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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培 鎔*
梨花女子大學校 人文大學 史學科 敎授.
Ⅰ. 머리말 3. 開化政策
Ⅱ. 開化思想과 開化政策 Ⅲ. 甲申政變
1. 開化思想의 형성과 분화 Ⅳ. 甲午改革
2. 開化思想의 전개 -현실인식·민족 Ⅴ. 맺음말
문제 근대 개혁 구상을 중심으로
I. 머 리 말
1876년 개항으로 인한 문호개방과 해외통상은 봉건체제 해체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런데 한국의 개항이 갖는 독특한 성격, 즉 서구열강의 지원하에 있던 일본에 의한 불평등하고 타율적 개항이라는 성격은 자율적 근대화를 꾀하고 대등한 대외정책을 전개시켜 나가는데 극복되어야 하였다. 즉 주체적이고 근대적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국가에 예속화될 것인가의 민족적 과제가 주어졌다. 따라서 개항 이후 서구와 일본등의 외압속에서 시작된 근대사회는 봉건체제의 극복과 함께 외세의 침략에 대한 투쟁이 근대 변혁운동의 관건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근대화와 자주화를 꾀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부단히 전개되었다. 한국의 근대 민족운동은 그 주체세력과 지도이념에 따라서 부르조아 개혁운동과 농민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당시 근대 민족운동의 흐름속에서 대체로 지식인, 지배층 중심의 위로부터 추진된 근대 개화운동과 그 사상에 관하여 연구사적 검토를 하고자 한다.
그동안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광린교수를 비롯하여 한우근·강재언·신용하교수 등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비로소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 개화사상의 연원과 발생시기, 개화파의 형성과 개혁론의 분화와 개화운동으로서의 갑신정변에 대한 연구업적이 쌓여온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꾸준한 연구업적에 비해 1990년 이후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그다지 많지않다. 그에 비해 의병운동과 실력자강사상이 가장 논문편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한국사학계의 경향이 독립운동 분야에 비중을 두고 연구되었던 점과 한편으로는 이분야 전공학자들의 기념논총이 지난 5년동안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던 점에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다져온 연구업적을 뛰어넘어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역사적인 해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발굴에 어려움이 있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Ⅱ. 開化思想과 開化政策
1. 開化思想의 형성과 분화
개항 이후 한국 근대사의 변혁사상 중 부르주아적 지향을 지니는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분화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에 대한 종래의 연구는 박규수와 유대치의 사상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1860대설과 1870년대 전반설이 있다. 이에 대해 신용하는 1850년대 중반 실학사상의 계승과 중국에서 수입된 新書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그 가운데 역관 오경석의 역할을 중요시 하였다.1) 오경석의 사상은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던 박규수 등과 1860년 대 말 합류하여 1870년 경부터 개화사상을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개화파 형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1874년 김옥균이 仕路에 나선 시기부터 동지를 규합하여 개화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1880년대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보았다. 개화파는 임오군란 후 청의 속방화 정책에 대한 비판, 조선의 자주독립성 강조 정도에 따라 내부에 차이가 노출되었고 개화 추진의 폭과 속도에 대한 차이, 개화정책 단행을 위한 권력장악 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가 분화되어 이후 개화당, 개화독립당이라고 할 때는 급진개화파들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개화사상은 본질적으로 자주부강한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추진한 것이었으나 민중의 지지기반이 약하여 그 영향력은 취약하였으며 갑오개혁 때에야 비로소 개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이후 독립협회 사상으로 계승되면서 후기 개화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김신재는 1876년 개항 후 민족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부국강병의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광의의 개화파가 형성되었으나 이때까지는 내부의 급진, 온건 대립이 불분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882~1884년 청의 내정간섭 하에서 淸式 양무운동이 전개되어 개화파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청의 간섭을 벗어나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변법개화파가 분화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상당기간 개화사상에 의한 내셔널리즘은 좌절된 것으로 파악하였다.2)
일반적으로 개화파의 분화는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강화되는 가운데 동도서기론적 점진개혁을 추구하는 온건개화파와 청으로부터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급진개화파가 나뉘어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대해 김봉렬은 개화파를 분류하는데 있어 동도서기론적 관점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였다.3) 그는 동도서기적 측면은 개화사상가 일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여 개화파의 분화는 변법 유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 사상적 입장의 구분과 개혁운동적 입장의 구분을 별개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즉 사상적 입장에서 변법적 개화파와 개량적 개화파로, 정치개혁적 입장에서는 급진개화파와 점진온건개화파로 분류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화사상가와 개화정치가가 따로 존재하였는가의 문제를 고려할 때 사상과 정치개혁의 입장을 분리하여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원적 분류는 개화파를 집단으로 범주화시켜 근대 변혁운동의 주체를 설정하려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개별 사상가의 성향을 구체화하는 데는 유효한 방법일지라도 집단으로서의 개화파의 분류에는 지나치게 미시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같이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개화파가 형성되었고 1882~1884년 시기를 개화파 분화의 시기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주진오는 개화파를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받아들인 일군의 관료들로 좁혀 이해하고 있다.4)
그는 개화사상이 연원문제에 있어 보편적인 실학사상의 영향이라는 점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이들이 집권 노론계의 북학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치적 입장에서 청의 양무론을 접촉할 수 있었으며, 일본과의 국교 재개후 후쿠자와류의 자유민권사상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즉 개화사상은 당시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는 주체적 의식의 산물로 북학론과 사회경제적 토대의 자본주의적 길이 진전되고 있던 시대적 토양 위에 청의 양무론, 일본의 자유민권론이 침투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개화파의 형성 시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1880년대를 설정하고 있다. 즉 개항을 전후한 시기 세도가문 출신의 소장관료 사이에 친목도모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아직 정치집단화 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개화사상조차도 양무적 수준에 머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개항 이후 정부에서 추진한 개화사업에 실무자로 등용되어 있었지만 주도적 담당층은 아니었으며 당시 동도서기론적 성격을 지닌 민씨정권의 관료층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1879년 이동인이 일본에 파견된 이후 일본을 통해 西器를 수입하려는 경향이 대두하면서 그러한 입장을 지닌 세력 일반에 대하여 ‘개화당’, ‘개화파’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개화파란 여전히 동도를 고수하는 입장을 지닌 채 척사, 척화론에 대비되는 용어일 뿐이었다. 그후 1882년 1월 김옥균이 일본을 방문한 후 사상적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김옥균 등은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도서기론자들과 결별하여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정책추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西敎의 수입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이 시기 사상대립이 개화파 내부의 정책추진 속도를 기준으로 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상적 내용을 기준으로 한 동도서기론:문명개화론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개화파를 부국강병을 위해 문명개화론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서교의 수용까지 가능하다고 여기는 세력으로 축소하여 범주화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개화파의 사상이 국내 정치․사상 발전에 거의 공헌하지 못하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편 권오영은 개화사상과는 별도로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의 존재를 주목하고 있다.5) 1880년대 개화와 척사의 갈등 속에서 김윤식, 신기선, 박기종 등 전․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동도서기론은 당시 정부의 개화정책의 이론으로 기여하였으며 개화사상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동도서기론이 국제사회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논리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1년 신기선에 의해 논리구조를 갖추었고 1882년 임오군란 후 고종의 근대화 정책추진에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재야유생층에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갑신정변 때까지 부국강병의 목표에 있어 개화사상과 상호보완적으로 개화정책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개화파 내에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포함시키는 입장과는 별개의 견해를 주장하였다.
