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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복도로 시문학관 원문보기 글쓴이: 눈산
☐ 해설
내부로의 유배와 경계 위의 눈뜸
-강영환 시의 의미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장소를 잃는 것은 세계를 잃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살아야 할 지향성을 잃게 됨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 이것은 『장소와 장소상실』의 저자 에드워드 렐프가 장소의 중요성을 이르며 한 말이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존재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을 두고 장소귀속성이라 부를 수 있는데, 거기서 사회적 연대성이니 자아실현이니 하는 등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말들이 생기게 됨을 볼 수 있다. 누구나 여타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장소 속에 놓여 있을 때 삶의 의미와 안정을 획득한다. 공동체는 저마다 공통되는 빛의 파장 속에 놓여 있되 조금씩 다른 프리즘으로 개성을 살려 다양성 속의 통일, 또는 통일성 속의 다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보다 더 원초적인 동물도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오줌을 비롯한 체액으로 자신의 표지를 남기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물이 자신의 영역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는 다른 동물에게 쫓겨나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경우뿐이다. 확대 해석하면 이는 식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장소, 혹은 장소성은 존재의 실존과 관련된 의미의 자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의미의 토대로서 말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에서 장소의 유무와 그 장소가 갖는 특이성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친 바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자신의 실존적 토대가 되는 장소를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상실의 과정이 갑작스럽고 제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정치적 판단에 의해 피지배, 또는 소외 계층에 저질러진 구조조정이나 철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는 사회적 차별로 인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사안에 대해 우리의 마음은 복잡해지지 않고 분노와 연민의 감정으로 정리된다. 문제는 이런 경우보다 누가 볼 때도 자연스럽다고 여길 만큼 자신의 장소성을 상실해 가는 경우다. 흔히 나이 듦에 따른 골방으로의 퇴거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정년퇴임이나 병病 등 여러 이유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정치적 차별의 차원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므로 개인적으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장소 상실로 보기 쉽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에 볼 때 그것은 바로 삶과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그가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또 다른 사회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더욱 본질적인 차원의 장소상실의 문제를 늙음의 현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늙음의 현안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일인 만큼 그것으로 인한 장소상실의 문제는 ‘노년의 삶’만에 한정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에게 그 자신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탐색할 만한 주제다. 특히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의 핵가족이 주류가 된 오늘의 현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독거노인’의 확산과 그에 따른 장소상실은 이 시대 존재론의 핵심적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영환 시인의 이번 시집은 바로 이 문제를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그의 고뇌에 찬 시적 언명과 사색은 우리도 고민해봐야 할 만한 좋은 고찰의 자료이자 계기다. 그는 현재 사회적 차원에서 나이 들어 정년하였고(오랜 중등학교 교사생활에서 퇴임하였음), 몸도 편치 않아 술도 끊어(필자가 알기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술을 너무 좋아하여 술고래로 불렸다) 몇 가지 차원에서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다. 이는 사회적 소통과 활동의 영역에서 자의라기보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물러난, 그렇다, 그의 입장으로 볼 때엔 ‘물러난 상태’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쉽게 회복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즉 세월의 불가역성不可易性이 거기에 놓여 있어 이러한 고민과 고통은 인간 존재에게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사실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강영환 시인의 고통과 방황을 통해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과정의 있을 법한 한 인간의 전형을 보게 되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글은 강영환 시인의 시를 빌어 노년의 문턱에 접어드는 우리 시대 인간의 존재론을 살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후老朽, 버려짐 혹은 내몰림
전제가 그렇다면 이번 시집의 강영환의 시들은 고민과 슬픔에 싸여 있을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읽어보면 사실 그렇다. 그의 이번 시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의 감정과 슬픔이 시 전체에 배어들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연한 감정을 들게 한다. 그것도 현실적인 문제로 그러한 점들이 제시될 때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면서 나이듦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 심사가 복잡해지고 으스스 추운 느낌마저 들게 해 괴로워지기까지 한다. 다음 두 편의 시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나도 삼천포에서 오는 길인데…
그래요 오늘 사표를 내고 오는 길이요
십년 넘게 근무한 직장 그만 둔 심정 알겠어요?
