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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거제에 닿으니 감청빛 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이 서둘러 마중을 나와 있다.
이른 시각인데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한 신현읍 고현에서
다시 14번 도로가 이끄는 옥포를 지나 장승포로 접어든다.
해안의 일기는 가늠할 수 없는 법, 몽실몽실 구름이 피어나는가 했더니
이내 사위는 검은 바람이 몰고 온 짙은 해무에 휩싸인다.
불현듯 수년 전 이즈음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대학 졸업 후 강원도 거진으로 떠나 소설 쓰기에 매달리고 있던
친구를 찾아가 무작정 길 떠나기를 재촉했던 때가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옷 몇 가지만 꾸린 엉성한 여행자 차림의 고마운 친구를 마주하고,
격조했던 그간의 안부를 묻기보다
막연한 여행에 대한 불안과 어설픈 기대들로 수다를 풀어놓았었다.
그때는 짙은 안개의 배웅을 받았었던가.
이후로 동해에 면한 도로와 간간이 내륙의 길들을 훑고 내려오기를 며칠.
거제 해금강 부근에 숙소를 잡고는 일찍 쉬겠다는 친구를 두고
이곳 장승포까지 거슬러 올라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쏟아져 내리던 별과 파도소리를 아끼며 들었었다.
그러는 사이 어깨를 누르던 기원 없는 불안감과
결정할 수 없었던 어떤 선택들은 거짓말처럼 조용히 잦아들었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숙소로 향하던 나를
친구와 주민들은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그렇게나 반가이 맞았었다.
잠시 지난 시간과 조우하는 사이 안개는 때로 옅어졌다 짙어졌다 하며
쪽빛 눈부신 바다를 못 보고 여행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이어 다가오는 지세포, 구조라, 학동 아름다운 포구들은
지난 몇 번의 기억과는 또 다르게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아니 오히려 회색빛의 하늘을 그대로 받아들인 흑진주 몽돌 위를
파도가 차란차란 쓸어내리며 소리를 내는 학동은 쨍한 날씨보다
더 분위기 있는 해안풍경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왼편으로는 해안을 끼고, 오른편으로는 원추리와 금계국,
산수국과 자귀나무의 속살거림이 귀를 간질인다.
이어지는 철지난 동백 숲의 나무는 꽃이 없어도 싱그런 단아함이 곱다.
다음 번엔 붉고 따뜻한 동백을 만나러 지심도며,
1018도로로 연결되는 섬의 구석구석도 다녀보리라 다짐한다.
햇귀가 조금씩 비친다. 함목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갈곶마을로 접어든다.
도장포(드라마 ‘회전목마’ 촬영지인 바람의 언덕이 있다)선착장을 스쳐 지나,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분교에 조성한 해금강테마박물관을 들러보기로 한다.
이곳을 돌고 나오면 얼추 날씨도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입장권을 끊고 입구에 들어서기까지는 생뚱한 테마 아이디어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허나, 1층을 빼곡하게 채운 명사들의 귀중한 학창시절 물품과
한국 근현대 생활자료 50,000여 점, 격동의 한국 100년사 사진전은
그다지 견결치 않은 의지들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던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발관겦맬??세탁소겢摹?잡화점 등의 공간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구분되어 있어서 유년시절의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양 기분 좋은 착각도 하게 하였다.
2층에는 중세시대의 범선 모형과 유럽 각 나라의 밀랍인형겣돛未?
가면겺?된??포스터 등을 전시해 두었는데 평소 궁금했던 많은 것들의 답이 그곳에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오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아져 있다.
이제 드디어 거제해금강(巨濟海金剛,1971년 국가지정명승지 제 2호로 지정)에 갈 수 있게 된 거다.
승선표를 끊고 유람선에 오른다.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마을에서 남쪽 약 500m 해상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섬으로 연접한 해금강은 사자바위, 촛대바위, 미륵바위,
두꺼비바위, 해골바위, 신랑겱탄菅牡?등도 유명한 볼거리지만,
섬의 북쪽으로 진입하여 가운데에서 90도 방향을 바꾸어 후진하며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십자동굴이 가장 압권인데,
운 좋게도 30%의 좋은 해상날씨를 오늘 만나게 된 것이다.
