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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적 오해가 있는 성경구절 | | | 양태론 |
2011.04.27 11:05 |
1. 양태론적 오해가 있는 성경구절
간단히 말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인격이 나타나는 세 양태로 보는 것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셨다고 하며, 십자가에서 죽고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론은 숱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갖고 온다.
즉 동시에 삼위(三位) 혹은 이위(二位)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없으며, 죽을 수 없는 불사(不死)의 성부하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는 주장이라고 하여 초대교회부터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려졌던 이단적인 주장이다. 이 양태론은 초대교회부터 줄곧 이단적인 주장이었고, 단 한번도 정통신학적인 견해로 인정된 적이 없었으며, 그러나 시대마다 양태론자들은 항상 존재하여 왔다.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성부가 성자가 아니고, 성자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이 성부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 자체가 본체(본질)은 하나이지만, 위격(인격)은 셋이라고 정의하는 용어를 가르킨다. 즉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기도를 하며, 성자도 성령을 파송하신다. 삼위는 모두 하나님이지만, 인격적으로 삼위는 구별되며, 서로 상호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 성경적인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들은 몇개의 성경구절을 양태론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성경구절들이 양태론을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요한복음8장24절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요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공동번역(개정)]요 8: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표준새번역(개정)]요 8: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그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요 8:24 그래서 내가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너희가 정말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KJV]요 8:24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NIV]요 8: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이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본문을 보면 "I am he" 에서 "he" 라는 인칭대명사가 없다. 그래서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he 라는 단어를 괄호 안에 넣었다.
-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NIV 영어성경은 he 라는 인칭대명사를 빼고, I am the one 이라고 번역하였다.
-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헬라어 성경원문을 보면, he 라는 인칭대명사는 없다.
"피스티오(to believe) 호티(that) 에고(I) 에이미(am)"라고 되어 있다. 항상 이단들은 평범한 성경본문에는 관심이 없으며, 난제라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교리에 맞추어 채택한다.
그렇다면 성경본문은 어떻게 해석하여야만 할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묻는다. “하나님이 누구라고 유대백성들에게 설명해야 되는가” 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다. I am Who I am (that I am) 즉 예수님이 자신을 I am 이라고 한 것은 오래 전부터 선재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예수님은 계셨다고 말씀하시는데(요8:58) 그 구절이 바로 요8:58의 “I am” 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하시니”(요8:58)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는 단어가 곧 I am 이다. 즉 I am he 라는 번역에서 he 는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부터 선재하셨던 메시야, 성경에서 예언된 그를 가르킨다.
요8:24 바로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요8:26-27)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은 "나를 보내신 이가 아버지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를 보내신 이가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으며, 즉 성경에서 예언된 아버지가 보내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현대인의성경] 그래서 내가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너희가 정말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 사도행전20:28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성부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고 해석을 하게 되면 양태론적인 해석으로 오해되고 만다.
그러나 딤전6:15은 하나님은 유일하게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면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가? 실제로 양태론자들이 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양태론을 증거한다.
그러나 다른 번역성경을 보자.
[공동번역(개정)] 여러분은 늘 자신을 살피며 성령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을 잘 돌보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당신의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개정)]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잘 살피십시오. 또 여러분은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서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이디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의 뜻은 “자기에 관한, 자기에 속한, 자신에게 관계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his own” 이라고 번역하였다.
[KJV] Take heed therefore unto yourselves, and to all the flock, over the which the Holy Ghost hath made you overseers, to feed the church of God, which he hath purchased with his own blood.
[NIV] Keep watch over yourselves and all the flock of which the Holy Spirit has made you overseers. 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which he bought with his own blood.
즉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속한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해석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 곧 “자기에게 속한, 자기와 관계된” 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혈육으로 사신 교회”라고 해석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며, 그래서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그래서 “아들의 피”라고 직역을 한 것이다.
(3) 고린도전서 15:45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프쉬게)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프뉴마)이 되었나니
특히 지방교회가 이 구절을 통하여 예수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하므로서 성령이 곧 예수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지방교회의 주장처럼 "마지막 아담이 과정을 거쳐 성령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구절이 결코 아니다.