알리가 없지요 누구도 몰라요
난 말이요 삼천포 화력 과장인데
지들이 뭐 잘났다고 말이야 더러워서
<중략>
나 오늘 사표를 냈단 말이요 알겠어요
그 심정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몰라요
사표를 내 보지 않고는 이해 할 수 없어요
당신 사표 내 봤어요
-「사표 내봤어요?」 부분
노후로 분류한 컴퓨터가 구조신호를 보낸다
동작이 늦다고 가두어 둔 붉은 눈과 눈 맞춰 보았다
멀어진 귀와 귀를 맞춰 보았다
닫은 입과 입을 맞춰 보았다
그래도 살려 달라고 말 걸어오지 않는다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남아도는 심장이었지만
폐기처분되는 것이 싫어서 손짓을 보내온다
퇴출이 싫은 목숨을 눈짓으로 깜박거린다
누구도 관심있게 보아주지 않아 눈에 말을 달았다
구석진 자리로 내몰려 화분에 물이나 주면서 지내라고
뼈 있는 말 한 마디 걸어와 주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모두 다 그랬다
-「어느 틈엔가」 전문
이 두 편의 시는 강영환 시인이 현실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실체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사실을 명료하게 적시하고 있다. 하나는 ‘사표’로 집약되는 사회적 실존의 장소상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노후’로 집약되는 폐기처분이다. 둘 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실케 하는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상실에 따른 일임을 함축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이 두 원인이 서로 맞물려 발생한다는 점에서 노후로 인한 사표의 문제는 시인에게, 아니 우리 인간에게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상승적이고도 본질적 문제로 닥쳐옴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시인의 심리를 좀 더 알기 위해 두 편의 시에서 시적 화자의 심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사표 내봤어요?」에서 시적 화자는 대화의 상대자라 할 수 있는 ‘삼천포 화력 과장’의 사표 낸 넋두리를 듣고 있다. 특히 “십년 넘게 근무한 직장 그만 둔 심정 알겠어요/ 알리가 없지요 누구도 몰라요”라는 점을 수미상관 형식으로 두 번이나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하고 쓸쓸한지를 강조하고 있고, 이를 화자도 공감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자아로서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곳으로부터 퇴출이 자신의 가족을 넘어 자신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는 그 의미를 형성케 하는 타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사표’(/퇴출)는 그러한 의미형성을 차단, 또는 박탈해 버리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다른 여타의 새로운 장소 획득(시 안에서는 ‘점포 하나’로 나타남)으로 이것을 대신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말 그대로 임시변통이지 본질의 대체가 될 수 없다. 그 점에서 사표로 표현된 삼천포 화력 과장의 심리는 자신의 정체성 상실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는 듣고 있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대변함으로써 곧 시인 강영환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표를 낸 원인에 대해서는 이 시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과장의 “지들이 뭐 잘났다고 말이야 더러워서”라는 분노의 말로 볼 때, 상관의 횡포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진 사표를 던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의 현실적 경험으로 볼 때 이 화력 과장은 평소 무능한 직원으로 찍혀 있다가 회사 사정으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러한 구조조정의 불합리에 문제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표를 내고 난 후의 장소귀속감의 상실감 내지 두려움을 더욱 첨예하고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이제 자신의 존재성을 발휘할 장소를 다시 획득할 수 없다는 잠재적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는 까닭은 그 다음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어느 틈엔가」의 내용과 맞물려 살펴볼 때 