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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롬1장8-17절.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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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롬1장8-17절.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종교개혁의 주제요절이 되는 말씀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 구절이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의 시대이다. 수많은 설교가 있지만 오히려 들을 만한 설교가 희귀한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예배가 흔들리는 시대이다. 이 두 구절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구절이다. 로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절이다. 로마서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아있는 죄 해결- 종교개혁의 열쇠
남아있는 죄는 무엇으로 해결될 수 있는가? 회개인가?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회개해야 용서받을 수 있는가? 단순히 고백만 하면 끝인가? 큰 죄를 지었을 때에도 단순히 고백만 하면 용서받는가? 금식을 해야 하는가? 어느 정도 금식을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회개해야 한다면 어느 정도 진지하게 회개해야 용서받는가? 단순히 회개했다고 하면 끝인가? 남아있는 죄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은 연옥에 가야만 했다. 이렇게 남아있는 죄문제는 컸다. 중세시대에 면죄부는 이렇게 남아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고행하는 것을 돈이 대신하는 것이었다.
. 로마 카톨릭- 기도와 고행과 선행과 헌금과 각종 성인들의 중보기도, 면죄부
중세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문제가 있으므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복음 선포에 관한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복음을 전혀 선포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에게는 윤리만이 있었다. 그 윤리에 관한 선포도 잘못된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순수한 복음에 기초한 선행과 윤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피만으로는 사람의 죄를 완전히 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처음 믿을 때의 죄는 씻는다고 하여도 믿은 이후의 죄들은 기도와 회개와 고행과 끝이 없는 선행과 수 많은 헌금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는 이러한 것으로도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후에도 곧장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연옥에서 남아있는 죄를 씻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연옥에서 고난 받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씻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필요했다.
자기들의 노력이 부족하므로, 이제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날마다 기도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의 도움도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각 나라마다 수호성인이 필요하였다. 그 수호성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하였다.
드디어 나온 해결책이 면죄부 표였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표였다. 이것은 로마 교황이 인정한 표였다. 이 표는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이 표를 사기 위해서 돈을 연보궤에 넣는 순간, 돈이 연보궤에 떨어지는 땡그랑하는 소리에 연옥에 있던 영혼들이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구약시대- 짐승의 피, 안식일과 매월삭일, 대속죄일
구약시대에는 안식일마다 죄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림으로 구약백성들은 죄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에는 한번의 제사를 드림으로 일주일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한달 동안 지은 죄는 매월 드리는 제사로 용서받았다. 또한 일년 동안 지은 죄들도 대속죄일에 한번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들이 용서받기 힘들다면, 구약백성들보다 더 불행한 자들인 것이다.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들은 일주일마다, 매월마다, 일년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루터의 회심
루터는 교회에서 남아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고행을 하였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로마카톨릭, 즉 천주교에서 개혁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세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종교개혁의 역사를 모르고, 이 구절을 오해하고 있다. 루터나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불신자였다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것이 아니다. 루터도 하나님을 믿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루터는 신학박사요 교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 믿은 후에 남아 있는 죄, 계속 짓는 자를 완전히 용서받고 싶어했다. 그 죄 때문에 몸부림치던 자였다. 그는 그 죄를 씻기 위해 수많은 회개와 고행과 금식을 하고, 로마를 순례하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17절이다. 이 17절 말씀이 그를 변화시켰고, 종교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한 구절이 역사를 완전히 바꾸게 된 것이다.
믿음을 선물로 주심에 감사(8절)
바울은 8절에서 로마교인들에게 감사로 인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로마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다른 축복들도 감사해야 하나 무엇보다 믿음을 주신 것은 결코 무분별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다.
내 하나님(8절)
바울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신자의 특별한 권리이다. 이 특권을 오직 신자에게만 주셨다. 바울이 드린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이 표현을 인정하셨다.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사야의 하나님으로 불렀다(사37:4). 또한 다니엘에게도 하나님은 다니엘의 하나님으로 불렸다(단6:20).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의 설교에 대한 신뢰를 확립시키기 위해서 맹세를 덧붙인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그리스도의 맹세 금지명령에 대한 바른 뜻
그리스도께서 맹세를 금지하신 것은 율법의 참된 준행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의도일 뿐이었다. 맹세들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가 아니었다. 율법은 맹세를 허용한다. 그러나 위증이나 맹세에 관한 무익한 서약만은 정죄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맹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맹세에 있어서 사도들이 보여준 진지하고 경건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른 곳에서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1:23)라고 말하고 있다.
