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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산소를 찾으며
우리 형제자매를 낳으시고 바르게 키워주신 우리 부모님 은덕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줄 우리는 느끼고 있다. 평생 좋은 옷 한 벌, 맛있는 음식 한 번 제대로 챙기지 않으시고 어려운 때 출생하셔서 자식들 귀염도 그리 받지 못하시고 가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일생을 바라보며 우리 형제자매, 자손들은 늘 경건하게 목상하며, 유업과 유지를 받들어 바르게 살려고 한다.
1974년, 광주시에서는 북구 망월동에 시립공원 묘지를 조성하고 일반 시민에게 분양했다.
시골에는 악산 반 정(약 1,500평)이 있어 아버님은 고향에 갈 때마다, 이 자리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하셨다. 그러나 그 곳은 묘지가 아니었다. 악산에다가 남의 폐혈이었다. 나는 겉으로는 그런 척 하였으나, 아버님을 그곳에 모실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1년에 몇 번이나 찾아 뵐 수 있을까 해서다.
광주시의 공고가 있자 나는 서슴없이 제1묘역 남향인 중앙에 2기를 신청하였다. 불효였다. 아버님 연세 76세시니 성급한 묘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나와 아내만 아는 비밀이었다. 나중에는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 묵시적으로 승낙해 주셨다. 이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안심이 되었다. 설혹 지금 돌아가시더라도 모실 곳이 마련되었으니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번은 아버님께서 친구의 장례를 망월동에서 치뤘다시며, 천하에 못된 곳이더라, 묏봉이 그게 뭐냐. 쬐그마 하고 절할 곳도 없더라.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도지사나 시장도 거기에 묻혀있고, 광주에 이름있는 명사들도 그 쪽에 묻혀있답니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 뵐 수 있어서 좋고, 봉분이 많으니 저승에서 많은 친구를 만나서 좋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없어서 좋고, 무등산을 바라보고 좌청룡 우백호하니 좋은 곳이랍니다.’하고 말씀 드렸다. 절대로 그 곳에 묘소를 준비했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다.
묘지 분양 후 17년 후에 아버님을 그 곳에 묻히셨다. 아버님을 모실 때에는 이미 망월동은 초만원 상태였다. 그 때 분양 받지 않았더라면 북망산 어느 쪽에 모셔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친족들은 그런대로 칭찬해 주셨다. 내 친구들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미리 마련한 산소가 여러분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님 돌아가신 몇 년 후 어머님을 아버님 산소에 모시고 갔다. 둘러 보시더니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당신 자리에 앉아 보시더니 ‘여기가 내 자리냐’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음반 긍정반 얼버무리고 말았다.
1998년 음력 4월 30일 어머님도 천수를 누리시고 세상을 뜨셨다(94세). 그리고 아버님 곁에 나란히 누우셨다.
부모님은 늦게 혼인하셨지만 68년을 동반 해로 하시었다. 회혼을 8년이나 넘기신 정부부셨다. 때로는 의견 충돌도 있으셨으나 의기 투합하여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 가계를 일으키셨고, 슬하에 4남매를 두시더니 한 세기에 걸쳐 90명의 자손을 거느리셨다. 부모님에게는 오직 자식이요, 조상만이 같이 하셨다. 어렸을 적 바른 길을 인도해 주신 고모부와 고모님께 늘 감사하고 계셨다. 명절이나, 생일 때면 자식 잘되라고 주문을 외우시는 어머님,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농사 일에 전념하신 부모님, 세상에 나가셔서 온갖 풍상을 다 겪어보신 부모님, 친척이라면 내 곁으로 끌어들여 문씨일가를 키워오신 부모님, 자식의 일이라면 인고의 고통을 참아내셨던 부모님….
