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3촌 칠곡 웃갓마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리에 조선중기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선생을 배출한 명당마을이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3촌이라 불리는 칠곡의 웃갓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예로부터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곳 웃갓마을 또한 조선인재의 반을 배출시킨 영남의 명고을 중 하나이다.
이곳의 지명은 조선후기까지 칠곡군 상지면(漆谷郡 上枝面)이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역(驛)이 생기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새마 또는 신동(新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폐합 때 신동은 지천면(枝川面)에 편입되었는데 지금은 신1리부터 신4리까지 나누어져 있다. 웃갓마을은 현재의 지천면 신3리와 신4리를 합한 곳을 말한다.
웃갓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조선조 성종 임금 때 광주이씨(廣州李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중종 임금 때 정승을 지낸 김수(金洙)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웃갓마을은 한자어로 상지(上枝)마을이라 표기하는데 이것은 마을의 생김새가 매화나무의 윗가지(上枝)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이씨와 벽진이씨, 그리고 진주강씨 등 세 성씨들이 터전을 잡고 사는 웃갓마을은 풍수적으로 볼 때 그 뿌리를 왜관에서 찾을 수 있다.
김두규 교수는 저서 [논두렁 밭두렁에도 명당이 있다]에서 웃갓마을의 명당형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학산(巢鶴山) 정상에서 마을의 지세를 살펴보면 칠곡 왜관읍 석전리가 매화나무의 뿌리이며, 왜관읍 매원리는 줄기이고, ‘웃갓’은 그 윗가지에 해당되는 형국에 놓여 있다. 꽃은 가지 끝에서 핀다. 꽃이 피면 그윽한 향기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윗가지에 해당되는 땅은 고상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다. 특히 매화나무는 선비를 상징하므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설명한다.”
또 풍수 전문가 장남식 선생은 웃갓마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풍수적호기심을 가지고 처음 웃갓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명당 자체가 큰 마을을 수용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묘지 명당을 보는 것보다 주변 산세를 읽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웃갓을 제대로 살피기에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거나 짙은 어둠이 대지를 감싸기 직전이 좋다. 이 때쯤이면 산은 자기가 낳은 모든 초목을 감추고 자기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듯 적당한 때를 골라 마을 뒷산에 오르면,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꽃잎과 같이 둥글게 둘러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조로운 꽃잎의 형상이 아니라 일 자 모양의 봉우리 토성(土星), 둥근 봉우리 금성(金星), 잔물결 모양으로 연이은 봉우리 수성(水星)들이 연이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웃갓마을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오행상으로 상생의 관계를 이룬다). 또 산줄기는 어떠한가. 웃갓마을 뒤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두툼하고 단단하여 왕성한 기운을 마을로 보내 주는데 마치 꽃잎 안에 수술과 암술 들이 빙 둘러쳐져 있는 형상이다. 마을 집들은 당연히 암술과 수술의 끝머리 부분에 위치한다. 저녁에 집집마다 불이 켜지면 밝게 빛나는 한송이 매화꽃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이상과 같은 두 글에서 살펴볼 때 웃갓마을은 왜관읍 석전리에 뿌리를 둔 한 그루 거대한 매화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윗가지의 끝자락에 피어난 한 송이 매화꽃이라 할 수 있다.
웃갓마을의 산세를 살펴보자.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출맥한 산자락이 대구의 진산 팔공산(1192.8m)을 일으키고 다시 서진하여 칠곡군 석적면 도개리와 지천면 황학리의 경계에 이르러 수려한 산봉우리 소학산(巢鶴山, 622m)을 만들어 놓는데 이것이 웃갓마을의 소조산(小祖山)이 된다.
소조산에서 남으로 진행하던 용맥은 웃갓의 발암산(鉢岩山)을 끝으로 웃갓마을의 명당수를 만나 행룡을 멈추게 되는데 발암산이 웃갓마을의 진산(鎭山)이 된다.