더욱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틈엔가」는 모든 문제의 심층적 본질에는 바로 ‘노후老朽’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늙어감에 따른 비활성이 아직 스스로는 새파랗다고 생각하는 이 과장으로 하여금 회사가 그만두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이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로 하여금 “노후로 분류한 컴퓨터가” “유효기간이 만료되기 전에는 남아도는 시간이었지만/ 폐기처분되는 것이 싫어서 손짓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노후’가 삶의 위상과 질을 결정해 버린 부당함에 대해 시적 화자들은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어느 틈엔가」에서 시적 화자는 노후로 인해 버려지고 폐기처분되는 것이 설령 컴퓨터라 할지라도 잘못되었다고 불편해 한다. 그러한 관점은 그러한 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고 있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는 태도다. 시적 표현이 대상과의 동일시 측면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노후로 분류돼 폐기처분되어 가는 컴퓨터를 다시 살리고 싶은 마음의 표현은 자신의 존재성이 사회 현실로 폐기처분된 것 같은 것에 대한 부정과 안쓰러움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시에서 “동작이 늦다고 가두어 둔”의 굼뜸이나 “멀어진 귀”, “닫은 입”의 퇴화, 그리고 “퇴출이 싫은 목숨”의 욕망 등의 현상을 표현하는 것은 결국 낡았다고 지칭되는 사물의 특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컴퓨터의 특성이라기보다 나이 든 인간의 특성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에서 자기와 같은 존재를 “구석진 자리로 내몰”아 버리는 것에 대해 분노와 안쓰러움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해내는 것이다. 비록 “어느 틈엔가”라는 처연한 탄식으로 이러한 일의 발생이 시간의 변화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생기는 현상이라는 점도 인정하는 듯해 보이지만, 낡고 늙었다고 쓸모없는 존재로 폐기처분해 들어간다는 것은 그래도 생명성을 지닌 존재에게 부당하다는 것을 시 전반의 문맥으로 은연중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지 강시인은 자신의 현실에서 나이듦에 따른 육체적 변화와 비활성의 문제를 경험하고 이것의 문제성을 인식하기도 한다. 시인의 정직한 부분은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잊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다음 시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귀에 자물쇠를 채웠다 며칠씩이나
쇠붙이 긁어대는 소리 그치지 않고
돌아누워도 몇 번씩이나 벼랑 끝이다
설사는 몸 아래로 길을 내고
천 개 자물쇠로도 모자랐다
식은 피가 밖을 향해 꿈틀거린다
-「이명 속으로」 부분
의자가 외면하는 벽에 걸려
손이 못 가서 높아지던
자꾸만 틀리게 가는 시계를 내려놓고
분침을 거꾸로 돌려댔다
즐겁다 손톱 끝이 찌르찌르 떨리면서
눈 가 주름살 하나가 지워졌다
쉽게 웃는 발바닥이 공중에 떠올라
낙엽은 가지 끝으로 돌아갔다
<중략>
의자도 시계도 없이 누워 있는 독방
누군가가 내 시계를
조금 빠르게 어둠에 맞췄다
-「조금 빠르게」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나이듦, 즉 노화에 따른 현상과 원망願望을 너무나 잘 보여주어 눈물겹다. 「이명 속으로」는 말 그대로 새로운 ‘현상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말해주고 있다. 그 경험은 “쇠붙이 긁어대는 소리”, “돌아누워도 몇 번씩이나 벼랑 끝”, “설사는 몸 아래로 길을 내고”, “식은 피가 밖을 향해 꿈틀거린다”는 것으로 볼 때 결코 즐겁지 않은 체험이다. 일반적으로 ‘이명’이 나이듦에 의해 발생하는 귓병임을 염두에 든다면 이 시는 나이듦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리라. 거기서 이러한 현상에 ‘이명 속으로’라는 지향적 부사 어미를 붙인 것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속으로’는 어떤 방향으로의 지향이자 그곳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굳셈을 드러낸다. ‘이명’이라는 늙음의 현상을 피하지 않고 새로운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시는 늙음의 현상이 갖는 비애와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삶의 본질로서 또 다른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보겠다는 대결의식도 간취된다는 점에서 슬픔과 긴장이 묘하게 버무려진 작품인 셈이다.
