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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 (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 (門巖逸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2. 성장기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 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 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 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다산은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한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 가 되었다.
3. 관직
다산은 23세 때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 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 를 절약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향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 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23세때 甲辰年(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 의 배 위에서 다산과 사돈 관계에 있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으로 부터 처음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후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곧 손을 떼었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4. 유배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셋째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제자들 또한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5. 만년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 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 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6. 다산의 집안
나주정씨는 처음 본관을 압해(押海)로 하였으나 영조때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시 조(始祖)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6세(六世) 공일(公逸)까지 압해도 에 거주하였고 7세(七世) 원보(元甫)가 황해도 덕수(德水)로 이거하였다.
시조 이하 6세의 분묘는 압해도에 있었으나 고려말 압해도가 왜구의 침탈로 실토(失土)됨에 따 라 실전(失傳)되었다고 한다. 압해도는 본래 군치(郡治)의 섬으로 박씨, 정씨, 주씨, 홍씨 등이 본거지로 하였으나 고려조에 현치(縣治 )로 하였다가 현이 없어지고 나주 에 소속되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비운의 섬으로 지금의 행정구 역은 신안군 압해면이다.
다산이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다산의 선조 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었다. 처음으로 벼슬한 선조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11세)부터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12世), 병조판서 를 지낸 옥형(玉亨-13世),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14世),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 -15세),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16세),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17세),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18世)이 모두 당대의 선비들이 선망하던 옥당에 들었다.
옥당은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의 별 칭으로 당대에 글 잘하던 선비들이 임명되었으며 임금에게 경론(經論)을 강연하던 관 직도 겸하였다. 역대 문과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문(國朝文科榜文)>에도 옥당 에 임명된 급제자들의 이름 위에는 그 사실이 따로 표시될 정도로 옥당에 드는 것을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하지만 병조참의를 역임했던 다산의 5대조 丁時潤(1646~1713)이 만년에 마현(馬峴)으로 이주한 이후 고조 · 증조 · 조부의 3대 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숙종 이후 극심해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 을 잃은 남인이 겪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載遠) 때에 와서야 정조(正祖)의 즉위 로 남인계에 벼슬길이 트이자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선조의 공훈이나 특별한 배려 로 임명되던 제도인 음사(蔭仕)로 진주목사까지 역임했다.
7. 다산의 형제 집안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에게는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 남매가 있었다.
큰 아들 약현(若鉉)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1729~1752) 소생이 며, 둘째부인 해남 윤씨(1728~1770)에게서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 등이 있었다. 윤씨가 세상을 뜬 후 김화현의 처녀 황씨를 첩으로 삼았으나 요절 해 버리자 1773년 다산이 12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 려왔다.
이 분이 다산이 장가들 때까지 손수 부스럼이나 종기를 치료해 주고 친어머니 처럼 보살펴 준 서모 김씨로 형제 중에서 다산과 특별히 정이 돈독하였다.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황) 을 두었는데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다산의 집안은 혼맥으로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였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다산일가 가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다산에게 천주학을 가르쳐 주었 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 인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니 다산과는 사돈간이다.
다산에게 하 나밖에 없는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 교인인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에게 시집갔고 다산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니 이승훈은 다산에게 매부이자 사돈지간이 된다. 한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은 이승훈의 숙부가 된다.
또 백서(帛書)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다산의 조카사위이다. 16세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황사영이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의 딸(丁命蓮)에게 장가들었다. 황사영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 받고 알렉산드로라는 교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열일곱 어린나이에 진사에 합격해 임금의 사랑을 받았지만 천주교에 심취해 서울에서 교리서를 등사하며 나이 많은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때 수배되었지만 토굴에서 지내며 흰 명주에 조선교회의 박해상황을 알리고 서양제국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북경에 있는 주교 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그해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이때 황사영의 어머니와 부인 은 각각 거제도와 제주도로 �겨가 여종살이를 해야 했고 세 살짜리 아들까지 추자도 에 버려졌다. 이로 인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던 다산은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관련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극형은 면하였으나 형 약전은 흑산도로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산이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연(緣) 뿐 아니라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유일한 사람 으로 말 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깊게 교류하였 던 손암(巽菴) 약전(若銓)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1801년 11월 하순 귀양길에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한번 보지 못하 고 죽은 형을 다산은 형의 묘지명에서 정밀한 지식과 식견을 펼치지 못하고 먼 바다속 풀집에서 귀양살다 죽었다고 가슴 아파 하였다.
다산의 손윗 형인 정약종은 1801년 신유사옥때 옥사하였다.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여 최초의 전도회장으로 천주교 전도에 힘쓰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이 천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나라의 엄혹한 탄압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하였다.
8. 다산의 자녀
다산은 1776년 2월22일 풍산 홍씨(豊山 洪氏 1761~1838)와 결혼하였다. 장인은 후 일 무과승지 홍화보(洪和輔)이다. 홍씨 부인과 다산 사이에 6남 3녀의 9남매가 있었으 나 대부분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다.
큰 아들 학연(學淵, 1783~1859)의 호는 고향 마재의 뒷산 이름을 딴 유산(酉山)으로 감역(監役) 벼슬을 지냈다. 작은 아들 학유(學遊, 1786~1855)는 호가 운포(耘逋)로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고명딸은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正言)까지 지낸 막역한 친구인 옹산(翁山) 윤서유(尹書有)의 장자이자 강진 유배기 다산에게 수학한 윤창모(尹昌模)에게 시집갔다.
9. 다산의 외가
어머니 숙인(淑人) 해남윤씨(海南尹氏 / 1728~1770)는 윤덕렬의 딸로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6세 손녀이자 詩 · 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다산의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다산 의 나이 9살때인 1770년(영조46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해남 윤씨는 어초은(魚樵隱) 윤효정(尹孝貞) 이후 명사를 배출한다. 중종 때의 인물로 고산의 고조가 되는 윤효정은 강진군 도암면 덕정리에서 태어났으나 13세에 해남의 갑부 해남 鄭氏집으로 장가를 들었다.
자신의 호(號)처럼 고기잡고 나무를 하며 은거 하며 살던 윤효정은 처갓집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되었고 이 재력을 바탕으로 해남 윤씨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니 어초은의 4대손 고산 윤선도와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이다. 하지만 18~19세기 정국은 노론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 로 남인계열이었던 고산의 후손은 정치적으로 불우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다산은 어린시절이나 벼슬하며 학문을 넓히던 시절부터 외가의 윤씨들과 가깝게 지내 왔다. 외가로 6촌 형인 윤지범(尹持範, 1752~1821)이나 동갑인 윤지눌(尹持訥, 1762~1815)은 평생의 지기(知己)들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같이 벼슬하던 윤지눌은 시동인(詩同人)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일원이었다.
