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추억 속으로의 초대 (내 고향 미네미)
내게 유년의 추억을 가장 많이 간직하게 해주고 내 삶에 영향을 준 고향은 미네미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백수 홍곡리이다.
마을 앞에 커다란 저수지가 있고 마을 뒤편엔 모감산이라는 명산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병풍을 쳐 놓은듯한 병풍바위가 있고, 아래 촛대바위가 있으며, 북 형상의 북바위와 부엉이가 밤마다 우는 부엉바위가 있는 풍수상 장군이 태어날 명산이란다. 그리고 집에서 이십여분 걸어가면 바다가 나타난다. 하지만 내 어릴적에 바다에 대한 기억은 없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2월 계송리 미네미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나의 어릴적 기억의 발원지는 여섯 살 봄부터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뒷산에 갔을 때 높은 산골짜기에서 부서져 쌓인 자갈들이 자르르 쏟아지던 기억과 검은털 보송보송한 통통하게 물오른 칡 순이 줄기차게 뻗어있던 기억과 산 아래 약수리 박씨들 시제에 할아버지가 오빠만 데리고 가는 바람에 집 뒤 언덕 넘어 밭까지 따라나섰던 나는 처음 가본 길에 집을 못 찾을까봐 헤매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여름날 장마철이면 산골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로 마을앞 개울이 범람하고 밭둑에 매달린 호박이 아슬아슬 달려있고, 비가 그친 후면 개울 옆 옹달샘이 모래로 가득 메워져 아빠, 엄마께서 삽으로 모래를 퍼 내셨다. 그 샘에는 홍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어른들 입에 전해오고 있었고, 다슬기가 살고 겨울철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샘물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는 약수 샘이 있었다. 마을 입구쪽으로 개울을 따라 논에 이르면 봄에 도룡뇽이 낳은 신비한 알자루를 볼 수 있었고, 논 옆 저수지로 흘러드는 개울 중간쯤 웅덩이엔 마침 나무 한 그루가 그 웅덩이를 덮고 있고, 칡순도 늘어져 있어 여름이면 우린 칡순에 매달려 타잔처럼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었다.
초라한 초가집 네 채가 전부였던 두메산골에서 나의 인생의 첫 기억들은 더욱 또렷이 남아있고, 고향을 떠나 미네미로 이사를 오던 날 아버지는 동생 미정이와 트럭을 타고, 엄마와 오빠, 나, 셋째 젖먹이 여동생은 택시란 걸 처음 타 보았다.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 속 읍내 어느 시장을 지났나보다 신발 가게와 사과가 보이는 과일가게를 방금 막 돌았는데 택시는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듯 자꾸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사올 적의 가난한 살림살이란 가족들 옷가지와 이불 몇 채, 수저분, 식기 몇 개와 돌절구가 전부인 초라하고 궁색함 그 자체였다. 새 희망을 안고 엄마의 친정인 송정리 앞동네 미네미로 새 터전을 잡은 것은 어머니의 친정인 영월신씨 문중의 종부인 지정뫼 아제의 도움으로 우린 제각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지으신 오막살이 초가집에 촛불을 켜고 살았던 산골 소녀가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에 호롱불을 밝히고 보다 발전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문중에서 준 전답도 제법 많았지만 빈주먹 쥐고 온 우리 가족에겐 늘 빈 독에 물 붓기하듯 궁핍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볕 좋은 남향인 우리집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일곱채의 집들이 부채처럼 펼쳐져있고 그 아래로 논이 있고 지석할아버지의 큰 방죽이 있었다. 마을 앞산은 월곡 뒷동네였고 서쪽으로는 월곡의 낱알맹이인 지금의 민순이네 집이 보였고, 서북향엔 멀리 금아들 냇가와 양평리 현영이네집이 보였다. 월곡을 거쳐 지석할아버지의 방죽길을 따라 우리 동네로 찾아드는 사람들도 다양했다. 하루 종일 거지들이 그 길을 따라 왔고 춘궁기에는 더욱 심했다. 대나무 바구니며 키며, 채를 가득 이고 진 장사꾼이며 생선을 머리에 인 장사꾼들과 우체부가 그 길을 따라 마을을 거쳐 지나가곤 했는데 우리집은 고갯마루 아래 첫 번째집으로 마을의 가장 윗집이었고 길 왼편 옆으로 청전아제 (정병회선생님)가 사셨고 그 옆엔 아제의 동생인 함평아제(정병세선생님)네가 사셨고, 대나무밭 끝자락에 직사각형의 얕으막한 큰샘이 있었다. 그 샘 위에 덕암아제가 사셨고 마을 아랫들먹엔 엄마의 사촌 큰오빠인 율촌아제가, 그 옆엔 지석할아버지 (정병택교감선생님의 아버지)와 대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엄마의 사촌 작은오빠인 애제이아제가, 동네 가운데 우리집 바로 아랫집엔 수말할매(정동수 경찰아제) 댁이 있었다. 우리 동네와 인근 마을들은 씨족사회처럼 친족들과 알고보면 먼 친척이 되는 사돈에 팔촌과 팔촌에 팔촌이라도 될듯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바쁜 농사철이면 품앗이를 하며 정을 나누며 함께 어울려 살았다.