2. 開化思想의 전개 - 현실인식․민족문제, 근대 개혁
구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의 역사적 과제는 대내적인 반봉건 근대화와 반침략 자주화였다. 그런데 대내적 반봉건 근대화의 문제 역시 민족 구성원간의 통합에 의한 근대 민족형성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침략의 과제와 함께 이 시기 개화사상의 민족문제 인식이 어떠했는가는 연구자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도진순은 이 시기 변혁세력을 개화운동, 의병운동, 농민운동의 세력으로 대별하고 이 중 근대 민족주의 이념은 개화사상이 선도하였다고 보아 개화, 개혁,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 과정을 정리하였다.6)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을 추진한 혁신개화파의 사상은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을 지향하면서도 반침략보다는 반봉건, 민권보다는 국권, 국민보다는 정부에 중심을 두는 사상이었다고 보았다. 이들의 사상체계는 치밀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것이지만 당시 국제관계를 주시하면서 중국보다 10여년이나 앞서 개혁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던 점에서 선진적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갑오개혁을 추진한 온건개화파들은 보다 정치한 국권개념, 정부를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심각해진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냉엄한 국제현실에 대한 낙관적 인식과 농민들의 반봉건 요구를 비문명적인 것으로 보는 안이함에서 갑신개화파 보다 사상적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의 반봉건, 국권 위주의 사상적 결함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더욱 노정되는 반면 극복의 단서도 마련되어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유영렬은 갑신․갑오기를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고 근대적 정치개혁이 시도되는 시기로 설정하여 이 시기가 한국민주주의 정치운동의 맹아기였다고 보았다.7) 그는 민주주의 정치운동을 ‘국민에 의한 정부’ 설립을 추구한 것이 요체라고 전제하면서 그러한 민주정치 운동의 중심적 세력이 개화파였다고 규정하였다. 개화파의 자유민권 사상은 실학사상의 민권적 요소를 계승하고 서구사상을 수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특히 일본 자유민권론자의 영향이 크게 받은 것이라 하였다. 갑신․갑오기의 개화파는 국가의 부강독립을 위한 민력양성론, 민력양성을 위한 민권보장론, 민권보장을 위한 정치개혁론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민권론은 천부인권론에 의거하는 것으로 정부의 악정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과 자유권까지 주장하고 있었고 이것은 개혁시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즉 국권확립, 민권보장을 위해 입헌군주제를 정치체제로 채택하여 갑신정변에서의 내각제, 지방자치제 구상과 갑오개혁에서의 ‘군민공치’ 체제 추구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민선의회를 기초로 한 입헌정체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은 미약하나마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을 가지고 국가의 부강독립, 민권신장을 위한 정치제도로 군민공치=입헌군주제를 이상으로 하여 갑오개혁에서 내각제 창설, 관선입법부 설치, 지방의회 설립 시도, 근대적 관리 임용제도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서영희는 근대 시기의 민족문제에 있어 대내적으로 신분제를 폐지하고 민족 구성원의 수직적 통합에 의한 근대 민족형성의 측면이 반외세 저항 측면보다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개화파의 역사적 과제는 국민주권, 입헌공화제 하의 자본주의 경제구조 수립과 제국주의 자본의 침투로부터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새로운 생산계층의 성장에 온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개화파의 국가구상이 이러한 기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보고자 하였다.8) 그는 개화파의 근대국가 구상은 갑신정변을 거치며 ‘군민공치’의 정치제도로 구체화되어 갑오개혁기에 입헌체제 수립으로 실현되었고, 갑오개혁 실패 후 독립협회의 사회운동으로 확대되어 계승된다고 보았다. 그는 개화파가 반외세의식이 불철저하다는 평가는 민족문제를 반외세 저항만으로 파악한 결과로서 이 시기는 민중세력 역시 독자적으로 근대국가를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고 하여 민중주체 변혁운동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오히려 개화파의 국가구상은 민족 구성원 간의 평등을 전제로 한 근대민족의 개념과 이에 근거한 근대 국민국가의 개념에 가장 근접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들은 주권재민, 법치주의 사상에 가장 철저했으며 신분제 타파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민족구성원으로서의 민중 계몽의 필요성도 역설하고 있었다. 또한 개화파의 외세의존 문제는 민족의식이 불철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봉건과의 대결에서 미숙한 정치력을 보완하기 위해 외세를 이용한 것으로 이는 계급적 기반의 한계로 민중세력과의 연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편 박명규는 19세기 한국과 일본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을 구상하고 주도했던 개혁파 정치세력인 개화파와 일본의 도막파의 성격을 비교 검토하여 개화파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그에 따른 근대지향성의 특징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9) 이를 위해 그는 양 개혁세력을 ①신분, 계급적 성격 ②조직원의 결합 양식과 조직기반 및 조직성의 강도 ③물질기반과 폭력수단 소유정도 ④권력자원에의 접근도로 나누어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개화파와 도막파는 모두 지배집단 내부에서 분화된 세력으로 기존의 신분제도, 지배양식을 이용할 수 있는 개인적, 집단적 자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지향과는 거리가 먼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양 집단의 성격에 있어서는 개화파가 문인적, 사상적 결합체인데 비해 도막파는 무력적 기반을 지닌 정치군사적 결합체이며, 개화파가 중앙을 중심으로 활동한 데 비해 도막파는 지방에 자체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이 양국의 개혁파가 지니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지향과 실천에서 다른 결과를 보인 것은 양국 지배층의 성격과 권력지배 양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여 일본 도막유신의 성공도 일본의 권력지배 양식이라는 특수성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개화파의 실패, 도막파의 성공을 주체적 조건의 차이만으로는 설명이 곤란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최경숙은 1880년대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세력이었던 개명관료들의 개화사상을 주로 검토하고 있다.10) 그는 1880년대 성립된 동도서기론을 논리 근거로 한 온건개화파가 갑신정변 실패 후 국내 개화정책의 추진세력으로 활약하였다고 보았다. 온건개화파들은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속에서 민족적 대응을 위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국내의 체제 내에서 서구문화, 특히 기술수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수용하고자 한 것은 주로 서구의 기술문명 ― 전보, 전선, 철도, 광산개발 등으로 기술뿐만 아니라 학문수용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여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이들이 추진한 교육의 목표는 국란방지, 질서유지, 교화를 위한 교육이라는 입장을 지닌 것으로 국가 우선의 교육관을 지니는 것이었다. 또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통역의 양성이라는 실리적 관점과 새로운 관리양성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으로 근대교육의 내실을 다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구교육에서 신교육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았다.