어려서 같이 공부하고 진사 (進士)가 된 후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 혹은 진산사건으로 순교하는 윤지충(尹持 忠, 1759~1791)은 어머니 윤씨의 조카이니 외사촌 형이 된다. 이외에도 윤종하, 윤종직 등 유수한 문사들이 다산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귀양살이 중인 다산을 위로하였다
외가의 도움 중에서 무엇보다도 큰 것은 천여권의 장서와 함께 다산초당을 내어주어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초당으로 이주 후 귀양이 풀릴 때까지 수기(修己)의 학문으로 六經(시경 · 서경 · 주역 · 춘추 · 예기 · 악경)과 四書 (논어 · 맹자 · 대학 · 중용)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완성하고 치인(治人)의 목적으로 一表二書(경세유표 · 목민심서 · 흠흠신서)를 저술하였으니 다산초당(茶山艸堂)은 다산 학의 산실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시절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던 제자가 18명인데 이 중 10명이 해남의 외가와 강진의 윤씨들이었 다. 이들은 다산이 유배가 풀린 뒤까지도 제자의 도리를 다하며 스승의 학문계승에 노력하였고 혜장과의 만남 이후 즐기던 차를 보내주는 정성을 잊지 않았다.
10. 다산의 저서
1)경학분야
육경
<모시강의> 12권외에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3권이 있다. 시는 간림(諫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 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며,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 시경강의(1809/12권) : 1791년 정조가 40일 기한으로 냈던 시경조문 800여조에 대한 대답형식으로 저술된 강의물로 1809년 재정리하였고 자찬묘지명에는 모시 강으로 되어있다.
시경강의보(1810/3권) : 시경강의를 보완한 뜻에서 저작하였으며 풍증으로 고생 하던 때라 제자 이청이 받아 썼음.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 錄)> 7권이 있다.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사기> 양한서(兩漢書) 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은 상천(上天)의 의기(儀器)가 아니요 <홍범구주(洪範九疇)>도 정전형(井田形)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 매씨서평(1810/9권) : 일명 <매씨상서평> 매색의 고문 25편이 위서임을 밝힌 책.
상서고훈(1810/6권) : 정약용이 엮은 <서경> 해설서로 매씨서평 중에서 밝힌 고문 25편의 미서를 제외한 금문 28편의 고훈을 정리한 책(6권 2책 필사본으로 원본인지 여부는 미상)
상서지원록(1811/7권) : 정약용이 <서경>의 난해구를 체계적으로 고증하고 그 의미를 변증한 해설서로 경문의 대의를 파악한 책(7권 3책 필사본으로 원본인 지 여부는 미상)
<주역사전(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 는데 추이(推移) · 물상(物象) · 효변(爻變) · 호체(互體)로서 십이벽괘는 4시를 상징 하고 중부(中孚) · 소과(小過) 두괘는 오세재윤(五歲再閏)을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先天卦位)의 설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 주역사전(1804~1808/24권) :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 근거하여 주역사 법(周易四法)을 추이(推移) · 물상(物象) · 효변(爻變) · 호체(互體)로 나누어 풀 이하고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에 주석을 붙인 책(24권12책 필사본 1808년 (순조8)에 간행되었다)
1804년부터 시작하여 4번의 추정을 거쳐 1808년 무진본이 완성되었다. 정약용 의 사상체계가 수기지학(修己之學)과 치인지학(治人之學)으로 표현되는 점을 고 려할 때 역학적 접근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 내지는 수기를 달성하려 하 였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역학서언(1808~1821/12권) : 강진 유배시절에 저술한 역학평론집.(12권 4책 필 사본 1937년에 간행된 <여유당전서>에는 45~48권까지 4권으로 이를 2책으로 묶어놓았다.)
당나라 이정조(李鼎祚)의 <주역집해>에 대한 평론으로 역대 제가들의 학설을 정리 · 비평 ·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정약전의 자산역간과 제자 (이강회 · 이청) 및 아들과 토론한 다산문답이 들어 있다. 다산 역학의 주저술 인 <주역사전(周易四箋)>의 서론적 구실을 하는 것들을 포괄하여 편집해 놓은 것으로 다산역리의 입문서로 평가되어야 할 저술이다.
그는 이글의 말미에 서 “한위(漢魏) 이래 많은 학자들의 설이 남아 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없어지 게 마련임을 걱정한 이정조는 그 중에서도 뛰어나 학설들을 채록하여 <주역집 해> 10권을 저술 하였으니 후세에 끼친 그의 공적은 지극히 크다.”고 하여 요 즈음 학자들도 주역연구를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의 하나로 권장한다.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이 있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五 帝)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 지낸다고 한 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喪期)에는 변함이 없 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 춘추고징(1808~1812/4권) : 춘추에 나타난 주대의 예제를 정리한 예서로 1808 년 겨울 정학유의 초본과 1812년 겨울 이강회의 재고로 완성되었다. 1936년 김성진(金誠鎭)의 편집과 정인보(鄭寅普) · 안재홍(安在鴻) 등의 교정을 거쳐 간행되었다.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이 있다. 관혼상제 사례 중에서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 된다. 태뢰(太牢) · 소뢰(小牢) · 특생(特牲) · 특돈(特豚)의 예에서 그의 변두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君王) · 대부(大夫) · 사(士)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상례사전(1803~1811/50권) : 상례외편과 함께 사대부의 상례에 대한 저술로 상 의광(1803/17권), 상구정(1809/6권), 상복상(1809/6권), 상기별(1811/21권) 4권 을 합친 저술.
상례외편(1803~1805/12권) : 예기 단궁편의 취지를 드러내고 고주의 잘못을 수 정한 단궁자모 6권, 서건학의 독례통고(讀禮通考)를 읽으며 떠올랐던 생각을 1821년 이인영이 편집한 예고서정 1권, 조선후기 예송의 쟁점이었던 기해방례 (1659) · 갑인방례(1674) · 경신방례(1800)에 대한 윤휴 · 송시열 · 허목의 예론 을 비판하고 독창적인 주장을 한 정체전중변(3권), 조전고(1권), 고례영언(1권) 을 합한 책.