이에 비해 「조금 빠르게」는 말 그대로 늙어감에 의해 발생하는 슬픔의 반동으로서 젊음에 대한 원망을 내보이고 있다. 시적 화자는 그것이 장난스러움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그것이 절대 가능하지 않음을 알면서 “분침을 거꾸로 돌려대”는 행위를 통해 “눈 가 주름살 하나가 지워졌다/ 쉽게 웃는 발바닥이 공중에 떠올라/ 낙엽은 가지 끝으로 돌아갔다”고 시간의 역전을 상상한다. 그러한 환상적 염원이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역설로 더욱 애잔하게 만들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래서 제 정신을 차린 시적 화자는 “의자도 시계도 없이 누워 있는 독방/ 누군가가 내 시계를/ 조금 빠르게 어둠에 맞췄다”고 말함으로써 생의 쓸쓸함과 죽음에 이르러 가는 삶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좋겠다는 것은 나이든 사람이면 가질 법한 보편적 염원일 것이다. 그 원망은 영원한 삶을 갈구하는 것이기에 심원한 의미를 띠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덧없는 망상에 불과하므로 처량함이 더욱 극심하게 환기된다. 강시인 또한 이러한 점을 알고 있기에 시 말미에 그 쓸쓸함을 절대자인 신을 빌어 “누군가가 내 시계를/ 조금 빠르게 어둠에 맞췄다”고 표현해 내고 있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생의 늙음과 절멸을 의식을 가진 존재라면 그 누군들 이런 암담한 비유로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러한 늙음에 자인과 탄식은 이번 시집의 여러 시에서 나타난다. 가령 “봄인데 나는 왜 뜨거워지지 않는가”(「안개에 젖어」)에서나, “전원을 뽑자 몸이 어두워졌다 눈과 귀와 입이 캄캄해졌다”(「전원을 뽑다」), 또는 “그러나 몸 숨길 그늘이 없다/ 웅크린 도시 빛을 향해 가는데도 나는/ 점점 어두워지고 무거워졌다”(「어둠에서 빛으로」) 등의 표현은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의 숙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덧없는 태도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상과 탄식은 생명적 존재가 갖는 필연적인 태도일 것이다. 젊음과 활력으로 충만된 세계에서 퇴출되듯 비활성의 세계로 내몰리는 존재의 심사가 결코 담담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상심傷心과 우울로 생세계가 물들여질 것은 분명하다. 강영환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이 다소 우울하고 처량한 어조를 띠고 있는 것은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창작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적 존재에게 필연으로 닥쳐오는 것이기에 그 마음의 등고선은 더욱 애틋하고 쓸쓸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세계와의 단절로 발생하는 내부로의 유배
자신만의 한정된 세계로 내몰린 존재들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 여러 가지 방향으로 반응을 할 것이다. 도전하거나 웅크리거나 무시하거나 등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 어느 태도도 인간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성찰의 재료가 되겠지만 그것 중 어떤 태도가 오늘의 현실에 대한 전형의 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형은 그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면에 대응하여 가장 대표적인 형상을 취하는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존재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강영환 시인이 취하는 태도가 딱히 우리 시대의 노년이 보여주는 전형적 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어 가면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어감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여 인간 존재를 외롭게 하고 실의에 빠지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제적 상황으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이 필자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전형성에 대한 숙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다음 시가 바로 그런 점을 보여준다.