이상과 같이 개화파의 집단의 사상과 개혁 지향을 살피는 연구 외에 개화사상 연구를 위해 개별 인물의 사상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인물에 연구가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개인의 사상을 살피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저술활동의 결과가 일부 지식인들에게서만 남겨져 있는 자료적 한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김신재는 1888년 망명지 일본에서 ‘상소’를 올려 갑신정변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좌절된 개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박영효의 입장에서 개화파의 사상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박영효가 변혁하려던 정치체제의 구체적 모습과 개혁의 목표가 무엇인가, 또한 그들이 근대화를 추진하고 민족적 과제를 추진함에 있어 전통과 근대를 어떻게 조화시키려고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11) 그 결과 그는 박영효의 입헌사상,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적 민권사상은 ‘민족의 독립’이 전제가 되는 ‘국민적 통합’이라는 정치 과제에서 형성된 것이며 개혁사상에 있어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꾀하여 전통적 요소를 재해석한 위에 서구․근대적 요소를 수용, 활용하려 하였던 점을 밝혔다. 박영효의 상소에 나타나는 개화사상은 민권사상이자 국권확보를 전제한 내셔널리즘으로 민권과 국권의 관계에 있어서는 민권을 국권확립의 수단으로 보았다. 박영효에게 있어 민권이란 국권과의 관계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민권신장의 필요성을 인정한 점에서 진보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또한 ‘一君萬民的 정치치제’를 구상하면서 의회문제를 제기하지는 않고 내각제를 통한 입헌군주제의 초기 단계를 설정하는데 그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초보적 요구를 실현한 뒤 발전시켜 나갈 정치체제에 대한 전망은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 그 혁신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박영효가 갑신정변 이전부터의 부국강병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서 나아가 민족 독립사상과 국민적 통합사상을 더욱 명료한 형태로 구조적으로 관련시켜 파악한 점에서 진보적인 사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개화사상가 중에 가장 많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갑오개혁의 주역이었던 유길준이다. 이는 그의 사상서인 ꡔ서유견문ꡕ이 남아 있고 갑오개혁에서 그의 사상을 실천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유길준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먼저 갑오개혁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해온 유영익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유영익은 ꡔ서유견문ꡕ을 통해 유길준의 개혁사상을 고찰하고 그를 보수 점진적 개혁론자로 평가하였다.12) 그는 우선 유길준의 사상 형성과정을 고찰하여 그의 사상이 실학적 바탕 위에 놓인 것이며 갑신정변의 실패, 미국유학 과정을 통해 점진적 개혁사상이 더욱 고취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온건개화파와 교류하면서 ‘中庸之道’에 의거한 중도노선을 스스로 채택하고 있었다. ꡔ서유견문ꡕ에 나타나듯 그는 구미의 자유주의 사상과 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개혁을 전개하는 가운데 ‘政體’와 ‘政事’를 분리하여 정체를 변할 수 없는 항구적인 것으로 보고 조선의 전통적 군주제, 나아가 전통적 윤리체제의 保守를 주장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면서 국민교육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보수적 점진적 개혁사상가의 범주에 머물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론, 동도서기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급진개화당, 민권론자의 변법사상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보았다. 또 그의 ꡔ서유견문ꡕ도 갑오개혁 이전의 전진적 개화사상가의 노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조영도 유길준을 전통 위에 서구사상을 수용한 개화기 지식인으로 파악하고, ꡔ서유견문ꡕ과 ꡔ정치학ꡕ에 나타난 군주론에 대해 고찰하였다. 즉 유길준은 급진적 개혁파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민주주의라는 근대체제를 지향했지만 그의 민주주의 수용은 군주제의 유지 등 조선의 기존체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 그쳤다고 보았다.13)
김신재 역시 ꡔ서유견문ꡕ과 ꡔ정치학ꡕ을 통하여 유길준의 정체 개혁사상, 특히 전제군주권과 민권이 상호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에 중점으로 두어 고찰하였다.14) 그는 유길준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반개화 상태로 보고 이것을 혁파하고 극복하여야 할 후진적 요소로 간주한 위에 일본식 개혁을 추진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개화파의 목표인 부국강병에 있어 軍備보다는 內政을 중시하여 제도개혁을 주장하는 변법론을 기초로 군주권을 제한하고 교육과 법률에 의해 민권을 확립하는 것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적 군주국가를 설립하려고 하는 온건한 자주적 개화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그의 개혁 내용이 갑오개혁을 통해 현실로 구현되어진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로서는 변법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그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개혁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1880년대 말까지의 개화사상은 갑오개혁을 자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봉렬은 유길준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하여 그의 사상적 특질을 밝히고 나아가 유길준 사상 내에 존재하고 있는 전통인식을 고찰하여 그의 사상이 지니는 근대 사상체계로서의 논리적 한계와 개화추진 세력으로서의 사상적 한계의 원인을 고찰하고 있다.15) 유길준의 사상은 1880년 초반 이후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화의 필요성 속에서 잉태되어 ꡔ서유견문ꡕ 집필기에 완성되었다. 그 사상적 배경은 서구사상의 영향과 전통사상 및 자생적으로 성장해 온 근대 지향적 인식으로서 실학사상의 영향 등 제 요인이 결합된 것으로 근대적 의미의 ‘법’과 전통적 의미의 도덕적 ‘윤리’를 기본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화의 방안에 있어서도 서구 근대사상적 법 개념에 의해 일차적으로 표방되고 전개되면서도 한편으로 동시에 전통적 관습, 윤리도덕적 가치관에 의해 정당성을 보장받는 것이어야 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유길준의 논리체계는 일관성을 결여하게 되었고 사상과 실제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원유한은 유길준이 실학자들의 화폐사상에 수용된 서양의 화폐제도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계승하고, 일본과 미국의 근대 화페제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여, 화페제도의 근대화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 서양 금본위 제도의 수용을 골자로 하는 화폐제도 개혁론을 구상, 제시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16) 한편 윤병희는 유길준이 일본에서 귀국한 1907년 8월 이후로 부터 한일합방에 이르는 시기에 있어서의 사상과 활동을 규명하였다. 즉 유길준이 제시한 평화 광복책을 대외적으로는 對日 평화 신뢰관계의 수립이며 대내적으로는 충의정신의 계도였음을 밝히고 그가 궁극적 이상으로 내세운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흥사단과 한성부민회 활동을 통해 소학의무교육의 지방자치화를 정착시키려한 노력을 실증적으로 검토하였다.17)
유길준이나 박영효 외에 개화사상가에 대한 연구로는 초기 개화파의 선구자라고 평가되는 김하원의 오경석에 대한 연구가 있다. 그는 구체적 정치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는 ‘인식’과 ‘사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전제 위에 개화사상가와 개화정치가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개화사상을 그들의 정치활동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초기 개화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햑력을 미친 역관 오경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대외인식의 변모와 개화인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18) 이를 위해 오경석이 병인양요 당시 진청사의 재자관으로 청에 파견되어 수집한 자료인 ꡔ양요기록ꡕ과 조일수교조약 교섭 당시의 일본의 외무대신 宮本小一과의 필담 내용을 중심으로 병인양요-신미양요-개항조약 교섭 시기로 구분하여 인식의 변화를 고찰하고 있다. 그는 오경석이 중국을 통한 간접경험을 바탕으로 대외인식상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여 신미양요 당시에는 개화가로 인식될 정도로 개항론을 행동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개항교섭 당시에는 일본의 문명개화를 동경하여 적극적으로 교섭의 실무에 나서게 되었음을 밝혔다.