사례가식(1808~1817/9권) : 사대부의 4례(관혼상제)를 정리한 것으로 고례에 비해 향연의 사치스러움을 지적한 제례고정(1808/2권), 관례와 혼례에 관한 가 례작의(1810/1권), 상례사전의 요약본인 상의절요(1817/6권)를 모은 책.
국조전례고(1818/2권) : 정체전중변과 함께 왕실의 전례(왕조례)를 정리한 책으 로 상례외편의 끝에 편입되어 있으며 <여유당전서>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예의문답(1805/3권) : 1805년 10월 강진읍의 보은산방에서 장남 정학연이 예에 관해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일명 승암문답으로 불린다.
<악서고존(樂書孤存)> 3권이 있다. 5성(聲) 6율(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율 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연(鄒衍) · 여불위(呂不韋) · 유안(劉安) 등의 취율정성(吹律定聲)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三分損益) · 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이나 괘기 월기(卦氣月氣) · 정반변반(正半變半) 등의 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 악서고존(1811~1816/12권) :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육경 중 유일하게 원문이 전해지지 않는 악경을 복원한 것으로 상서 · 주례를 주자료로 하고 춘추좌전 · 국어를 보조자료로 활용하고 기타 경전의 자료를 종합하여 저술.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 <원의총괄(原義總括)> 이라 하였다.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분목(分目)으로서 주자의 심덕(心德) · 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 지 않는다.”고 하였다.
* 논어고금주(1813/40권) : <논어>에 대한 주석서로 유배생활을 하던 강진 다산초 당에서 1813년(순조13) 겨울에 완성하였으며 40권13책으로 되어 있다.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은 제자인 이강회 · 윤동 등의 도움을 받아 공자 이후 모든 주석 서를 총망라 하였으며, 자료수집에 여러 해가 소요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에 필사본 40권 13책이 남아있다.)
다산의 실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뿌리가 되는 경학사상을 살펴야 한다. 다산 은 사서오경 등 경전 주석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논어고금 주는 다산의 경학 관련 저술 가운데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으로 그는 역대 중국학자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논어를 해석하였다.
특히 당시 영구 불변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떠받들어 오던 주자의 해석 가운데서 170군데나 바로잡아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밝혔다. 예를 들어 논어 학이편 맨 처음에 나 오는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주자는 習을 습관으로 보았는데 다산은 실습으 로 보았다. 그 이유는 學이란 아는 것이요 習이란 행하는 것이므로 學而時習이 란 知와 行이 함께 향상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부모에 게 문안드리는 예를 배웠으면 제때에 몸소 문안인사 드리는 것이 習이라는 것 이다.
내용에는 한나라 때의 훈고학적 주해인 고주와 성리학적 주해인 신주를 모두 소화하여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밝혀 놓고 있는데 저자는 고금주 외에도 175장 의 새로운 지견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논어> 521장 가운데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많은 분량으로 이것을 함께 묶어 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여 이 책 의 첫머리에 싣고 있다. 그 내용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仁 )을 인륜적 실존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인류의 성덕(成德)으로 보아 실천윤리의 성과로 파악하였다. 이는 주희(朱熹)의 심성론적 인설(仁說)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둘째 주희(朱熹)의 충서(忠恕) · 이덕설(二德說)을 반대하고 중심행서(中心行恕) 의 일덕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서(恕)를 인(仁)의 실천 방법으로 보아 실천윤리 로서의 인서론적(仁恕論的)인 측면을 밝히고 있다.
셋째 주희(朱熹)의 심덕설(心德說)을 반대하고 행동의 성과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론적 덕론(德論)을 제시하였다. 결국 저자는 인(仁) · 서(恕) · 덕(德) 삼자 로서 실천윤리적 유교 본질을 천명하였다. 부록으로 <논어대책(論語對策)>과 <춘추성언수(春秋聖言蒐)>두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전자는 1791년(정조15)의 저술로 정조의 내각월과(內閣月課)때 바친 것이고 후자는 <춘추(春秋)>와 <국 어(國語)> 등 <논어(論語)> 이외의 다른 책에서 신빙할 만한 공자의 말들을 채록한 것이다. 이 두편도 저자의 <논어(論語)> 연구를 위한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刑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 며 우리 유가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서로 빙탄(氷炭)과 같아서 상호간에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 맹자요의(1814/9권) : 역대의 주를 편집하고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덧붙인 저술 로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4단에 대해 독창적인 견해를 피력함.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당 대학강의(大學講義)> 1권, 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孝) · 제(弟) · 자(慈) 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이요 치지 (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다
* 대학강의(1789/1권) : 정조가 창경궁 희정당에서 초계문신들을 불러 대학을 강론 하게 할 때 발표한 것을 정리
대학공의(1714/3권) : 古本 「대학」을 27절로 나누고 각 절에 대한 역대의 주와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으로 「大學章句」에서의 주희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이 있다. 용(庸)이란 끊임 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 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중용강의보(1784/6권) : 經義進士로 太學에서 수학 중 정조가 내린 「中庸」에서 의심스러운 70條에 대한 질문에 이벽과 상의하여 답한 저술(甲辰年)
중용자잠(1814/3권) : 비교적 고증이 부차적이며 원문의 충실한 해석에 중점을 둔 것으로 이전의 양본(갑진본과 명례방본)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독자적 서술형식 을 취함.
2)경세학
-정법서(일표이서)
국가의 전반적인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1808~1817/44권)는 미완성 작품이며 44권 15책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 ·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필사본이 있다.)
<주례(周禮)의 이념을 근거로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중앙의 관제 · 전제 · 세제 · 각종행정기구 국가경영 일반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먼저 개혁의 대강과 원리를 제시한 후 기존 제도의 모순, 실제의 사례, 개혁의 필요성 등을 논리적 실증 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책에서 제기된 개혁안들은 첫째 관직 체제의 전면 개편, 둘 째 신분과 지역의 차별을 배제한 인재등용, 셋째 자원에 대한 국가관리제 실시, 넷 째 토지제도의 개혁, 다섯째 : 조세제도의 합리화, 여섯째 지방행정조직의 개편 등으 로 당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함께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 등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도 폭 넓게 담겨 있어 당시 실학자들 의 정치 · 사회적 이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 를 비롯해 자(子) · 집(集) 등에서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저술한 목민심서 (1818/48권)는 48권 16책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리의 부임으로부터 해임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견식과 진보적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으로 부임(赴任) · 율기(律己) · 봉공(奉公) · 애민(愛民) · 이전 (吏典) · 호전(戶典) · 예전(禮典) · 병전(兵典) · 형전(刑典) · 공전(工典) · 진황(賑荒) · 해관(解官)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을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목민심서>가 저술된 배경은 어려서 부친의 임지(任地)를 따라 다니면서 본 것과 그 후 금정찰방, 곡산부사로서 직접 백성을 다스렸으며, 18년 동안의 강진귀양살이 를 통해 백성이 국가권력과 관리의 횡포에 도저히 배겨나지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 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흠흠(欽欽)이란 걱정되어 잊지 못하는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審議)하는 흠휼(欽恤)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책에 나타난 저명한 판례를 뽑아 저술한 흠흠신서(1819/30)는 30권10책으로 되어 있다.
