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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내시경
<서 문> 고고한 지조나 무위자연의 인간 초월적인 시조보다는 사람과 부대끼는 일상의 현대성을 시조로 쓰고 싶었다. 자유분방한 현대인의 정서를 시조의 틀에 담는데 형식은 장애 요인이 될 수 없고, 시적 의지와 추구하는 철학이 문제였다. 줄곳, 이런 사고 안에서 68 편을 썼다. 시조가 많이 보급되고, 깊이 잃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1부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3월의 산까치가 알 품을 집을 짓고 속잎 트는 굴참나무 한낮을 서서 겨운 나른한 산등선을 타고 봄날은 간다 바람도 햇볕 실어 서로 엉켜 딩굴고 꽃 속의 꿀벌도 단물로 흠뿍 취해 해찬들 아지랑이 속을 봄날은 간다 나두야 봄꽃 보며 처진 손 치켜든다 심학산 옹달샘에 햇빛이 담기어 두 연인 꽃등에 실려서 봄날은 간다 봄나들이 차창에 미끄러지는 가는 바람 살갑다 꽃길 타는 미더움에 이냥 스친 봄 빛살 크작은 가로수마다 꽃자리가 애잖다. 옆자리 아내에게 봄 풀꽃 눈짓 주네 내려서 톺는 풀밭에 냉이 꽃눈 하얗고 발끝도 삼가로웁게 즈려밟고 가느니 봄바람 살랑살랑 바람의 몸 색깔이 봄빛인데 나뭇잎 사이사이 끼어 든 바람 빛이 퍼렇고 늦봄의 한낮 햇살이 바람 속을 뚫는다 파란 바람이 가지 끝에 매달렸다가 와르르 흩어진다 뒤처진 자투리 바람이 손까락에 붙어서 휘젓고 가는 바람에 꽃 구술로 콩 튄다. 봄밤의 사모곡 오늘 밤 주룩주룩 봄비가 오네요, 어머니 이 비 맞고 이울 봄꽃 피는 능선에 오롯이 잠들어 계실 덩실 봉분 멀어요 무색(無色) 비바람이 무명 홑치마를 날려요, 어머니 창백한 백발이 어둠 속을 밝게 비추는데 이렇게 할 말이 많아 혼자 쓰고 있네요 논낫 같은 저 빗줄기 눈물처럼 슬퍼요, 어머니 빗소리 주루룩 , 똑-똑- 기도 음성 간절하고 애절히 사무친 정을 빗줄기로 흘려요 영춘 삼제(迎春三題) 1. 문발 들녘에서 기러기 떼로 찍, 찍힌 점들이 벼포기 그루터기로 남아 봄바람 살폿 스친 언덕에 퍼스레한 풀 순, 봄꽃이 피오르고 조촐히 사분거린 넋이 두럭마다 미덥다. 2.봄까치 아파트 나들길에 줄로 이어 선 벚나무 한겨울 견뎌 지나 이제 막 꽃순이 트고 봄 까치 새(新) 집 한 채가 눈에 덩실 얹히네. 3. 나목(裸木) 일없이 내려 뵈던 앙상한 나목 숲에 춘정(春情)은 애살포시 바이없게 깃들어 새싹을 틔우는 고통 헉헉, 숨을 내뿜네.
춘우산음(春雨散吟) 새싹 돋는 들길을 봄비 맞고 걷는다 빗 속을 뚫고 가듯 민들레 꽃눈 돋고 촉촉이 젖는 발치에 봄기운이 채인다 헝클린 머리칼을 빗질하는 가는 비 어깨를 적시우며 봄꽃 다시 피라네 비루한 삶을 다 보내 피울 꽃도 없는데 희미한 안개구름 들녘 끝에 가라앉고 두럭길 굽굽이에 싹이 트는 일렁임 노심(老心)도 허리를 펴고 꽃비 속을 걷는다. 春日餘情(춘일여정) 봄볕 쐬고 벙그는 진홍빛 호접난 베란다 창변에 가만가만 솟아난 꽃나비로 이 저리 날지도 못해 꽃잎으로 나붙네 공원의 참나무는 잎을 틔우며 한드리고 바람이 멈칫 불 듯, 섰다가 휘는 가지 수액을 퍼올린 줄기 가지 끝을 비트네 희뜩이는 까치 부리에 삭정이가 물리고 또 한 마리 수까치는 집짓기를 멈추는데 사월의 새봄 햇살이 흑백 깃털 비추네. 봄까치 먹이를 한 입 물고 날아가는 까치 꼬리가 검다 앞가슴 백색 문채(文彩)는 따갑도록 눈 시리고 낼 앉은 발가락 아래 봄볕 살폿 밟힌다 알 품는 암까치 허공 속에 빠져들고 가지 끝 봄의 입자가 날것으로 알알 튕겨 닿을 듯 삼삼 멀리서 봄날 가듯 아즐타. 벚꽃 할미 벚꽃 활짝 공원길 백발 할미 걸어가네 흰 치마 바람 스쳐 꽃보라 함께 얼려 지친 듯 힘겨운 생을 마다 않고 누비네 꽃길은 백리련 듯 화사하게 불타고 가시밭 어둔 길을 나 몰라라 웃는 벚꽃 시리고 저리운 삶을 서릿발로 떨치네 가다가 서는 할미 머리에 무심히 얹힌 꽃잎 헝클린 머리칼에 은반지로 꽃단장 빛바랜 청춘 세월이 결빙되어 시리다. 