우리 내외는 틈나는 대로 부모님 산소를 찾는다. 좋은 일이 있으면 설명해 드리고, 궂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인도를 받으려고 찾기도 한다. 먼 길을 떠날 때나 다녀왔을 때도 부모님을 뵙는다. 나들이 갔다가 시간이 있는 대로 산소를 경유하여 집에 오곤 한다. 늘 곁에 모시는 기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부모님은 응답해 주신다. ‘그래 현명하게 처리해라. 그것 참 좋은 일이다. 마음 고생이 되겠구나, 조금만 참아 보아라……’
어머님 쓰시던 방에 생전의 부모님 영졍을 모셨다. 생전에 뵙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편안하고, 대견해 하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계신다. 어린 막내가 이제 가정을 꾸리고, 또 그 자식들을 보살피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족간에 화합하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 부끄러워 외면하려 해도 부모님은 또렷이 우리 모습을 지켜 보신다.(2001)
부모님을 그리며
여순 반란 사건 때의 기억
해방 후 이 지역에는 좌익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48년 제주 4.3 민중항쟁 발발 이후 10월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유격대는 재차 공세를 강화하면서 각처에서 토벌대를 위협했으며, 이에 대해 이승만 정권은 계속적인 병력투입으로 그 위협을 극복하려 했다. 이런 와중에서, 국방경비대 사령부로부터 제14연대에 10월 19일 오후 8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제주도 출동명령은 제 14연대 내 좌익계 사병들에게 동족상잔과 반란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순 지역을 평정한 정부는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내린 후 가장 먼저 봉기군과 동조자를 철저하게 색출, 처벌하는 작업에 나섰다. 민간인 참여자의 색출작업이 진행되었고, 그것은 보복 테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귀결되었다.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 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 부모님은 갖은 고초를 당하신 것이다. 반란군은 낮에는 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밤에는 인가로 내려와 식량과 가축을 도살하고, 경찰은 낮에는 마을에 들어와 상황을 점검하고 밤에는 철수하는 형편이었다. 이러니 반란군에게 식량을 내주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 그 사이에서 죽는 것은 마을 사람뿐이었다. 부모님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시게 되었고, 초지일관 좌익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어서야 1 주일 만에 석방되셨다. 그 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다. 부모님은 보성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시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셨고, 그 후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 때 어머님은 어린 나의 양육을 위해 천만 무사 하시기를 한결같이 기도하셨다고 한다. 형님 누나들과 함께 웅치 지서에 면회를 갔을 때, 경찰도 어린 나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였다고 한다.
조성북국민학교 근무와 어머님의 사랑
나의 초임지는 보성군 조성북 국민학교.
5,16혁명이 있은 해 1961년 8월 7일 발령을 받았다. 내 생일이 1943년 7월 12일이라 만18가 못되어 발령을 내지 않았다. 성적으로 보면 1차 발령이 나야 했다. 7월 31일자로 자격증이 나왔고 바로 일주일 후 발령이 된 것이다. 물론 발령 순위는 1위였다. 보성 교육감(지금의 교육장)님은 나의 국민학교 4학년 시절 교감이신 조용근 선생님이셨다. 발령 대기 중에 모교인 웅치 국민학교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문복래 교장 선생님이 말씀을 드려 보성 관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학교에 배치했다고 한다.
착임 신고를 마치고 2학기 개학은 1학년 4반에서 시작되었다. 학부형들은 애기선생이 왔다고 좋아했다. 하숙을 해 보았으나 시골이라 마땅하지 않았다. 사회성도 부족하여 앞만 보고 걸으니 선생님들도 친밀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 선생님들의 격려 속에 점차 교직생활의 자리가 넓어져 갔다, 이런 저런 연구회, 수업공개, 향토학교의 건설, 농촌 계도활동, 야학개설, 마을 청년들과의 친교 등 조금씩 폭이 넓어져 갔다.
이 때 어머님은 형수씨에게 살림을 맡기시고 내 곁으로 오셨다. 방을 얻어서 어머님이 손수 식사를 제공하신 것이다. 오랜만에 매인 가정에서 벗어나 막내 아들 곁에서 밥해주고, 옆집 사람들과 사람 사는 얘기도 하시고, 조성으로 이사 오신 형제 같이 지내셨던 김봉율 아저씨 댁도 방문하고 하여 새로운 인생을 맛보고 계셨다.
그러나 아버님이 문제였다. 아버님 혼자서 며느리 시중을 받고 계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강산으로 시집간 둘째 누님과 같이 조성에 오셨다. 그래도 아버님이 너무 안되었다. 하는 수 없이 1년 반의 조성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학교인 웅치 국민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옛날로 돌아갔고, 나는 형수님 신세를 지면서 편히 출근할 수 있었다.
