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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향후 변화 이해를 돕기 위한 리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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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향후 변화 이해를 돕기 위한 리포트" 작성자: 김용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
지난 2007년 10월 30일 법무부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사증 발급대상자 22,863명을 전산추첨하는 행사를 가졌다. 지금까지 한국에 친척 등 연고자에 의한 초청과 신원보증 하에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들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었다. 그러나 22,863명은 초청장 없이 신원보증인 없이 한국에 들어와 3년간 지속적으로 체류하며 취업활동 등 한국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무연고동포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2008년부터는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중국동포, 즉 중국조선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게 떠오르는 시점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중국동포가 한국사회에서 도와주어야 할 소수집단, 내지 소외집단 차원을 넘어서 국가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라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중국동포’라는 용어대신 ‘중국조선족’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논하고자 한다.
1. 중국조선족 명칭과 형성 중국조선족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같다. 중국에서 한민족 이주민을 ‘조선족’이라 부른 것은 언제부터인가? 1908년 중국국적법이 나오면서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기고 난 뒤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한민족 이주민을 ‘조선족’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정부가 중국으로 이주한 한민족 이민자(韓人)에게 중국 소수민족으로서 지위를 주고 ‘조선족’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붙힌 것은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1954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됨)가 생긴 이후부터이며,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한 헌법에 중국의 소수 민족을 중국의 공민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족이 합법적인 중국의 소수 민족이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 된 것이다. 최근 9월 30일 발간한 연변과학기술대 이승률 부총장의 저서 『동북아시대와 조선족(박영사)』제3장 조선족 사회의 형성과 민족특징 - 편을 보면 조선족 형성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정부로부터 조선족이라는 공식 명칭이 붙기 전인 1945년 해방시기 이후 중국으로 이민한 한민족 이주민들은 중국의 해방전쟁에 지대한 공을 세운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동북지역에서 국민당을 물리치고 공산당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그것을 중국공산당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생겼으며, 조선족에게 민족평등과 자결의 정책을 베풀어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등 동북3성 지역에 조선족 자치향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7개 조선족자치향, 11개 조선족만족연합 자치향과 진 설립 흑룡강성: 18개 조선족자치향, 5개 조선족만족연합자치향과 진 설립 요녕성: 5개 조선족자치향, 12개 조선족시버족연합자치향과 진 설립 내몽골자치구: 1개 조선족자치향 설립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동북3성지역에 1개 자치주, 1개 자치현, 30개 자치향, 28개 연합자치향과 진을 설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만주땅으로 이주한 한민족 성원들이 1945년 해방 이후 왜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조선족으로 남아있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연변해외문제연구소 김종국 원장의 설명을 들어보면 참조가 될 것같다. “해방 이후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은 고국(한반도)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빈손으로 고향에 가봐야’ 라는 심리가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때 1946년 중국은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 소유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물론 우리 조선족 농민에게도 토지를 주었죠. 당시 동북3성 각 지역의 조선족 대표들이 모여 고국으로 돌아가겠는가, 만주땅에 남아있겠는가 논의를 했습니다. 중국땅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지요.”(중국동포타운신문 제100호, 2007년 4월1일 김종국 원장 인터뷰기사 중) 이 당시 동북3성의 조선족 농민이 분배받은 토지가 한반도의 두 배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해방전쟁에 참전해 중국정부 성립에 공헌한 연대장급 이상 직위를 가진 조선족이 5천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족은 동북3성의 분배받은 토지 헐헐 벌판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을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고 중국땅에서 한민족의 글과 문화를 지켜온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형적인 농촌 공동체를 형성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족과 북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조선족은 북한과 인적 물적 교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필자가 방문한 단동과 도문, 흑룡강성 계동현 조선족자치촌을 통해 본 조선족과 북한의 관계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① 단동 방문 필자는 2005년 1월경 일주일간 단동을 방문해 그곳 상황을 취재한 경험이 있다. 