밤 벚꽃 밤 벚꽃 백설기는 설원 위로 북극곰 무풍지대 함박눈 설악산에 퍼붓고 밤하늘 백색 채운(彩雲)은 갈갈 찢긴 창호지 편편 겹겹 제각각, 따따로 白, 白, 白 흰 쌀밥 압력 밥솥 증기 배출 푸-쉬-쉬- 폭발은 핵실험인데 구름 버섯 둥글다 천지는 현황(玄黃), 사방은 은백이다 구십 노인 백대가리 서양 년 은발 미인 지구는 서서 돌았다 성층권에 서릿발 봄밤의 대뇌 회로 깊은 어둠 아리고, 초속 만 리가 찰라다 봄밤의 아득함이 감전된 경련인데 지구 밖 위성을 돌아 번쩍이는 빛이다 긴 세월 만(萬) 생명은 억겁의 어둠이다 지심(地心) 천만리에 목숨 줄 이어 내리고 지상의 핵분열 소리 꼬물거린 명(命)이다 어둔 밤 대뇌 회로 고압선 전류다 우주를 회전하는 머리통 속 안에는 낱별로 튕겨 구르는 주먹만한 공(空)이다. 밤에 보는 싸리꽃 밤에 보는 싸리꽃 서리 눈사태로 마구 얼려 달빛 도곤 은은 깊어 발길 도로 멈추고 제 꽃빛 스스로 사뤄 절명시(絶命詩)를 읊는다 백혈을 울컥 쏟는 핍진(乏盡)의 찰라에 백지에 휘갈기는 육필(肉筆)의 몸짓으로 순정의 백의(白衣) 천사는 날개 활짝 펼친다 묏비둘기 산책길 굴참나무에서 3월에 우는 묏비둘기 멈춰서 듣는 음흉스런 속울움 쿡쿡-쿠루루 타남은 애간장 속을 탁음으로 전한다 몸체는 까딱도 않고 꼬리 깃만 들썩들썩 부리는 앙다물고 석고처럼 앉아서 전설 속 유령 빛깔로 능청떠는 모양새 백년이나 오래 묵힌 동굴 속 저음으로 가슴 저려 슬픈 듯이 가래 끓이는 소리 잿빛의 가면을 쓰고 곡비(哭婢)처럼 울고 있다 장끼 희번한 새벽 장끼가 울고 날은다. 꿕 꿕- 꾸억꾸억- 이른 봄 참나무 공원 숲에서 울려오는 소리 가등은 그대로 빛나 충혈 된 채 깔린다 높고 낮은 음을 섞어 겁도 없이 울고 있다 11층 아파트 내 서재로 콕콕 파고드는 음향(音響) 장끼의 생 울음소릴 받아쓰지 못한다. 꼬옥-꼭, 꺽억-꺽-, 2초간의 음색을 흉내 낼 수 없다 귀를 세워 여섯 번째 들었다 한글로는 못 적겠다. 열 번째 끽끽- 소리에 나는 그만 질린다 까치 울음소리 짹-짹-짹, 해질녘 석양빛을 보고 까치가 울어 찍찍 짹짹, 찍짹짹- 여러 마리가 떼 지어 울어 못 말린 울부짖음에 입술 피식 웃는다. 연초록 숲 4월의 새잎 숲이 눈 시리게 펼쳐졌다. 속잎으로 짜낸 물감을 엎질러 논 유리 화판 억 만 개 분수 끝자락 묵묵 함성 빛이다 와-아, 탄성을 질러 시선을 모아 봐도 타는 잎새 생생 물빛이 속눈까지 파고들어 연초록 어울려 퍼진 살아 솟는 찰라다 숲 너울 사월이 가고 녹음이 짓푸른 오월 일렁이는 숲 너울이 맞춤형 옷 색깔이다 까치도 안보인 곳에 소리까지 없구려 잔인한 숲 파도에 잠겨버린 까치집 새끼 치는 어미 정성이 안에서 고물거리고 바람이 녹색 이불을 사운대며 흐른다. 기우는 까치집 겨우내 온갖 풍상 다 겪은 덩실한 까지집 무너지는 집덩이를 바람이 흔들고 지나간다 떠받친 가지는 휘어 잣바듬이 버티네 애초에 잘못 잡은 집터라 풍수지리설이 빗나갔나 약한 곁가지 우듬지에 자리는 왜 잡고서 허공에 기우는 까치집 받쳐 줄 벽이 없네 나무 높은 공중누각도 전문 기술은 있겠지 집 짓다 떨군 삭정이 폐자재로 다시 안 쓰네 산책길 걷다 멈추고 낙목(落木) 잔가지 자주 보네 산머루 온 식구가 함께 일하는 뱀사골 식당 아이 둘이 거들어 싫은 내색 하나 없고 뒷켠에 산머루 넝쿨 엄마 손이 감싸네 머루 알 같은 아이들 눈동자 알랑 달랑 바쁘고 톱니처럼 손발 맞아 빈틈없이 오가는데 산머루 낟알 엉키듯 꿀벌 같은 삶이네. 오월 뻐꾸기 뻑꾹-들었다 소리 가깝듯 순간이 아련타 비둘기 회색 꼴태로 날은다 세월 가듯 공중 멀리 오일팔 초여름 숲에 돌아왔다 뻑뻑꾹- 숲과 하늘
졸참나무 잎잎에 여름 햇살 내려쌓여 한 잎이 속엣 말로 입술을 간드리고 허공에 구름 한 점이 하늘 혀로 내미네.
여러 잎 한들거려 큰 입은 간지러워 바람도 일으키고 산새도 드날려서 한여름 적막강산을 입속에서 감치네.
고요론 숲속에서 선녀의 옷깃은 날려 입은 듯, 벗은 듯,잎으로 뒤덮은 듯 그대여, 가린 입일랑 바람으로 피거라.