경건과 불경건
두 종류의 사람들의 있다. 하나는 경건한 자들이며, 또 하나는 위선자들이다.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들의 직분을 신실하게 수행한다. 또한 고난을 참고 인내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속은 비어 있으며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 직분을 신실하게 수행하지 않는다. 고난이 올 때 도망간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감히 거짓 맹세를 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을 불경건하게 조소하는 사람들은 뻔뻔스러운 만큼이나 확신 있게 한낱 구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 로마 사람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경건(devotion, 라틴어 devotio는 헌신이나 경건등으로 번역함. 한글번역판은 신심으로 번역함)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그의 영(spirit-한글번역판은 심령)을 외형적인 경건의 모양(external appearance of religion)과 대조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체하고 겉으로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는 그가 심령(heart)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a sincere worshipper of God)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하나님을 신실하고 경건된 마음으로(with sincere devotion of heart) 하나님을 섬겼다고 자랑한다. 이렇게 신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 경건이(true religion, 여기서 라틴어 religio는 경건이나 종교등으로 번역됨, 한글번역판은 종교라 번역함)요 바른 예배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건(devotion, 한글번역판은 신심으로 번역함)을 말하여, 로마 사람들이 그의 맹세를 보다 잘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였다. 거짓증거는 불경건한 사람들(the godless)에게는 하나의 웃음거리에 불과하지만 경건한 사람들(the devout)에게 천 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 자신의 모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맹세를 할 때마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것에 합당한 영광을 보유할 수 있도록 우리는 경외하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이 있는 경우에는, 그의 이름에 대한 참된 존경심도 있다. 바울은 그가 맹세를 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신성과 경외감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불경건한 자들의 경우처럼 그가 경거망동하게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고 있는 것으로 그가 말한 것과 같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섬김이 단순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의 직무에서 한 증거를 보여준다. 그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킴에 있어서 비난과 궁핍과 죽음과 증오등, 모진 역경들을 모두 그가 주저하지 않고 감내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경건(devotion, 한글번역판은 앞에서는 신심으로 번역하였으나 여기서는 헌신으로 번역함)의 가장 완전한 증거였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하나님을 섬겨 헌신하였던(devoting his service to God)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섬겨 예배하는 것 외에 다른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던 외식자들(the hypocrites)과 자신을 구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이 야심이나 그와 같은 종류의 것에 의하여 마지못해 예배하게 된 까닭에 그들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진실되게(faithfully and from the heart) 수행할 수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은 그의 가르치는 직분에 성실하다(sincere in his office of teaching)는 것이다. 이는 그가 그 자신의 경건(devotion )에 대해서 말한 사실이 본문의 이 특정한 경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고 귀중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들을 때, 그들에게 적지 않게 격려를 줌에 틀림이 없는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만일 복음의 사역자들이 수고가 최고의 예배 행위로 고려될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그 무엇이 그들을 가로막아 그렇게 섬기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복음을 “그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의 영화롭게 된 것이 보답하여 성부께 영광을 돌리도록 성부에 의해서 택정된 것이다(He is appointed by the Father)."
신령한 은사(10-11)
11절의 “신령한 은사”는, 그가 복음 전하는 것과 권하는 것과 예언에 대하여 소유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던 그 능력들을 의미한다.“ “그는 가장 크게 진보한 사람들 역시 옆에서 주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매우 도와주고 싶어 한다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엡4:13) 견고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주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을 겸손케 하시고, 그리고 그러한 겸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의존해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His providence)를 그들에게 믿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의 계획들을 자주 꺾으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바올이 여기서 사도들이 예수님께 보냄을 받아 거두도록 되어 있었던 그 열매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바울은 열매를 그 자신의 것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 열매를 거두었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신자들의 가장 참된 특징이다. 그들의 온갖 행복은 주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이 다른 이방인들 중에서 그에게 일어났었던 것을 회상한다. 이는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무익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그들에게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의 전도 여행이 아주 많은 이방인들에게 유익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무식한 자가 결코 이 학교(school)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학식있는 자도 터무니없는 이해로 말미암아 그것을 피해서도 안된다.”