<흠흠신서>는 앞에 저자의 서문이 있고, 이어 목차,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에서는 유교경전에 나타난 형정(刑政)의 기본 이념을 밝히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책에 나타난 저명 한 형사판례를 뽑아서 고금의 변천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목민관(牧民官) 이 참고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판례 36건, 중국의 판례79건을 소개하고 법률의 변통 없이 고수만 해서는 안 되며 의(義)에 비추어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승인 하고 있으나 하잖은 연민의 정은 경계하였다.
<비상전초>는 우리나라의 판결문인 제사(題辭)나 재판관계 왕복문서인 첩보(牒報) 가 법률식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장황하거나 잡스러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재판문서 가운데 모범적인 것을 뽑아 제시하고 해설과 비평을 붙인 것이다. <의율차례)는 살인사건의 유형과 그에 따르는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구분되지 않음을 고치기 위하여 중국의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상형추의>는 무원(無寃) · 무의(無疑)한 재판에 참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조의 인명사건에 관한 판결을 모은 <상형고(祥刑考)>를 자료로 하여 엮은 책으로 <상형고> 가운데 144건을 골라 정범(正犯)과 종범(從犯), 자살과 타살, 상해치사와 병사(病死), 고의와 과실 등 21개 항목으로 분류하고 최종판결의 당부(當否)에 대하 여 논평하였다.
<전발무사>는 곡산부사(谷山府使) ·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으로 재직하던 중에 관여 한 인명관계 판결과 유배 중에 보고 들은 인명에 관한 옥안(獄案) · 제사(題辭) · 검안발사(檢案跋辭)로서 의심가는 것 17건을 모아서 분류하고 평한 것이다.
재판을 맡은 수령들은 어려서부터 시부(詩賦)만 논하여 법률을 모르고 재판하는 법 을 알지 못하여 재판을 서리에게 일임하여 자의적(恣意的) · 법외적(法外的) 형벌 부과가 이루어지자 흠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 며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흠흠신서>를 지었다.
-지리
한백겸(韓百謙) 이래 추구되어온 우리나라의 영토와 역대 국가, 수도의 위치 문제에 대한 기존 지리서의 오류를 시정하고 강역의 문제를 정리하여 조선의 정통성을 바로 잡아 보려는 목적에서 쓴 아방강역고(1811/10권)는 필사본이며 초고본은 10권으로 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권7(여진고 · 거란고 · 몽골고)이 누락되어 현전하는 것은 9권 이다.
우리나라 한강이북의 수계(水系)를 정리한 지리서로 압록강(淥水) · 두만강(滿水) · 청천강(薩水) · 대정강(淀水) · 대동강(浿水) · 예성강(瀦水) · 임진강(帶水)과 그 지류 들 및 강이 통과하는 하안(河岸) 지역에 관한 내용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 및 지도를 바탕으로 중부 이북 지방 주요 하천에 관련된 자연지리 · 역사 · 군 사 · 정치 · 지역 등의 사실들과 당시까지의 기록 견해를 종합한 책이다.
-의학
마진(痲疹 :홍역)을 다룬 의학서로 이헌길(李獻吉)의 <마진기방(痲疹奇方)>을 중심으 로 중국의 많은 마진 전문서를 참고하여 저술된 마과회통(1798/6권)은 6권 3책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원증편(原證篇) · 변사편(辨似篇) · 자이편(資異篇) · 아속편(我俗篇) · 오견편(五見篇) 합제편(合劑篇) 등으로 되어 있으며 아속편과 오견편에서는 우리나 라에서 유행한 마진을 중심으로 그 증세를 관찰하고 치료법을 기술하였다. 부록으로 신증종두기법(新證種痘奇法) 1편에서 E.제너의 우두방(牛痘方)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마진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교육
<소학> 가운데 의문점이 있거나 난해한 부분에 대하여 설명을 붙이고 자신의 견해 를 밝힌 책.<소학지언(1815/1권)>
<아학편>과 함께 아동의 교육서로서 좋은 구슬을 꿰어서 보물을 만들 듯이(珠串) <소학주관>에서 고경(古經)에 나오는 명물(名物) 중 학문에 도움이 되는 300조를 골 라 숫자순으로 정리하였다.<소학주관(1811)>
한자 2천자를 유형지물(有形之物) · 물정(物情) · 사정(事情)에 관계된 글자로 나누어 八字一韻으로 정리하였다.<아학편(1811/2권)>
-기타
당시 널리 쓰이고 있는 말과 글 가운데 잘못 쓰이거나 어원이 불확실한 것을 골라 고증을 통해 뜻 · 어원 · 쓰임새를 설명한 아언각비(1819/3권)는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총 200여 항목으로 나누어 단어를 수록했으며 수목(樹木) · 의관(衣冠) · 악기(樂器) · 건축물(建築物) · 어류(魚類) · 지리(地理) · 주거(住居) · 도구 · 식기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또한 음과 뜻을 잘못 쓰고 있는 말들과 동의어 · 동음 어 · 방언 등을 문헌을 들어 고증하고 있다. 국어학 · 사학 · 민속학 등 여러 분야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속담집으로 서문에 이어 중국 속담 178수와 우리말 속담 214수를 실었다. 중국속담 은 중국의 왕동궤(王同軌)가 지은 <이담>에 승지 신작(申綽)이 수집하여 보낸 십여 수를 보태어 수록했다. 8자 속담을 먼저 싣고, 이어 4자에서부터 22자까지 순서대로 속담을 실었는데 각 속담에 가는 글자로 주석을 달았다. “이하동언(已下東諺)”이라 시작하는 우리말 속담은 마지막 4수를 제외하고 모두 8자로 되어 있다.