제2부 지하철 내시경 대화역에서 전철은 미처 떠나지 못하고 길게 서 있다 종점에서 새로 떠나는 모두가 목적지뿐인데 서로의 조급한 맘을 제 얼굴로 담는다 유리알 눈동자는 깜작일 줄도 모르고 연발의 조준경으로 사람들 내려 겨누는데 차라리 숨지 않겠다 드러냄도 권리다 행선지는 따따로 길고도 짧은지라 함께 갈 인연도 예비 된 이별마저 쇠바퀴 윤회생사(輪廻生死)를 서로 참고 가잔다 불광 전철역에서 반평생 흙 밟고 살아 온 제이의 고향땅 오늘 두더지처럼 지하, 지하로 떠밀려 내리네 돌계단 딛고 내리다 자동계단 갈아타네. “그리운 산하” 내 시집 한 권을 가방에 챙겨 넣고 깊은 땅 밑, 하얀 대기선, 대리석 바닥을 밟고 섰다 내일 또, “그리운 지하철” 시조집을 써야겠지 찰흙 묻혀 굴러 간 땅 끝 해남에서 넓은 바다, 머 언 산하를 노래 할 때 눈 시린 지심(地心) 만(萬)리는 저승인 줄 알았다 바람 세찬 초원에서 제 사냥감 찾는 새끼 사자들 아들 딸 떠난 자리 캄캄한 불빛 아래서 제 삼의 땅밑 고향을 차(車)가 와도 못 뜨네. 독립문 전철역에서 독립문 전철역 지하 대기석에 앉아서 뱀 자루 땅꾼들, 우굴거린 몸짓을 본다 지하의 이승 불빛이 대낮같이 밝구려 내 하늘 청청 푸른 가쁜 숨을 잔조리고 작고한 원로 시인의 저승 시를 새기는데 유골로 뿌려진 시혼(詩魂)이 땅 밑, 등불에 어리네 도라산행 열차
임진강 철교위에 추적추적 봄비 내리고 녹(綠)물 떨구는 철길은 반세기 세월 길어 업드려 깔린 넋들이 빗줄기로 젖는다.
도라산행 열차는 간다간다 기적 울려 눈물, 낙수 쇠다리 굴러 함성으로 건너간다. 가다가 막힐 길이여! 예서, 참아 울어라.
목조 삐거덕 자유의 다리에 빗줄기로 서서 막힌 길 돌아서 오는 텅~ 빈 차창을 본다 자유여, 음각 흉터로 쓰려 아픈 이별아.
망향의 노래비는 설운도 가락을 실어 북향의 혼백을 풀어풀어 빗물 젖고 평행선 철길위에 비창음표(悲愴音標)로 찍힌다.
지하철 내시경 땅 속 깊이도 안 알리고 지하철은 달린다 길게 누워서 바퀴로 굴러가는 철뱀 같고 가끔은 덜컹 덜커덩 힘겹다고 앓는다 구비길 돌 때는 몸을 비틀어 기울다가도 제 새끼 감싸듯 금시 제자리 잡고 내시경 쎈 불빛마냥 실내등은 환하다 사람들은 서거나 앉아서 매무새도 제 각각 젊은 여성일수록 화장발 짙고 의상도 곱고 경노석 빈자리에 뜨거운 감자가 놓인다 삼호선 타고 충무로 간다 행선지가 멀리 길다 옛날 호남선 같은 지상 구간에 축사와 아파트가 흐르고 마찰음 깔리는 곳에 푸나무가 쏠린다 아스라이 한강이 따라오고 북한산이 맞대들고 파발마(擺撥馬 )갈기 바람을 전철이 쿨럭거린 오늘 손잡이 꼬옥 붙잡고 함께 가는 현대인들 스마트폰, 에어폰 꽂고 노트북에 춤추는 손가락 모니터에 흐르는 세월호 상처가 퍼렇고 천심(天心)의 인간만사가 무쇠 속을 달군다 줄어드는 시간을 짤락- 짤락 찢는다 만날 사람이 생체실험실 유리관에 섰느니 뇌 회로 얽힌 핏줄이 계산기에 깔린다 내릴 사람들은 의무처럼 창 앞에 모이고 지하 동굴 구곡간장을 꿈속같이 돌아와서 낱낱의 운명체들을 토사물로 쏟는다.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임진강은 멀리서 횡으로 뻗어 죽은 듯이 말이 없고 잡초 무성한 철조망 너머로 빈 하늘이 덮여 절단 된 다리 발목이 전쟁처럼 서 있다 녹음 우거진 남방 한계선 산줄기는 검푸른 피가 맺혀 뭉턱 솟다가 기울고 옆돌아 흐른 강물이 수혈하듯 잠잠하다 서울 53km ↔개성 22km 임진각 표지판 뒤로 튼튼 철주, 촘촘 철망이 낡은 이념처럼 굳었다 외국인 관광객 둘이 사진 찍고 떠난다 겹으로 첩첩 드리운 리본은 뒤엉킨채로 휘감기어 철망에 찢겨져 걸린 염원들이 혈흔으로 남아 하늘빛 바람결에 실려 속절없이 날린다 육십 년이 삭아 내린 듯 기관차 화통은 녹이 슬고 뻥뻥 뚫린 탄흔은 전쟁의 상처로 남아 소경처럼 울고 뿜어 낼 연기도 없이 숨이 끊겨 짤렸다 달리고 싶은 철마(鐵馬)는 철석같이 꿈적도 않고 철갑은 너덜너덜 누더기로 찢긴 채로 탁발승 등신불처럼 철로 위에 누웠네 향연(香煙)도 못 피올린 망배단의 향로(香爐)는 해골마냥 덩실 놓여 산화한 혼백의 눈빛 따갑고 비워 둔 사리함에는 통일 염원이 담긴다. 