 물으시면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병들 어 약 사발이나 들이키다가 죽는 것은 저주 같이 여겨져 가장 복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그렇게 기도 한다오"
하시면서,
"당신도 나를 하나님 앞에 바친 줄 알고 남편이라고 의지하지 마시오"
하고 항상 당부해 나아왔다.
한 번은 복막염인가 하는 병에 걸려 배에서 고름이 줄줄 흘러나오는 한 처녀가 들것에 실려 왔다가 부흥회 기간 동안 완전히 나아 돌아가기도 하였고, 또 한 번은 어느 집사의 열 살 정도 된 아들 하나가 공연히 눈이 어두워지면서 앞 못보게 된 것을 그 집사가 부흥회에 데리고 와서 같이 은혜를 받다가 신유의 능력으로 그 눈이 밝아져 성경을 줄줄 읽게된 적도 있었다.
이 일에 대하여 고 유한규 목사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눈 뜬 그 사람을 해방후 이북에서 재건 교회 제 일차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에 그 사람도 박의흠 전도사가 상단교회를 분가하여 세운 막자리 교회 대표로 참석한 것을 만났는데 그때 나이는 이십 한 사오세 되어 보였고, 자기가 박의흠 전도사님이 부흥회 석상에서 설교후 "예수의 이름으로 네 눈이 밝아져라!"는 한 마디에 눈뜨게 되는 은혜 입은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를 직접 듣고 대화까지 나누어 보았다고 한다.
3. 신사참배 반대 투쟁
상단교회에 시무 하면서 박의흠 전도사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년 때 벌써 신사 참배 문제로 총회 노회가 다 넘어가고 많은 교회들이 다 굴복하고 말았을 때였지만 우리 상단 교회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박전도사가 일러두고 갔다.
그 때에 상단 교회는 교인이 900여 명에 장로가 다섯 분, 집사가 25명 정도 되었는데, 어느 주일에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형사가 열 명이나 교회로 몰려와 장로들을 모아놓고 신사참배를 결의하라고 강요를 하였다. 장로들은 처음에는, 그것은 교역자가 와야 알지 우리끼리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형사들은 전도사가 무슨 상관이냐? 여기도 다른 교회들과 같이 장로들이 모인 당회에서 결정하면 될 것이 아니냐 하면서, 만일 결의를 안 할 때에는 교회 문도 닫아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다섯 장로 중에서 두 분이 형사들의 위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회계 장로로서 그 교회에 헌금도 제일 많이 하고 매우 유력하게 일해 나아오던 장로는 다른 장로들에게 화를 벌컥 내면서 신사 참배는 국가 의식이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하는데 우선 우리가 말만이라도 신사참배 한다고 해놓고 교회를 살려야지 어떻게 교회 문을 닫고 양떼를 헤치겠느냐고 하면서 고집을 세운다. 그러나 다른 세분 장로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어떻게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단 말이냐고 하면서 싸움판이 벌어져 회의가 무산되는 것을 보고 형사들은 몇 번이고 다시 모이라고 강박 하면서 갖은 협박과 공갈로 기어이 가결을 짓게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되니까 청년 집사들과 교인들은 너무나 통분해서 장로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교회를 이렇게 망쳐놓을 수가 있느냐고 울부짖으며 항의를 하면서 박의흠 전도사에게 편지하기를, 신학교를 그만두시고라도 빨리 돌아오시면 좋겠다고 써 보냈다. 편지를 받은 박전도사는 상단 교회 당회가 이미 다 가결해버렸는데 내가 이제 가면 무엇하겠느냐면서 당회에다가 엽서로 간단하게 편지 한 장만 보내 왔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데 아론은 밑에서 000하였느니라」라고 한 다음, 상단 교회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아시오 라고. 여기에 000하고 쓴 것은, 그 때에는 벌써 신사참배 반대하는 사람은 덮어놓고 잡아갔기 때문에 암시적으로 쓴 말이었다. 당회에서는 그 엽서를 받고 양심에 가책을 받는 장로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했고 교회 안에서도 교인 백 이, 삼십 명은 결심을 굽히지 않고 당회와 대항해 나아가는 바람에 교회는 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장로들이 넘어가고 교회가 이렇게 혼란하게 되니까 교회 안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박전도사가 맨 처음 부임했을 때에 신이 들렸다가 나은 그 장정에게 귀신이 다시 달라붙어 장로 한 분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도중에 이 장정이 벌떡 일어나 강단 위로 쫓아 올라가 지금까지 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장로를 강도상 밑으로 내 던지고는 강도상을 붙들고는
"그 동안에는 박의흠 전도사가 무서워서 내가 꿈쩍도 못했지만 박의흠 전도사가 떠났으니까 상단 교회는 이제부터 내 차지야."