한편 일반적으로 온건개화론자로 분류되는 어윤중과 김윤식의 사상에 대한 연구도 일각에서 진행되었다. 이상일은 1880년대 고종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책에 중심적 역할을 하여 온 온건개화파의 대표적 인물로 김윤식의 사상을 검토하였다.19) 그는 김윤식의 사상형성을 그의 학문적 맥락과 교유관계, 유학자로서의 성품 등과 관련하여 살펴 본 후 그의 개화사상을 고찰하였다. 김윤식은 당시 개화를 전통유학자의 현실 개혁논리인 ‘時務’로 파악하여 전통을 중시하는 가운데 현실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구열강의 위협속에서 조선의 주권수호를 위해 청을 기축으로 하는 외교론을 전개하여 친청사대노선을 견지하는 한편 대내 자강론에 있어서는 군비강화보다 내정 개혁에 역점을 두어 민력양성을 우선시 하는 내수자강론을 전개하였다고 보았다.
최진식은 온건개화론자의 한 사람인 어윤중의 사상을 고찰하였다. 당시 권력의 핵심인 민씨정권과 제휴하여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당대의 전문가, 실무자로 개화정책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로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온건개화파의 전체 위상을 이해하는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20) 그는 어윤중의 생애를 임오군란을 분기로 나누어 전기는 경세론을 펴며 일본, 청을 시찰하고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청의 양무이론을 수용하며 부강론을 형성하는 시기로, 후기는 減省廳의 운영을 통해 부강론을 실천하고 좌절을 경험하는 시기로 보았다. 어윤중의 부강론은 임오군란 이후 감생청의 운영을 통해 추진되고 그 가운데 조선 정계에서 실무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지만 정치적 결속력을 지니는 집단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정치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변신의 소지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친청적이던 그가 실무자로서 갑오개혁에 참여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한편 그의 부강론 자체가 지니고 있던 변법적 요소는 갑오경장 참여의 계기를 더욱 열어준 것이라고 보았다. 어윤중의 연구를 통해 최진식은 온건개화파를 당대 정치개혁 각 분야의 이론가로서 보다는 전문적 실무자로서의 위상으로 더욱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한사람의 사상가를 집중적으로 분석, 규명할때는 나름대로의 사상가로서의 일관성과 역사발전에 미친 영향도 아울러 함께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들어 개화기 인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복룡 등은 ‘정치전기학’의 입장에서 서재필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전개하여 갑신정변 시기부터 미국에서의 그의 독립운동을 다룬 저서를 편찬해내었다.21) 또한 개화기의 자료 발굴에 많은 공헌을 해 온 이광린도 개화기의 인물에 대한 전기적 고찰을 통해 일반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오지 않은 인물들의 활동을 밝혔다. 즉 그동안 이교수가 다루었던 김옥균, 서재필, 유길준, 이동인, 유대치, 이승만 등을 제외하고 새로이 남궁억, 어윤중, 김홍집, 박영효, 지석영, 서광범, 이상재, 최병헌 등의 일대기를 기초자료까지 두루 발굴, 섭렵하여 상세히 분석하였다.22) 이현희도 근대의 인물에 대한 저서를 펴내는 등23) 인물연구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인물연구의 성과는 앞으로 보다 다양한 개화파의 사상연구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3. 개화정책
개화파의 개혁구상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개항 이후 주로 1880년대에 실시되었던 근대적 개혁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특히 1880년대의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그 개혁의 주체와 당시 정권의 성격문제와 관련하여 고찰되어지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전미란은 개화기 외교관계에 나타난 조선측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기초연구로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과 구성원, 외교기능의 형태를 살펴보았다.24)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과도기 형태를 거쳐 외교담당기구로 분설된 후 1884년과 1887년의 기구개편을 거쳐 외교전담 기구로 발전하였던 점을 밝혔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국견문이 풍부하고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을 기용하는 등 인사등용에 있어 근대적인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만국공법체제에 입각하여 均勢라는 외교노선을 견지하고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을 도모하는 등 1890년대 이후 조선의 근대적 제도개혁이나 근대화 추진의 기반을 마련해 준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조약체결 등에 있어 외국고문에게 의존하는 등 국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열강의 세력침투를 용인하는 역효과만을 초래한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함께 1880년대 초반 국정을 주도하였던 통리군국사무아문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한철호는 1882~1884년에 사실상 조선정부 최고의 국정 의결기구이자 집행기구로 기능하였던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조직과 기능을 통해 이 시기 정치세력의 동향과 권력구조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였다.25) 그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이 재정․군사 업무뿐만 아니라 근대적 개화, 자강기구의 신설 등 국정 전반의 사안을 입안, 시행하고 있던 점에서 기존의 의정부, 6조를 능가하는 기구라고 보았다. 특히 개화․자강기구를 신설, 통괄하던 기능에 주목하여 볼 때 그 기능이 주로 권력유지에 근간을 이루는 재정, 군사권 장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것이 적극적으로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즉 개화정책을 표명한 고종의 개혁의지에서 출발한 통리군국사무안문은 점차 민씨척족세력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정치기구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반봉건 근대개혁 기구로서의 위상도 약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갑수는 1876~1894년까지 개항기에 실시된 개화정책의 내용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각 시기의 권력집단의 성격과 국제정세 특히 청과의 관계를 대비하여 1880년대 개화정책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26) 그는 개항기를 ①1873년 11월~1879년 민씨정권의 등장과 대외인식의 수정시기 ② 1880~1884년의 내외 정책개혁의 실시와 대청인식에 있어 권력집단 내부의 분열이 시작되는 시기 ③ 1884~1890년의 반청 자주 정책이 추진되는 시기 ④1891~1894년의 반청정책의 좌절과 정치적 종속이 심화되는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에 이루어진 개화정책의 성격을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개항기 권력집단을 ‘친청사대정권’으로 일관하여 성격을 규정하는 기존의 입장에 대해 그들의 주관적 의도는 적어도 자주적으로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 정책의 중점이 강병책에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병책은 외세, 특히 청의 개입으로 목표 달성이 불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시기에는 부국강병을 사회개혁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이같이 사회개혁, 재정개혁을 수반하지 못한 재정 확대책은 외세의 경제침탈로 어려워진 제반 사회세력의 경제기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농민전쟁이 터지자 우호적 외세와 사회적 지지기반을 찾지 못한 권력집단은 청에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민중의 저항을 해결하고자 하는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김필동은 1880~1895년 이전의 관제개혁을 추적 고찰하여 1895년의 근대적 관료제 개혁이 1880년대의 근대적 관제개혁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하고 있다.27) 그는 통리기무아문, 기무처, 감생청, 통리교섭통상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 내무부에 이르는 1880년대에 신설된 관료기구의 성격을 통해 관제개혁의 근대적 성격을 규명하였는데, 이러한 관제개혁은 체제위기에 대해 집권층 일각에서 국가 운영체제 개혁이라는 형태로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한 것으로 특히 개화파가 일관되게 적극적, 주체적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각 관료기구의 개편과정에서 관료기구의 조직과 운용의 주요 측면들은 제도화되면서 전통적 관료기구틀과 병존하고 있었다. 즉 갑오경장은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을 전체적으로 확산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장기적 과정에서 이미 이루어진 변혁의 발전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1880년대 개화파가 추진해 오던 근대적 변혁의 과제가 갑오경장에 계승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1880년대 관제 개혁은 근대적 관료제 개혁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개혁 자체가 부분적이고 그 자체의 한계를 지닌 것이기는 하나 근대 관료제 형성의 단서를 제공하였고 또한 기본적으로 초기개화파에 의해 상당히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변혁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개항 이후 한국근대사의 기본 목표가 부국강병이었다는 점에서 ‘강병’을 위한 군제개혁을 고찰한 연구성과들도 나오고 있다. 임재찬은 개화기 군제 개편과정을 1876~1895년 훈련대사관양성소 설립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당시 정치체제, 사회경제적 구조와 관련하여 조선의 군사근대화 정책 및 군제개편 과정을 살피고 있다.28) 한편 최병옥은 임오군란 후 갑오개혁 때까지 조선 군제의 근간이 되었던 친군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친군제의 성립과정과 성격, 모순점을 밝히고자 하였다.29)
Ⅲ. 甲申政變
한국 근대사는 대내적으로 봉건사회의 해체와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반봉건 근대화’와 ‘반외세 자주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근대국가,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둘러싼 다양한 변혁세력이 등장하여 이 시기 변혁운동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제반 세력 중 1884년 개화파에 의해 추진된 ‘갑신정변’은 이 시기 근대적 변혁운동의 시발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갑신정변에 대한 연구는 근대 민족운동의 성향과 그 성격을 밝히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이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개혁주체의 현실인식과 변혁의 방법론을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 근대화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30)
갑신정변에 대한 연구는 근대사회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 사건의 주체들의 사상적, 정치적 지향과 그 결과를 둘러싸고 긍정, 부정적 견해로 대별할 수 있다. 일본인들에 의한 갑신정변의 타율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1960년대 이후 갑신정변은 내재적 발전의 결과에 의한 주체적 성격이 강조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즉 사건의 주체적 동인으로 내재적인 사상적 동인이 강조되어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의 인적, 사상적 계보가 밝혀졌다. 또 정변과정에서 발표된 혁신정강의 개혁내용을 분석하여 주도세력의 근대화 의지와 이를 위한 사상, 정책적 치밀한 계획이 수립되어 있음도 강조되었다.