임진각 평화의 종 하늘로 향할 염원을 흙빛 어둠으로 품안고 싸움터 오랜 상처는 청동(靑銅)의 살덩이로 남아 상투 끝 목매 달리어 울고 가는 종소리 핏빛 강물로 흘러온, 흐르는 역사는 아프다 비운의 임진강물은 굽이굽이 멍이 들고 흐르다 숨이 막힌 듯 길게 잠긴 자유여 보리밥 된장 냄새로 익혀 온 속 깊은 살빛 위성으로 하늘을 날아 우리 땅 겨레를 보느니 터질 듯 솟치는 원(怨),원(願)을 안고 떠는 평화의 종 산정호수 물빛 역사 파주에서 두 시간을 달려 호수의 세월 앞에 섰다 칼 빼어 들고 산하(山河)를 피물들이던 한 사내를 보느니 청동 빛 말탄 입상(立像)이 천년 역사로 굳었네 전장(戰場)을 누비던 맹주의 시야에 산그늘이 서리고 험준한 암석의 산골 높이에 다래넝쿨 엉켜서 치켜 든 말발굽에는 허허 창공이 휘졌긴다. 핏빛 하늘 아래 살육 된 목숨들은 물결로 출렁이고 천하를 다 삼키려던 제왕의 허공은 저리도 파란가 패장의 흙 묻은 칼날에 뜬구름이 짤리네 창끝에 높이 걸린 황금빛 권세도 초근목피 찰흙 묻힌 민초의 괭이자루도 목숨 빛 창연(蒼然)한 생이 이렇게도 공(空)하냐 마지막 목이 찔리던 피비린내 현장에서 제 목숨 하나 못 건진 산정호수 물은 맑은데 수하(手下)의 칼끝 피 한 점, 씻어주지 못했던가 제왕이여, 승승장구 용맹하던 장수여, 생애여- 쫓기던 하늘빛이 어떻든가, 그대에게 묻노니 천년이 사뭇 지났으니 말해보렴, 허사(虛事)-, 허사(虛史)여- 궁예의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챙겨 넣고 귀가길, 휴전선 초병의 흙 묻은 군화를 흘낏 스쳐보고 내 피땀 뒤엉킨 길을 돌아보네, 옆자리 아내여- 광화문 네거리
눈부신 빌딩 아래, 불타는 네거리에 청사(靑史)의 수레바퀴 파도처럼 굴러가고 광화문 처마 끝 끝에 기왓장도 굳세다.
영욕의 이 포도 위에 저리 바쁜 자동차들 오늘은 또 어디로 매연 뿜고 달려가나 대사관 경비병들이 역사 속을 오간다.
큰 칼 빗겨세운 충무공 동상 위로 북향의 구름 띠가 서울 하늘 감돌아 비운의 궁궐 밖에서 통곡하며 떠가네.
서오릉에서 덩실한 봉분 능에 21세기 침을 뱉느니 천근 무계 고운 상석에 유골로 차려진 민초들 흘러 온 역사 앞에서 돌아보고 걷는다 함박웃음 권력도, 복받친 통곡 소리도 저 무덤 안에 함께 잠들고 있거니 잡초로 이어 온 넋이 함성인 듯 손 젓네. 문무의 석상도 축생의 수호신도 천년을 지키라는 황금빛 명령인데 돌이끼 허울을 쓰고 허재비로 섰네요.
목욕탕 풍경 남녀 탕탕 물론 남탕, 나 지금 막 들었네 모두들 괴벗고 못 볼 것도 들어내고 잘난 체 더 못난 척도 내색 않는 나신(裸身)들 걸핏 보면 남자인데 뜯어보면 수컷 내용이야 상관없다 들숨 날숨 살아 있네 원시의 심산계곡에 알몸 담긴 그림자 짐승으로 살아 왔네 털 길러 물마시고 사람으로 여기 있네 맨살 때를 벗기네 문명 속 인간 본색을 생각난 듯 뽐낸다 샅.샅에 알알, 너나없이 노란 호두과자 막 뽑힌 총각무 시들은 긴 단무지 신의 뜻 상벌 값으로 마냥 한들 끝없네 괴좆나무 생나무 검불 엉성 묏새 둥지 비누칠 희번득 언치새 날아들고 샅 아래 한드린 불(알)이 원죄인 냥 무겁다 꼿꼿 서서 걷고 유연(柔軟)히 허리 굽혀 맨살덩이 육곡간 풋풋 싱싱 날로 엉켜 진화된 수컷 짐승들 털렁 길죽 업보(業報)다. 아파트 군상(群像) 건너다 뵈는 아파트는 길길이 솟구치고 구름 낀 일요일은 가만히 하늘로 떴다. 묏새도 앉지 못하는 경사 급한 지붕들 사각의 창문들이 종횡으로 열을 맞춰 열병식 군단 질서로 한 모습 찍히는데 개미집 지상 동굴에 피뢰침이 날 섰다. 더 멀리 안개 자욱한 아파트 마을 고압선 휘드린 철탑 끝에 찍-찍, 빛, 점. 찰라의 고압 불빛이 천년광음(千年光陰)날리네. . 신도시 개발 조감도 새로 뚫린 사차선 포도(鋪道)를 백색 벤츠가 내뺀다. 가로수가 다가드는지 먼 산이 가고 마는지 마음의 착시 현상이 검은 길로 엉킨네 개발구역 산 하나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이름도 못 들어 본 힘 좋은 장비가 무성(無聲)의 산을 허물어 똥 빛 흙을 파낸다 황토 흙이 깎기여 길 난지 십일이 지나고 드러난 속살을 검은 비밀이 덮는다 한 그루 뿌리 뽑힌 나무 질질 끌려 실려 갔다 허물린 폐가에 고양이 유령은 울부짖고 어둠 속 개발 역사는 억,억, 지페로 쓰일 때 별빛은 흐리어 가고 짤린 달이 기운다 텅 빈 아파트 부지에 하늘이 내려 깔리고 잡초 무성한 하세월이 풍선으로 붕붕 떠올라 무거운 삶의 굴레가 헛바퀴로 구른다. 