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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예수와 외국인 노동자 선교의 신학적 사고 |
박천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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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예수와 외국인노동자 선교의 신학적 사고
외국인노동자 선교의 신학적 흐름 찾기 구약성서의 신학적 전통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하여 두 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다윗의 전승과 모세의 전승이다. 첫째, 다윗 전승(계약)은 축복의 신학, 가진 자들의 신학의 줄기를 이룬다. 다윗??M 제왕들??M 제사장으로 이어지는 신학을 부르지만은 이 계약 사상을 왕권의식(Royal Consciousness)이라 불렀다. 왕권의식을 가진 이들은 풍요의 경제, 억압과 착취의 정치, 내재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억압의 정치와 풍요의 정치에 포로가 된 것이 종교였다. 중심부(도시지역)와 권력자와 상류층에 관심을 가지고, 안정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이방인과 타국인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차별적이었다. 둘째, 모세의 전승(계약)에 의한 신학은 구속의 신학 해방의 신학이라 부른다. 모세??M 여호수아??M 사사들??M 예언자로 이어지는 전통이다. 부르지만은 이를 대안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이다. 이들은 풍요의 경제 보다는 나눔의 경제를, 억압과 착취의 정치보다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사회를, 하나님의 내재의 종교 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주변부(농촌지역)와 소외된 자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이방인과 타국인에 대하여 포용적이고, 평등적이었다.
예수시대에 와서도 이러한 흐름은 명확히 나누어진다. 복음서의 처음 기록인 마가복음을 보면, 중심부인 예루살렘(막 11장~16장)과 주변부인 갈릴래아(막 1:14~9:50) 지방이 상호 대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왕, 제사장, 바리새인 등 상류계층이 자리하고, 갈릴래아는 중심으로는 귀신들린 자, 문둥병자, 죄인들이 자리를 한다. 예루살렘 중심 세력은 법의 준수와 안정을 강조하고, 갈릴래아 중심세력은 하나님의 공의와 변화를 강조한다. 예루살렘 중심 세력은 이방인을 죄인으로 배척하지만, 갈릴래아 중심 세력은 이방인을 똑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녀로 포용한다.
배척 받는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 : 외국인노동자 인권실태 예수 시대에 갈릴래아는 예루살렘과 대조하였을 때, 비천한 지역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지방 특히 예루살렘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보면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천년 이상 강대국의 밑에서 2등 시민권자 혹은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며 살아왔다. 이집트??M 아시리아??M 시리아??M 바벨론??M 페르샤??M 마케도니아??M 프톨레미??M 셀류커스??M 로마제국이 차례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침탈 하였다. 그러나 상류계층은 식민지 국가의 1등 시민권자로 행세하면서 일반 백성들을 지배하여 왔고, 식민지 국가의 대변자가 되어왔다.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의 이방이란 민족이 개념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민족은 단지 권력과 물질의 소유 정도의 개념으로 구별의 기분을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민족이라 할 지라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모두 이방인이요, 이들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지역은 모두 이방의 땅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이방인들은 통제와 배척의 대상일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들인 것이다.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이었다고 무시되었다. : 국제결혼 가정 갈릴래아가 여러 민족이 섞여 살게 됨으로 해서 이때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는 낙인이 찍혔다. 역사적으로 갈릴래아는 733년 아시리아에 점령당하여 므기도(Megiddo)지방에 편입되어 이스라엘과 분리되었다. 이후 다른 민족과 분리되거나 다른 민족의 통치와 문명에 적응하거나 맞서 싸워 나갔던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마치 창녀와 같이 무시하였다.
자기 재산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 외국인노동자 내국인 일자리 잠식하는자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지배계층과 상류 계층을 포로로 잡아갔다.(열하 24:10~17) 바벨론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땅을 이스라엘의 농민이나 하류계층과 이민 이방인들에게 정책적으로 땅을 넘겨주었다. 이때부터 상류층이 이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공동체에서 제외 되었다 : 불법체류자 추방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류층 백성 암하레쯔에 대하여 페르샤 시대의 하시딤과 분류하여 처음에 부르다가 나중에는 바리새인과 분류하여 불렀다. 포로기에 상류층이 자기들의 땅을 차지한 자들에 대하여 멸시와 분노의 뜻으로 암하레쯔라 부르며 차별한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땅꾼(농사꾼), 무식한 자, 율법을 모르며 안 지키는 자로 통하였다. 라삐 자카아의 아들 요하난은 갈릴래아야 너는 토라를 멸시한다.며 저주한 일도 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죄인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에서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되었다.