단동은 압록강을 끼고 신의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국 변방 도시이다. 필자가 단동을 갔을 당시 분위기는 신의주특별개발구 이야기가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당시 신의주특별개발구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인이 중국당국에 의해 좌초되면서 다소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은 때였다. 하지만 당시 단동엔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주요변화는 압록강변을 낀 단동 시내 분위기이다. 압록강변을 따라 넓직한 도로가 났고 병풍처럼 고급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입주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불 꺼진 아파트단지였지만, 그것은 북한과의 전쟁은 없다는 것을 과시하듯 북한개방을 염두해두고 투자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동에는 북한 이주민이 만든 북조선 거리가 있으면서 조선족거리가 있고, 또 한국인 거리가 있다. 인상깊었던 곳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 북한이 투자하여 세운 식당과 한국인이 투자하여 세운 식당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단동 신도시 개발구에 중국 부동산 투자자들에 의한 코리안타운 단지를 조성하고 그곳에 대형 한국상품 판매점을 유치하기 위한 활동이 한창이었다. 단동은 북한 신의주 지역을 통해 보따리상 등 소규모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무역활동인은 조선족과 북한상인들이며, 압록강의 신의주-단동간 교량 개통이 이루어지는 요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통관절차를 밝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트럭 등을 타고 북한 신의주로 들어가는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단동에서 북한 무역거래상을 만날 수 있었다. 북한인들 중에 단동에 나와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북한사회에서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 고위층 가족이나 친척들이며, 중국에 친척을 두고 있는 화교들이다. 화교들은 자유롭게 중국과 북한을 왕래할 수 있었다. 북한국적 화교 2세들은 단동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인데 중국말보다는 조선말을 더 잘 구사하였다. 이들은 텔레비전은 물론 다음 커뮤니케이션 등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한국사회를 쉽게 접촉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기도 하고 단동내 조선족들과 잘 어울렸다. 북한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도 단동의 분위기였다. 북한사람들도 한국의 발달상을 익히 알고 있으며 한국을 왕래하며 활동하는 조선족을 사업파트너로 삼고 한국-중국-북한 무역거래 정보 등을 교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② 도문 방문 2007년 4월초 필자는 연변 도문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도문은 두만강을 끼고 북한땅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다. 단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중국 도문은 두만강변을 끼고 벼농사를 짓는 농토가 있었고 띄엄띄엄 조선족농가가 형성되어 있다. 두만강은 강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보다 물이 많이 흐르지 않았으며,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북한땅은 중국땅과 대비되게 시커먼 자태를 보이는 산능선을 형성해 있지만,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시 필자를 안내한 도문시 조선족 김덕자씨는 두만강을 건너 탈북자들이 도문시로 많이 들어온다고 말한다. 겨울에는 두만강이 얼기 때문에 쉽게 건너올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증거로 아침에 두만강변에 나가보면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생계형 탈북자들이다. 이곳 조선족농가는 탈북자들의 딱한 사정을 잘 알아서 그런지 신고하지 않고 오랫동안 재워주고 먹을 것을 대준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족과 탈북자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조선족과 북한주민은 가까운 사이였다. 필자가 2000년 말부터 중국동포를 관심두고 활동하면서 당시 한국에 온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중국동포들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70년대초에 동북3성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족들이 많았어요. 북한당국은 조선족이 어려움을 겪어 북한땅으로 넘어오자 ‘우리는 같은 동족이며 한 형제들입니다. 어서 오세요. 마음껏 있을 때까지 있다가 돌아가세요’ 하면서 대환영을 해주었고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대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족은 북한에 대해서 더욱 고맙게 생각하고 친형제처럼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은 그러지 않습니다. 불법체류자로 몰아 강제추방을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면 조선족은 북한편을 들겁니다.” 북한을 경험해보고 남한을 경험해본 중국동포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③ 흑룡강성 계동현 조선족마을회관 방문 2007년 8월초 필자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의 조선족마을 회관을 견학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선족마을회관에는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한국 등으로 해외노무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때 필자의 눈에 띈 것은 마을 회관에 걸려있는 게시판이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 개혁개방 20여년간 거주판도가 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리면서 그 거주판도를 기록해 놓은 내용이 게시판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제1대 지역(동북지구)내 길림성엔 114만5200여명, 흑룡강성 38만8000여명, 료녕성 24만2000여명, 내몽골 2만180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제2대지역(산동성) 청도 13만여명, 위해 5만여명, 연대 2만여명이 거주하고, 제3대 지역(북경, 천진) 북경 12만여명, 천진 5만여명, 제4대 지역(강소성) 상해 6만여명, 남경 4만여명, 소주 2만여명이 거주하며, 제5대 지역(광둥성, 절강성) 심수 2만여명, 동관 3천여명, 광주 2천여명, 절강성 1만7천여명이 거주하고 제6대 지역(서부지역) 성서성, 감숙성, 사천성 2만여명이 중국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 해외롤 진출한 조선족인구는 24만명, 한국에 13만명, 러시아 3만명, 미국 2만명, 유럽 1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 총인구는 210만명이라고 한다. 