1970년대부터 개화파와 개화사상등 근대사 연구에 정열을 바쳐온 이광린은 개화파가 갑신정변 이전부터 근대적 정치개혁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갑신정변 당시 ‘정강’으로 발표된 것임을 국내외 자료를 이용하여 재확인하고 있다.31) 정강의 실재를 부정하는 일본인 학자의 논지에 대한 기존의 반박을 보다 구체화하여 한국측에서 ꡔ罪人申箕善鞫案ꡕ, 박정양의 ꡔ從宦日記ꡕ, ꡔ大韓季年史ꡕ와 중국측의 ꡔ淸季中日韓關係史料ꡕ, 일본측의 ꡔ明治十七年朝鮮京城事變始末書ꡕ, 井上角五郞의 ꡔ漢城내殘夢ꡕ, ꡔ朝野新聞ꡕ, ꡔ時事新報ꡕ의 기사, 그리고 미국측의 ꡔ에비슨 자서전ꡕ에 들어있는 서재필의 회고록 등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여 정강의 실재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결과 정강 14개조는 정변 이전부터 개화당 인사 간에 논의되고 때로 국왕에게까지 진언되었던 것으로 그 중의 일부가 갑신정변 당시 공포되어 실시되었던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의 추진세력인 개화파가 정변 이전부터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등 변혁주체로서 성숙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근대 변혁주체로서 개화파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신용하 역시 갑신정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32) 그는 임오군란 후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이 청의 내정간섭으로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급진개화파가 무장정변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본다. 그는 개화파의 무장정변 결정이 독자적 결정에 의해 주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갑신정변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혁신정강의 공포로 국정 전반에 걸쳐 전근대적 체제를 근대체제로 개혁하여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후 개혁운동의 지침이 되어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도 ①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입과 군사공격, ②개화당의 일본군차병과 일본의 배신, ③지지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층의 미성숙 ④민중의 지지결여, ⑤민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 소홀, 정변 수행기술의 미숙 등으로 분석하여 개화파 자체의 미성숙, 계급적 한계보다는 정변 수행과정에서의 외적 상황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한편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갑신정변이 ①대개혁 단행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열적으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며, ②근대사에 있어 개화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였고, ③반침략 독립운동의 기원을 마련하였으며 ④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하였다.
윤대원도 갑신정변을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변혁하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근대적 시민층, 민중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봉건권력 내부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개혁운동으로 평가하였다.33) 그는 갑신정변이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 국가와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경제개혁에 있어서도 구래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켜 나갈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개화파의 사회경제적 기반에서 계급적 한계가 노출되어 지지계층이 제한되었고 구미 열강의 침략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침략적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근대주의의 성향을 띠었다고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지향한 개혁 방향은 조선후기 이래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던 역사발전의 합법칙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갑신정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근대사회 건설을 위한 변혁운동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는 입장과는 달리 그것이 오히려 근대사회 발전에 장애가 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시킨 사건이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견해가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다.
먼저 최영호는 갑신정변의 개혁안, 전개과정을 살피고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혁 실패에 따른 국내외의 반응과 영향 등을 통해 그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고 있다.34) 즉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사상이 일반국민의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권력의 최고집권자인 고종의 개화에 대한 의지를 죄절시켰다고 보았다. 또 능력있는 젊은 인재의 상실과 일본에 대한 감정악화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모델이 될 수 없었으며, 청의 내정간섭이 더욱 강화된 점을 들어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근대화운동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비극적인 영향을 초래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갑신정변의 시기상조론을 들어 개화파의 근대적 변혁운동을 오히려 좌절시킨 악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이다.
한편 그동안 한말 외교사를 주로 연구해 온 최문형도 당시 열강의 대한정책과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갑신정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35) 그는 역사에 있어 동인보다는 결과를 중시해야 할 것이라고 전제한 뒤 현재까지의 연구가 개화파의 선각자적 의식이나 사상사 측면에서의 기여도에만 편도하였고 그 자신들이 남긴 ꡔ갑신일록ꡕ․ꡔ갑신정강ꡕ 등의 자료에만 의존하여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정변 당시의 상황만이 아니라 정변 이전 개화파의 행적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김옥균이 차관 교섭을 위해 영국, 미국, 일본에 접근한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개화파는 제국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점은 차치하고라도 국내의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밀한 계획도 없이 정변을 일으켜 결국 제국주의 열강에게 이용당하였다고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내렸다.
근대사회 변혁주체로 민중세력을 상정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주진오 역시 갑신정변이 부르주아 개혁의 성격을 갖는다는 일반적인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36) 임오군란 이후 청의 자주권 침해 상황에서 조선의 자주적 부국강병이 시대적 과제로 요청되어 왕실, 특히 고종의 지지 아래 개화파들의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의 차관 교섭 실패 이후 민씨척족세력의 반발에 직면한 개화파는 정변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국내에 확고한 원조세력과 사회적 지지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즉 갑신정변은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파악없이 감행한 모험주의적 책동으로 한국 근대 변혁운동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또한 개혁의 지향에 있어서도 정강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평가되어지듯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합문내의 의정소에서의 회의라는 것은 대원군, 종친, 외척, 개화파 연합정권의 유지를 위한 장치로써 이는 세도정치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근대국가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개화파의 근대국가 수립 지향은 인정하지만 갑신정변이 곧 부르주아 혁명 혹은 자주적 개혁운동은 아니며 그들이 지향한 권력구도도 부르주아 권력으로 보기 어렵고 민중을 무시한 점에서 자유민권 사상을 지녔다고 보기도 힘들다고 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몰두해 온 박성수는 우리나라 근대화운동의 선각자로 인식되고 있는 서재필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면서 그가 초기에 활동했던 갑신정변이 조선의 대일종속을 가속화 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고 부정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37) 그는 갑신정변이 일본군과 결탁하여 저지른 소년들의 불장난이었다고 혹평함으로써 갑신정변 주체의 미성숙과 외세 특히 일본에의 의존을 비판하였다.