웅치국민학교 근무시절 맞은 어머님 회갑
웅치 국민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지방 교생실습을 한데다가 발령 전 봉사했던 곳이다. 박형문 교장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무조건 6학년을 맡기셨다.(1963) 그 후 줄곧 6학년을 맡아 나의 교직생활 중 가장 많은 정열을 쏟았다.
1965년은 어머님 회갑이었다. 모처럼 아들이 교사가 되었고, 그것도 고향에서 봉사하면서 고생하신 어머님 회갑만큼은 좀 성대하게 맞이하려고 작정하였다. 초대장도 보냈다. 음식도 그럴듯하게 장만하였다. 사진사도 불러 회갑상을 놓고 우리 친족이 둘러섰다. 풍악도 울리고, 술꾼들에게 온종일 술시중도 했다. 아버님도 친구분들을 불러 춤을 추시며 즐거워 하셨다. 그야말로 모처럼 온 동네 잔치가 되어 어머님,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 저녁에는 웅치 국민학교 동료 선생님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김금중 선생님은 덕담까지 하셨다. 좋은 아들을 두었다느니, 장차 훌륭한 교육자가 될 거라느니, 국가를 위하여 일할 거라느니… 그 순간 어머님은 역정을 내셨다. 국가를 위해 죽으면 어쩔거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국가에 헌신한다는 말을 죽음으로 오해하셨던 같다. 나는 어머니에게 더 잘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니 나쁜 말이 아니라고 설명해 드렸다.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혹시나 잃어버리면 어쩔까 하는 순박한 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지…
결혼과 분가
형님을 비롯하여 큰 누님도 열 아홉에 결혼을 하셨고, 작은 누님도 스물 하나에 결혼하셨다. 내 나이 스물 셋인데도 자꾸 결혼만 하라는 것이다. 따로 사귄 사람도 없고 아직은 자립하지도 못한 처지이며 군대문제도 해결이 안된 상태여서 말씀도 못 꺼내시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주 늙어가는 부모를 생각하라고 하시니, 별다른 계획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려야 했다.
큰 매형과 함께 선을 보러 갔다(지금의 아내). 단정한 시골 처녀였다. 집안도 내력이 있고 가풍이 잘 다듬어진 양반 댁이었다. 장차 장모님 될 분은 이미 학교 인근에서 만나 뵌 터라, 이날은 내가 결정을 할 차례였다. 단둘이 만날 기회를 주셨다. 본래 나는 사람을 녹이는 기술이 없고 그 쪽도 부모님 슬하에서 순진하게 자란 터라 내내 말이 없었다. 다만 눈빛으로 말을 건냈을 뿐이다. 첫인상은 단정하고, 건강하고, 소박하고, 맘 고운 처녀로 보였다. 나의 예견은 빗나가지 않아서 결혼한 지금도 아내의 고운 마음에 감사하고 있다.
결혼을 하기 전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분가했다. 1966년으로 기억된다. 내가 출생하여 23년간 몸을 의지한 집을 떠나오자니 감회가 깊었다. 짐을 싣고 떠나던 날 아버님도 어머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사실 아버님 26세에 이 집을 사서 입주 하신지 어언 45년을 드나드신 정든 집. 형님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기쁨도 있으셨겠지만 손때 묻은 가구며, 집안 가득 심어진 실과 나무며, 드나들기 편하게 만드신 입구 도로, 그리고 건너다 보이는 안산과 뒤 형제봉. 어느 하나 정들지 않은 게 없으셨기에 발길이 떨어지기 어려우셨으리라.
아버님 형제는 단 둘. 할아버님 형제는 세분인데 큰할아버님이 이 두 분의 아버님이시다. 둘째 할아버님(종조부님)은 손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버님이 둘째 할아버님을 이으셨다. 불행히도 백부님은 아드님을 두셨으나 일찍 날려 버리고 딸만 넷을 두셨다.백부님 손이 끊겨 있어, 형님이 양자를 서신 것이다. 결국 아버님 사신 터를 큰댁에 넘겨드리고 나와 부모님이 예동마을(보성군 보성읍 옥암리)로 분가한 것이다.
다시 어머님의 집안 일은 시작되고(당시 62세) 결혼 압력은 높아졌다.
손자를 애지중지하시던 부모님
결혼(1967.12.27) 이듬 해 첫딸을 낳았다(희숙). 큰댁 조카들도 부모님이 죄다 길렀다. 우리 아이도 부모님 몫이었다. 유달리 자식 손자를 사랑하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이신지라 딸애는 곱게 곱게 자라났다.