앞뒤의 전제적인 문맥을 보면 "아담과 예수"를 대비시키는 그러한 대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본문은 “아담은 무엇이 되고, 예수는 무엇이 되고....”이러한 변화과정을 말하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본문을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면,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고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창세기2장7절을 보면 아담은 생령(네페쉬 하야=생명체, Living Being)가 된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첫 부활의 열매가 되셨다. 성경본문의 앞부분을 살펴 보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5)
본문은 부활을 말하고 있다. 즉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문은 아담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생기를 불어넣음을 받아 생명체가 된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신령한 영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즉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은 살려주는 영적존재, 즉 신령한 부활의 신체가 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프뉴마"라는 단어가 언제나 "성령"이란 뜻으로 해석되어지는가? 이것이 아마 관점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뉴마”는 언제나 성령으로 해석되어지지 않음을 알려 드리며, 본문에서 볼 때에는 오히려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어린 요한이 "심령"이 강하여졌다는 구절(눅1:80)에서 "심령"은 프뉴마인데, 이것은 당연히 성령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어린 요한이 성령이 강하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심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눅24:37과 39절에서도 프뉴마는 단순한 육체와 반대되는 "영"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렇다면 고후와 고전을 기록한 바울의 경우에는 어떻게 사용되어지는 지를 보기로 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이 로마서에서 "성령"은 "프뉴마"이지만 우리 "영"도 프뉴마인 것이다. 즉 프뉴마가 프뉴마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영"을 성령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갈6:18)
이 심령도 프뉴마이다..... 즉 프뉴마가 언제나 성령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가 영이시라는 개념은 반드시 주가 성령이 되셨다고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신령한 몸을 갖고 계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적존재라는 개념으로서 "프뉴마"라고 해석하며, 그 분이 구원주가 되심을 "살려주는 영적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공동번역」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또 현대인의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라고 쓰여 있으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자.... 모두 아담은 생명체적인 개념, 마지막 아담 예수는 살려주는(구원을 해주시는) 영적존재라는 개념으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spirit 란 단어를 모두 소문자로 번역하였다.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was mad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was made] a quickening spirit.(KJV 영어성경)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NIV 영어성경)
번역본은 국어이든 영어이든, 모두 성령이 아니라, 영으로 번역하였다.
지방교회와 양태론자들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이 성경적인 해석인가? 성경적인 증거를 몇 개 더 들어보자.
마5:3의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심령도 "프뉴마"이다. 또 육신과 대조적인 영적인 개념으로 분명히 사용된 구절에서도 "프뉴마"가 사용되어지는데, 마26:41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에서의 "마음"도 프뉴마이며, 요4:23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신령도 "프뉴마"이다.
지방교회 사람들은 놀라지 말기 바란다..... 마8:16과 막5:13등 몇구절에서는 "귀신"이 "프뉴마"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지방교회는 그 단어를 성령으로 해석하지 바란다. 그러한 해석은 오직 프뉴마가 성령이 아니라, "영적존재"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창세기 2장7절을 참고하여 보자. 사람이 생령(히:네페쉬, 헬:프쉬게)이 되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영적존재가 아니라 생명체(Living Being)이다. 이 네페쉬라는 단어는 창세기1장20, 21. 24절에서 짐승에 해당하는 단어도 "네페쉬=생물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장19절. 9장4절의 "생명"도 "네페쉬"이다. 즉 아담은 "생명적 존재"....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살려주는 "영적존재-신령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갑자기 예수가 성령이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인정받기가 매우 곤란한 견해가 된다. 그러한 주장은 자신들의 양태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구절을 짜맞추는 식이 될 뿐이다. 성경본문의 다음 구절도 보자. 모두 부활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님이 첫 부활의 열매이시며 그 부활의 몸이 신령한 몸이신 것은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6-49)
아담은 누구인가? 흙에 속한 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흙에 속한 형상을 갖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부활시에 하늘에 속한 자의 몸, 신령한 몸을 갖게 될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해석되어진다. 아담은 흙에 속한 생명체였지만,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살려주는 구원주로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부활체이시다.