발암산(鉢岩山)은 신4리의 서쪽에 있는 나지막한 구릉형의 봉우리로 남으로 길게 뻗어내린 형상인데 그 모양이 마치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떼(鉢)와 같이 생긴데다 산의 뒤쪽에 높은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발암산 정상에서 신동(新洞) 일대를 내려다보면 이곳은 매화꽃의 암술 부분에 해당한다. 암술을 중심으로 점점히 박히듯 늘어선 마을의 집들이 마치 암술을 둘러싼 수술처럼 펼쳐져 있다.
소조산인 소학산에서 동남으로 뻗어내려 마을을 빙 둘러싼 황학산, 백운산, 명봉산 줄기는 웃갓마을의 외청룡이 되고, 남서로 갈라져 나온 자봉산, 장원봉은 서쪽을 감싸 안아 외백호를 이룬다. 그 안쪽으로 올망졸망 온갖 형상으로 마을의 좌우를 감싸는 내청룡과 내백호 줄기가 완벽한 장풍을 이루어 마을을 명당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안팎 용호의 봉우리들이 매화꽃잎처럼 둘러선 가운데 암술의 끝자락에 놓인 웃갓마을은 포근히 감싸인 속에서 한 송이 매화꽃이 되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소학산에서 발원되어 마을 안쪽으로 흘러가는 명당수는 웃갓마을을 감싸고 도는 금성수가 되어 대구에서 내려오는 금호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빠져 나간다. 신동마을의 기름진 들녘은 무한한 곡창지대가 되어 이 마을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는 부(富)를 이루어 낸다. 이처럼 안온하고 생리(生利)가 풍부한 웃갓마을은 자연이 만들어 준 명당길지인 것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였다. 좋은 산천의 기운이 서린 곳에는 뛰어난 인물이 나기 마련이다. 석담집을 편찬하였고 이조참판을 지낸 석담 이윤우 선생을 배향하고,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전 총리의 선친으로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이충영씨가 웃갓마을 출신이며, 그 밖에 해방이후 3대 법무장관을 지낸 이우익씨, 중성미립자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권위자인 이용영씨 등을 비롯하여 수십명의 교수와 판검사, 그리고 장관 등을 배출시킨 명 고을이 웃갓마을이다.
웃갓마을 안에 들어서면 오래된 고가들이 많이 있다. 많은 인물을 배출시킨 마을다운 느낌이 전해온다. 마을의 입구인 안산자락 에는 진주 강씨의 고택과 벽진 이씨의 재실이 있다. 진주 강씨의 고택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고 있으며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뒤 쪽으로 돌아 언덕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벽진이씨의 재실인 오도재가 있다. 마침 나물을 캐고 있는 아낙에게 물으니 지금도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다.
“웃갓마을에는 크고 오래된 집들이 많아요. 마을 안에 들어가면 거의가 다 세도 있는 양반들 후손인 것이지요. 구경할 곳도 많으니 한 번 가 보시오.”
아낙은 마치 웃갓마을을 자랑하듯 묻지 않은 말까지 하며 필자에게 친절히 설명 해 준다.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증거이다.
진주 강씨 고택과 벽진 이씨 재실 사이에 있는 언덕 위에는 입석(立石, 선돌)이 하나 서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된 국내 최대의 입석이다. 이 입석은 선사시대(先史時代)에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형태로 지역간의 경계(境界)를 나타내거나 신앙의 대상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높이 4.5m, 밑부분 둘레 약 2m이며, 이 입석의 주위를 농토로 개간할 때 무문토기(無文土器), 석기(石器)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입석의 아랫부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후세에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보며 세월이 흐르면서 입석이 민중불교의 미륵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마을의 진산인 발암산 뒤쪽에는 바래덤이라고 하는 높은 직벽의 벼랑이 있다. 그 절벽 밑에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곳을 낙화담(落花潭)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마을 여인들이 왜적을 피하여 이곳 발암산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왜병들에게 발각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하여 바래덤 절벽을 낙화암(洛花岩)이라 하고 그 아래의 소를 낙화담(落花潭)이라 부른다.