둘째 원태, 셋째 희경, 넷째 인태는 모두 광주에서 태어났다.(1969년 광주로 전근이 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광주로 이거함) 할아버지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아이들도 탈없이 자랐다.
아들 놈들은 어렸을 적 장난이 아주 심했다. 할아버지 등 뒤로 목 위로, 무릎 위로 기어 다니고 딩굴고, 소리치고 야산법석을 피워도 마냥 즐거워 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루는 이모할머님 사위이신 아버님 동서 한 분이 오셨다. 손주놈들이 하도 성가시게 구니까 크게 나무래셨다고 한다. 그러자 두 동서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왜 남의 손자를 나무래느냐는 것이며, 그렇게 버릇을 들이면 못쓴다는 것이었다.
그런 장난꾸러기들이 지금은 말도 잘 하지 않는 얌전이가 되었으니, 어렸을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유아교육학을 강의 하고 있는 나도 모른다…
노년기 아버님의 기백
며느리(나의 아내)는 아버님 생전을 회상하면서 아버님의 기백과 너그러움을 이야기 하곤 한다.
아버님은 남에게 지지 않으시려는 기백이 넘치신 분이시다. 무엇이든 시도해 보시는 분이시다. 정의롭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박살 내는 성미셨다. 내가 알기로도 왕초에서 살 때, 밥상이 몇 번 날아간 줄 모른다. 성질이 나시면 죄다 던져 버리신다. 그리고는 곧 화를 푸시면서도, 순간을 참지 못하는 성미이시다. 그런 급성과 기백이 자수성가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미적지근한 일은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으신다.
어머님도 많은 수난을 당하셨다고 한다. 하시는 일에 조금이라도 동조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살림을 망가뜨리든지, 집을 나가시든지. 그러나 절대로 아내를 구타하지는 않으셨다. 이것이 아버님의 철칙이다. 모자란 놈이 마누라 때리는 놈이라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유교 사상이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까닭이다. 백홍인 유학자의 슬하에서 근 20년을 지내시다 보니 자연히 몸에 벤 사상이었다.
아버님은 노인당 출입을 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남성 노인당(광주,북구 우산동)에 나다니셨고, 다음엔 지면이 많은 분들을 만나시려고 웃 마을 풍향 노인당을 출입하셨고, 연세가 높아지시면서 작고하실 때까지, 효동노인당(우리집 바로 옆)을 애용하셨다.
노인당에는 놀잇감이라곤 화투짝 만지기, 장기두기, 음식 나누기 등이 주였다. 풍향 노인당에 다니실 때의 일이다. 나는 그 때, 지금 근무 중인 동강대학(구명:동신전문대학)에 재직 중인 때(1986년이라고 기억 됨)였다. 아내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아버님이 파출소에 연행되셨다는 것이다(당시 88세). 알고 보니 연세가 낮은 한 분이 사사건건 놀이를 방해하고 심지어는 반항하시므로 가만히 보고 계시다가 순간적으로 콧대 언저리를 쥐어박으셨다는 것이다.
피해 노인은 피투성이가 되고 콧대가 부러졌다. 합의하지 않으면 구속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사정 사정하여 파출소에서는 풀려 나셨으나, 노인 집에 가서 사죄를 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우리는 노인 댁에 갔다. 노인은 입원 중이었고, 아들이라는 분은 모 교육청 사무 직원이었다. 꽤 뻣뻣하게 나왔다. 노인도(우리 아버님) 고생 좀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면서 아들을 설득하였다. ‘88세 노인 구속’이라면 고소자도 비난 받을 것이며, 결코 아버님의 가해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니니 이해해 달라, 완치토록 최선을 다하고 그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겠노라. 이런 일을 계기로 우리는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친해지면 형제처럼 지낼 수도 있다. 노인 아버님을 모시는 자식으로서, 악의 없이 만난 우리 사이가 수원지간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등등 갖은 회유를 다한 끝에 서로 양해가 이루어졌다.