위 내용은 현재 파악되고 있는 조선족인구와 거주판도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선족촌 마을회관에 조선족인구 현황에 대해서 게재되어 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또한 조선족마을회관내 칠판에는 한반도를 낀 미국과 조선(북한) 관련 소식들도 있었다. 특히 북한의 연변핵시설과 미국의 이라크 등 국제관계 전쟁 판도에 대해 게시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④ 중국조선족사회 형성에 따른 특징 200만 중국조선족 인구 중 50%가량은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고 북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30%는 남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996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도문세관을 통한 조선족의 북한 방문은 47,545회이며 이중 상당 부분이 친척방문으로 방북한 사람들이다. 이때 조선족이 휴대해간 물품을 보면 식량이 일인당 150~200kg에 달한다. 조선족 민간인에 의한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과 생활필수품 지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곧 조선족사회가 북한의 경제난 해소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평가한다.(이승률, 동북아시대 조선족 387p) 또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1998년 11월부터 시작된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개발에 있어 조선족의 역할이다. 지난 2007년 4월초 필자는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관광안내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금강산 관광특구에서 복무원으로 활동하는 70%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원은 500여명으로 현대아산이 중국 현지에서 채용한 인력이다. 현대아산이 북한주민을 채용하지 않고 조선족을 채용한 배경은 북한측이 주 관광객인 한국인과 북한 주민의 접촉을 꺼려하고, 또 한국인 대비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조선족 인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조선족 인력은 식당, 호텔 종업원, 버스기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상 조선족과 북한과의 관계, 그리고 조선족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활동 등을 볼 때. 한국사회는 조선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단순히 중국인으로 인식해서도 안된다. 분명 조선족은 기회가 닿는대로 한국과 중국 북한을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란 점이다. 특별히 방문취업제 시행에 따라 2008년부터는 무연고 조선족동포 22,863명이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한국에 친척이 없고 대개 북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젠 조선족은 한국사회의 주요 인력이 되었으며, 한중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으로 본다.
조선족이 ‘코리언드림’을 갖고 한국으로 진출한 것이 20년이 되었다. 50년간 단절되었던 중국대륙과의 교류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짐으로서 조선족에 의해 교류가 활성화되어 왔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수확을 얻은 곳은 한국과 중국이며, 반면에 조선족사회는 해체되는 등 희생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냐 지적할 수 있겠지만. 조선족사회의 처한 현실을 놓고 볼 때 그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것같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에 불어닥친 ‘코리언드림’은 조선족사회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 태풍처럼 작용을 한 것이다. 필자는 2006년 7월 13일 인천상공회의소 차이나클럽 주최 세미나에서 ‘현재 조선족 사회 이해를 통한 한중 교류 증진 세미나’에서 조선족동포 관련 주제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국내에서 바라보는 조선족동포에 대한 시각’으로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년’을 정리해 발표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발표한 자료로 대신하고, 여기서는 주요 내용만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①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시각] 편에서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하며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기술하였다. 그 주요이유는 조선족사회에 과잉 교육열이 가져다 준 자녀교육비 마련을 위한 해외노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와 때를 같이해 코리안드림이 강하게 불었다. 그런 틈을 이용한 과장된 코리언드림을 팔아 돈을 번 악덕브로커에게 당한 사기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불법체류하며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절박성 등을 이유로 꼽았다. ②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편에서는 중국동포들이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 등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조선족은 한국에 오면 중국에서 평생 일해도 도저히 벌 수 없는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입국문이 너무 좁다보니 고액(한화 1천만원)을 들여 브로커에 의한 입국을 시도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중국에서 조선족이 일본으로 가고자 할 경우엔 중간알선자에게 한화 3천만원, 미국은 5천만원이 든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이 제일 저렴한 비용이며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국이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사회 분위기도 한국행을 부추겼다. 