15절. 나는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15절에서 로마성도들을 향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인가? 보통 복음 전도는 불신자를 향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불신자가 아니라, 로마 성도들을 향하여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왜 그러한가? 복음을 다 아는 성도들이 또 다시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해답을 하고 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여호와의 팔(사53:1)의 계시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세상은 철학을 조롱하지 않는다. 세상은 철학을 좋아하고 놀랍게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철학이 아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사람들은 싫어한다. 교인들 중에 그러한 사람도 있다. 복음 선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강단에서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복음, 아들의 복음이다.(9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1장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십자가가 왜 거치는가?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남아있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믿을 때에 사영리와 같은 것으로 구주를 고백하면 되었지 또다시 무슨 십자가의 복음이 필요한가 생각한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능력과 기적과 사회교양과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성도들 안에 남아있는 죄를 알지 못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절)” 희안한 표현이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조금만 윤리적인 말을 해도, 짜증내듯이 말한다. “설교 좀 그만해” 설교를 단지 듣기 싫은 말로, 짜증나는 말로 생각하는 시대이다. 오늘날 그래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오히려 세상의 경영학과 철학과 수많은 것들을 곁들여서 아는 척을 해야 좀더 고상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오늘날에는 코미디를 흉내내면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듯이 설교를 해야 성도들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사이비들은 예언을 한다면서 무당처럼 “목이 쉰 소리로, 오히려 권위있게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것에 미혹된 사람들은 목사의 설교는 무시하고, 예수 무당들의 예언은 더 수준 높은 영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목사는 능력이 없는 말쟁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16하반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구원
구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소테리안이다. 이것은 구원, 구출, 구조, 석방, 보호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원과 반대되는 말이 바로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반대되는 말로 구원이 사용되었다. 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죄로 부터의 구원은 죄의 책임 다시 말하면 죄의 댓가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또한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것을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나는 구원받았다(과거), 나는 현재 구원받고 있다(현재). 나는 구원 받을 것이다(미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를 의미한다.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구원을 단순히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얻을 수 있다니 말이다! 저 높고 높은 하늘, 저 높고 높은 천국을 어찌 사람이 말로 갈 수 있을까? 저 높은 하늘을 가기 위해서 무엇인가? 높이 높이 행위나 무엇인가로 높이 높이 쌓아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기도의 단을 쌓든, 선한 행위의 공덕을 쌓든 말이다. 무엇인가 뭐를 쌓고 그것을 밟고 올라가야 될 것 아닌가? 그리고 또한 죄인이 어찌 그 높은 하늘에 갈 수 있을까? 죄인이 거룩하고 불꽃같은 눈으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갈 수 있는 자, 구원 받을 수 있는 자는 단지 그 복음을 믿는 자가 갈 수 있다고 하신다. 연약한 목사의 복음 선포를 듣고, 연약한 사람의 말을 듣고 믿기만 했는데 구원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말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정하시되 사람이 전하는 말로 구원 받도록 작정하셨다.
왜 하나님은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나 강력한 천사가 나타나서 강단에서 설교하게 하지 않으시고, 연약한 목사를 세워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가? 그것은 사람의 겸손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연약해 보이는 목사의 입술에 하나님의 복음을 두셨다. 그리고 이 복음 선포를 믿는 자, 설교를 듣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은 오늘날도 시내산에서 나타나듯이 불과 연기로 나타나실 수 있으셨다. 그리고 온갖 희안한 기적과 능력으로 사람들을 떨게 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힘이 없어 보이는 연약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입에 그의 능력의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이 복음을 선포하는 자의 말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여기서 바울은 능력에 해당하는 말로 단순히 힘을 뜻하는 에네르기아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역동적인 능력이라는 오늘날 다이내믹이라는 뜻을 가진 뒤나미스이라는 말을 썼다. 사도 바울은 원래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죽이는 데 합법적인 살인 증명서를 받으러 다메섹으로 갈 정도로 열정적인 박해자였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폭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성령이 쓰시는 도구는 바로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 19-20절에서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여도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죽은 문자가 아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겨자씨 한 알과 같아서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어마어마한 역사를 이룬다. 왜냐하면 비록 작은 씨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생명의 말씀은 택한 성도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만 하면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한다. 말씀 자체가 일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말씀 자체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이 역사한다. 말씀 자체가 일한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시대에 일군을 세우셨다. 이 일군들은 제사장들로서 죽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군들은 살리는 일을 한다.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히 율법 조문이 아니라, 살리는 영적인 것이다.
