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한국동남아연구소> 홈페이지 2006. 2. 26.
나의 동남아 편력
신 윤 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남포럼 운영위원)
이곳 싱가포르에 도착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호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데다 컴퓨터도 없이 글을 쓰자니 정돈이 되질 않는다. 그냥 내가 동남아와 인연을 맺은 경위로부터 첫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니 독자 제위들께서 해량해 주시길 바란다.
나의 동남아 편력은 20여 년전, 1984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집중적인 인도네시아어 교육을 받기 위해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에 위치한 인구 5만의 소도시 살라띠가(Salatiga)에서 석달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연구계획서를 작성, 제출한 뒤, 넉달 후 본격적인 현지조사(fieldwork)를 하기 위해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 갔다. 일년 간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의 재벌형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집중하며, 이른바 “지역전문가”(area specialist)가 되기 위한 마지막 통과의례를 치렀다.
두번째 동남아 장기체류는 1997년 2월부터 1998년 9월 중순 사이 한국에 체류한 석달을 뺀 1년 5개월의 기간이었다.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의 주도(州都) 스마랑(Semarang)에 살았는데, “인도네시아 화인(華人: 중국인)들의 정치문화”를 주제로 본격적인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관찰”보다는 “참여”에 더 치중하고 연구보다 현지경험에 더 충실했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보다 더 강도 높은 외환위기가 덮쳐 더 혹독한 경제적 시련을 겪었고, 종족, 종교 분쟁과 소요사태로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급기야는 30여 년의 수하르또 장기독재가 무너지는 엄청난 격변을 겪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를 직접 보고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은 지역연구자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세번째 장기체류가 되는 이번은 앞으로 일년 간 싱가포르국립대학 (NUS: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의 아시아연구소(ARI: Asia Research Institute)에 머물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의 가치관과 정치적 거래”, “동남아의 선거와 민주주의”, “동아시아의 정체성과 공동체 형성” 등을 연구거리로 삼아 사색도 하고 글도 써 볼 요량이다. 내가 전공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가서 자료조사도 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버마(미얀마)와 라오스도 여행하게 될 것이다. 1년 동안 “안식년” 휴직을 받았지만, 내친 김에 한 2년쯤 있어 볼까 궁리도 하고 있다.
한번 따져 보니 내가 동남아와 첫 인연을 맺은 후 21년 8개월 동안 짧고 긴 동남아 여행과 체류를 어느덧 60여 차례나 하였다. 이상하게도 미국에서 돌아 온 이후로는 한번도 동아시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중국과 일본에 간 적이 몇 차례 있을 뿐, 전부 동남아만 돌아다녔다. 브루나이와 새로 독립한 동티모르를 빼고는 다 가 보았다. 이쯤 되고 보면 동남아 사랑이 아니라 동남아 “편집증”에 빠져 버린 것 같다. 내가 처음 동남아 공부를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은 전두환 독재 치하의 암울한 시기였다. 국내의 어느 재벌 재단이 주던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이 엄청나게 비싼 미국 사립대학에서 유학하게 된 내가 동남아를 전공하겠다고 하자,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종속의 수렁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한가한 동남아”를 공부한다고 여기 저기서 비난이 만만치 않았다. 학위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땐, 그런 걸 해서 어떻게 먹고 살겠느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조차 있었다,.
이런 저런 비난과 압력을 받으면서 굳이 동남아에 집착하고 천착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강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동남아로 끌어 당겼을까? 한두마디 답으로 간단히 정리될 질문이 아닌 성 싶다. 동남아 전 역사를 통하여, 인도인, 중국인, 아랍인, 유럽인, 일본인, 미국인,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한국인들까지 힘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무역상, 포교자, 식민주의자, 침략자, 노동자, 기업인 등 각종 유형의 이주자로 끌어들인 그 어마어마한 힘을 감추고 있는 지역이 바로 동남아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통해 항상 “제3세계”, “주변부”, “약소국”으로만 치부되던 동남아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독자들과 함께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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