누구네는 한국에 가서 팔자가 피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동네사람들을 부추겼고, 결국 한국에 가지 않으면 무능한 사람으로까지 비쳐졌다는 것. 결국 조선족사회는 묻지마씩 코리언드림에 푹빠져 촌장(동장) 주선하에 한국 입국행을 선택했던 사례들을 수없이 접촉할 수 있었다. ③ [한국속 조선족타운-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편에서는 국내 체류하는 조선족의 집거촌 형성 과정과 그 특징을 설명하였다.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 대림동이 대표적인 조선족집거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 집거촌을 통해서 한국사회에 반영된 조선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울의 조선족타운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이해하는 것은 국내 거주 조선족인구가 늘어나면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발전적으로 현 시점에서 논한다면, 한국사회에 중국동포들이 중심이 되는 중국동포타운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화교 중심의 차이나타운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 현지에 형성되어가고 있는 코리아타운과 한국에서 형성되는 중국동포타운(차이나타운)은 중국동포 역할이 밀접하게 있다는 맥락에서 의미있게 주시해 보고 향후 발전모델을 찾는데 관심을 기울일만한 영역이라 생각한다. ④[한국인과 중국동포-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경제적으로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사회체제가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5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 만났을 때 관계가 서먹서먹하고 문화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상호 그런 선상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조선족의 코리언드림 20년史는 정부정책의 부재속에서 값싼 노동력을 요구한 한국경제 현실속에서 벌어진 갈등과 불신이 팽배하게 된 안타까운 세월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현실적인 정부정책의 부재는 결국 조선족동포 상당수를 형사처벌 대상자로 몰아넣기에 이르렀다. 일부만 보고, 한국인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 조선족은 사회적 약자라는 편견 속에서 한국사회는 조선족을 바라보았고 조선족 또한 한국인을 보아왔다. 그것이 결국은 한국인과 조선족 간의 갈등과 불신의 벽을 높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국사람도 돈이 있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있고 선량한 사람도 있고 사기치는 사람도 있듯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복잡한 사회이다. 이것을 전형적인 농촌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조선족동포들이 알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조선족 중엔 중국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동포하면 불법체류자라는 단순한 인식이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정서였다. 그런 인식이 결국 능력있는 조선족이 한국인을 상대하기를 꺼려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풀어가야 할 당면과제도 있다. 과거 20년 동안 코리언드림의 영향을 받은 조선족사회는 개인 호구가 바뀌고 남편이 바뀌고 아버지와 아들이 형제가 되고, 부모가 이혼하고 한국에 재혼해 오는 등 피눈물나는 가정사를 갖게 된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에서 그런 사실이 들통나면 공문서위변조자로 형사처벌 대상자가 되고 강제추방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뒤얽힌 문제들은 곧 조선족사회의 전반적인 현실이며, 이는 곧 한국에 대한 원망으로 분출될 소지가 크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방문취업제 합법화시대를 연 만큼 과거 한국방문 수단으로 뒤얽혀진 문제들을 한국정부가 먼저 바로 풀어줄 수 있는 과감한 포용정책을 펼쳐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⑤[중국동포 합법화시대를 맞이하며] 편에서는 2005년과 2006년도 동포 귀국지원프로그램 실시에 따른 불법체류 동포 구제정책이 조선족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하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방문취업제 시행으로 조선족의 불법체류 한국생활은 막을 내리고 합법화시대를 맞이하게 됨을 알렸다. 필자는 조선족의 한국에서 합법화시대는 조선족사회의 또다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 변화는 중국동포 밀집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그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①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조선족의 ‘민족심’ 지난 8년간 필자는 중국동포 관련 활동을 하면서 항상 중립적인 위치를 지켜왔다. 한국에는 조선족문제와 관련 활동하는 종교 사회단체들도 많고, 고구려 역사문제나 간도 문제 등에 관심갖고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다. 저마다 단체 활동의 필요성이 있고 그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단체들의 공통점은 지리적으로 무대가 되는 동북3성 지역이며 조선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단체는 조선족 지식인 지도층 인사들과 교류하기를 원하고 그 입장도 들어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조선족은 이런 한국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학술회의나 단체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야 되는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해서 조선족을 무조건 배척하고 경계하고 또 한민족으로서 소속감이 없다고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조선족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민족심이 있고 그 속엔 한민족의 소속감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한국사회가 조선족이 중국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되는 그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② 한국인/한국단체를 주의 관망하는 조선족 또한 동북3성 조선족은 조선어방송과 신문이 있다. 