사각의 시멘트 절벽에 멍멍 뚫린 구멍들 하늘로 더는 못 올라 쇠줄 감긴 관목수로 섯다 절망은 말이 아니라 내려꽂힌 집값이다 화려한 네온이 너울거린 일 번가 어둠은 지병에 시달린 은행 감옥의 죄인이다 아는 듯 못 본체 하는 불꽃 튀는 눈동자들 나 아직 방콕 못 뜨네 저네, 방콕에 간다는 겐가, 귀국했다는 말인가 그동안 벽지에 뚫린 눈빛 화살 자국 몇 구멍인가 도저히 셀 수 없다면 사진으로 보내게 자네, 방콕 소식 왜 자주 안전해 주는 건가 방문이 공항 십팔번 게이트보다 좁은가 마누라 눈치본다고 듣고 있네, 그런가 외국 여행기념 만년필 방콕에서 잘 쓰고 있네 외제 필기구로 원고지 칸칸을 콕콕 잘도 긁어대네 시 쓰는 방콕 하늘은 창문처럼 사각이네 내 서재에 방콕 관련 기록물이 많은 거 알지 일기장, 사진첩, 가계부, 축, 부의금 기록 장부 꼭 써둘 상속 유언장은 내용 별무라 안 썼네 퇴직 후 이곳 생활 십 오년 사연도 제법 쌓였지 좌골신경통, 퇴행성관절염, 우울불면증, 답답우울증 그래도 즐거운 날은 하루 있지 25 연금날 자네, 면벽 선종 스님들 병 안 나는 까닭 알지 천정에, 벽에 철갑 된 눈독이 살균 항생제가 된거래 내 고독 함께한 벽면에 눈독 약독 다 발렸네 어둑 컴컴 눅눅한 방바닥에 등 붙어 나 못 가네 전국 방방곡곡 편안한 쉼터 아직 못 찾아 방 안에 콕콕 짱박혀 정든 방콕 못뜨네 제3부 바다가 쓴 시 수평선 서로의 눈과 배를 맞대고 뒹구는 먼 바다에서 끝내 화해 할 수 없는 배반의 경계를 짓고 하늘과 바다는 오늘도 긴 전선(戰線)을 긋는다 멀리 있어 더욱 그리운 아련한 꿈속에서 하늘 바다를 베는 용왕의 칼날은 유성처럼 번뜩이고 영원한 맞수의 대결은 긴 수평선을 남긴다 바다가 쓴 시 바다는 속 깊은 모정의 넉넉한 표정으로 들끓는 내심을 세월로 삭히면서 잠들지 못하고 불멸의 시심을 지닌, 먼 세계, 영혼의 시인 바다는 날마다 시가 되어 파랗게 울며 노래하고 나울로 넘실대는 옷소매에 오랜 전설이 실려 삼만리 물 숙 깊이로 인내하는 생의 어머니 온 바다가 좁아라 굴러 뒹굴고 파도치고 한 빛깔 푸른 영혼은 은하의 골짜기로 치솟아 제 몸을 육필(肉筆) 붓으로 시를 써서 새긴다 쉼 없이 일렁이는 잔잔한 물결 소리, 숨소리 유한한 목숨, 허무한 삶을 애절히 달래주는 아득한 수평선, 지울 수 없는 생의 긴 흉터 낙조의 붉은 넋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고 진주빛 생구슬 알알 튕겨 은혜롭게 돌려주는 영원한 바다의 신비를 시리도록 바라본다 비바람 하늘 천둥을 숙명인 냥 끌어안고 분노의 거친 몸짓으로 저항시를 쓰면서 큰 소리 높은 파도로 검은 피를 쏟는다 물 속 깊은 태초의 바다에 영혼의 왕국이 있어 우주만물 생명의 근원을 뼛속까지 알아 왔으니 바다가 쓴 시는 속죄와 부활의 영원한 사모곡 사랑가 낮에 멀리 있어 깊은 밤 수렁에 빠진 넋 가슴 속 머리 위에 살아 삼삼 가뿐 숨소리 해 밝은 대낮 바다에 먹빛 하늘 사랑아 천공(天空) 높은 파란 나울로 알알 뜨는 얼굴 꿈속을 가듯 땅 밑 암흑천지를 헤매 돌아 붙안고 얼굴 비벼 볼 평생 묵힌 사랑아 사뇌가(詞腦歌) 밤은 오래 깊어 정은 밀랍(蜜蠟)으로 말라붙고 임 계신 용궁심처에 손가락 베어 보내시면 잡힌 손 그때를 보아 행여 알아볼런지 이승의 대명천지도 눈감아 밝혀보면 영혼도 하 멀리 날아 눈빛 더욱 빛날테니 천만리 먼 사랑인들 오고 가지 못할까 솟대 새 해맑은 허공에 발 뗄 수 없는 빈 헛걸음 있는 듯 안 보이는 홀로 가는 먼 외길 넓은 들 거칠 것 없이 날고 싶은 자유로(自由路) 마음 속 허허벌판 자신만의 깊은 오솔길 풍화작용 솟대 새 오래 묵힌 고독감으로 몸에서 기둥으로 선 이념 같은 공중 길 차디찬 비갈(碑碣)
한 생애 긴 사연을 빗돌로 믿지 말라 빙설로 깎여나갈 가공의 허상 위로 무지한 몰자비(沒字碑) 영상 구름이나 흐르지.