(4)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이 성경본문만 보면 주와 합하는 자는 정말로 주와 한 영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지방교회는 이 본문을 통하여 신인합일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부분적으로만 치우치는 해석이 된다. 원래 이단들은 그 구절만을 분리시켜 해석을 한다. 성경본문의 전문을 함께 보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인격체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동일한 적용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창기와 합하는 자도 한 몸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앞 뒤 문맥을 잘 읽어보라.... 그 성경본문은 양태론을 설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비난하고 경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삼가하라는 것이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동질, 동류의 음란한 자가 된다..... 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는 자가 되어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남선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하였을 때에 그 "하나"가 한 인격이 되자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남선교회는 같은 믿음, 같은 목적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된다는 것을 한 인격, 한 실체가 되는 것으로 해석하는가?
양태론을 주장해놓고 성경에서 그것을 짜깁기로 맞추려고 시도를 하다보니....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 우스운 것은, 신인합일을 부정하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지방교회가 이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성경본문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5)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지방교회는 이 아기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므로 예수 =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정통삼위일체의 당연한 명제중의 하나이다. 이 이사야 본문은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교리를 비판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9:6은 아기가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예수는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으로 불리고 있음을 생각하라.
(NIV 영어성경) He will be called....
(KJV 영어성경) His name shall be called
히브리어 “쉠”은 “이름, 영광, 명예, 명성”을 가르키며, 히브리어 “카라“는 ”부르다, 드러내다, 수여하다“를 가르킨다. 즉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름과 영광, 명예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사야서 본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한 한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질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과 동일하며,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의 신성과 다름이 없이 동일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지 않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요14:9)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6) 요한복음10:30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본문이 예수 = 성부하나님이라는 인격적인 동일함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정통삼위일체는 본질에서 일체를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여러 곳에서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그 뜻이 하나, 목적이 하나, 본질이 하나라는 다양한 개념을 포함한다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본문은 28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으며,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온 것이다. 즉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그것이 부부가 한 인격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양태론자들이 변명하는 것은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 (요17:21)
이러한 상호내재가 한 인격이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신학적인 용어는 초대교회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교부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 용어가 등장한 것은 오리겐의 “종속론”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성자와 성령은 성부보다 열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위계질서론적인 종속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상호내재라는 성경적인 근거로 비판한 것인데, 이 상호내재는 종속론을 반박하는 데에 성공하였지만, 삼위가 구별되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던 것이다.
-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87쪽)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양태론자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는 자체가 그들이 양태론자라는 증거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삼위의 인격적인 구별이 불가능함을 말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웨슬레목사와 장로교의 웨인그루뎀의 견해를 들어보자.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연합”이라는 것은 같은 뜻,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등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뜻한다. 그러나 연합이 한 인격이 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0-32)
사람이 그 아내와 한 육체가 되는 것이 두사람이 한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교회(성도)가 한 유기체적인 공동체로서 연합하지만, 그렇다고 한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 유기체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 (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출처] 양태론적 오해가 있는 성경구절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dsmedic
첫댓글 갓맨님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천천히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하나님의 경륜, 55-56)
덩어리 수박(아버지) -> 조각난 수박(아들) -> 수박의 즙(성령)
이 비유만 보자면 아버지가 결국 성령이 되어서 우리안으로 들어오신다는 내용인데 참으로 위험한
양태론적 사상같네요..--;;
그래서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서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단 감별사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지요.
위 비유만 아니라 삼위일체에 관한 어떤 비유도, 그 비유를 사용한 전후 문맥을 보아야 하고
저자가 그 비유를 사용한 의도를 읽어내야 합니다.
위 비유의 요지는 삼위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방면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방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파/교단에 계신 분들도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믿지만, 아들과 아버지 하나님도 계시는 것은 긴가민가 합니다. 수박전체가 우리 안에 있듯이 삼위일체 전체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성경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위의 글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구분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삼위가 구별은 되나 분리가 안 되시는 분이라는 정통 삼위일체만 견고하게 붙드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단 감별사들처럼 아버지는 저 하늘에, 아들은 이 땅에 각각 분리된 분이시다 라는 이단적인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세 위격의 하나님을 세 사람들처럼 오해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밀하시며 사람의 머리로 명쾌하게 무우 자르듯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으십니다.
따라서 성경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서 이 땅에 계신 아들 안에 계시다는 말씀(요14:11)도 있고, 이 땅에 오신 아들이 저 하늘에 여전히 계시다는 말씀도 있지요(요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