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심사
박 종 성
‘술’처럼 평판이 엇갈리는 게 있을까?
어떤 이는 ‘신과 대지가 인간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극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마약과 같은 존재’라고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술은 40년 넘게 애환을 함께 나눈 나의 절친한 벗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친구의 정체를 확연히 알 수 없다. 친구는 때때로 친근하게 다가와 마음을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그런 게 하도 고마워, 깊은 정을 줄라치면 이를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얄궂은 심사를 드러낸다. 정신을 혼미하게 흐려놓고, 몸을 가누지도 못 할 지경에까지 빠트려 놓는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등산을 마치고나서 흔쾌한 기분에, 여러 명의 회원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과음을 하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2차였다.
만취상태에서 밖으로 나가, 농협의 현금자동인출 코너를 찾아 들어갔다. 돈을 찾으려는데 눈이 가물거려 자판을 제대로 누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나왔는데, 그만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신분증이 든 지갑을 거기에 두고 나온 것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주민등록증, 명함 등이 들어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소지품을 확인해보니 셔츠 주머니에 신용카드만 있을 뿐,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리나케 서둘러, 택시를 타고 그 곳을 찾아갔다. 그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쓰레기만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지갑에 명함이 들어 있으니 어쩌면 반가운 연락이 오지 않겠느냐는 바람이다. 그 날은 지루하고 긴 하루였다. 그런데 고대하던 연락은 전혀 없었다.
서서히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언론에 보도 된 주민등록증 악용 사례가 문뜩 떠올랐다. 습득한 주민등록증을 이용하여 신용카드를 만든 후, 과다한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고가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결국에는 귀책사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수심이 가득한 아내가 한 마디 했다. 분실 신고를 빨리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아차, 그렇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인터넷에 접속하여 주민등록증 분실 시 대처요령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도 신속한 분실 신고를 할 경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지체 없이, 동사무소를 찾아가 주민등록증 분실신고 및 재발급 신청을 하였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에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염려했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아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또 한 번, 사고를 경험했다. 과음으로 인한 열쇠 분실 사태였다.
12시를 넘긴 늦은 밤, 집에 도착하여 아파트 현관문을 열려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려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다른 주머니에 넣었나 싶어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아내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 생각을 접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깊은 잠이 들었나싶어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집 전화와 이동전화 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으나 묵묵부답 이었다. 집을 비운 상태에서 전화까지 받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궁여지책으로 아파트에서 내려가 경비실에 들렸다. 열쇠를 분실한 상태에서 집에 사람도 없으니 마땅한 방도를 찾아 달라고 경비원에게 하소연했다. 그는 난감한 입장을 취하며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내 처지만 궁색하고 초라할 따름이었다.
임시 거처할 방도를 찾던 중, 그 날 비번인 다른 경비원 생각이 떠올랐다. 염치불구하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야심한 시각에 전화를 했건만 그는 살갑게 응대를 했다. 나의 딱한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이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정말 그가 왔다. 나를 보자마자 당장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눈치 볼 것도 없어 마음까지 편했다. 그런데다, 막걸리 상까지 차려오는 게 아닌가! 취중에도,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어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20여분 정도 지났을 때 내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방금,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야기 인 즉, 내가 늦게 돌아올 것 같아 친구를 만나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보니 12시를 넘겼고, 전화가 진동으로 되어 있어 뒤늦게 전화 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렇게 열쇠분실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튿날, 만물상에 연락해서 아날로그 열쇠 방식을 디지털 번호 방식으로 전환했다.
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았다. 술을 마시면 기분 좋은 이완 상태를 느끼다가 점차 말이 많아지고 자제력을 잃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술이 더 들어가면 청력이 둔감해지고 발음도 부정확해지며 물체도 흐릿하게 보인다. 뒤 이어 몸의 균형을 잃게 되고 급기야 의식까지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의 지식과 이성, 판단 작용을 하는 뇌의 신 피질 기능이 술의 작용으로 마비되기 때문이라 한다.
술은 잘 마시면 약이요, 잘 못 마시면 독이라 한다. 과음이나 폭음으로 정신과 몸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대응책을 가져야 한다. 기분 좋을 만큼 적당히 그리고 자리를 가려서 마시는 게 현명한 처사다. 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인생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