성옹(星翁) 의 우리말 속담 100수가 운이 맞지 않으므로 운을 맞출 수 있는 것은 맞추고 중씨 (仲氏)가 산해(山海)에서 채집해 보낸 수십여 수를 더 보태어 실었다. 우리말 속담을 운까지 맞추며 한역하다보니 의미상 다소 무리가 가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 각종 문물에 대한 저술로 이만은이 편찬한 <문헌비고>를 수정 · 윤색한 정정본이다.
<소학지언>과 함께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에서 터득한 바를 실천하기 위한 저술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수양서.<심경밀험(1815/1권)>
11. 다산의 업적
조선조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퇴계와 율곡의 융성기를 지나 학파의 분화 속에 학설이 다양화되고 이론이 정밀화 측면에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파의 분열과 대립이 객관적 합리성을 잃고 사변적 내지 관념적 체계에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현실 사회와 유리되어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론(空論)만을 일삼는 폐단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임진 · 병자의 양란 이후 사회 · 경제적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도 개국 이래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피폐된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 려 죄없는 백성들을 산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탐관오리들의 폭압을 견디다 못해 전 답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치는 것)
실학은 사회적 혼란기에 통치 이념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대한 반 발과 때마침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서학 및 청대 실학의 영향에 의하여 당시의 학풍이 소홀히 하였던 사회의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풍에 의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혈연 · 사제 · 교우 관계를 통해 형성된 실학은 그 형성시기와 학문적 특성에 따라 다음의 3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실학의 제1기인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經世致用學派), 제2기인 18세기 후반의 북학파(利用厚生學派), 그리고 제3기는 19세기 전반의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제1기 <천주실의>를 소개한 책으로 유명한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李晬光 1563~1628), 성리학에서 실학으로의 전환점에 서 있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 한 유형원(柳馨遠), 탈주자학적 경학해석에 물꼬를 텃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등 이 활약했던 17세기는 서로 다른 학문적 관심과 배경에서 개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는 점에서 실학의 맹아기라 할 수 있다.
제2기 18세기에는 17세기에 싹텃던 실학적 문제의식과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 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 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 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 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기술의 발전 등 물질문화의 발달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 지칭하기 도 한다.
제3기 18세기는 실학파가 학파적 면모를 갖추기는 하였지만 그 철학적 입장은 아직도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결국 철학적 기반의 확립은 19세기 전반 다산 정약용에 의해 서 가능해진다. 다산은 성호학파를 학문적 연원으로 하면서도 서학의 영향을 광범위 하게 수용하면서 청대의 고증학적 지식까지 받아들여 경학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 해석 을 시도하였다.
230권이 넘는 육경과 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로 경전주석의 전면적 인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리 (理) · 기(氣) · 음양(陰陽) · 오행(五行) 등에 대한 해석에서 주희를 비롯한 종래 성리 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함으로써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 다.
다산의 이러한 탈 주자학적 해석은 실리중심의 실학파가 예학과 의리, 명분을 중 시하는 도학파로부터 철학적 기반에서 완전히 독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표현대로 자신의 몸을 닦는 학문(修己之學)인 육경과 사서의 경학연 구만으로는 학문의 절반밖에 갖추지 못하기에 자신의 경학적 입장과의 연속선상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치인지학(治人之學)인 경세학(經世學)으로서 부패한 사회를 전면 적으로 개혁하려는 목적에서 저술한 “一表二書”(<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 書>)로서 나머지 절반을 갖추었다. 수기와 치인은 유학자가 궁국적으로 추구하는 이상 적 인간(修己治人)이 되기 위한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 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 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 학(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썩어가는 국가의 대들보를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괴는데 평생을 바 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 동안의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 한 육신의 고통과 찾아오는 이 없는 유배지의 쓸쓸함을 밤을 새는 저술 작업으로 극복 한 다산이 가슴속에 붙들고 놓지 않는 말은 “한 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 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법 당시의 어두운 현실은 그를 시기하고 배척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한국학의 바다”로서 새롭게 부활하 고 있다.
12. 다산
다산은 평생을 따라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는 비서관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고위관료이던 다산은 천주교 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방의 미관말 직으로 좌천된다.
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역시 천주교와 관련 된 옥사에 연루되어 한번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한번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한 개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건만, 다산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 려 책을 놓지 않으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33세에는 예문관(별칭으로 翰林)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옥당(玉堂), 즉 홍문관 교리 및 수찬의 벼슬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가 된 데 이어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으며 화성 축조공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거중기 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벼슬의 꽃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르며 중앙의 고위관료로서 승승장구 하였다.
하지만 그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북악산 아래에서 선교하 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는 서용보 · 이기경 ·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6품의 충청도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金井 道察訪)으로 좌천당했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잘나가 는 중앙의 고위관료에서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쫓겨간 것이다.
열다섯의 어린나이에 호조좌랑이 되어 한양으로 벼슬살이 간 아버지를 따라가 성호의 종손 이가환과 누이의 남편인 매형 이승훈 등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던 이 들을 만나 교유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던 다산은 부임지인 금정역에서 멀지 않은 온양 서암의 봉곡사에서 성호의 종손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35~1813), 종증손 이재위(李載威) 등 인근 성호의 후손 및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10일간 공자의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박학한 성호 선생님/ 百世의 스승으로 모시리라”하며 평소 흠모하던 성호 선생의 유고를 교정하였다.
“성호 선생이 남긴 글이 지금에 와 없어지 고 전하여지지 못함은 후학들의 허물입니다”하며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내 유고정리를 제의하고 모임을 주도하여 “다산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을 열심히 읽고 퇴계 학문의 깊은 이치를 조금 이나마 이해하였다.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은 이때의 공부내용을 기록한 저서이다. 억울한 좌천에 관리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채 기생을 옆에 두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생의 이런 자세는 지식인으 로서의 참모습이요,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에도 관리들의 좋은 귀감이 되 고 있다.
다산은 평생에 세 번의 유배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림(翰林), 즉 예문관의 검열이 되 는 과정에서 생긴 잡음으로 떠난 첫 번째 유배는 일주일이 채 못 되어 끝나기에 유배 라고 할 수도 없다.
천주교를 믿는 이는 역적의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엄명에 다산의 형 약종이 천주교 관 문서와 물건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 발각된 이른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촉 발된 신유박해에 그의 표현대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정도”로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도 목숨을 겨우 부지한 다산은 “젊은이야 기다리면 만날 날도 있겠지만 노인 네야 누가 앞일을 누가 알겠나”하고 슬퍼하며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로 유 배를 떠난다.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 하였 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 결과 장기에서 다산은 상복문 제로 서인과 남인사이의 기해년의 예송을 다룬<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과 한자 발달 사에 관한 <삼창훈고(三倉訓詁)>, 그리고 한자의 자전류라 할 수 있는 <이아술(爾雅 述 )> 6권을 저술하였다.