복음의 능력- 두 번째 창조-회복(구원)의 말씀
하나님은 두 번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말씀을 창조하셨다. 깜깜한 공간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물들에게 명하여 생물이 번성하게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늘에 새가 날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말씀으로 천지말씀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능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처음창조는 천지창조이며,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두 번째 창조를 하신다. 이 창조는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가운데, 이 세상 가운데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다시 두 번째 창조를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 창조가 처음 창조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창조는 복음으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처음 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또한 두 번째 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
두 번째 창조의 말씀은 복음이다. 어떻게 창조하시는가? 복음으로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복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도구이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은 말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단지 이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를 주신다.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였는데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다. 구약시대는 보는 예배를 드렸다. 짐승의 피를 드리는 제사를 보는 것이 예배였다. 그러면 죄용서를 받았다. 예배 중에 죄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보는 예배가 아니다. 오히려 듣는 예배이다. 하나님의 참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복음을 듣는 예배이다. 이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 이 죄사함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원죄뿐만 아니라 자범죄까지도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의 예배의 핵심은 기도나, 찬송이나, 헌금이 예배의 핵심이 아니라, 죄사함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가 핵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여기서 모든 믿는 자에는 모든 종류의 인간이 들어있다. 황제나 총독이나 죄수나 노예나,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의 총독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감옥에 들어가서 간수나 죄수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노예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힘써 복음을 전하였다. 오늘날 이 말은 불신자, 새신자, 오래된 신자, 어린이, 젊은지, 노인, 남자, 여자, 낙심한 자, 시험든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어떠한 누구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기서 본문은 모든 믿었던 자라고 하지 않는다. 과거에 엄청나게 잘 믿었던 자가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는다. 현재 지금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다고 하신다.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본문은 모두 현재이다. “모든 믿는 자” 현재 믿고 있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현재 구원을 주시고 있다고 하신다. 즉 현재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지금 구원을 주시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구원은 한번 얻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더욱 더욱 풍성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구원은 근본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구원은 성경에서 보통 죽음과 반대이다. 구원은 그러므로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어떻게 그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가? 바로 복음 선포를 통하여 주신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는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은혜의 방법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인데 성만찬과 기도 외에 첫 번째를 목사의 복음 선포로 놓는다. 하나님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를 주시는가? 바로 복음 선포이다. 우리가 은혜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을 듣는 것 자체가, 그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자녀에게 특별히 하늘의 양식을 주신다. 그 양식을 주시고, 그 양식이 마음에 심겨져서 30, 60, 100배로 자라게 하시고 복을 주신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에게 그 복음을 듣는 기회도 주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복음을 혹시 듣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이 마음에 심겨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복음은 생명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지 못하고, 듣고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인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도저히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세상으로는 미련하게 보이는 방법이지만 이 복음의 전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17상반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여기서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의의 전가를 의미한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이다. 히브리어로는 체덱으로 언약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언약 백성에 대한 신실하심이다. 인자와 성실로 말할 수 있다. 아담은 언약을 파괴하였으나, 하나님은 언약 관계를 회복하기로 하셨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에 절망하였다. 이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에 복음이 아니라 저주로 들렸다. 그러나 본문의 의는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는 의이다. 여기서 이 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케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시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하나님의 의를 복음 선포를 듣고 믿는 자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풀어주심으로 나타나는 그의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값없이 화목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의이다(의의 전달). 또한 하나님의 의는 법정에서 인정되는 의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나타난다
나타난다는 의미는 계시한다는 의미이다. 계시를 떠나서는 기독교가 없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죄인이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는 희안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 말은 복음 선포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복음이 선포될 때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덮입혀 주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죄인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된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단지 복음을 듣고 믿었는데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된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단지 가만히 앉거나, 서서, 누워서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듣고, 믿었는데 그냥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는가? 그냥 얻은 것이다. 공짜로 얻은 것이다. 선물로 얻은 것이다. 조건이 없이 얻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것이 공적이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 믿은 것도 내가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믿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서 믿어진 것이다. 성령께서는 내적교사로서 복음을 효과 있게 하신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칭의-의롭다 칭함받는다(법정적 칭의)
여기서 의롭게 된다가 아니라 의롭다 칭함받는다는 의미이다. 사람의 본질이 신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법적으로 칭하신다는 것이다.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지만, 그 죄인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한다는 것이다.