91세 되시던 해에는 전립선 비대로 소변을 잘 못 보시게 되었다. 한 밤중에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잦아졌고 급기야는 배뇨가 되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시고 방광을 움켜쥐고 계신 때가 많아지셨다. 전남대 병원에서는 요도에 관을 삽입하여 오줌이 흘러나오게 하는 방법과 수술을 통하여 비대한 전립선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연세가 90을 넘으신 분 수술을 행한 예가 거의 없으니 관 삽입술을 권장했다. 그러나 아버님 결단은 대단하셨다. 죽었으면 죽었지 관을 매달고 살고 싶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의사들도 혀를 내두르며, 한 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수술은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회복실에서 나오실 때까지 우리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혹시나 불행이 오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잘 이겨내셨다. 수술 결과 요도 결석을 두 줌 정도 받아 내었다. 돌처럼 단단했다. 방광에 꽉찬 결석도 또한 오줌길을 막았고 전립선 역시 길을 막았던 것이다. 평소에 물을 적게 마시고 짠 음식을 좋아하신 아버님이시라 결석이 더 심했을 것이었다.
한달 여 병실에서의 간호가 계속되었다. 어머님도 한번 와 보시고는 무서운 양반이라고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우리 내외는 번갈아 가며 간호를 하였고 거의 매일 친족들의 문안을 받았다. 보통의 결단이라고 할 수 없는 대결단으로 결국 배뇨에 이상 없이 여생을 보내셨다.
이렇듯 강인한 의지와 결단이 있으신 한 편, 연세가 드실수록 평안하고 따뜻한 너그러움을 보이셨다. 무슨 일이든 아들 며느리가 요청하면 수락하셨다. 보성 이모님 댁을 방문 하자면 그렇게 하자고 하셨고, 외식이라도 하자시면 그러자고 나서 주셨다. 옷 선택도 까다로우신 분이었으나 며느리가 드린 옷은 아무 말씀 없이 입으셨고, 식사 타박도 없으셨다. 아이들의 놀이에도 관여하지 않으셨다. 가끔 막내 인태와 장기를 두시다가 물리느니 안 되느니 하시며 싸우시는 게 고작이다.
아버님은 노름을 모르신 분이다. 그런데 노년에 드시면서 화투 짝 맞추는 데 흥미를 가지셨다. 방에 앉아 계시는 동안 십중팔구 짝 맞추는 놀이에 열중하셨다. 그런 결과였을까. 아버님은 임종을 맞는 순간까지도 치매 증세가 전혀 없으셨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작고하시기 전 해에도 시제를 모시러 험난한 산을 올라 가셨다. 숨은 좀 가쁘게 쉬셨지만 결코 젊은 사람의 부축을 받지도 않으셨다. 대단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우리 아버님이시다.
어머님과 장미꽃
아버님께서 타계 하신지 1년 후, 장녀 희숙이가 결혼하였다. 그 때 우리는 삼호가든 아파트(광주, 북구 동림동)에서 살고 있었다. 막내가 광주진흥고등학교에 배정이 되어 매일 등하교를 시켜 주어야 할 판이라 근방에 아파트를 임대하여 좀 편리하게 지내고 싶었다. 물론 우리 집은 임대해 주었다.
우리 집으로 말하면 이사하기 20년 전 어렵사리 좁은 땅 한필지를 구하여 우리 식구만 살 3간짜리 작은 집을 지었다. 소위, 반 양옥집인데 해가 갈수록 불편이 늘었다. 처음에는 상하방 세까지 내고 살았다. 우리는 상하방과 큰방이 있으면 족했다.
한 때는 큰 누나가 어렵게 되어 우리 집에 잠깐 기거하셨는데 식구가 무려 10명. 상하방에서 노시모님 모시고 생질들과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셨다.매형은 도청에 다니셨지만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으셨다. 다행하도 우리 아이들과 생질들이 사이좋게 지냈고, 어린 생질들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어 다른 모르는 집 셋방살이보다는 설음은 적으셨으리라. 게다가 사부인께서는 악명 높은 시어머님 그대로였다. 사돈네 집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밤새 악을 쓰다가 목이 쉬어 저절로 조용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누님의 우리 집 접방살이는 악몽 그대로였다. 이제 누님도 45평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를 소지하고, 손자들도 잘 자라고 있으니 그만한 행복과 성공을 안은 가정이 드물 것이다.