갑신정변에 대한 이상과 같은 긍정 혹은 부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갑신정변의 동기와 결과를 분리하여 동기면에서 국민국가 건설, 자유평등 사상 등에는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그 결과로 인해 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저지하지 못하였으며 고종과 집권층 내부의 개화의지를 쇠퇴시켜 근대사의 중요시기에 10년의 퇴행기를 가져왔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절충적 입장이 정옥자에 의해 제시되었다.38) 즉 그는 1870년대~1884년 까지의 초기 개화운동 연구가 ①운동 주체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 ②1876년 개항 이후의 역사를 서구적 가치 기준과 현대적 시각으로 이해하여 전통시대와 단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 ③근대사에 대한 심층적 기초작업이 없이 평가에 급급한 점, ④당시 사건의 당사자에 의한 자기합리화, 사실은폐 등을 고려하지 않은 점 등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갑신정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와 아울러 앞으로 수행되어야할 갑신정변에 대한 과제는 우선 개화파의 사상적 기반을 도출해내는데 있어 개화사상의 개념부터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미 개화파나 개화사상의 형성시기에 있어서도 남한이나 북한의 입장의 차이와 더불어 남한학계에서도 학자마다 다른 시각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혼선을 빚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미를 그 자체의 분석만 가지고 평가하기보다는 1880년대를 전후한 시기 국내 정치세력의 동향과 정책의 집행상황, 열강의 對조선정책, 갑신정변 이후 일련의 변화된 정국의 흐름을 통해서 그 영향권까지 파급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Ⅳ. 甲午改革
1894년의 갑오개혁에 대한 종래의 연구는 대체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는 타율성론의 평가로 치우쳐 있었다. 이에 대해 1980년대 이래 이를 비판하면서 갑오개혁을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어 왔다. 이는 갑오개혁의 자율성, 즉 합법칙적 발전의 주체적 반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관한 논의는 제국주의 침략론과 내재적 발전의 반영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머물고 있어 본질적 측면에서 논쟁의 간격을 메꾸기 어려운 실정이다.39)
1970~80년대 이미 갑오개혁의 자율성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했던 유영익은 1990년 그간의 연구를 실증적으로 보완하여 ꡔ갑오경장연구ꡕ를 출간하였다.40) 이는 갑오개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로서 그의 적극적인 갑오개혁 긍정론을 논의한 것이다. 유영익은 이 책의 전반부에서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의 대한정책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여 당시 일본 정치권의 대한정책의 중심은 침략주의였다는 점을 밝혀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계획하고 주도했다는 타율성론의 근거가 희박함을 논증하였다. 한편 갑오개혁에 참여한 조선의 개화친일파 관료의 개혁동기, 개혁사상, 참여도 등을 다각적으로 천착하여 갑오개혁이 갑신정변 이래 근대화정책을 추진해 온 개화파의 자율적 개혁임을 밝혔다. 또 주체세력 내에 양반서자, 중인 등 ‘아류양반’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양반 중심의 사회 신분체제가 변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 제도개혁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의 중국지향적 제도가 일본, 서구지향적 근대제도로 바뀌고 있었던 점을 들어 갑오개혁이 명실공히 근대화 도상의 중요한 기점임을 밝혔다. 개혁주체의 개혁사상은 전통적 실학의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반청, 독립이란 정치개혁 목표와 평등, 합리적인 사회건설이라는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것으로 이런 점에서 친일 개혁관료들에 대해 긍정적인 재평가가 가능하다고 결론지어 갑오개혁에 대한 자율, 긍정적 평가를 주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는 갑오개혁의 범주를 1894년 군국기무처 단계부터 1895년 고종의 친정발표 이전 박영효 주도의 개혁시기까지 포괄하여 자율성을 강조하였다.41) 즉 1894년 말 내무대신으로 취임한 박영효는 개혁 추진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본의 井上馨공사와 제휴하였으나,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기반 구축에 진력하고 나아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이권 요구를 거부하는 등 자율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전권을 장악했던 1895년 5월 말부터 7월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1888년의 ꡔ건백서ꡕ에서 이미 제시한 개혁안들은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겼다고 보았다. 따라서 박영효의 개혁사상과 정치활동에서 드러나듯이 갑오개혁이 단순히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혁운동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는 1884년 갑신정변과 1896~1898년간의 독립협회 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로서 그 역사적 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사건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갑오개혁의 내용 중 사회제도 개혁 특히 신분제 개혁 부분의 검토를 통하여 갑오개혁 중 사회제도 개혁에 일본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갑오개혁의 자율성을 구체적인 개혁 내용을 통해서도 검증하였다.42) 즉 신분제 개혁 등 사회제도 개혁은 조선후기 이래의 법제 개혁을 계승한 것으로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진행되어 완결시킨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철호는 갑오개혁의 주체세력을 갑신정변파, 갑오경장파, 정동파 등으로 구분한 유영익의 논지를 수용하면서 각 정파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친일 개화파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반일, 친미․친러적인 정동파의 개혁활동을 검증하고 있다.43) 정동파의 핵심인물인 박정양과 윤치호의 문헌, 일본․미국측의 자료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갑오경장 중 정동파가 주로 근대적 교육이념의 확립과 근대식 학교의 법적 토대마련에 진력하였다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또 그들의 순한글 신문 간행 계획은 이후 「독립신문」 창간의 여건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갑오개혁이 타율적 개혁이 아님은 물론 갑오파, 갑신파 외에도 정동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근대 개혁운동이었으며 이들 정동파는 아관파천 이후에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이후 개화파의 독립협회 운동에도 기여하였다고 하여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운동의 유기적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도면회는 갑오개혁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와 관련하여 이것을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기점으로 파악하였다.44) 그는 시기구분 문제에 있어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개념을 채택하여 근대=자본주의 사회구성체라는 논리를 전제로 하여 한국사의 근대 기점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호, 조장하고 촉진시키는 국가권력의 수립과 각종 개혁조치가 시작되는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계기를 바로 ‘갑오개혁’이라고 보았다. 갑오개혁을 담당한 정권은 일본의 내정개혁의 요구에 몰려 구성된 것이나 그 구성원은 이전 시기부터 조선정부의 근대화 정책을 기획하고 실무를 담당했던 세력 혹은 근대화정책 과정에서 양성된 실무관료로 이들에 의해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의 개혁구상과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수용, 일본 근대화를 모델로 하여 개혁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갑오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침략 정책에 부응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독자적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로 자립하는 데 필요한 제반 조치를 망라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기존의 연구가 갑오개혁의 타율성이라는 비판적 견해로 인해 이후 사회변화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성과를 종합해 볼 때 이 시기 사회변화는 한국사회가 근대적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추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변화의 내용은,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①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적 정치체제 수립운동이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변화한 점, ②개화파의 인적 구성에 신흥세력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는 점. 이는 갑오개혁의 과거제 폐지, 신분제 타파 조치를 전제로 한 것, ③보수유생층도 자신의 이해관계 수호 위해 대중적 정치단체 조직 등 근대적 정치운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점, ④지방제도 개편의 경우 갑오개혁의 기본방향이 유지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①구래 지주제를 근대적으로 전환하여 이를 근대국가의 기반으로 삼고자 한 기본방향이 대한제국 시기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점, ②조세제도의 개혁조치 유지, ③근대적 화폐제도의 기본원칙 고수, ④상업적 농업이 성장하고 농민층의 분해가 진전되고 있으며 지주제가 확대 강화된 점, ⑤근대적 기업설립 움직임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근대사의 기점을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상부구조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함께 고려하는 논지는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갑오개혁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의 모습이 과연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제고의 여지가 있다. 