지역적 차별과 배타가 있었다. : 3D에서 일하는 가난하고 무식한 지역의 출신들 하스몬 왕가시대 때는 유대인들이 갈릴래아로 많이 이주되었는데, 갈릴래아 인들을 잡종으로 천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너희와 지역출신이나 신분적으로 이미 다르다는 것이다. 프톨레매오가 예루살렘을 정복(주전 302년)하고 팔레스타인을 분할 통치할 때에는 지역적으로 본토 이스라엘과 분리되어 고아처럼 지역적 소외를 받았다. 헤롯 시대에는 헤롯이 죽자 팔레스타인 지방이 3등분 되었다. 이때 갈릴래아는 다시 유대지방과 행정구역상 나누어지게 되었고, 벨게아 지방과 하나의 행정 구역이 되어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를 받았다. 유다인들은 갈릴래아를 지역적으로 이방인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였다.
체제에 도전을 주고 안정을 해치는 자들이기에 배척되었다. : 집단행동을 하는 외국인노동자 갈릴래아는 상놈들의 소굴이었다. 갈릴래아 하면 반란자, 불순분자와 동의어로 사용되다 시피 하였다. 젤롯당을 중심으로 한 저항하는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 독재자 헤롯이, 온갖 세금 명목을 부여 백성들을 세금으로 착취하고, 나라의 수십의 건축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켰다. 백성들은 수탈과 강제 노역 때문에 주전 4년 헤롯이 죽자,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로마도 진압할 수 없는 저항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마 군단에 진압되어 2,000여 명이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예수 10살 때쯤인, 주후 6세기 로마 구례뇨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호구조사를 하자, 젤롯당이 일어나 갈릴래아 지방은 로마 항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십자가를 지라에 구호와 함께 저항하다 죽어간 사람들 역시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암하레쯔는 에스라서 편집 이후에도 나타나고(10:1), 느헤미야(10:31)에도 등장한다. 갈릴래아는 암하레쯔의 중심지였다. 통제 받아야 할 대상 외국인노동자 법에 의한 한 통제 : 출입국 관리법의 통제와 관리 대상 바리새인은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무장 시켰다. 그러나 이 율법은 두 가지에서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첫째는 사람의 인권을 구속한 것이다. 율법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저들의 일주간은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했고, 정결법의 엄격성 때문에 직업의 재한을 가져다주었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갈라놓았다. 율법을 잘 지키는 체제안의 사람은 참 이스라엘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체제 밖의 사람들은 죄인들로 낙인찍혀 소외된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이들이 곧 암하레쯔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체제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암하레쯔라 하여 그들과 공동식탁을 하기를 거부하였다. 특히 정결 법에 저촉되는 자,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를 암하레쯔라 불렀다.
경제적 착취 :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외국인노동자 갈릴래아 소작인들은 부재지주들에 의하여 착취당하였다. 갈릴래아는 비옥한 땅이 많았다. 갈릴래아는 전체가 비옥한 푸른 정원과 같이 비옥한 푸른 정원과 같았다고 하였다.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갈릴래아 지방의 농산물은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의 생명선과도 같다. 그러나 갈릴래아 사람들은 절대빈곤의 소농과 땅 없는 소작인들이 압도적이었다. 이 지역에선 가난이 신해서 자진해서 농업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실업자도 늘어만 갔다.
관심의 대상으로서 갈릴래아 : 외국인노동자 선교의 사명 구약에서의 갈릴래아는 스불론, 시돈, 이사갈(창 49:13~15)로 불렸고, 사무엘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어머니(삼하 20:19)로 불렸다. 예수가 태어나고 관심을 가지고 주로 활동하신 지역이 바로 갈릴래아다.
시민권 요구하는 외국인노동자 갈릴래아 사람들은 눌린 사람들의 표상으로서 이들의 갈망은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되는 세상이었다. 갈릴래아는 젤롯당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소작농의 부재지주의 절대 다수가 왕족이거나 대제사장 등 종교 귀족이었다. 특히 60년경 젤롯당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유대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집과 헤롯궁을 소각하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채무 장부를 소각하기도 하였다. 빚진 자들을 해방 시켜 주기도 하였다. 노예신분, 빚진자의 신분이 아니라, 한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한 것이다.
주민으로서 다문화 공동체 형성의 과제 갈릴래아는 북 이스라엘의 근원지로서 일찍부터 이방인들과 섞여 살면서 자기 정체성을 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도시가 헬레니즘화 되어가는 것에 반하여 이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지켜 나갔다. 예루살렘 중심 세력의 생각과는 달리 갈릴래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지켰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이 아니라, 모세 전승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의 회복을 고대한 자들이다.
외국인노동자 선교 : 예수의 간절한 부탁 갈릴래아는 예수가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처음 밝힌 소명을 밝힌 곳이다(눅 4:18). 그러나 예수는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멸시 받으며 죽어갔다. 예수가 형장에 끌려갔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녔지요 (마태 26:19) 당신이 갈릴래아 사람이니, 틀림없이 예수와 한 패일꺼요(막 14:70)라는 비난의 말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나는 살아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고 선언한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부탁을 한다. 21세기 국경없는 시대를 맞아, 우리의 선교의 자리가 어디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필요할 때다. |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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