연변방송,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매체는 중국에서 한글과 문화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언론방송인은 대외적으로 한국의 언론방송사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편이지만, 한국인의 중국내 조선족언론방송에서 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임을 느끼게 된다. 2007년 4월초 방문취업제 시행 후 연변사회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필자는 연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가 연변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변의 어느 조선어방송 담당 PD는 필자를 방송에 출연시켜 방문취업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해 줄것을 바랬지만, 결국 윗선에서 허락이 되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신문사들도 한국에서 조선족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인의 활동상에 대해서 잘 보도하지 않는 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행사나 조선족 인사에 대한 보도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만큼 조선족사회는 한국인 활동에 대해는 주의 관망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 동포 관련 단체와 신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조선족 스스로 만든 단체, 언론매체가 없다는 자아비판적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필자의 한국에서 중국동포 활동을 하면서 갖게되는 아쉬움이라면 바로 이런 조선족 지식인 언론사회 단체가 한국인과 한국사회와 함께 하려는 노력보다는 조선족 자체행사에 치중되어 있고 자아중심적인 사고가 강하다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사회에 접근하기 쉬어진 반면 한국인의 조선족사회 접근은 여러 면으로 어려움이 있다. 그나마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의 활동은 열린 자세로 자유로우면서 한국사회와 함께 하려는 적극성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국내 한국인 학생들과의 교류활동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③글로벌코리언 중국조선족 지식인 사회는 ‘코리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북한은 조선, 남한은 한민족, 구소련은 고려인이라는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민족의 이름이 공통어로 통하는 것이 ‘코리언’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내 코리언이다. 그리고 코리언은 정치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어느 곳에 치우치지 않고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조선족 지식인 사회층에서 공개적으로 내거는 민족화합 네트워크는 ‘글로벌 코리언네트워크’가 된다. ④ 신화교 최근 국내 조선족사회의 변화를 보면, 대표적인 것은 최근 국내 화교의 조선족에 대한 관심이다. 조선족을 화교의 범주에 넣고자 하는 신화교 움직임이다. 중국이 1970년대 들어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중국인들의 해외진출이 자연스럽게 다시 이루어 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또 다시 많은 중국인들의 해외진출 러시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번의 새로운 중국인들의 이동은 중국대륙에 국한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만, 홍콩 등지의 중국계 인구가 전면적인 이동을 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고, 오래전부터 동남아에 정착해 있던 중국계 인구가 다른 지역으로의 재이민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렇듯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고 있는 중국인들이 새로운 이동에 따른 유입을 일반적으로 '新華僑'로 지칭하고 있으며, 이들의 총수는 대체적으로 약 160 -180만 정도로 추산된다. 신화교의 움직임은 과거 중국인들의 해외진출과는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대개 해외에서 유학을 한 후 그 자리에 눌러앉아 생활하거나 또는 해외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또 보다 유리한 경제환경을 찾는 '투자이민', '상업이민' 등이 대종이며 이들은 또 전적으로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외국행이라고 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들이 택하는 이민 대상국도 하나같이 부유한 나라들이며 가난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들의 학력도 상당히 높을 뿐 아니라, 이민 전의 경제적인 상태도 좋은 편이다. 다만 이 중에서 대륙출신 이민자들은 여전히 대만이나 홍콩 등 여타지역에 비해서 교육수준도 낮고 이민전의 경제적인 여건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특히 신화교 물결은 중국의 개혁개방 본격화는 물론 홍콩이 1997년7월을 기해서 중국에 반환되는 것에 따른 홍콩인들의 대대적인 해외이주가 이를 크게 부채질 하고 있다. 한 통계는 중국대륙에서 만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래 약 12년간에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출국자 수는 약 136만명으로 그 가운데 이민이 80여만명, 유학생이 약 30만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진출국은 미국, 일본, 카나다, 오스틀라리아, 유럽 등이다. 그리고 이들을 또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전통적으로 최대의 화교 송출지인 광동성에서는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 1년간에 4만2천명이 세계 60여개 국으로 출국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미국이 1만6천명, (전체의 38%), 카나다에 1만1천명(26%)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이 성에서는 매년 이민자 수가 약 4만명에 달하고, 1981-1991까지의 이민 자는 44만명으로 이는 같은 시기 중국 전체 이민자 총수의 57%를 차지하고 있다. [趙政男, 고대교수 정치학] 한국에서의 신화교 움직임은 2005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8차 세계화상대회 개최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2005년 10월 당시 필자는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인 가리봉동에 중국동포타운센터를 설립했고, 중국어신문인 신화보(사장 조명권․ 한국국적으로 귀화한 조선족)사가 본센터에 함께 입주해 활동을 하였다. 