셋집으로 내준 임대료에 약간 돈을 보태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새 아파트에 모든 것이 신식으로 꾸며져 우리에겐 과분할 정도였다. 어머님은 화장실 가까운 현관 앞쪽 방을 차지하셨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신 통에 그 방 벽지는 노랗게 물들고 말았다. 우리는 수시로 환기를 해 드리고 냄새가 가시도록 했으나, 문을 닫고 줄담배를 피워대시니, 벽지 뿐만 아니라 반닫이 농이며, 화장 거울이며 TV까지도 색깔이 누렇게 변해 버렸다.
아파트 8층이다 보니 어머님의 거동이 문제였다. 문을 여닫는 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일, 우리 아파트를 찾아 올라오는 일 등을 모두 익혀야 했다. 연세가 87세시니 그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문제였다. 어머님은 아버님처럼 맑은 정신력을 갖고 있지 않으셨다. 가끔 엉뚱한 일을 벌이곤 하셨는데, 나물을 캐 오신다, 화분을 만드신다 하여 아파트를 많이 어질고 계셨다.
하루는 아파트 저 편 산 언덕에 핀 꽃을 발견하셨다. 어떻게 그 언덕을 오르셨는지 모른다. 아래 층 아낙네의 말을 들으니 올라 가시가다는 구르고 다시 일어나 기어 오르시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가지째 꺾어 우리 집 베란다 화분에 꽂으셨다. 그 꽃이 살리 없지만 꽂아 놓으면 뿌리를 내려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애써 꺾어 오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2층에 사는 노인네(교회 열심히 다니는 할멈)가 그 사실을 알고서 우리 집까지 ?아 올라왔다는 것이다.다짜고짜 온 집을 뒤지고는 꽃이 보이지 않자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와 악담을 퍼 부었다고 한다. 그 눈치를 아신 어머님은 이미 그 꽃을 감추고 계셨다. 아무튼 기분이 몹시 나빴다.
우리 부부는 산 중턱에 심었다는 장미꽃을 복원해 주기 위하여 화원을 찾아갔다. 두 그루를 사서 제자리에 심었다 그리고는 그 악랄한 할멈 집 문을 두드렸다. 아들 며느리가 나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할멈의 행위에 대하여 서운함을 전했다. 아들 내외는 되래 미안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할멈 왈 ‘우리 아들이 볼려고 심은 꽃인디, 늙은이가 그럴 수가 있느냐?’며 달려 들었다는 것이다. ‘극노인이 설령 꽃을 꺾었다 하더라도 너무하지 않느냐. 만약 꺾었더라도 당신 꽃인지 모르고 꺾은 것 아니냐. 우리 어머니는 그런 꽃을 꺾으실 분이 아니다.’ 아내는 변명하였지만 할멈은 악만 쓰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야박한 인심을 가진 곳이 공통 주택인 줄 몰랐다. 하느님을 섬기고 만인을 사랑하는 신도가 아니라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 인태 졸업이 되자 우리는 그 곳을 떠나버렸다.
1997년 우리는 옛집을 헐고 새로 개축하였다. 주차장도 만들고 2층도 지어서 내 서재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또한 노령의 어머님을 아파트에서 보살펴 드리기엔 너무 어려웠다. 화장실을 넓게 만들고 그 옆 방에 어머님을 모시고 화장실 이쪽에 우리 부부가 거처하면 좋을 것 같아서 아래 층은 방 2, 화장실, 그리고 주방만 만들었다.
본래의 집으로 돌아왔건만 어머님은 옛 그 집터인줄 모르시고 세상을 뜨셨다. 도대체 모든 것이 새로웠고, 옛 날 같지 않게 문들이 잠겨 있기 때문에 문을 열고 사시는 습성을 가지신 어머님에게는 매우 불편하셨던 같다. ‘이 집이 우리 집이여?’ 하고 자꾸 물으셨다. 그렇다고 말씀 드려도 곧이 듣지 않으셨다. ‘묘하기는 묘하다, 나가 본께 소금집도 이사 왔더라, 점방 집도 이사 왔어야…’ 이런 식이었다. 옛날 사시던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이셨지만 방안에 놓인 꽃 한 송이는 늘 사랑스럽게 간직하시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그것은 어머니 날 가슴에 꽂아 드린 빨간 카네이션 조화였다.
(2001. 음력 4.13 부모님 기일에 문기정 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