의금부에서 받은 모진 고문이 가져다 준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궁벽한 산골에서 언제 풀릴지도 모르는 유배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불 행하게도 그 해 겨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받는 경황 중에 분 실되어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다.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 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 주 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거처를 정한 다산 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 서 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禮記)> 연구에 열중한다.
“생각이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하게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厚重)하게 해야 하니 후중(厚重)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궁벽한 곳에 유배오고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여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에서 의로움에 합당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지고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금욕적으로 살아가겠다 는 다산의 당당한 태도에 마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다.
산수를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임금에 대한 흠모 의 정을 노래한 연군가를 부르며 서울로부터의 해배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보통의 유 배객과는 달리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바탕하여 “수기(修己)”로서의 육경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치인(治人)”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와 목민관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적어놓은 <목민심서>등을 저술한다.
죽기 2년 전인 일흔세살의 고령에도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尙書 , 五經중 하나로 일명 書經)를 개정 · 보완했던 다산에게 우리는 참다운 지식인의 모습을 봇 수 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 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 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끈질기게 붙어 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다산은 질곡의 삶을 살아 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사후 중앙의 세도정치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 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다산학)는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 가 운데에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인으로서 북경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다산의 매형이다.
최초의 천주교리연구회장(明道會長) 으로서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다산의 셋째형이다. 진산사건으로 효수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다산의 외사촌 형이고 백서(帛書)사건으로 능지처 참 당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딸 즉, 다산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고향 마재는 서양학문(西學)에 대한 관심이 서양의 신앙(西敎)으로 발 전하면서 피어린 순교의 역사를 배태한 “자궁”이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다른 종교에 흥미를 갖고 심취하는 계층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당한 집단이다. 일부가 나중에 배교(背敎)하였지만 당시 천주교를 믿는 중심 계 층은 노론중심의 국정에서 소외된 일부 남인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집단)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을 강장(講長)으로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열리고 이 중의 일부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세례를 받게 하는 동시에 천주교 서 적과 각종 성물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승훈은 그의 부친 이동욱이 동짓날 중국에 가 는 사신인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데 수행했던 것이다. 이듬해 봄 이승훈이 북경 북당(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과 성물을 갖고 귀국하자 이벽은 자신의 수표동 집을 임시 성당으로 정하고 선교활동 에 나선다. 다산도 이 무렵에 포교대상이었을 것이다.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 로 오던 두미협의 배위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소개한 사람은 8세 연상인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5)이다. 광암이라면 바로 한국천주교에서 창립성조 (創立聖祖)로 받드는 인물로서 큰형수의 동생이니 다산과는 사적으로 사돈간인 셈이다.
다산은 그의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일찍이 이벽을 따랐다(嘗從李壁)”는 기록을 할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냈고 서학과 천주교 서적을 읽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성균관 학생시절 <중용>에 대한 정조의 물음에 이벽과 상의하여 답안을 작성했 는데 정조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다산은 이벽과의 만남 이후 한동안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여러 기록들을 종 합하면 다산은 젊은 한때 사 · 오년 동안은 마음으로 열중하였지만 1791년 진산사건 (辛亥邪獄) 이후에는 사설(邪說)로 여기고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 정약종이 신유년 옥사에서 1786년에야 비로소 천주교를 배웠다고 자백하였으니 다산도 아마 이 무렵부터 믿지 않았을까 한다.
1797년 정조가 정삼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임명하 자 반대파의 모함을 해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疎)에서 처음 에는 서학, 즉 천문(天文) · 역상(歷象) · 수리(數理) · 농정(農政) · 수리(水利) 등에 매 혹을 느끼다 점차 천주교에 마음을 빼앗겨 성심으로 믿어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라 는 세례명까지 받을 정도였으나 윤지충이 어머니의 죽음에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처형당한 신해년(1791년)의 사건이 있은 뒤로 허황되고 괴이하고 망령된 설이라 여기고 “마음을 끊었다.(遂絶意)”고 말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도 이와 같은 사실은 입증되고 있다. 신유년의(1801년)의 천주교 옥사 때 “천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무엇 하겠냐”고 할 정도로 다산을 죽이고자 혈안이 됐던 반 대파(공서파)로부터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종의 일기와 서찰 덕분 이었다. 정약종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째형과 막내가 함께 배우려 하지 않 아서 한스럽다”는 구절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 증해 주었다.
끌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사를 폐하는 부분에 이르러 결국 천 주교에서 마음을 접은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 동안 예학, 특히 상례(喪禮)와 제례(祭 禮)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 유배지 장기에서 <기해방례변>으로 시작된 그의 “禮”에 대한 연구는 50권의 <상례사전>, 12권의 <상례외편>, 9권의 <사례가식> 등으로 <여 유당전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꼭 읽어야 할 책을 열거하면서 <예기>를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예에 관해 열심히 공부할 것을 부탁하며 <독례통고(讀禮通考)>라는 예에 관한 책을 보내주기도 한다. 천주교 때문에 다산이 겪어야 했던 순탄치 않았던 벼슬생활, 일가친척과 친구 들의 죽음, 18년의 유배생활과 17년의 미복권의 굴곡의 삶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오 늘의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역경속에서도 정도를 포기하 지 않는 한 인간에게 역사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갈밭의 젊은 아낙네 울움소리 그지없어/ 관청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온 거야 있을 법도 하다지만/ 예부터 남절양(男絶陽) 은 들어보지 못했어라/ 시아버지 장례치르고 갓난아긴 젖먹이는데/ 三代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올랐다네/ 달려가서 호소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텨 섰고/ 리정(里正)이 호통치며 남 은 소마져 끌고 갔다네/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 칼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하여라” 유배 3년째인 1803년 가을 강진에서 지은 시로 제목 “애절 양(哀絶陽)”은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한 백성의 사연을 슬퍼 한다는 뜻이다.
슬픈 사 연인 즉 이러하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지 사흘만에 16세부터 60세의 정상 남자들에게 해당되는 군적(軍籍)에 등록되어 군에 가지 않는 대신 내야하는 일 종의 세금인 군포를 물어야 했다. 죽어 백골만 남은 사람과 갖태어난 젖먹이 아기에 게 군역을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黃口添丁)이 일반화된 시절이었으니 탐관 오리에게 부당함을 하소연 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어떻게 해 서든지 내려고 하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결국 소를 빼앗기게 한다.