생전의 서른 사연 고이 접어 챙겨넣고 하늘을 우러러 안으로 활활 태우면서 더 작은 사리 구슬로 갈고 닦고 할 것을. 내리는 눈발 속에서
산야에 눈 내린다 지붕에도 거리에도 나비가 떼를 지어 하늘가득 채운다 오늘은 눈이 오는데 옛날이 왜 그립나.
눈발이 굵어지니 얼굴들이 생겨나고 소학교 운동장에 만국기도 펄럭대고 사진 속 그리움들이 분수처럼 솟친다.
첫눈이 내리면 만나자던 여인네 다시 또 볼 수 없는 먼저 간 친구들 내리는 눈발 속에서 영혼으로 떠도네.
아내 수영장 한 달 값을 아내에게 선뜻 내어주고 배낭 메고 가는 양을 먼발치로 바라본다 한평생 부부 정분도 저리 멀리 깊을까 길 따라 멀어지는 뒷모습 아련하고 수영복 온갖 태를 삼삼 그려 굴리는데 오늘도 내일 또다시 이런 날로 깊어라 마치고 돌아온 아내 얼굴 다시 본다 우리 세월 골주름 맨얼굴로 그리웁고 사무친 평생 사연이 눈빛으로 저리다 무제(無題) 작년다이 피는 벚꽃 기시감(旣視感)도 지례 맑아 조찰히 보는 꽃이 이냥 돋뵈어 슬카장 눈부신 꽃빛 우련 더욱 깊어라 부시게 쏟뜨린 봄볕은 꽃잎을 태우고 불타는 화색(花色) 정렬은 시간을 조바시어 피는 뜻 못다 사루고 떨 군 채로 딩군다 목숨 줄 목숨은 동아줄, 하늘 길로 이은 숨줄 흔들린 그네줄은 바람타는 신의 심줄 끊긴 날 해달 밖에서 흙이 되어 밟히리 탯줄 짤린 긴 세월 외줄 타는 채선(彩扇) 광대 하늘 땅 사잇길에 줄에 실려 이은 삶 삭은 줄 끊어진 그날 목숨 줄로 감기리 진열장의 돌 삼봉(三峯)의 돌 한 점이 조석으로 제자리다 폭포도 옹달샘도 꺼먼 제 색깔로 말라서 그대로 돌인 척 하고 능금을 뚝 떤다. 무겁다 가볍다 내색 없이 앉아서 들어보라 말하라 유도심문도 않고 정말로 돌은 돌이다 돌대가리 석두다 옮겨 볼까, 지겨운 그 자리에 돌로 굳었나 내 눈빛 만 가지 상념에 정나미 떨어졌나 십년을 깊이 뜯어봐도 돌이 녀석 모르겠다 마음씨 떨군줄도 모르고 공원 산책길을 걸었다 할아버지 지갑, 열 살 쯤 된 소년, 고맙다 해맑은 눈에서 알찬 마음씨 한 알 보았다 씨앗은 썩지 않고 싹이 텄다, 비바람 오십 년 오늘 나무 그림자를 밟고 서서 땀을 씻는다. 아이의 눈빛 씨알이 또 다른 그늘을 짓겠네. 그리움 먼지 풀썩 돗자리에 배 깔고 읽던 책들 빛바랜 마분지(馬糞紙) 책장 황토색이 짙어 내 눈빛 그때 물들어 이제까지 노랗네 추억은 한이 되어 책을 끼고 미쳤네 칠십년 지난 세월도 돌아보면 한웅큼인데 순간도 이어 펼치니 한 생애가 길구려 밤비 가로등 불빛이 빗속을 뚫고 오는 야밤에 검은 천막의 숲나울이 무당춤으로 쏠리고 화살비 맞는 자동차 소리 길바닥에 깔린다 침침 멀어진 공장 불빛 힘이 빠져 가물거리고 비의 침날이 꽂힌 들판은 습습 으슥 어둡네 유령도 날개를 접고 밤비 가만 젖는다 바퀴에 짓이겨 철벅이는 차도의 빗물은 밤의 정령이 내 뱉는 코감기 가래침 키 성큼 막아선 넋이 외로움을 퍼붓네
시인의 모자 모자 쓰고 거울 보니 이쪽의 내가 아니네. 그쪽의 내 인상을 어찌 볼까 몰라서 조찰히 살피는 맘이 이저리로 나뉜다 시인의 모자위에 서정시가 쓰일까 사진 속 검은 모자 무겁지나 않을까 모자만 크게 보일 뿐 그대 시를 못보네 안에서 끓는 넋이 의관으로 솟친다면 맨 살갗 대머리가 가려질 수 있다면 허상의 빨간 모자를 벗지 않고 가겠네. 유년의 하늘 덩실 코앞에 덕두산이 막아서고 해지는 석양빛을 시리도록 쏟뜨리던 전설의 황산 모퉁이 추상화로 그립네 고려는 망하고, 태조왕도 가고 말아 전적비에 파인 세월 이웃으로 정이 들어 뜻 모를 새김 글자는 역사처럼 깊었다 군용차 습격 받고 딱꽁 총알 검은 산울림 6.25도 흘러가고, 나는 보네 마른 핏자국 돌아 본 유년의 하늘 밤낮 없이 놀빛이네 반구정에서 반구정 눈 높이로 갈매기는 뜨고 남북의 강줄기는 합수(合水)로 크게 흘러 옛주인 그리다 말고 숨소리도 거칠다.