신화보는 세계화상대회 행사장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홍보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중국인 인사들이 신화보를 보고 본센터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후 신화보는 4개월 후 본센터에서 독립하여 나갔다. 그 배경에는 한국화교단체의 지원과 연계활동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 화교계 대표인물인 한성호 박사는 중국어신문 신화보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중국대사관과의 연계의 길도 열어주었다. 그리고 2007년 5월경엔 구로동에 한중관련 사업을 펼치고 국내 체류 중국인(조선족 포함)을 위한 지원활동을 펼치기 위해 사무실을 확장하여 주한중국인동향회 성별 모임 등을 추진하는 등 구체적인 일들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신화교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성호 박사는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로 1992년 한중수교를 이루는데 공헌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성호 박사는 중국 소수민족들도 화교로 봐야 한다면서 한국으로 진출한 한족은 물론 소수민족(조선족)까지 포함하는 화교단체를 만들 것을 주창하여 주한중국대사관의 관심과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아직 그 활동은 초기단계이지만 주목해 봐야 할 것으로 본다. 중국대사관에서도 최근 한국 진출 조선족을 화교의 범주에 넣어야 된다는 것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는 국내에서 그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법륜공(파룬궁)의 활동을 경계하기 위한 중국대사관의 포섭작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법륜공은 反중국공산당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 중국어신문 를 2000년초부터 발행해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선전 배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정부도 법륜공과 에 대응할 수 있는 대항4마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신화교 물결과 화교우대정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런 화교계의 움직임에 대해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반응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선족이기 때문에 화교와도 손을 잡고 교류활동을 펼쳐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바람직한 활동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재한조선족사회가 화교와 연대하여 활동하는데 관심이 커지고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중국대사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⑤ 한국에서 형성된 자생적인 중국동포 단체들 또한 국내 조선족사회는 이런 커다란 움직임과 달리 여럿 작은 모임들도 자생적으로 생겨 그 모임 특성에 맞게 연합회가 구성되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의 조선족동포관련 단체는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는 현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포 관련 활동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 자생적인 중국동포 단체가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귀한동포연합회(국적 회복 동포1세 중심으로 구성), 축구동호회 연합회인 중국동포축구연합회, 그리고 인터넷 까페모임 등을 통한 고향별 모임 등으로 각자 개성과 취향에 따라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다양한 변화 속에서 재한조선족 사회는 과거에 찾아볼 수 없었던 다양한 특성을 띠고 활력을 찾고 있다. 어찌 보면 중국 동북3성 광할한 지역에 포진되어 있음으로 인해 좀처럼 구심점을 찾기 어려웠던 조선족사회가 한국사회에서는 환경적으로 쉽게 구심점을 찾고 조선족사회를 이끌어갈 대중적인 지도자도 배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도 갖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인구가 늘어나면서 지금까지 국내 조선족문제는 한국의 재외동포정책과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간의 이해 속에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중국의 화교정책과도 연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재이주한 중국동포 1세와 2세로 한국국적을 회복하고, 결혼 등으로 온 귀화한국국적 조선족이 10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구로구와 영등포구 같은 지역에서는 지역대표 선거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군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재한조선족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이다.
조선족 200만은 그렇게 많은 인구는 아닐 것이지만, 그 인구에 비해 앞으로 역할은 확대되며 조선족사회는 해체와 재편성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히 변화무쌍한 세력군으로 성장해 나가지 않겠나 하는 전망을 가져본다. 한중관계, 남북관계 속에서 지금까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왔지만, 환경이 바뀌면서 능동적인 역할자로 지위를 갖게 될 것으로 본다. 조선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 한국정부의 정책부재로 동족에게 발생된 불법입국에 의한 꼬리표 ‘형사처벌 대상자’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한국속에 형성된 조선족타운과 차이나타운, 그리고 조선족을 한국의 국익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 이젠 심도있게 연구하고 논의해볼 때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젠 가리봉동과 같은 조선족타운을 시작으로 하여 한국인과 조선족 간의 이해소통의 장을 점점 더 넓혀 확대해 나감으로써 상호 발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동북아시대를 함께 열어가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2007년 11월 22일 세계한인정책포럼 주제발표문) |
출처 :온라인위의 중국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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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독고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