농사꾼에 게 어쩌면 자식보다 소중한 소를 빼앗긴 힘없는 백성은 모든 것이 아이를 낳게 한 자 신의 생식기 탓이라 하면서 결국 그것을 자르고 만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 편의 생식기를 들고 관청에 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였지만 문지기는 막무가내로 앞을 가로 막아버렸다.
이렇듯 다산이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중앙의 벼 슬아치들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에만 골몰하 며 밥 그릇 싸움에만 열중하던 시기였다. 영 · 정조 76년간에 걸쳐 기틀을 잡아가던 개혁의 노력은 1801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500년 역사의 마지막 개혁의 몸부림”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유배객으로서 이런 비참한 현상을 직접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바로 잡고자 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금정도찰방으로, 이어 황해도 곡산부사 등 일선 관리로 재직하면서 그는 어진 목민관이 되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항상 노 력하였다.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연천 현감 김양직과 삭령 군수 강명길의 죄상을 낱낱 이 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두 사람은 뇌물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고 군역을 면제시 켜주었다. 또 세금을 빼돌려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고 국가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상대 로 장사를 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지방 수령이 할 수 있는 온갖 악정은 다하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마음놓고 백성들에게 탐학질 하는 데는 정조 임금이라는 든든한 배경 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김양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길 때 묘자리를 봐준 지관(地官)이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를 역임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포정을 알면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곡산부사로 부임할 당시 부임지인 곡산에 이르렀을 때 이계심이란 자 가 백성들의 고통 12가지를 적어 바치며 엎드려 자수하였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전임 부사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자 천여명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다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이었다. 당장 체포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냥 보내주면서 그에게 말하길 “수령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는 이 유는 폐정을 보고도 수령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마 땅히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일신의 안 전을 살피지 않고 항의하는 이계심도 훌륭한 백성이지만 이런 사람을 알아주는 다산 도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목민관이 아닐까?
훌륭한 목민관이 되겠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던 다산은 때마침 곡산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명“마마”라 불리는 천연두가 창고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 <마과 회통(麻科會通)> 12권을 지었다. 그 자신도 일찍이 천연두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하여 스스로를 “삼미자(三眉子)”라 불렀고 슬하에 9남매 중 요절한 대부분이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 고 말았다. 다산은 당시에는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치 료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을 때 치료해 준 이헌길(李獻吉) 에게서 책을 빌려 그 근본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십권을 참고하여 초고 를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차례나 고쳐 12권의 <마과회통>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책의 서문에 인명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의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의원 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 인데 몇 십년만에 한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 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밤이나 비가 올 때면 등잔불이나 삿갓을 급히 찾다가도 아침이 되거나 비가 그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듯이 천연두에 대한 세간의 얄팍한 연구를 비판한 다산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연구에 연구 를 거듭하여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다산은 18년 동안의 고독한 강진 유배생활에서 말없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던 친구는 그윽한 차 향기, 그리고 더불어 다도를 즐기며 말동무가 되어주던 혜장과 초의 두 선 사(禪師)였다. 하지만 다산이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유배 전의 음다설과 유배후의 음다설로 나눠진다. 주의할 것은 단순히 차를 마신 것과 음미 하면서 다도를 즐기는 차를 생활화 한 것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차 연구가인 김명배 선생은 <다도학논고(茶道學論攷)>에서 이전의 일반설이었던 유배 후의 음다설에 대해 다산의 차에 관한 시문의 역사적 시기를 증거로 제시하며 유배전 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관직생활을 하기 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생활하며 그곳에서 읊은 <등성주암(登聖住菴)>(18세) <하일지정절구(夏日池亭絶 句)>(19세)의 다시(茶時)와 성균관 유생시절 차가 들어있는 식당 차림표로 볼 때 유 배 전부터 다산은 차를 마셨다고 주장한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기간 중 아암(兒菴)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로 부터 차를 배워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는 이을호 교수를 비롯한 학계의 일반적인 주 장이다.
그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1801)되어 오기 전에 차와의 인연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은 없고 오히려 유배후 백련사의 선승 혜장선사를 만나 비로소 차와의 인연 을 맺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동문 밖 주막집에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만덕사)에 소풍을 나갔다가 다산 만나기를 갈구하던 혜장선사와 해후를 하면서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며 그에게 명 다(茗茶)를 부탁하는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라는 시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는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학문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혜장이 소개해준 다선(茶仙) 초의선사와 만남은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귀양에서 풀려 한강변 고향집으로 온 후에도 초의나 강진 다 신계의 선비들이 보내주는 차로써 계속 차를 마셨고 경기학인들을 비롯한 막역한 벗 들과 차와 시로써 교유하였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도 다종(多種, 찻잔)을 곁에 두고 지낸다고 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다
오늘날 다산이 있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바로 정조(1752~1800/ 조선 제22대왕/ 재위1777~1800/ 이름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개혁군주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조는 오늘날의 사상범이라 할 수 있는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다산을 보호해 준 방패막이인 동시에 경전에 관해 서로 토론하고 잘못된 점을 비판하였던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 스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하지 만 다산은 1801년 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처자를 데리고 고향 마재로 낙향한다. 사 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도록 충동질하던 벽파가 이에 반대하던 남인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자신이 머무르는 집을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에서 “여유당(與猶堂)”이라 부르고 선인들이 남 기신 글 다시금 읽으며 남은 생애 이가운데다 내 맡기리라“하며 분주한 벼슬살이로 하지 못한 공부에 열중한다. 낙향하여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어느날, 규장각 서리가 보자기에 뭔가를 들고 밤늦게 찾아왔다. 정조가 보내준 <한서선(漢書選)> 10권이었 다. ”너를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보내준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 진하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10살 연상인 정조와의 인상적인 만남은 1784년 23살의 나이로 성균관 학생으로 있 을 때였다. 정조가 <중용>에서 의심스러운 80조(70조-이광용)를 기술하고 이에 대한 답을 적어 올 것을 숙제로 내주자 서학을 포함하여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이며 사적 으로는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자신과는 사돈사이인 이벽과 상의하여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다.