저세상 오백년을 석상으로 부활하여 의연한 기풍 지녀 땡볕 여름 견디는데 역사여! 남긴 흔적을 그대로만 지켜라 제4부 교화동 칩거기 蘭(난) 겨우 내 묵언침묵 겉 빛깔로 멀더니 창변에 새봄볕이 아작아작 들비쳐 잎손을 줄줄이 뻗쳐 봄을 반겨 늘이네 난분 속 얽힌 뿌리 태반 속 수족(手足)인즉 난석 틈틈 휘어 내린 분절의 절개로 지금 막 새순을 틔워 뾰쪼롬이 내미네 얽히고설킨 사슬 뿌리 넋으로 사려두고 굽어진 마디마디 띠로 묶인 앙금인양 천리향 꽃을 기려 오늘 더욱 외롭네. 바람 소리 천리 밖 머언 추억의 들녘 끝, 끝에서 푸나무 잡초밭을 씻어 온 바람 소리는 어둔 밤 창에 기대어 받아쓰는 자성록 창살에 부딪쳐 낟알로 부서지는 바람 소리는 찢겨져 너덜거린 다시 도진 성장통(成長痛) 겹으로 엉켜 들리는 영혼의 깊은 소리 백자 항아리 골진 백자 항아리 눈이 부셔 감기우고 다가서면 그 빛깔 외려 더 흐려지니 물러서 본체 마는 체 자로 눈이 홀리네 도도록 돋은 철(凸)은 혈관 솟듯 살아나고 흐르듯 미끄리는 골진 요(凹)는 파르르 떨리어 연연이 흰 핏줄 내려 시리도록 아리다 휘어진 난(蘭) 잎 끊길 듯 휘어진 푸르른 가는 잎새 비상(飛翔)의 꿈을 그려 하늘 금방 날을 듯 허공을 갈라놓고서 팽팽히도 굽었다 튕길 듯 솟친 잎새는 뻗다말고 도로 휘어 무지개 일곱 색을 품어 담을 둥근 꿈은 하그리 세월만 기려 드푸르게 엉켰다. 선인장 가시 촘촘 드센 바늘, 줄줄이 곧추세워 종으로 연을 지어 성곽으로 에워싸듯 지엄한 푸른 속내는 범접 못할 업보네 화분에 홀로 담겨 바위처럼 무거워 드비치는 햇살에도 창끝은 날카롭고 흉금을 쓰담아 안고 마른 세월 삭히네 안에서 끓는 피를 돌산같이 눌러 참아 광야의 청사(靑史)를 빚는 듯, 쏟아낼 듯 침침(針針)이 사연을 벼려 지친 생을 찌르네 몸 밖은 허공인데 어딜 겨눠 웅크린가 세상은 쓰고 떫어 부푼 허영 찔러 뚫고 몸신을 가시 화살로 천년청청(千年靑靑) 지키네 아파트 거실에서 일찍 기상한 날 거실 쇼파에 앉아 가구들을 둘러본다 먼저 존재감 드러낸 벽시계 소리 세월 속으로 날아가고 인삼주 익어 온 해년 묵묵 색깔 노랗다 다섯 개 난(蘭)분이 횡으로 열 맞춰 의젓하고 군자란 인품(人品) 값이 지난날을 힐책한다. 의연히 못 새긴 울분 자서전을 밀친다 꾹꾹 눌린 서책은 울어 본 그림자로 남아서 손때 묻은 체취가 삼천 권 시집으로 그립고 만 생각 어지런 상념 억 만 자(字)로 쌓였네. 오십 인치 디지털 티비는 말 잘 듣는 피동형 제왕 군중 속 외로움을 화면 속으로 이끄는 마약 상자 칠 할을 함께 지내 온 유아독존 친구다 발 디밀고 등을 보인 식탁 의자를 헤아리는데 삼시 세끼 수젓가락, 그 소리 뒤엉켜 들리고 아이들 모이는 날은 책걸상이 채웠지 진열장의 상패 상자가 날이 날마다 빛이 바래 허무한 지난날이 회색빛으로 삭고 있다 어제가 오늘처럼만 생각 깊이 온다면- 달력 아래 지구본(地球儀)은 공,자전도 멈춘 채로 못 가본 아메리카 목장 말이 뛰고 또 달린다 영주권자 처제 소식을 받는 전화기가 놓이고 출판 기념회 때 사진이 20년 전으로 걸렸다 품에 안겼던 아이가 학사모로 덧씌워져서 손자의 손자를 안고 촬영할 날 올까 몰라 슬쩍 밖을 보니 열 개의 봄이 가고 있다 전설의 숲 속 비밀이 60년만큼 아득할까 음미 된 삶의 진맛이 쓰고, 달고, 떫구나.
책상
책상이 여러 날을 그대로 서서 있어 사뿐이 앉은 채로 어제를 잊지 못해 시간은 죽었다 살아 설합 속을 휘젓네.
어젯 밤 눈을 뜨니 책상다리 휘어져 찌그려 무너질 듯 별빛에 눌렸다가 동공을 휘돌리고야 본자리를 되찾네. 이색투시 (異色透視)
동안거 토굴 서재에 그림자도 흔적 없다 만유의 이색투시(異色透視)도 영혼 속에 묻히고 결국은 내 백골만이 벽 속에 갇혔다.