편지를 받을 수 없는 속쓰림은 길었다
빈 봉투로 우편함이 가득 차서
도달하지 못한 편지가
어디를 떠돌다 늦게 왔을까
폐허가 된 얼굴을 보았다
-「편지함」 부분
이부자리를 개면서 흩어진 눈물 쓸어 담고
아침이면 문 앞에 벽돌을 쌓아 올렸다
한 단, 두 단 견고하게 모서리를 맞추고
잠 속에 세웠다 그리고 길을 갔다
벽은 더 두터운 슬픔 속으로
키 낮은 이웃 데리고 함께 나섰다
눈물은 저녁에도 멈추지 않았다
-「집을 세우다」 부분
인용되는 두 편의 시는 사회적 관계로서 장소성을 상실한 자의 심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편지함」에서 시적 화자는 “편지를 받을 수 없는 속쓰림이 길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의미를 생성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실존적 장소성을 상실했음을 암시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마저 찾을 길 없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그것은 “어디를 떠돌다 늦게 왔을까/ 폐허가 된 얼굴을 보았다”에서 볼 수 있듯 떠돌음의 방향 상실과 정체불명의 이미지 ‘폐허가 된 얼굴’로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시적 자아가 느끼는 것은 단절이자 고립이다. 이는「집을 세우다」에서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아침마다 문 앞에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은 돌아갈 길 없는 현실과의 마주침 때문이다. 즉 벽은 문맥상 시적 화자가 쌓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외부 세계가 시적 화자에게 가하는 억압이자 폭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힘에 대응하여 내부에 몰린 자는 스스로 벽을 쌓고 자신을 보호한다. 그 벽 자체는 사회적 소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이 슬픔이자 외로움이다. 그 점에서 “널린 슬픔이 와서 벽이 되었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고백이자 사회적 소통 불가능의 현실에 대한 항복 선언과 같은 것이다. 이 점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다른 시, 가령 “벽을 향해 공을 두드렸다/ 벽은 물러나지 않고 흉터만 돌아왔다/ 흉터가 간직해 온 뿌리 깊은 어둠은/ 지워지지 않는 견고한 눈물이다”(「날개를 위해」)에서 그 벽을 사실은 쌓고 싶지 않아 공으로 두드린다는 함축적 행위의 의미를 통해서이다. 여기서 벽은 부서져야 할 대상으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안이든 밖이든 벽은 나이듦에 따라 필연적으로 형성된, 완고한 사회적 체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시적 화자가 그것을 허물려 해도 “벽은 물러나지 않고 흉터만 돌아왔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완고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이 벽에 의해 자신의 상처만 심해질 수밖에 없음을 ‘견고한 눈물’로 상징할 뿐이다. 그것은 가히 상심의 지극한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시인에게 자신의 현존적 삶의 형태는 감옥과 같은 무의미한 생존의 연장, 혹은 무미건조한 삶의 나날로 파악된다. 다음 시들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 시들을 감상할 때 그 처량함은 무엇으로 달래도 쉬이 가시질 않음을 보게 된다.