하면서 우상 앞에 넘어진 교회의 진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드리던 예배도 끝내지 못하고 모두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한편 박전도사는 식구들에게 거기에 있지 말고 누구보고 간다는 말도 할 필요 없이 사택에서 나와 살짝 고향으로 이사를 하라고 편지로 부탁을 해 왔기에 가만히 이사를 나오는데 신앙 핍박과 싸울 결심한 교인들은 거의 다 모여 전송하였고 어떤 이들은 땅바닥에 뒹굴고 통곡을 하시면서 전도사님네가 이렇게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겠느냐고 울부짖었다.
신사참배로 넘어간 신학교를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온 박전도사는 한국교회의 참패를 안타까워하시면서 한동안 성경 연구에 몰두하신 끝에 양무리를 살리는 길은, 범죄한 교회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끌어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우선 자기가 시무 하던 상단교회 교우들부터 건지기 위하여 당국의 눈을 피해가면서 뜻을 같이하던 교우들을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우상이 얼마나 무서운 원수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교회가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 앞에 창기가 되고 그런 교회에 나가는 것은 창기의 지체가 되는 일이니(고전6:15) 그 영혼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 지옥 아랫목 자리에나 알맞을 수밖에 없다고 성경을 일일이 들어가며 가르쳐 주시고는, 여러분이 아무 집사댁에 따로 모이면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예배 인도해 드리겠다고 하니까 교인들이 대환영이었다.
그렇게 하여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되니 900여명 모이던 교회가 갑자기 와해되다시피 되어 원 교회는 더 운영해 나아가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그쪽 사람들이 이제는 박전도사쪽 교인들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박전도사는 김린희전도사와 함께 이미 목숨을 내걸고 누구보다도 선봉에서 싸우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단 상단교회 뿐만 아니라, 그때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매우 유명했던 신의주 제일교회, 제이교회 교인들에게도, 그리고 그 밖의 어디든지 뜻이 통할만한 교인들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상단교회에서와 같이 가르쳐 주어 따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윤모 목사의 그 신의주 제일교회와 한모 목사가 맡아보던 제이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갈라져 나왔다.
그러하니 이미 마귀의 화살에 꿰인 목사나 교역자들은 박의흠이 때문에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고 교역자 노릇도 못해먹겠다고 당국에다가 박의흠이 잡아가라는 투서가 여기 저기서 한없이 날아 들어갔다. 그런 투서가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실에 무더기로 쌓이게 되어 그 고등계 형사대가 총 출동하여 박전도사와 김린희 전도사를 잡으려고 온통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박의흠 전도사의 차남 박신광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와 같은 투서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부친 박의흠 전도사의 처조카로서 당시 일본 헌병 노릇을 하며 봉천에 살고 있던 이가 쫓겨다니는 고숙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줘 볼 생각으로 신의주 경찰서에 들렀더니 책상 위에 투서들을 수북히 쌓아 놓으면서 목사, 장로, 전도사들이 이렇게 자꾸 투서를 보내고 있으니 우린들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박전도사는 되도록 짐을 간단하게 챙긴 다음 이곳 저곳으로 숨어 다니면서 교인 끌어내기 운동을 계속하였는데 그렇게 이사 다니기를 아마도 백 오십 번 정도는 했을 것 같다고 한다. 유한규 목사도 인증하기를 그 때 자기가 들은 대로도 한 달에 서른 두 번까지 이사를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전도사라지만 무슨 일정한 월급을 전과 같이 받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나 한 푼 생기면 먹고 없으면 온 식구가 굶어야 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부인이 이젠 식량이 떨어졌다고 걱정 같이 말씀하시면,
"요것 다 먹고 하나님이 안 주시면 그 때는 올라가지, 주시면 더 일하라는 줄 알고"
하면서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말한 그대로 어디에서라도 꼭 먹을 것이 생기곤 하였다.
그렇게 전담한 교회가 없는 박전도사는 전국에 있는 범죄한 교회로부터 주님의 양무리들을 끌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만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걸음은 교회를 전담했을 때보다도 더욱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 국외래야 압록강 건너 만주 일대이긴 했지만 신의주, 안동, 봉천, 무순, 하얼빈 등지로 다니면서 가정교회들을 많이 세워 놓고 교인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밤낮 심방하곤 했다.