1965년에 저수지를 둑으로 막은 이후 소는 없어지고 소의 부근에 취수탑이 서 있고 그 앞에 ‘지천청년협의회’에서 세운 낙화담 기념비가 있다.
낙화담의 전설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칠곡군청 홈페이지의 ‘내 고장 전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칠곡군 지천면 신동 발암산에는 낙화암이라는 바위 절벽이 있다. 속칭 '바리덤'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전에는 이 동네에 강씨라는 집안이 살았었다. 부자였고 높은 벼슬을 해 오인석 강씨라 했다. 이들 오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인양을 탔으며 집안에 바위가 다섯이나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 때 광주 이씨 조상중에 석 담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당시 24세의 나이로 진사를 지내셨다. 마침 대구 방면으로 여행을 나섰다가 오는 길에 왜병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 동네로 들어오니 강씨네 집 여자종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종에게 빨리 집으로 가서 샌님들에게 왜병이 쳐들어온다고 고하라 했다. 그래서 그 여자종이 빨래하는 것을 멈추고 집에 가서 이를 알리자 노인들은 마침 바둑을 두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 이 진사 같으신 분도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가?" 하면서 바둑을 계속 두려하자 그 중 한 노인이 " 이 진사가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젊은이를 하나 불러 동구 밖으로 가 직접 확인하게 하니 과연 왜병이 떼를 지어 쳐들어 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변을 당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모두 바리덤 발암산으로 올라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곳으로 피난을 했으므로 얼마 후 왜병이 이 동네로 들어 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텅 비고 난 후였다.
발암에 올라간 동민들은 왜병을 향해 돌을 굴리고 함성을 지르자 그곳으로 피난을 간 것을 알아차린 왜병들은 발암을 향해 올라가려 했으나 산 아래 깊은 강과 돌이 굴러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히 지세를 살피니 신동 옆으로 비스듬한 경사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올랐다. 왜병에게 포위된 동민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왜병의 손에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자면서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때 대부분의 죽은 자가 부녀자였으므로 이 바위 절벽을 낙화암이라 했다.
이때 강씨 집안도 전멸하고 석담선생은 골짜기로 피난을 했다가 다시 팔공산으로 피난, 공부를 많이 해 학문과 벼슬을 겸비했으며 이 낙화암을 추모하고 이 낙화암아래 사양서원을 세워 그 덕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낙화담의 기념비에는 약간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본문의 내용 중에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쫓겨 일촌사 부녀(一村士 婦女)가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발암에 올라 꽃잎처럼 저 절벽에서 투신한 그 소(沼)를 낙화담(落花潭)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마을의 양반집 부인네 한 사람이(한 시골 선비의 부인이) 왜적의 능욕을 피하여 발암산 절벽에서 투신한 것으로 보여진다.
낙화담은 현재 지천지(枝川池)라 불려지며 여름이면 수상스키장의 놀이터로 이용되고 있다.
신동의 마을 한 가운데에는 한강 정구 선생과 석담 이윤우선생, 그리고 송암 이원경 선생을 배향한 사양서당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1985. 8. 5)로 지정된 서당으로 조선 효종2년(1651)에 한강 정구(寒崗 鄭逑)(1543~1620)선생이 일생동안 학업을 닦았던 칠곡면 사수동(현 대구광역시 편입)에 향인들이 건립하여 한강선생을 주벽으로 석담 이윤우선생을 배향하였던 것을 숙종20년(1694)에 이곳으로 이건(移建)하면서 송암 이원경선생도 함께 배향하였다. 그 당시에는 묘우(廟宇)와 강당(講堂), 폄우재(貶遇齋), 정완재(訂頑齋), 봉하문(鳳下門), 양현청주고(養賢廳廚庫)등이 있었으나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강당(講堂)인 경회당(景晦堂)만 남아있다.
이윤우(李潤雨)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으로, 희복(熙復)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고,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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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남의 삼촌 웃간 마을 한번 가고 싶네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