공중에 걸린 창 앞에 귀를 닫고
거울 속에서 입술을 닫고
전화기 가슴에 빗장을 지른다
사람들이 믿는 것은 열쇠꾸러미다
상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에 자물쇠를 걸고
어둠이 된다 혹은
가까스로 빛이 된다
-「상자에 들다」 부분
창유리에 갇힌 얼굴이 남루하다
입술로 말을 그렸지만 들리지 않는다
어둠과 궁합이 잘 맞는 유리창에서
눈꺼풀이 떨리고 초점이 도피해 간다
못내 하고 싶은 입속 말이 다가가
유리에 숨은 어둠을 닦았다
모음으로 다 하지 못한 말들 꼬리가 빠져나와
얼룩 위에 숱한 검은 상처로 남는다
-「환한 유리창」 부분
스스로 상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유폐되는 자의 심리는 도대체 어떤 마음의 상태일까? 「상자에 들다」에서 시적 화자가 “공중에 걸린 창 앞에 귀를 닫고/ 거울 속에서 입술을 닫고/ 전화기 가슴에 빗장을 지른” 뒤, “상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에 자물쇠를 걸고/ 어둠이 된다 혹은/ 가까스로 빛이 된다”고 언명하였을 때 이 상황은 사회적 관계 속에 보편적 삶을 살고 있는 사회인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매우 궁핍한 지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장소로의 유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태는 경우는 다르지만 이육사의 시 「절정」에서 볼 수 있는 극한적 상태의 외로움과 의지적 결단을 떠올리게 한다. 「상자에 들다」도 극한적 상황이 제시되고 이 상황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는 의지적 결단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이 연상되었든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자 결단이라는 점에서 단순하게 사회적 차별에 순응하는 형상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안이 감옥과 같은 유폐의 장소이지만, 그리고 그 안으로 가게 된 계기가 늙음이라는 자연적 현상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만 이러한 소외와 유폐는 어느덧 사회적 체제의 문제로 확산되고 그것에 의해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발적 유폐와 거부는 대사회적 차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환한 유리창」이 보여주는 국면의 해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시도 일차적으로 볼 때 시적 화자는 “창유리에 갇히”어 “얼굴이 남루”한 상태로 존재한다. 갇힌 자이기 때문에 “입술로 말을 그렸지만 들리지 않”는 소통의 부재와 단절의 심연만 존재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애처롭게도 화자의 모습이 “모음으로 다 하지 못한 말들 꼬리가 빠져나와/ 얼룩 위에 숱한 검은 상처로 남아” 있는 상태로 머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갇힌 자의 깊은 시름과 자의식의 상처를 변주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다른 시, 가령 “한 사발 밥이 허기를 채워준다/ <중략> / 내 오래된 창을 열고 네모난 귀에 몸을 묶었다/ 나는 창의 노예다”(「네모 창 곁에서」)에서 보이는 폐쇄된 존재로서 ‘창의 노예’, 즉 사회적 소통에서 물러난 자아의 표현을 통해 알 수가 있다. 또 이러한 현실 가운데 갇힌 자로서 쓸쓸함이 더욱 증폭되는 이유가 시 「혼자 먹는 밥」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 버림받아 홀로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식탁에 어둠이 깃든 한참 후/ 드넓은 아침에도 그랬고/ 숱한 식탁 위 점심에도 그랬듯/ 늦은 저녁을 혼자 먹는다/ 맹한 티뷔 소리도 키워놓고/ 질긴 모래밥을 씹는다” (「혼자 먹는 밥」)라고 했을 때 이는 홀로 갇힌 자의 심리적 외로움과 처량함을 우리 시대의 구체적 현실로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독거노인의 발생과 확산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야 할 필요성을 이 시들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환한 유리창」이 암시하는 진정한 뜻은 제목에서 간취할 수 있듯 ‘환한 유리창’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와의 폭력적 대립이다.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존재에게 환한 밝음으로 비춰오는 외부 세계의 유리창은 어둔 상처와 슬픔으로 존재하는 내부적 존재, 즉 스스로 유폐된 자아의 처지에 보자면 사회적 형벌로서 유배와 다름없다. 이는 낡고 늙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과정을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구분하여 폐기여부를 결정짓는 근대 산업사회의 모순을 은연중 문제 삼는 시적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농경사회에서의 나이듦은 노동력의 문제에서 조금 약해질지라도 농사짓는 방법이나 천기와 지리를 잘 아는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코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떠올리게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농경사회의 노인이 ‘경륜’을 갖춘 자로 대접받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 강영환의 이러한 문제제기가 결코 공소하지 않다는 점에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다.
실제 산업사회의 현실에서 늙음은 곧 뒷방 늙은이로 폐기처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 사회발전과 역사 발전을 위해 노력했건만 나이 들었다고 일선에서 물러나 그냥 폐기처분되는 사회 체제는 인간에 대한 도의 측면에서 볼 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의 행복한 사회로 발전되어 간다는 역사적 인식의 측면에서 볼 때도 이러한 일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때문에 시인 강영환은 자신의 현실적 감정과 처지로 은연중 이를 형상화하며 그 부당함을 정서적 인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강시인의 사회적 소외로 인한 유폐의 심리적 형상과 서사는 우리 시대의 모든 존재들이 고민해보아야 할 노년의 삶에 대한 문제제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점은 산업사회의 본질로서 노년 삶의 문제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 노년의 존재론적 문제를 풀 해법의 전형성을 일정 부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서의 사색과 존재의 본질 탐구
그런데 강영환 시인의 시에서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그의 시적 특이성이 있다. 시가 단순히 사회적 문제성을 담는 그릇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시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생각을 유발하고 있다. 시는 과연 오늘의 사회 현실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가? 이 점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앞 절에서 어느 정도 해명이 된 바가 있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더 모호하고 아득한 경지가 열리는 것 같아 함부로 결론짓기 어렵게 한다. 시로써 사회적 문제를 고발을 한 것이 그 끝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재인식으로 새로운 경지가 열려 있음을 그의 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 시들은 앞의 시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문제를 아우르고 있지만 인식의 심화를 통한 초월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시적 해석의 다양성과 함께 존재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느끼게 한다. 그 작품은 이렇다.