하늘로는 끝내 못보낼 헐벗은 육신을 끌어안아 가슴터질 이승 것을 어이하랴 유골분 뜨겁게 끓여 한바다로 띄울까. 빛의 장난
베란다의 아침 햇살이 사선으로 드세다 수직으로 못 내릴 제 힘도 부치다면 구태여 옆꾸리 찔러 장난인들 못하랴.
창유리에 부딪치는 억 광년의 곧은 빛살 억조창생이 예 있구나, 부질없이 허망하다 비로소 떨어지면서 애기처럼 웃는다.
이것이 무엇이냐, 투명체 유리더냐 막지 못할 허공을 멀리에 그냥 두고 허상의 장막(帳幕)을 짓고 가리우며 있구나. 시조 단상
시조를 쓰려고 자유시를 실컷 읽고 사유의 영마루에 구름발도 걷치고 정형의 틀을 박차고 애벌레도 구르네
톨톨이 굳어진 옛글의 씨알 섬(石)이 자유의 광야에 연상의 나래를 펴고 오백년 역사를 딛고 소스라쳐 튕기네
사각의 책갈피에 세 쪽 줄로 막힌 길 들었다 놓으면서 현대시를 또 읽어 틀 속에 다시 채워 볼 상징물을 다잡네. 계단
계단이 아래로 쏠릴 때 세월은 하염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기갈의 살림살이 다시는 미끄러지기 싫다 싫어, 지겨워.
아파트 팔층을 계단 타고는 안 내려 차라리 오를 때는 힘쓰고 생각느니 내 사연 옛날로 뼏쳐 좋다 좋아, 힘들어.
사랑이 아니라도 올라갈 일 보람찬 길 십 팔시 분침마저 꺾여지길 거부하고 윗 계단 벽에 붙어서 올라 올라, 살아라.
아득한 땅 언덕에 소나무 한 그루 바람을 맞고 서 있다 하늘 높은 유년의 그림자는 자꾸만 길어져 더 멀리 아득한 땅을 두 손 모아 쓰담네
불모의 폐원(廢苑)에도 시간은 도사리고 기대일 언덕마저 깎여진 빈자리에 나무는 눈비 맞으며 하늘 땅을 뒤집네
된서리 몰아오는 어제의 바람결에 뿌리는 땅을 파고 밤하늘 별을 잡아 오늘도 버리지 못한 고향 언덕 오르네.
두 여인 짧은 치마 두 여인 숲 속으로 사라진다. 여름 날 땡볕은 그림자를 태우고 흔적은 욕망을 살려 푸른 잎에 얹히네.
나무 뒤에 가려진 여인 감은 눈으로 보이네 여인네 젖가슴은 멀리서 뽀얗고 가지로 뻗은 내 팔은 삭정이로 말랐네.
풋보리 바람 일어 그늘 숲에 일렁거려 딩굴던 연정마저 추억으로 피오르고 부활의 동굴은 커녕 절명(絶命)인냥 멀구려.
벽시계 문득 벽시계 본다 왔다 갔다 시계추 강뚝의 어린 시절 황소 뒷다리 기둥 섰네 가린 듯 흔들 매달린 두 쪽 불알 무겁다 아버지 야왼 팔에 하지감자 뭉뚝 길어 보릿고개 넘다 우는 주먹 눈물 황갈색 시계추 가시밭 생을 비리게도 살았다 서울역 시계탑은 흔들 추도 없더라. 높게만 치솟아 비집고 들 틈도 없이 청운의 뜻도, 샛길도 튕겨나는 럭비공 休眠期(휴면기) 밤 같은 물 속 깊이 자맥질로 허우, 허우적 긴 흑목이 두루미 깃털은 흠뻑 적시어 외다리 서서 기리는 모래판은 외졌다 예비 된 채란통(採卵桶)은 서재에서 녹슬고 의식의 부채질만 해 거듭 팔이 저려 머리털 빠진 자리에 시린 바람 서렸다 못 박힌 손가락에 장을 지진 아픔도 방구석 그늘에서 어둠으로 칭칭 동이고 산란통(産卵痛) 겪는 시련을 허공에다 뿌렸다. 약이 된 쓴 세월이 영 넘어 흘러가고 여인숙 객실처럼 눅눅했던 영혼도 알 깨는 소리로 열려 빈 공책이 들렸다. 한내골 시정(詩情) -한내문학회의 사단법인체 발족을 축하하며
크고 넓은 것 꼭 좋은 것 아니다 모두가 바라는 바 나갈 길을 알 때 한가득 바른 섬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
실개천이 모여서 깊은 강으로 이어져 바다로 하늘로 흘러내려 퍼질 때 우리는 순리의 이름으로 받아드려 즐겁다
한내골 시정(詩情)이 하늘 구름 비로 내려 아픈 채찍 자성으로 제 몸을 추스리며 스스로 다지는 아픔, 오래도록 피겠지
깊고 넓은 강언덕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울울창창 거목으로 아늑한 쉼터 되어 사나운 폭풍, 낙뢰를 견디면서 가거라
역사는 시간이다. 고향 냄새 시심으로 뭉치어 튼튼 동아줄 더 멀리 가슴으로 이어질 때 한내(大川)문학은 시간을 업고 역사로 흐르겠다. (대미)
후기 정리해 놓고 보니 아쉽고, 부족한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찌하겠는가. 나 자신을 뛰어넘을 시를 쓸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1부는 춘정에 관한 것. 2부는 우리 시대의 생활 감정 3.4부는 의식 내면의 풍경화 이렇게 마무리해 놓고 보니 넓은 바다와 우리의 땅 끝 구석구석이 보이질 않는다. 더 넓은 물리적 세계가 보고 싶고 그리웁다. 여행 시조를 쓰라는 스스로의 과제물을 부여받고, 여기서 책을 묶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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