그 때 교인들도 교역자의 말을 따라 신앙 하나만을 위해 고래 같은 기와집에 문전 옥답도 아낌없이 모조리 정리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사해간 이들이 많았다. 그런 중에서도 상단교회 교인들이 더욱 많이 따라 나왔는데, 유두풍 집사라는 이는 큰 부농으로 남이 모두 부러워하게 살다가 그 좋은 집이랑 농토랑 모두 소작인에게 맡기고 짐을 간단하게 꾸려 가지고 만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상단 교회에서 나온 후 김린희 전도사댁을 위시하여 김신창 집사 댁, 신의주 김순채 집사댁으로 이렇게 전전해 가며 비밀히 집회를 하였는데 특히 김순채 집사댁에서 회집할 때에는 그 집이 도청 소재지인 신의주에 있었기 때문에 그 유명했던 신의주 제일교회, 제이교회 교인들이 많이 갈라져 나와 회집하곤 하였다.
밤에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문장도 이중으로 치고는 모두 숨을 죽여가며 예배를 드렸고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곤 하였다. 그래도 때가 때인 만큼 누구 하나 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시국은 날로 험악해 가고 투서로 말미암은 형사들의 끈질긴 추적은 도를 더해 가고 있어서 국내에서는 그 이상 더 피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식구들은 만주 무순 영안포로 가서 살게하고 그 동안 성경으로 훈련시켜 놓은 교인들도 되도록 먼 곳으로 피하게 하였다.
영안포에는 새끼 기계를 한 이십대나 들여놓은 새끼공장을 차려 놓고 신앙 지키는 성도들의 생계를 위하여 새끼를 꼬며 사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모두 공장에 들어가 새끼를 꼬다가 점심때가 되면 다시 모여서 한참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고 공장으로 들어갑니다. 저녁에도 식사를 하고 나면 그냥 자는 법이 없고 다시 모여 찬송을 부르고 성경 공부를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곤 하였는데 이 때에 박전도사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몇 주일 만에야 한 번씩 다녀가곤 하였다.
김윤섭 전도사는 이렇게 새끼를 꼬면서 먼지를 많이 먹고 일하는 교인들의 건강이 염려스럽다고, 그 때 만주에서 값이 싼 쇠고기를 사다가 석탄 불을 벌겋게 피워놓고는 빙 둘러앉아 맛있는 불고기를 실컷 먹곤 하였다. (당시 무순에 살았던 이 글의 원 집필자 고 정찬성 목사도 이 새끼 공장의 내력을 친구 집사에게 들어 알았고 지나다니면서 보곤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앞의 그 유두풍 집사가 수토 병에 걸려 매우 심하게 앓게 되었는데 병은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그러더니 하루는 뜻밖에도 유집사가 자기는 먼저 가겠다고 예언을 하면서 내일 열 시에는 내가 세상을 떠날 것이니까 그 때에는 모두들 와서 예배를 좀 드려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말이 헛소리 같지 않고 너무나 엄숙했기 때문에 그 다음날은 공장을 쉬면서 그 집사의 집으로 다 모였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하면서 열 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열 시가 가까워지니까 유집사가 여자분들은 좀 다 나가달라고 하고는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부탁하므로 김윤섭 전도사가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 드리고 장롱 속에 있던, 모시로 만든 흰 두루마기까지 깨끗하게 갈아 입혀 드렸다. 마지막으로 유집사는 부인과 자식들을 가까이 불러 앉혀 놓고는, 너희들은 모두 순교 당할 각오를 하고 신사참배를 이겨내야 한다.
신사 참배하는 사람은 제일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라 하면서 아주 단단히 당부를 하시고는 김전도사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먼저 가니까 전도사님은 일 좀 더 많이 하시고 오시오 하면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을 뜰 분이 세상에서 무슨 나들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너무나 똑똑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뜨시겠다는 말을 들은 식구들은 인정을 못 이겨 모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유집사는 그렇게 우는 소리에 천당 가는 길이 희미해진다고 하시면서 절대로 울지를 못하게 하였다. 다시 김윤섭 전도사의 인도로, 유집사 생전에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교우들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유집사도 희색이 만연하여 찬송을 입술로 따라 부르면서 손으로는 공중에다가 박자까지 저으시며 김전도사가 성경을 읽고 간단히 설교를 하신 다음 기도를 하고 예배를 모두 마치면서 아멘 하자 그 길로 숨은 완전히 끊어지고 그렇게 하여 유두풍 집사는 그렇게 확실한 증거를 남겨 놓고 천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