현관을 나서니 다시 어둠이다
가슴쪽 어둠과 등 뒤쪽 어둠이 서로 마주한다
문 앞에서 어디로 가지 못하는 경계는 늘
각기 다른 어둠이 지은 뚜렷한 선이 되지 못하고
진하거나 더 악랄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투명하거나
계단은 가파르고 불구는 건널 수가 없다
눈썹 끝에 선 벼랑은 깊고 넓어서
밖에 나선 길은 언제나 안개 속이다
눈에 늘어섰던 은행나무도 사라지고 만다
몸 세우지 못하고 납작 엎드린 질경이와
둔덕 아래 풀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지워진다
달빛 아래 길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
어둠이 감춘 핏빛 노을 속으로 찢겨진 강이
상처에서 솟는 피고름을 맑은 물과 섞었다
떠나지 못하고 문 밖에 떠나지 못하고 늘어선 외출이 아프다 간혹
빛과 어둠을 섞어 평균내지 못한 눈은 가로막는 어둠에 더 진하게 부딪혀 발자국 위에 납작 무릎을 꿇는다
혹 이승이 끌고가는 끝내지 못한 상처투성이 낙서들
돌아서 문을 열어도 더한 어둠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그곳에서 비명은 만져지지 않아도 칼금 같은 얼음기둥이 낯이 익다
현관에는 아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구두가가 남아있다
-「경계에 서다」 전문
이 시는 이때까지의 내용을 집약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현관’을 경계로 하여 밖과 안이 대립되고, 대사회적 통로로 나아갈 수 없는 유폐된 자아의 무력함과 슬픔이 도드라지게 표현된다. “현관을 나서니 다시 어둠이다”나 “문 밖에 떠나지 못하고 늘어선 외출이 아프다”, 그리고 “눈썹 끝에 선 벼랑은 깊고 넓어서 밖에 나선 길이 안개 속이다”, “아직 현관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구두가 남아있다”는 등의 표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립과 단절로 매몰되어 가는 자아의 슬픈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들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런 처지에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비명은 만져지지 않아도 칼금 같은 얼음기둥이 낯이 익다”로 표현했을 때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하나의 ‘얼음기둥’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아에 대한 각성은 깊다 못해 처연한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의 시인 강영환의 내면적 심리를 따라왔을 때 이 시가 주는 서러움과 표현의 묘미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다시 보면 이상한 느낌을 더 주고 있다. 경계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의 슬픔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조금 더 기울여 보면 그 사이의 극점, 즉 경계에서 양면을 다 보려는 자의 오기나 터득의 기운을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제목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시인 스스로 제목으로 ‘경계에 서다’를 뽑았다. 이것은 경계에 처한 자신의 현실에 단순한 감정적 차원으로 몰입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다시 말해 안과 밖의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슬픔을 온전한 자신의 현 존재성으로 인식하면서도 이것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재인식은 첫 인식에 대한 상위 인지이므로 초월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시적 화자가 인식하는 경계인은 안과 밖을 다 경험한 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어떤 제약에 의해 하나의 장소성으로 귀속되지 못하고 배제되거나 소외되어 있을 뿐이다.
이 배제와 소외는 일차적으로 볼 때엔 차별과 박탈의 심리적 결과물을 만든다. 그것은 이때까지 해석해 왔던 강영환 시인의 시적 내용이다. 그러나 양면을 다 경험해본자라면 그 배제와 소외가 오히려 자신의 일면적 정체성의 현실을 초월케 하는 계기가 됨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의 시적 도정으로 볼 때 새로운 관점이다. 시가 고발의 측면인 사회성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숙고해야 할 필요성의 문제 제기로 나와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아직 현관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구두가 남아있다”는 표현을 다시 읽으면 단순히 그것이 탈출하지 못하는 자아의 슬픔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자국마저 뛰어넘을 그 무엇을 시적 화자가 찾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관을 경계로 보는 상황에서 이 현관을 뚫고 반드시 수평적 세계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새로운 눈뜸을 이 시는 암시하는 듯도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경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다음 시가 그러한 내용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방충망에 나나니벌 한 마리가 붙어 있다
나가려는 것인지 들어오려는 것인지
움직일 기미가 도무지 없다
누가 들여보냈을까 투명한 날개는
완강한 방충망을 뚫지 못한다
안이냐 바깥이냐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안과 밖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지금 경계 위에 서 있으므로
이쪽과 저쪽 혹은 삶과 죽음이라든가
그것을 재보는 건 안에 있는 나다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는다 단지
나나니벌은 날고 싶을 뿐이다
나냐 나나니냐 그건 문제 아니다
또 다른 경계 밖에서 파리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같은 경계 위를
서성거리고 있는 몸을 나나니벌과 함께
내가 보고 있다 바라보는 건 경계일 뿐
나나니벌도 어둠도 파리도 아니다 결국
경계 위에 선 눈을 밝혀야한다
-「나나니벌」 전문
이 시에 오면 시적 화자는 “그에게 안과 밖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일정 부분 사회적 현실로의 소외가 더 이상 자신의 슬픔과 구속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게 되는가? 이것에 대해 「나나니벌」의 시적 화자는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는다 단지/ 나나니벌은 날고 싶을 뿐이다”로 표현하면서 “결국/ 경계 위에 선 눈을 밝혀야한다”로 끝을 맺고 있는 데서 그 추구해야 것을 암시한다. 이는 자유로의 비상과 새로운 인식의 눈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타의 사회적 관계나 장소가 그 동안의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의 바탕이 되었을지라도 그것 역시 제한적이고 유동적인 것임을 자각했다는 표징이다. 즉 존재의 더 지고한 세계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발견이다. 이것을 시적 화자는 ‘경계 위에 선 눈’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연하게 세계의 본질을 내려다보는 눈, 그것은 현상을 넘어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의 눈일 것이다. 랭보가 시인을 두고 ‘견자見者’라 부르고 이 견자가 현상의 부분과 단편에 머무르지 않고 현상 너머의 본질, 즉 신의 섭리를 꿰뚫어보는 자라고 했을 때의 그 안목에 해당한다.
