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옵는 선배님,
사랑하는 후배님,
감사합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는 아름다운 계절에 이 자리를 빌어서 인사를 드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별한 기획을 하시
고 자리를 마련해주신 재경동문회의 혜안과 믿음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저는 ‘제1기 중앙 칼럼니스트’ 로서 무한한 기쁨으로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지식과 필력이 부족하여 행여나 선, 후배 독자님들의 귀중한 시간을 도적질하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글을 쓰겠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코끼리를 만진 여러 장님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미국 체험이야기’는 제가 미국에서 살면서 체험하고, 느끼고, 보고 들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미국문화, 역사, 사람, 생활방식,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적고자 합니다. 동문 독자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학업과 직장관계로 미국에서 이미 생활 혹은 여러 차례 여행을 하시거나 정착을 하신 분 도 계셔서 더욱 조심스러우나 선후배님들의 많은 격려와 가르침을 부탁 드립니다. 저는 국문법 특히 띄어쓰기를 잘 하지 못해서 글 쓰기가 무척 망설여집니다. 이 점도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오늘은 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동문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인사를 올리기도 했지만 연재를 하기에 앞서서 제 자신을 좀 더 소상하게 소개함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4회로 졸업했습니다. 원래 시골(경북 의성군 춘산면) 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나 그 당시 큰 형님 (19회 허익환)이 중앙상고에 재학 중이셔서 저도 중앙중학교로 전학, 졸업을 하고 자연스럽게 우리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는 산골 중학교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면서 공부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데 그 가운데서 영어를 잘 하셨던 형님의 모범을 따라서 저도 열심히 했습니다. 형님께서는 영어 사전을 외우다시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문종합영어와 같은 문법서적도 여러 권 독파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 형님을 보면서 저 또한 자연스럽게 영어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오늘 제가 ‘미국체험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여기에 글을 쓰게 됨은 바로 19회 선배님이신 형님 덕분입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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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성장:
나는 1959년 11월 15일(음) 경북 의성군 춘산면 금오1리 (쇠골)에서 4남 1녀 (부: 허 병진, 모: 신 육녀)가운데 3남으로 태어나서 중학교 1학년 11월까지 시골에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동생(봉환)이 일찍 우리 곁을 떠남으로 나는 사실상 막내로 부모님의 귀여움, 한 분의 누님과 두 분 형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가난한 시대에서도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학교:
오지 중에 오지였던 고향 마을은 청송군과 군위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영천군계가 되는 노귀재와도 불과 7킬로에 불과한 곳이다. 80여 가구에 400여명이 살고 있었는데 분교가 있어서 2학년까지 공부를 하고는 6킬로를 걸어서 면소재지에 있는 본교에 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잘 만난 덕분에 때마침 시작된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우리 마을에 국민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분교가 ‘독립’을 해서 우리는 더 이상 시오리 길을 책보를 메고 걸어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초대 전교 어린이 회장에 뽑히는 영광을 가졌다. 1회로 졸업을 했지만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폐교가 되었고 몇 년 전에는 작은 기념비만 하나 남기고 학교 건물과 부지마저 밭으로 바뀐 모습을 보면서 무척 슬펐다. 춘산 중학교와 대구중앙중학교를 다니면서도 영어는 제일 재미있었고 성적도 좋았다. 시골 중학교 1학년 때 즉 1972년에 캐나다에 계시는 40대 여성과 펜팔을 하기 시작했는데 39년 넘게 아직도 편지를 주고 받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캐나다와 한국에서 신문에 소개도 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간 LOVE STORY는 다음 기회에 따로 적을까 한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미국인(군인, 선교사)을 초청하여 원어만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실업계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이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고 지내던 미군 조종사의 소개를 미팔군 영내에서 미국 대학(University of Maryland) 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하게 됨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처음 치른 TOEFL성적이 525점이었는데 그 당시 채점 방식으로 매우 높은 것으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에는 용산 미군부대에 가서 야간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뉴욕시립대학을 거쳐서 State University of New York에서 학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와서는 연세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쳤다.
군대: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영어 통. 번역 주특기(900E)를 받아서 김해소재 공병학교에서 교재 번역과 외빈 및 외국군 교육생 통역과 당번 병으로 보람되게 보냈다. 미국에 있으면서 미군에 입대해서 5년간 인사/행정 주특기로 일했으니 나는 한국이나 미국 어디에서도 병역시비만큼은 당당하다.
효성물산:
제대를 앞둔 군인을 대상으로 전우신문(국방일보 전신)광고를 보고 응시를 했다. 종합무역상사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데 ‘영어특채’로 입사를 했으나 고졸자라서 배정받은 업무가 바이어와 상담하는 일이 아닌 주로 은행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사무실에만 있는 것보다는 은행가면서 선배님, 동기들을 만나는 재미가 그나마 큰 위안이 되었다. 당시 한일은행 본점에 계시면서 후배 왔다고 잘 해주시던 박 노경 선배님이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이때만 하더라도 학벌에 대한 차별이 대단했다. 나는 우리부서에서 영어를 제법 잘했지만 외국에서 온 바이어 근처에도 못 갔다. 나이가 비슷한 대졸 친구가 여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해서 마시면서 외국 바이어와 이야기를 나누는 근처를 일부러 왔다 갔다 하면서 일부러 들어보면 내 영어보다도 못했지만 나는 가방 끈이 짧은 서러움만 탓하고 있을 수 없었다. 가끔씩 미국 친구를 사무실로 오게 해서 점심을 같이 먹으로 가곤 했다. 그때 자주 오던 친구가 바로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하며 “한 뚝배기 하실래요?’로 유명해진 로버트 할리다.
미국 생활
공부, 군인, 통역, 택시운전, 과외, 인쇄소, 주유소, 석면제거, 사진사, 보조교사, 항공사, 네일, 한인방송, 봉사, 학원강사, 컨설팅…. 정말 “안 해본 것 제외하고 다” 해봤다. 이 때 경험을 본 칼럼을 통해서 공유할 예정임으로 길게 적지는 않는다.
서울 생활
결혼과 함께 서울로 와서 중간에 미국 근무를 제외하고는 줄 곧 여기서 생활하고 있다.
취미
아이들과 놀기, 시골 여행하기, 마라톤, 우표 모으기, 물고기 기르기 등 돈과 시간이 별로 안드는것만 한다. 마라톤은 결혼 후 10년 만에 아이를 얻으면서 다짐한 약속으로 늦게 시작했는데 한라산 80키로 산악 마라톤, 춘천 마라톤, 동아 마라톤을 포함해서 13회 완주를 하고 지금은 왼 발목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다.
가족
아내와 초등학생 아들 둘과 딸이 있다.
직장
EDS, HP에서 10년간 일을 하고 지금은 CH2M HILL에서 일을 하는데 용산미군 기지이전 사업 팀에 소속되어있다.
봉사활동
나름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자 하나 대표적인 것은 PTP (People to People의 약어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세 계 평화를 위해서 창설)이다. 또한 내가 직접 만든 ‘명사초청 영어강연회’ SESA (서울영여연구회)는 매월 한 차례씩 영어 강 연회를 개최한다. 영어가 모국어인 외교관, 다국적 기업 임원, 교수 등이 주된 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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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파일은 지난해 월간지와 인터뷰 내용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어요.. 누구든 삶에 특별함은 있으나 허후배님의 또 다른 특별한 자서전이 남겨지는군요. 현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중앙 동문임은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늘 바쁜 일상을 보내는 후배님에게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