계속적 의의 전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 말은 계속적 의의 전가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한번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칭하시지만, 또한 계속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의의 전가가 계속되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모든 죄의 용서는 복음 선포를 믿음으로- 원죄와 자범죄, 큰 죄, 작은죄 모두
사람의 원죄가 언제 어떻게 용서받는가? 복음 선포를 듣고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면
남아있는 죄가 어떻게 용서받는가? 그것도 역시 복음 선포를 듣고 믿음으로 얻는다. 구약 시대에도 매 주일 안식일에 제사를 드림으로 죄용서를 받았다. 그런데 하물며 신약의 신자들이 원죄를 용서함 받고 계속 회개와 고행을 통하여 죄용서를 받지 못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하나님은 버려두시겠는가? 그렇지 않다. 매주일 목사를 통하여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믿으면 자범죄가 용서받는다. 원죄 뿐만 아니라 자범죄도 복음선포를 통하여 죄가 용서받는다. 모든 죄는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이다. 원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선행이 필요 없듯이, 마찬가지로 자범죄와 남아있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수많은 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죄사함의 복음을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원죄를 용서받은 이후에도 역시 남아있는 자범죄도 모두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조차도 그 회개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오직 죄사함의 복음에 근거한 믿음으로 하는 회개여야 인정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서 말씀하신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는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5-26)”
참 회개
회개도 하나님의 아들의 죄사함의 피에 의지해야 한다. 회개도 믿음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회개도 복음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죄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에 의지한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는다.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음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단지 자기의 잘못만을 고백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바라보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일 뿐이다. 가룟유다의 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죄를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피로 말미암는 죄사함은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것이다.
신약시대- 예수님의 피로 매일 매순간마다 더 풍성히 용서
신약시대에는 더 훨씬 풍성한 죄사함이 있다. 신약은 구약보다 더 확실한 제물이 있다. 더 확실한 피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약 시대의 짐승들의 피보다 더 풍성한 죄사함을 준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이다. 일주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신다. 죄는 어떻게 용서받는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다. 예수님의 피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효력을 미치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뿌려주셔야 한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주시는가? 바로 주의 사자, 주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예수님의 피와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말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음은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죄사함을 주고 생명과 구원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그 효과가 미치는 것이다.
신자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은 교인들에게도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윤리설교를 한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윤리설교는 율법설교이다. 윤리설교도 필요하다. 그러나 윤리설교만 해서는 안된다.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17중반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는 처음도 믿음이요 나중도 믿음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했다고 나중에는 선행으로, 노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믿음이나 나중에는 선행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처음도 믿음이요 나중도 믿음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수많은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선행 자체가 아니라, 그 동기가 믿음이 아니면 오히려 위선에 불과하고 가증한 것이다. 선행도 믿음에 근거한 선행이어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처음에는 연약한 믿음이었으나 점점 더 성숙한 믿음으로 라는 말이다.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믿음도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하여 이루어 진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꾸준히 들음으로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믿음의 열매가 풍성해 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한 믿음에서 점점 더 성숙하고 의의 열매가 풍성한 믿음을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힘써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7하반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말한다. “기록된 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의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만을 의롭게 보신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의롭다, 착하다고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판단과 다르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를 의롭다고 보신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오직 믿는 자이다.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뿐이다.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인 무엇인가? 오직 믿음뿐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뿐이다. 의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이다.
어떠한 사람이 의인인가? 세상에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의인으로 본다. 또한 인간적으로 드러난 죄를 짓지 않고, 과격하지 않으며,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들, 조용한 사람들을 의인으로 여기고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만을 의인으로 인정한다.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 또한 한번 의인으로 인정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한번 의인 끝까지 의인이다.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처음도 믿음이요 중간도 믿음이요 나중도 믿음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은 한 장에 한 단어를 수십번씩 사용하였다. 그 단어는 “믿음으로”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말한다. “교회의 서고 넘어짐은 이신칭의 교리에 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살리라라고 미래형으로 쓴 뜻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매일 매일의 진보를 의미한다. 또한 살리라라고 미래형으로 쓴 뜻은 삶의 계속되는 영원성을 의미한다.
. 루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원죄뿐만 아니라 자범죄도 용서받는다.
이러한 때에 루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회의 신학박사요 교수였다. 그도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를 씨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였다. 금식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도 하고, 고행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었다. 많은 고민 속에 지내던 어느날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읽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말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이 루터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루터는 마음에 죄사함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도 수많은 회개와 고행과 헌금이나, 성모 마리아의 도움이나, 성인들의 도움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씀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믿기 전에 지은 죄도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용서받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도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용서받는다. 만약 이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심각하다. 복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피의 가치가 무한하므로 어떠한 죄도 충분히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믿기 전의 죄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까지도 넘치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도 받아주신다. 우리의 찬양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도 받아주신다. 기도도 우리에게 그의 피를 인하여 죄사함과 복과 은혜와 평강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과 봉사도 받아주신다. 우리의 선행과 봉사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씻어주신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