또한 논자 자신도 개화파정권 몰락 이후 상부구조인 정치권력의 구성이나 정치체제 면에서의 개혁 성과가 부정되고 강력한 전제군주제로 환원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 갑오개혁 당시 정치, 사회개혁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지속성 문제는 앞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갑오개혁의 외세의존성, 친일성 등을 강조하여 민족적 과제에 있어 타율성을 면할 수 없다는 논지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한정하는 연구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김영모는 갑오개혁의 주도적 추진세력과 개혁내용을 군국기무처 시기의 1차개혁과 중추원을 통한 박영효내각의 2차 개혁으로 구분하여 분석한 뒤 갑오개혁이 조선 말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획기적인 제도개혁이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에서 발상된 것으로 내정간섭, 군사개입, 친일파 육성들의 방법을 통해 식민지화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라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45) 그는 1894년 당시 조선 내정개혁의 주도세력인 일본공사, 개화관료, 동학당의 내정개혁안이 내용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차개혁에서는 일본공사, 동학당, 개화관료의 요구가 함께 수용되었으나 2차개혁에서는 일본과 개화관료의 요구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때부터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가 그대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인 관료에 의해 추진된 개혁일지라도 분명히 일제의 군사적 위협과 일본공사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성이 매우 강한 개혁이었다. 그는 갑오개혁의 내용이 반봉건, 반청, 반세도의 근대성을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식민지화인 한 역사적 평가는 불가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상기는 1894~95년간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갑오․을미의병의 반갑오경장 투쟁과 그 논리를 살펴보면서 척사적인 의병운동과 갑오개화파를 대비시킴으로써 갑오개혁의 역사적 위상을 구명해 보고자 하였다.46) 갑오․을미의병은 ‘존화양이론’과 ‘개화망국론’의 논리를 가지고 갑오경장 전체를 기본적으로 부정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지방제도와 군사제도의 개편, 단발령과 변복령 공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군용전신선 절단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병들의 반대투쟁의 실례를 검토하면서 지방제도의 개혁과 군사제도의 정비는 지방세력과 군사력의 축소를 가져왔다고 보아 갑오경장에서 개혁적인 측면을 찾기 어렵다고 하였다. 더우기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의 전국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김홍집내각이 그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무력에 의존하였기 때문으로 보아 갑오경장은 일본군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에 추종하게 된 근대화정책에 불과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이화는 기존의 연구들이 갑오개혁의 자율적 추진기구로 보았던 군국기무처의 성격을 구명하면서 갑오개혁의 자율적, 주체적 성격을 부인하였다.47) 즉 일본군의 경복궁 장악후 김홍집내각의 협의체적 입법기구이자 실행기구로 성립된 군국기무처는 개혁의 주도기구였지만 정권 발생 5일이 지난 후에야 조직이 규정되는 절차상의 결함을 지닌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절차상의 문제는 군국기무처가 일본 군사력의 강압에 의한 괴뢰정부의 기구로 발족된 것으로 일본의 개혁구상 안에 이미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군국기무처는 조선 정부, 개화정권의 구상, 의지가 아니라 일본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고 따라서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은 결국 일본의 대조선침략과 연결되는 내용을 수용하는 것으로 주체적인 개혁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하원호는 갑오개혁 성격규정에 대한 남북한 역사학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외압의 변화에만 주목해 온 소모적인 자율성․타율성 논쟁 보다는 갑오개혁 주체의 성격, 개혁의 전개과정, 개혁 결과가 미친 영향 등을 긴밀히 연결하는 가운데 총체적으로 의의를 파악하려는 연구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48) 또한 그는 각 연구자들의 연구가 용어나 시기 범주에 대한 정확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시기를 설정한 상태에서 자율, 타율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갑오개혁도 근대 변혁운동 과정의 내재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근대 변혁운동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요청된다고 하였다.
갑오개혁 주체의 친외세적 성향, 민중과의 유리 등 한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지만 개혁내용이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지향은 결코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개혁의 외형적 구조와 내용은 조선후기 이래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 속에서 추구해온 합법칙적 역사 발전의 결과였으며 근대 부르주아 국가건설과 토착 부르주아 육성을 위한 상당히 일관성있는 근대적 성격의 정책체계였다는 점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즉 외압의 조건 아래서 개혁의 성과를 내재화하지 못한 한계를 인정하지만 개혁주체의 노력과 개혁내용은 조선후기 이래의 우리 역사발전의 한 산물이었던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절충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주진오 역시 위와 같은 입장에서 갑오개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갑오개혁의 시기를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로 설정하고 이 시기 개혁을 한국 근대 변혁운동사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동태적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 후 개혁의 대상이었던 민씨정권의 성격과 개혁의 주체, 개혁의 방법, 내용을 재검토하고 있다.49) 먼저 그는 당시 민씨정권을 친청수구파라고 보는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여 개혁 이전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부국강병책을 진행하고 있던 민씨정권을 이전 봉건국가와는 다른 차원의 절대왕정으로 보고 있다. 절대왕정은 그 자체가 근대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부르주아 개혁이나 혁명의 타도대상이 되는 것이지만 뚜렷한 개혁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유지가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는 종래의 갑오개혁 성격에 대한 논쟁이 소모적인 폐단을 제거하고 총체적으로 갑오개혁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해야한다는 새로운 전제를 내세우고는 있으나 전체적인 논지 속에 개화파의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찾기는 어려우며 결국 일본의 개혁지원과 침략의도를 구분하여 대처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일본에 의존적이고 타율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한편 1894년 농민전쟁 100주기를 맞아 1894년 농민전쟁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이라는 양대 변혁운동의 상호관련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에 대해 최근의 연구는 농민군의 개혁이념이 주체적 역량의 성숙에 따라 개량적 개화파와의 타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는 입장과 농민군이 개화파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타협의 차원을 넘어 ‘합류’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 혁신관료들이 농민전쟁의 힘을 개혁의 기본동인으로 이용하였다고 하여 갑오개혁 추진의 보조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우 등 어떠한 형태이든 양자간의 상호관련성을 인정하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50)
이에 대해 이이화는 두 개혁의 주도층의 성분과 추진 과정, 개혁의 조목과 지향점을 분석하여 두 개혁이 본질적으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51) 농민군의 집강소와 군국기무처의 활동기간이 일치하고 있으나 민족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양자는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외세와 밀착하여 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정부는 반민씨, 반수구 세력이라는 입장에서 농민군과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농민군이 반외세의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되자 그들을 적대시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농민군은 대원군을 옹립하려 하였고 개화파는 일본세력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간의 연합이나 연대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양세력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있었고 개혁의 지향점이나 방향에 있어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분제 개혁 등 개혁의 내용이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과 폐정개혁의 연관성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에 있어서의 당위와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인식 하에서 개혁의 본질과 수단이 온전히 결합했을 때 참방향이 잡힐 수 있다는 합법칙적 역사조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보아 갑오개혁의 외세의존성이 그 내용의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여 부르주아 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진오 역시 갑오정권이 농민군에 대해 반민씨세력이라는 점에서는 환영하였으나 개혁의 동기와 방법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어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 대해 심도있는 검토를 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자의 개혁안은 지향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지향과 상관없이 일치했을 뿐이고 외세에 대한 인식에 있어 양자의 상호 합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의 개혁세력에게 있어 개혁을 방해하는 민족 내부의 반대세력 보다는 개혁을 지지하는 외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을 것이라 하여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상호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52)