청전아제 댁엔 정영숙,영남,영희,성원, 홍권, 영옥, 길홍오빠와 언니들이, 함평아제 댁엔 정종권오빠와 선주,영주언니, 대종오빠가 살았고, 덕암아제 댁엔 정선희언니, 중규오빠 살았고 내 막내동생 또래의 꼬마가 태어났으며 율촌아제 댁엔 신정이, 종학, 종구, 종현, 종춘오빠, 정애언니가 살았고, 애제이아제 댁엔 신정순, 종남, 정자, 종열, 송자, 애근, 은영이가 살았고 지석할아버지 댁엔 이창훈과, 나영이, 근열이가, 동수아제 댁엔 우리가 이사 간 후 정명숙, 감율에 이어, 태호, 강규, 명순이가 태어났고, 우리집엔 오빠 김형영, 나, 미정, 정임, 순영, 득영이 있었으며 이어 송정리 살던 설묏양반이 이사를 와 김양순언니, 동희오빠, 영애, 동주가 우리 마을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 사이 이사를 가고 오는 변화의 물결과 큰언니 오빠들이 객지로 돈을 벌러 떠나긴 했지만 우리 마을은 아이들로 벅적대던 한 시절이 있었고 우리집 뒤 벌등에서는 문중의 묘 봉분 두 개가 있었고 잔디로 잘 조성된 넓은 벌엔 상석과 비석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비석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사다리놀이, 야구, 축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기마전, 언니들은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 실핀을 던지며 실핀 따먹기 놀이를 했고, 주서먹기(공기돌)놀이를 하며 해 가는 줄 모르고 세월 가는 줄 모르는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 정월 대보름이면 정씨아제들이 마을에 함께 사셨기에 월곡에서 풍물패들이 고깔모자에 울긋불긋한 탐스런 종이꽃을 달고 풍악을 울리며 앞산을 넘어와 동네를 들썩이게 했고, 무섭게 포수 분장을 하고 쌀 달라 총대를 들고 우르르 달려드는 그 모습에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놀라고 동생들은 울며 달아나곤 했다.
