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해월스님을 도와서 가끔 공주 불교 관련 근세자료 등을 조사해서 올리는 최영수입니다. 옛 신문을 검색하면서 마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듣는 옛날 이야기 처럼 재미있고도, 생생한 우리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관련 자료를 검색하곤 하는데 요 며칠 전 원래 공주에 있었던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생긴 파란 만장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충청남도 도청은 합일병탄 후 충청도 감영 자리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현재 공주사대부고 자리입니다. 공주사대부고 자리는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감영, 한일병탄 후 도청, 그 후에 일제의 신사, 해방 후에는 공주사대 그리고 현재는 공주사대부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사대부고 과학관이라는 하는 건물(현재 기숙사 자리) 뒷 쪽에 신사 기둥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공주에 사시는 분들이나 고향인 분들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희 집사람도 공주가 고향에 공주사대부고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고 있더라고요. 하물며 요즘의 젊은 친구들은 더욱 더 모르지 않을까요? 저는 공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3년을 다니고, 일생을 가름침인 불교를 만난 곳이고 처가이기도 해 애착이 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는 바라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흥미있게 보고 있어, 많은 분들이 이 파라만장한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제가 읽고 찾은 자료 중심으로 지금부터 풀어볼까 합니다.
지금 보시는 건물이 옛 도청 건물입니다. 충청남도 포정사라고 돼있지요. 충청감영에 있던 원래 건물 같고 그 건물을 그대로 도청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뒤에 보이는 산이 공주 분들이라면 다 아시는 봉황산입니다.
위 사진과 같은 건물입니다. 포정사는 감영(관찰사)이 있었던데 쓰였던 현판인데 일제가 도청으로 바꾸면서 금남루(錦南樓)로 바꿔 달았다고 합니다. 왼쪽에 안 어울리는 건물은 공주경찰서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아마도 포정사 뒤의 도청 사무실 인듯 하고요.
충남 도청 정문입니다. 눈썰미 빠른 분은 아실 것 같은데 현재 공주사대부고 정문은 옛 도청 정문입니다. 공주사대부고 역사가 50년 좀 넘었는데 정문은 100년이 넘었네요.
그럼 이렇게 잘 있던 도청이 왜 대전으로 이전하게 되었을까요?
잘 아시다 시피 조선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당연히 충청도의 가장 큰 도시인 공주를 거치게 돼 있었습니다. 물론 공주역이라는 기차역도 계획이 돼 있었겠죠. 하지만 지역 주민들 (특히 유림들)의 반대로 철도는 그 당시 넓기만 하고 도시기능은 거의없었던 대전 지역을 거치게 돼고 기차역도 대전역이 생깁니다. 경부선의 중간지점으로 호남선의 출발점으로 대전은 그야말로 국토의 중심지역이 되고 상업지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신도시가 되겠는데, 일제병합시대이다 보니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살게 되었습니다. 1923년 공주 지역인구는 8,304명(한국인 6,548명, 일본인 1,605명)이고 대전 지역 인구는 6,728명(한국인 2,114명, 일본인 4,798명)이었다고합니다. 따라서 일본인들 중심으로 대전으로 도청이전에 대한 로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미 경상남도의 경우 진주에 있던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 가게 되면서 지역 여론을 몰게 되고, 그러나 보니 소문이 퍼져서 공주 분들이 발끈하게 됩니다.
충청남도 북도를 합병하여 중간 지역인 조치원에 도청을 이전한다는 소문에 공주 유지들이 총독부를 방문 총독을 못보고 총감을 만났는데 사실무근이라고 했다믄 동아일보 1928-12-18일자 기사입니다.
다음 글에 본격적으로 도청 이전과 관련 공주의 반대, 대전의 유치 운동 그리고 주변 도시 조치원과 천안 강경 등의 또 다른 유치 운동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어디서 이런 귀한 자료가 나왔는가요 허허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최영수님 덕분에 소중한 자료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