고고한 자태를 여전히 보이고 있는 천년송과 기암절벽에 뿌리내린
동백곀낭?석란겧憫嘶?등 희귀란 이야기며 바위 전설들을 듣다보니
일순간 등줄기에 서늘함이 느껴지고 눈 깜짝할 사이 하늘이 열십자로 갈라져 바다에 눕는다.
하~아 탄성이 절로 난다. 기막힌 절경이다.
돌아 나오며 시선을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바라보이는 만물상은
마치 이집트의 벽화를 가까이서 보는 듯이 그 흘러내린 곡선이 예술이다.
바닷물에 반사되는 태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
‘겨울연가’의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하기도 한 ‘외도 보타니아(外島 Botania:식물들의 낙원이라는 뜻)’에 닿는다.
원래 무인도였던 이 섬은 한 부부의 30년 가까운 사랑과 정성에 힘입어
1995년 해상농원으로 개장하였는데,
천연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아열대식물인 선인장, 용설란, 종려나무 등의
수목으로 그 경치가 아름다워 가히 한국의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곳이다.
주어진 1시간 30분 동안 산책로를 따라 베르사유 궁의 정원을 축소한 듯한
비너스가든을 지나고 사택을 지나 제1전망대에 이르니,
동백숲 울창한 외도 동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장포의 예쁜 등대도 경계를 잃은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애교스럽게 하얀 모습을 드러낸다.
파노라마 휴게실에 앉아 여름별미로 만든 김치말이 국수로
허기와 더위를 달랜 뒤, 천국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진 편백나무 계단을 내려올 땐
정원을 만든 애틋한 노력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대를 지나 해지는 저구마을로 접어들어 500m 길이의
곰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는 명사(明沙)해수욕장으로 향한다.
수심이 완만하고 파도가 약하여 해수욕을 즐기기엔 제격인 곳이다.
맑은 물과 고운 모래의 질감을 느끼기 위해 맨발로 걸어본다.
원래 옛 이름이 ‘밀개(조개가 많이 나는 해변)’였다는데
역시나 물놀이와 함께 조개, 게 잡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이
마주 댄 고개를 들다가 부딪히곤 하는 모습들이 재미있다.
노오랗게 터지는 웃음과 재잘거림으로 해변은 한바탕씩 소란스러워지곤 한다.
멀지 않은 곳 이곳의 황금빛 햇살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누구나 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노래한 이진우 시인가족이 산다는데
무작정 찾아가 볼까 하다 뜬금없는 생각에 당황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미치자 이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무지개가 자주 나타나 무지개포라고도 불리는 홍포(虹浦)로 접어든다.
홍포에서 여차마을 로 가는 길은 3.5km의 비포장도로를 포함하고 있는데
1981년 망산(望山)의 허리를 잘라 만들었다고 한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만큼 좁은 이 운치 있는 길을 가다
망산 전망대에 이르니,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여차마을 풍경과
매물도, 다도해, 대겮捻눼逾뎔?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펼쳐진다.
이곳이 거제도 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환상의 길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산 벚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대,소병대도를 바라보고 지키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여차(汝次)마을은
거제 해안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포구로,
400m 길이로 넓게 펼쳐진 여차몽돌해변과 동백숲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물이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으로 영화 <은행나무침대>에서
궁중악사 종문과 미단공주가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가야금을 물에 띄워 보낸 곳이며, 황장군이 종문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촬영했던 곳도 이곳이다.
그래서인지 여차의 몽돌 구르는 소리에서는 어떤 비장함 같은 것이 울려나오는 듯도 하다.
짧은 하루, 새벽부터의 서두름이었어도 거제의 남부면을 다 돌아본다는 건 역부족이었다.
거제가 중심이 된 남해바다는 한민족의 기상이 숨 쉬는 해상왕 장보고가 누볐던
민족정기의 원천인 것을, 짧은 시간 탓에 좁은 안목으로 돌아본 것이 못내 안타까운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