여기에서 다산은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理가 發하여 나온 것(四端理 發)이라는 퇴계를 비롯한 기존의 일반설을 뒤집고 氣가 發한 것(四端氣發)이라는 율 곡의 說을 주장하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자신과 생각이 일치함을 확인한 정조는 “세속의 흐름을 벗어나 독창적이며 논리가 명확하여 첫째로 삼는다”고 하고 다산을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이후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에 출중한 성적을 내 어 임금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하사받은 “우등생”이었던 그는 나중엔 당시 규장각에서 인쇄한 책은 다 받아 더 받을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나이 28세인 1789년 에 대 과(大科)에 급제하여 종7품인 희릉직장으로 시작한 벼슬길은 정조의 총애 아래 잘 닦 은 신작로를 달리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해에 초계문신에 뽑힌 다. 정3품 아래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지도 · 편달하면서 재교육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는 정조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뒷받침 할 신 진 관료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초계문신들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정조는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 하고 그 방법과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을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지는 암울 한 상황을 개혁의 중심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신진 관료들의 도움 아래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정면 돌파하고자 하는 정조의 야심이 숭어 있는 것이다.
정치관료로서의 이러한 만남 말고도 다산은 기술관료로서도 정조와 만난다. 다산은 자연과학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 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성(화성)을 만들었다.
오늘날 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간 아 버지를 새롭게 이장하고 그곳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또 매년 참배하는 것에는 할 아버지(영조) 때부터 실시해온 탕평정치를 정착하여 망국적 당쟁을 일소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쟁의 약화 내지 일소는 자연스럽게 왕권강 화로 이어져 신진관료들의 후원아래 정조는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그러나 과감하게 실행해 나갈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 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해(陵幸)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에는 배다리(舟橋)가 필요하였다.
한강 폭만큼의 선박을 가로로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수백명의 능행 행렬이 지나가도록 배다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었다. 비용은 둘째 치고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수원성) 축조이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다산은 정조로부터 화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받고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 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 주었다. 또 정조가 하사한 책을 연구하여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 이상을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최선의 노 력을 다 하였고 그 신하를 따뜻이 보살펴 주었던 정조와 다산의 아름다운 만남은 당 쟁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정조가 죽었다는 갑작스 런 천붕(天崩)의 소식에 접한 다산은 얼마전 하사한 그 책이 “신하와 영결(永訣)하시 며 내리신 선물”이라며 통곡하였다.
정치관료로서 그리고 기술관료로서 현군(賢君) 정조와 의기투합하였던 다산은 바로 “정조스쿨”이라 할 수 있는 초계문신에 뽑혀 그 와 함께 참혹한 백성들의 현실에 가슴아파하며 모순투성이인 봉건왕조 개혁에 헌신하 였으나 두터운 당쟁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머나 먼 유배의 길을 떠나고 만다.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 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2년 후인 1838년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 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40세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 편을 아내는 세살박이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 롱을 피우던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 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에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은 시 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 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 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 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 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 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아래 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렴(爰止爰棲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賁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폭을 보 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첩을 만들어 두아 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 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 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 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 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 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가신 아버님이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 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 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며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씨에게 지아비의 해배소식은 맨 살을 꼬집어보아야만 믿길 정도로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문에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에 부인은 고개 돌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날 때 나이 사십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다하지 못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 던 다산은 60년 전, 15살의 나이로 발그레한 볼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를 맞던 그 날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회혼일에 맞춰 미리 시(回禮)를 하나 짓는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 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어머니 품에 안겨 유배가던 아버지를 전송하던 세살짜리 막내 아들을 뒤로하고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 는 큰아버지(약전)와 함께 유배를 떠나고 약종 백부는 대역 죄인으로 참수당하니 어 린 나이의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각각 19살, 16살로 한참 과거 준비에 열중할 나이였던 다산의 두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큰아버지의 “대역죄인” 소식 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큰아버지의 죽음도 슬픈 일인데 이제 과거까지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낙심하였을 것인가?
당시 대역 죄인의 집안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이 국가의 법률이었다.
이런 두 아들의 심정을 헤아린 다산은 유배지에 서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책 읽기에 힘써라. 출세길이 막힌 폐족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사람들 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 몇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내 귀양사는 고통이 매우 크긴 하지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유배 간 아버지에게 햇밤을 보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 던 아들이었지만 여러 차례 글공부를 재촉하는 아버지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부지런하지는 않았나 보다. 자질은 있지만 게을러 학문에 진척을 보이지 않는 자식들 을 걱정하다 병까지 앓으며 노심초사 하던 다산은 엄히 꾸짓는 편지를 보낸다.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넓게 알고 이치에 밝은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 냐. 평민이 배우지 않아 못난 사람이 되면 그만이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고 말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학문을 게을리 하는 아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 직접 가르친다. 유배초기 서슬 퍼렇던 관가의 감시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렸다. 이에 다산은 1805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과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과 예기 를 밤낮으로 가르쳤다.
유배 중 네 번의 교정을 거쳐 완성한 <주역>과 함께 <예기> 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말하고 <독례통고(讀禮通考)>라는 책을 인편으로 보낼 정도 로 예에 연구에 각별하였던 다산인지라 아들에게 직접 예기에 대해 강론하였던 것이 다.
이때 예에 대한 학연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기록하여 모아 놓았는데 이름하여 스 님들이 묵는 암자에서 묻고 답하였다 하여 <승암문답(僧庵問答)>이라 하였다. 유배지 를 다산초당으로 옮긴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옆에 두고 오경 가운데 <주역> 과 <춘추>를 읽도록 하였다.
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둘 다 가까이 두 고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꼼꼼히 적고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옆에서 직 접 가르치며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걱 정이 구절구절마다 깊이 배어 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던 아버지였지 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동딸에게는 사내아이와는 또 다른 애틋한 부정을 느낀다. 아들에게 보내 는 편지에서 “고향으로부터 기별이 오면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졸인다”고 하였던 다 산은 1802년 겨울 네 살짜리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간장을 쥐어짜는 서러움이 복받친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점포 앞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와의 기약 없는 이별에 슬퍼하던 그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몇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리라. 눈앞에서 네명의 사내아이와 한명의 계집아이를 잃 었을 때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듣는 막내의 죽음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절하는 연습한다 예쁜모습 보여주고/ 술잔을 건네주며 웃음 띤 모습 절로 보여/ 오 늘 같은 단오날 저녘/ 누구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리”하고 어렸을 적 딸아이 의 재롱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다 산은 어른으로 성장한 딸을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창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친정 어머니가 입고온 다홍치마 위에 매화와 새를 그리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아마도 시집간 딸에게 아버지로서 죄인의 몸인 것이 늘 부담스러웠을 것인데 그 미안함을 매조도에 담아 보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