결국 시인 강영환은 시로서 자신의 존재성을 완전하고 온전하게 밝힐 하늘의 눈을 갖고자 하는 데에 있음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소외되고 폐기되어 아파하는 노년의 삶을 끌어안으면서 보다 더 심층적 차원에서 인간 존재성을 밝히고 해명할 그 무엇을 찾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에게 시는 자기 구원으로서의 수련이다. 가령 다음 두 편의 시가 이번 시집에서 진정 가닿고 싶은 세계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경계 위에 선 눈을 밝혀야한다”의 테제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늙은 회화나무가 길 위에 누웠다
그에게 숨결이 떨어져 나가듯 이제
이름이 필요 없게 되었다
돌아가서 그냥 보통명사가 편한
누운 나무가 그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보통명사를 밟고 넘어간다
지워진 나무가 길이 되었다
죽어서도 길을 찾는 나무는
발길질에 닳아 빛나는 길이 되고
생전 가져보지 못한 잠을 잤다
길이 만든 잠은 고요하고 고요하다
비가 올 때면 젖지 않는 발을 위해
몸이 젖어 숱한 발을 받들고 다시
돌아 올 빛나는 흙이 되어 갔다
-「누운 나무」 전문
늦게라도 알지 못했다 산은
뒤가 없다는 것을 언제나
몇 바퀴를 돌아도 앞이 전부였다
불현듯 산등에 등 붙이고 살고 싶어
애써 뒤로 돌아가 보지만 산은
늘 앞으로만 만나 주었다
뒤에 산을 두고 싶은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언제나
가슴으로 떡하니 버티고 앉아
햇살 슬픈 노래를 안고 산은
등 뒤로 자꾸 돌아가라 일렀다
그곳에서도 해 뜨는 일 말고는
어떤 안개도 두르지 않았다
-「산의 뒤쪽」 전문
이 두 편의 시를 자세히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분명히 주지할 사항은 「누운 나무」의 ‘늙은 회화나무’가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뀌어 가면서 죽음이든 변화든 결국 “돌아 올 빛나는 흙이 되어 갔다”는 것으로 시적 화자가 인식하는 한 ‘늙음’이 결코 추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는 사실이다. 이 경지는 앞선 시들이 보였던 늙음의 초조와 슬픔 등을 말갛게 걷어내고 사물의 본질과 진리를 보다 넓은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의 뒤쪽」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늦게라도 알지 못한” 산의 진실에 대해 시적 화자는 언제나 “산은/ 뒤가 없다는 것”, 즉 “몇 바퀴를 돌아와도 앞이 전부였다”는 것으로 깨닫고 있다. 깨달음은 보다 큰 차원에서의 눈뜸이므로 ‘경계 위에 선 눈’의 획득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 와서 볼 때 시인 강영환은 사회적 존재로서 노년의 삶이 늙음이라는 자연적 현상으로 발생하기는 하지만, 제도적 차원의 소외와 차별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제기하면서, 존재의 늙음은 ‘경계 위에 선 눈’으로 세계의 진실을 꿰뚫는 것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렇게 슬프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전언을 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노년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이라 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이는 시인 개인으로 볼 때에는 시로써 노년의 삶을 견디는 일이자 그 정신적 지향점을 추구하고 정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의 위대한 기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이 쓸쓸한 노년의 파노라마에 몸과 마음을 싣고 막막한 세계 속으로 헤쳐 나갈 것인가! 이때까지 질러온 강영환의 시적 세계는 그것을 그의 생생한 현실적 삶과 인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의 세계로 접어든 강영환 시인의 쓸쓸함과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은 비단 필자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시인의 건필을 빌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