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경상대, 그 캠퍼스 시편들
강 희 근(국어국문학과 교수.시인)
필자는 오는 8월말로 32년 4개월 경상대학교 교수직을 마감한다. 5월 29일 있었던 고별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그동안 경상대학교는저의 이름과 나란히 다니는 이름의 친구이기도 하고 이름의 집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과 사색의 출발이기도 하고 그것들의 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년으로 현실적으로는 그 집에서 사는 삶이 마감되지만 저의 정신이나 연구나 문학의 주소로는 여전히 유효한 불멸의 성채로 함께 가는 집이 될 것입니다."
필자의 '이름의 집'인 경상대학교는 또한 '생활과 사색의 집'이기도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필자의 시 역시 이곳에서 발원해 나오는 소리요 색깔일 것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얼마 전 우리들이 겪었던 기억하기 조차 끔찍한 '로우스쿨' 상황이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피켓을 들었다
피켓은 이상한 나라 사람들의 연장인 줄로
알았다
그 나라의 연장은 매우 단순했다
여나므 글자 들어갈 판대기에 팔 길이 각목 달아맨
손으로 드는
들고 서 있으면 되는 목질이었다
피켓을 들었다
피켓은 이상한 나라 사람들의 언어인 줄로
알았다
그 나라의 언어는 간결한 단문이었다
-<피켓을 들고>에서
피켓을 들고 '우리'를 위해 외치는 일은 남의 나라 일로만 생각되었지만 사랑하는 대학이 흔들리고 있을 때 "생애의 교양 밀어넣고 / 생애의 길 꼬부려 넣고" 막무가내 피켓을 들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입에 있는 잇빨만 가지고 / 발에 있는 발톱만 가지고 우우 달려갔다가 왔다"라고 그 일어섰던 어찌할 수 없는 함성이요 노도임을 밀고가듯이 말했다. 사랑이다.
그 사랑은 가을 캠퍼스의 색채에도 머물고 활발히 걸어가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머물고 새로 발령한 신임교수들에게도 머문다.
아침,
캠퍼스가 지베르니의 정원처럼 물들고 있다
걸어가는 학생들이 지베르니의 정원이다
새로 오는 음성들,
신임 교수들의 얼굴에 어리는 빛깔이 더 짙다
물감처럼 붉게 번지는 노을이 저녁의 은유라면
저들의 빛깔은 아침의 은유다.
-<저들은>에서
경상대 캠퍼스의 가을은 지리산 한 계곡과 같은 때가 있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모네의 '지베르니의 정원'이 떠올랐다. 짙은 색채에 주변의 은은한 색감은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따뜻이 풀어준다. 캠퍼스의 이 색채는 대학의 미래이기도 하고 다가오는 세대의 채색된 꿈이기도 하다. 정원은 흘러가는 것에 대해 잠시 머물게 하는 한 컷의 감동이거나 전율이기도 하여 학생들의 심상으로 들어가는 것도 있고 신임교수들의 심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있어 보인다. 어찌 단순한 한때로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럴 때 필자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라면을 먹고 싶어진다.
라면을 먹으러 학생식당으로 간다
도서관 지나 교양동 지나
가벼운 걸음 학생식당으로 간다
밥은 언제 어디서나 먹지만 먹을 때 마다
먹을 게 없나 궁리하는 것,
(중략)
오늘 혼자,
혼자이고도 눈높이로 진실을 만나는 날
라면을 먹으러 학생식당으로 간다
무너질라 로우스쿨 신축 공사장 지나
느티나무 촘촘한 길 학생식당으로 간다
-<라면>에서
필자는 강의 중에 라면 이야기를 더러 하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식당이나 그 식당이나 라면의 맛은 불변이라는 점, 그것이 우리를 안심케 해준다는 말, 학생들은 곧장 "그 말씀이 맞습니다" 맞장구를 쳐주었다. 우리들은 그 즉시 '불변'에 대한 화두에서 서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박수는 새내기들이 더 크게 쳐주었다.
대학 새내기
교양과목 들으러 오는 그들은 아직
참새다
입시 우리에서 갓 빠져나와
보고 들은 것 신기하다 귀 쫑긋 세우고
캠퍼스 새봄,
순 돋은 것 순 돋아오르는 것 그들 귓볼인데 경이롭다고
새로 펴드는 책장에서 먼 산 청운사 박목월이 푸드득 청노루로 뛰는 것
그들 물 찍는 소리,
소리인데 경이롭다고
(중략)
날아라
새눈박이 크게 눈 뜨고 오르는 그들은
아직 참새다
낯익은 그리움으로 아직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일 없는 그리움 물고 날으는
그들, 그들은 참새다
-<그들은 아직 참새다>에서
새내기들 스스로가 경이로운 존재인데 캠퍼스 안에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고 귀 쫑긋 세우는 그들이 얼마나 귀여운가. 이 새로운 눈에서 나오는 광채가 우리들의 거룩한 목표이고 이정표인 것을. 그리하여 필자는 저들과 함께 하는 종강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었다.
아, 저들과 함께 했던 선생들은 저들 안에서
꽃이다 저들이 아니면
아무데서도 필 수 없는 불임(不姙)의 꽃.
선생들도 학기처럼 지고 있다 눈물처럼
눈물로 어려 있다
-<종강>에서
이렇게 필자는 대학의 일상에서 그 중심에서 시를 노래했다. 이제 필자는 정년을 맞아 필자의 살로, 피로, 뼈대로까지 엉겨 들어온 캠퍼스를 뒤에 두고 떠날 것이다. 빚진 자의 길은 가면서 빚을 갚아가는 것이 맞으리라.
사랑하는 캠퍼스와 학생들이여. 안녕. 그대들만이 필자의 가슴에 피는 장미꽃같은'포에지'이니......
첫댓글 詩를 통해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캠퍼스의 꿈과 희망을 노래하신 그 시어들이 너무 곱습니다. 사랑했던 캠퍼스를 떠나는 교수님의 감회를 느끼게도 됩니다. 교수님이 머물었던 자리는 詩와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며 아름다운 노래로 남을 것입니다. 건강과 즐거운 노후를 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