한봉재에서 우리동네 고개마루까지 산이 이어져있고 긴 꼬리가 공동뫼까지 닿아있던 정겹던 소나무산. 우리집 뒷산 벌등엔 몇 백년은 됐을법한 왕소나무 두 그루가 참으로 위용있고 아랫 들녘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쪽으로 붉게 노을지는 석양 풍경 속의 왕소나무는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주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문중산과 오른편으로 지석할아버지의 산을 지나면 공동뫼가 나타난다. 공동묘지엔 상여집이 있어 낮에도 음산한 기분을 느끼게 했고, 송정리를 마주보고 있는 묘지 뒤편의 산은 지정뫼아제의 산이었는데 그 곳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지석할아버지의 산엔 주로 국수버섯과 사슴뿔을 닮은 싸리버섯, 흰 독버섯과, 빨간 독버섯, 방구버섯이 나고, 옆 아제의 산에서는 코처럼 미끌미끌하며 약간 보랏빛이 들어있는 가지버섯, 노랗고 맛이 닭고기처럼 쫄깃쫄깃한 꾀꼬리버섯, 푸르뎅뎅 청녹빛이 나는 녹버섯, 끈적거리는 껍질을 한 번 벗겨야하는 갈색 솔버섯, 밀대버섯, 갓버섯등 식용버섯이 지천이었다. 또 겨울이면 주변 산엔 양송이버섯을 닮은 서리버섯이 났고 여름이면 엄마와 함께 버섯을 따고 된장을 풀어 끓여주시던 버섯국 그 맛이 난 지금도 그립다. 집 뒤 산에 가면 땅 위로 울퉁불퉁 튀어나온 소나무 뿌리를 부엌 삼아 깨진 사발을 솥단지삼아 걸어놓고 소꿉놀이를 하며 맨발로 폭신폭신한 솔이끼의 촉감을 느끼며 솔밭을 거닐다 그 감촉이 너무 좋아 야생마처럼 맨발로 초원을 뛰어다녔던 어릴적 소중한 나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많은 동네 오빠들이 있었고 특히나 부잡스럽던 개구쟁이오빠와 함께 살게 된 까닭에 난 말괄량이가 되었고, 오빠의 부탁에 높은 소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비둘기새끼를 내려오는 등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타고 모험을 즐기는 담 큰 아이가 되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생겨났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좋아하게 된 까닭은 그 풍요로운 자연과 벗이 되었기에, 그들이 나를 친구로 받아 주었기에 난 고향 밤하늘의 별을 기억하고 자연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청전아제 집을 둘러싸고 큰샘 위쪽까지 대나무 밭이 푸르고 대 숲 사이에 큰 상수리나무가 두 그루가 있어 가을이면 갈잎소리와 우수수 떨어지는 상수리를 줍고, 사철 댓잎소리, 겨울이면 뒷산에 소나무들은 겨울 파도 같은 울음소리와 겨울바람이 춥다며 왕솔은 왕 솔바람소리를 소리소리 냈다. 고향이 그리워 찾아봐도 예전의 고향은 간 곳 없고, 90이 가까워오는 율촌아짐과 동수아제, 현정이 큰오빠인 지상은오빠가 마을을 지켜가고 있고 고향을 둘러보며 옛 향수에 젖었다 돌아와야 하는 지금.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미끄럼을 타고 연을 날리고, 불깡통을 돌리고, 논두렁을 태우러 다니던 기억들과 정월 대보름이 되어도 징, 꽹과리 장구, 북소리 들리지 않는 시골들이 늘어나고, 그 시대 동네를 돌며 걸판지게 놀며 한 잔의 막걸리에 흥겹게 춤추고 시대를 아름답게 풍미했던 아제, 아짐들도 하나 둘 고인이 되어가고 있다. 정겹던 미네미의 소나무 숲은 모두 개간이 되어 밭과 논이 되버린지 오래지만 영혼이라도 마을에 머물며 고향을 지키고 옛 추억 속에 살고 싶은 뜻이셨을지 에제이아제와 청전아짐은 마을 부근의 밭에 묻히셨다. 우리들 기억 속의 마을 어른들과 언니 오빠들은 모두가 정 깊은 이웃사촌이었다. 내가 마을의 큰 언니오빠들의 얼굴을 잊은 채 이름만으로 기쁘게 지난날을 추억하듯 지난해 추석 고향엘 갔더니 동수아제의 막내딸 명순이가 윗집 살던 미경언니라는 말을 듣고 그토록 반가워하는 것이 아닌가 대여섯살 때 본 기억이 전부였을텐데도 ... . 고향의 정은 이리도 각별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추억하게 되고, 우리 옆집 청전아짐은 우리엄마인 송정댁(신복님여사)을 못잊어 하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다 몇해 전 돌아가셨다 한다. 고향을 떠난 후로 생전에 다시 못 만날 먼 곳, 부산으로 우리가 떠나게 되고 어려운 형편 탓에 고향땅을 찾지 못했기에 ... .
명절이면 고향을 떠난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기다리던 부모님처럼 지금 고향의 옛 어른들은 고향 친척들, 혹은 이웃사촌인 우리를 위해 또 다른 넉넉한 음식을 장만해 놓고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고향을 찾으시거든 부디 우리의 소중한 이웃 어른들이 살아 계실제 찾아뵙고 따뜻하게 손이라도 한 번 잡아드리고 정을 나누시길 빌어마지 않는다.
모두들 밝고 희망찬 새해, 복된 새해 맞으시길 빕니다. 2013. 2. 5 선강 김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