갑오개혁의 성격을 둘러싼 자율, 타율의 논점을 다룬 연구와 함께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을 개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먼저 유영익은 갑오개혁 당시의 사회제도 개혁을 개혁의 주체와 개혁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증하여 갑오개혁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기존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53) 그는 갑오개혁의 개혁안 중 사회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없는 상황에서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즉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관료들이 조선후기 이래 신분제 개혁의 법제적 맥락 위에서 개혁을 완료하였다고 하여 기존의 ‘신분제 개혁 동학농민군 선도설’을 비판하였다. 또 갑오개혁 때 제정, 공포된 사회제도 개혁안이 종래 알려진 것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으며 봉건적 신분제도 개혁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방법에 의한 신분제 폐지가 아니라 점진적, 개량적 방법에 의한 신분적 차별의 철폐, 특히 차별없는 인재등용의 원칙을 이룩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제도 개혁은 소극적 성격의 개혁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획기적인 근대적 개혁조치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갑오개혁의 성격 문제와 달리 개혁내용에 있어 근대성, 혁신성으로 평가받아온 신분제 철폐 문제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갑오개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영호는 주로 지주적 입장에서 전개된 갑오개혁 당시의 지방 행정제도 개혁이 이후 지방사회의 재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통해 갑오개혁의 성격을 고찰하였다.54) 갑오개혁 이후 자주적 근대화의 과제는 근대 민족국가 수립으로 이를 위한 개혁 가운데는 근대국가의 체제에 적합한 지방 행정제도의 수립, 지방사회를 주도할 새로운 세력이 등장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미 제국주의 세력이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 추진된 근대화정책에서 자주성의 유지는 쉽지 않아 지방사회 지배세력의 재편과정에도 제국주의 간섭이 개재되었고 결국 지방 행정제도 개편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신구향이라는 계급, 계층적 대립구조의 문제와 민족적 세력 대 반민족적 세력이라는 민족적 대립구조를 동시에 내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는 가운데 그는 갑오개혁이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결국 일제의 침략정책과 관련하여 새로운 친일세력 양성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았다.
정구선은 갑오개혁에서 이루어진 과거제의 폐지와 그에 따른 관리임용제도를 통해 갑오개혁의 성격을 밝혔다.55) 그는 이 시기 관리임용제도가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에 의한 관리선발을 규정하고 있으나 각종 학교의 설립을 통한 인재양성이 이루어지기 전 잠정조치로 천거제에 임용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시험제 보다 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천거제에 의한 인재등용 방법은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개혁방법으로서 이 시기에 와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이 일본식 관리임용제도를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실제적인 실행의 면에서는 자율적인 측면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론적으로 갑오개혁은 일본의 간섭으로 배제하지 못하였으나 내용면에서 다분히 한국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여 갑오개혁이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욕구가 결합되어 표출된 타율적인 것이면서도 자율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절충적인 입장의 성격 규정을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기존에 주류를 이루어온 개화파 위주의 갑오개혁 연구 이외에도, 갑오개혁 반대세력들의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갑오개혁의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도 있다. 오영섭은 1894~98년간의 갑오개혁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주자료로 삼아서 보수파 인사(보수파 관료, 유생)들의 갑오개혁에 반응 내지 비판의 특징을 서술하였다. 즉 갑오개혁안에 대한 보수파의 반응 중 주요관심사는 개화파 인사의 처단, 단발령의 시행반대, 복제복구, 성균관관제의 복구, 엄형주의의 부활, 고종의 위호변경및 개국기년의 사용반대 등이었는데, 이는 보수파의 유교적 문화중심적 사상논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 보수파들은 갑오개혁의 성격을 침략적, 친일 매국적, 비자주적, 급진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보수파 인사들의 반대논리가 위정척사적인 관점에서 나왔음을 강조함으로써, 갑오개혁에서 개화파들의 개혁구상이 친일적 반민중적인 면이 있기는 하나 동시에 반대파 등의 보수성과는 달리, 근대적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56)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갑오개혁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여러각도에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보다 구체적인 갑오개혁안의 시행여부와 지속성, 갑오개혁의 영향과 국내의 반응, 갑오개혁 주도세력들의 성향분석, 특히 사상적 기반과 현실대응의 일관성 등이 면밀히 포괄적으로 검토되어야할 것이다.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지난 5년동안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연구현황을 살펴보았다. 필자의 능력이나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모든 논문을 다 수록하지는 못했지만 되도록 연구성과에 나타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된 주제를 중심으로 고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 이제까지 앞서 살펴본 대체적인 연구경향을 토대로 앞으로의 연구과제를 종합적으로 전망해 보고자 한다.
첫째, 개화사상과 개혁운동에 있어 연구분야가 주로 개혁운동에 치우쳐 있으며 기존의 연구성과에서 나타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감이 든다. 물론 자료의 한계에 기인한 점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시각을 통한 폭넓은 주제선정이 필요하다.
둘째, 연구방법론에 있어 실증적인 검토보다는 이론적 가설에 토대를 두고 역사적 평가에 주력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갑신정변에 대해서도 긍정, 부정에 대한 논의와 갑오개혁에 대해서는 타율적, 자율적 성격의 논란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하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자칫하면 사건의 본질보다 흑백논리에 치우칠 필요가 있어 앞으로는 더욱 광범위한 자료발굴과 실증적인 연구를 토대로 다양한 분석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념과 용어정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논자에 따라 같은 용어를 다른 개념으로 적용하여 이해의 혼선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고 동일한 역사적 사건임에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획일적으로 용어나 개념의 통일을 단행하여 역사적 의미를 희석시킬 필요는 없지만 보다 역사적 진실을 밝혀줄 수 있는 적절한 용어 및 개념의 설정이 합리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넷째, 아직도 가리워진 자료의 발굴로 흩어져 있는 자료의 정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일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것은 국내뿐아니라 국외에도 안목을 넓혀 적극적인 입수작업과 보존, 사료적 검증과 정확한 해독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분야는 부단히 연구가 진척되기 위하여는 자료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특히 이 분야는 남북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 상이한 점이 많아 그동안에 간행된 연구성과의 종합적 검토와 남북한 학자들의 상호 학문적 교류가 필요하다. 당장에 어떤 합의점을 도출한다기 보다는 우선 서로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시각에 어떤한 차이점이 있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신용하, ꡔ한국근대사회의 구조와 변동ꡕ(일지사, 1994).
2) 김신재, 「박영효의 정체구상과 그 성격 - 상소를 중심으로」(ꡔ소헌남도영박사 고희기념 역사학논총ꡕ, 1993).
3) 김봉렬, 「유길준 개화사상에서의 전통인식」(ꡔ경대사론ꡕ 7,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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