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천 산책․1 <자유공원>
김윤식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 만국공원, 곧 자유공원에 대해 일말의 감회라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5~60년대 이 공원에 대한 추억은 인천 사람 대부분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축항과 월미도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우거진 숲, 맥 장군상. 길가에 앉아 사주팔자를 점치던 판수와 점쟁이들, 완장을 두른 유료 사진사들. 찐빵 행상들, 냉차 장수들. 그리고 박보장기, 주사위놀이 따위로 산보객을 유인하던 야바위꾼들에 대한 기억.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 자유공원은 그나마 이렇게 인천의 만상(萬象)이 자유롭게 집합하던 곳이었다.
그뿐인가. 그 시절 자유공원은 딱히 갈 곳도, 갈 여유도 없는 인천의 신혼부부들의 기념사진 촬영 코스이기도 했다. 식이 끝난 신혼부부들은 곧바로 이리로 올라와 월미도를 배경으로, 또는 맥 장군상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하얀 드레스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신부와 애써 의젓하려는 신랑의 모습, 울긋불긋 색 테이프로 치장한 대절 신혼 택시, 구경꾼들.
이 공원에 대해서는 또 이런 기억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벚꽃이 필 무렵부터 한여름 녹음이 우거진 때까지, 야간에 중고생들의 공원 출입은 무기정학이라는 엄포와 함께 훈육주임 선생에 의해 엄중하게 금지되었던 것. 이 같은 단속은 아침마다 적지 않은 수량의 버려진 여자 속옷 등속을 청소부가 수거해 간다는 야릇한 소문과 관계가 있었다.
1888년, 비록 외국인의 손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한국 최초로 조성된 서양식 공원인 이곳을 부르던 명칭은 각국공원. 각국지계 내 공용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만국공원이라고도 불렀고, 왜정 때는 서(西)공원, 그리고 해방 후 다시 만국공원이었다가 1957년 인천상륙작전의 주인공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서면서 자유공원으로 부른 것이다.
1930년대 중반까지 한용단 야구팀을 통해 민족의 울분을 발산했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 웃터골 운동장과 1905년 한국 최초로 기상 관측을 시작했던 곳이자, 매일 오포(午砲)를 쏘아 오포산이라고 불리던 건너편 응봉산의 인천측후소. 그밖에 의사로서 크게 칭송을 받았던 약대인(藥大人) 랜디스 박사와 성공회, 홍예문, 세창양행 숙사, 인천항 랜드 마크 인천각, 옛 제물포구락부 등이 모두 이 일대에 자리 잡았었는데, 오늘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또 남은 것은 남은 대로 풍운의 인천 한 세기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