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앙코르와트 : 캄보디아의 상징
Angkor Wat
(사진) 동쪽 포장도로 끝에서 바라본 사원부 주 입구의 모습.
앙코르와트(Angkor Wat 혹은
Angkor Vat, អង្គរវត្ត [앙코르왓])는 12세기 초에 건립된 일군의 사원들이다. 이곳은 수랴와르만 2세(Suryavarman II [수리야바르만 2세])가 자신의 수도를 건설하면서 국사(國寺)로 건립한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이 유적지에서 가장 잘 보존된 사원으로, 처음에는 힌두교의 위쉬누(Vishnu) 신에게 봉헌된 것이었으나 후대에 불교의 사찰로 바뀌었다. 이 사원은 고전적인 크메르 건축양식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국기(國旗)에도 그려져 국가적 상징물이 되었고, 이 나라의 관광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명소이다.
앙코르와트는 초기 남인도 건축양식에 기반을 둔 대표적인 2가지 요소, 즉 "사원 산"(temple mountain) 개념과 "회랑을 가진 사원"이란 특징이 결합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사원은 힌두 신화에서 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메루 산"(Mount Meru)을 형상화했다. 또한 3.6 Km에 달하는 해자(垓字)와 외벽에 둘러싸인 공간 안에, 3겹의 직사각형 회랑들이 각각 안 쪽으로 갈수록 솟아오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중심부에는 오엽배열의 탑들이 위치한다. 앙코르 지역의 여타 사원들과 달리 앙코르와트는 서향으로 건설됐는데, 그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앙코르와트는 건축 규모의 웅장함 및 그 배치의 조화로움으로 인해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이 사원의 장대한 회랑의 벽면에는 수많은 신장들(devatas: 수호신)이 조각되어 있다.
오늘날의 명칭인 "앙코르와트"(앙코르왓)는 16세기부터 사용됐는데,(주1) "사원의 도시"란 의미이다. "앙코르"(Angkor: 도시-크메르어는 "엉꼬"라고 발음함)란 말은 산스끄리뜨어 "나가라"(nagara: 도시, 수도)에서 기원한 "노꼬"(nokor)란 말이 방언화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그리고 "와트"(wat: [왓])는 크메르어로 "절"(사원)을 의미한다. 16세기 이전까지는 창건자인 수랴와르만 2세의 묘호(廟號)인 "쁘레아 삐스눌록"(Preah Pisnulok)으로 불렸다.(주2)
(주1) Higham, The Civilization of Angkor p. 2.
(주2) "Angkor Vat". APSARA Authority. 2004. |
1. 역 사
앙코르와트는 시엠립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5.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는 바푸온(Baphuon) 사원을 중심에 둔 고대 수도 앙코르 톰의 약간 남동쪽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고대 캄보디아의 여러 유적군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이 사원의 최초 착공은 12세기 초 수랴와르만 2세 시대(1113-1150)에 시작됐다. 위쉬누(Vishnu) 신에게 봉헌된 이 사원은 수도의 일부이자 국가의 국사(國寺)로 지어진 것이다. 그 창립 석주나 이 사원을 지칭하는 후대의 비문도 없기 때문에 최초의 명칭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본존(주 신앙대상이 되는 신)을 모신 후부터는 "위라 위쉬눌록"(Vrah Vishnulok)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에 따르면 수랴와르만 2세가 서거한 지 약간 후에도 회랑의 일부 조상들은 완공되지 못했던 것 같다.(주3) 수랴와르만 2세를 비롯한 크메르 왕들이 몰두했던 거대한 건설계획은, 백성들의 사실상의 노예노동 상태에서 국가적으로 동원한 것이었다. 수랴와르만 2세의 군사적 정복활동으로 제국의 영토는 확장되었지만, 그의 사후 27년이 되면 서서히 쇠퇴하던 제국이 마침내 참 왕국의 침입을 받기에 이른다.(주4)(주5) 1177년 크메르 민족의 전통적 숙적인 참파(참 왕국)는 앙코르를 약탈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 1181-1218[?] 재위)가 등극하면서 정리되는데, 대승불교도였던 그는 앙코르와트보다 몇 킬로미터 북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앙코르 톰"(Angkor Thom) 사원군 및 "바이욘 사원"(Bayon) 사원을 새로운 국사로 건립했다.
(사진) 1866년 Emile Gsell이 촬영한 앙코르와트의 입구 모습.
13세기 후반에는 힌두교도이자 불교의 탄압자였던 자야와르만 8세(자야바르만 8세)가 사위인 스린드라와르만(Srindravarman [스린드라바르만])에게 폐위당했다. 스린드라와르만은 그 이전 10년간을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승려생활로 보냈다. 이 새로운 왕은 크메르 제국의 국교를 힌두교에서 다시금 불교로 회귀시켰다. 하지만 이 불교는 자야와르만 7세 시대의 대승불교가 아니라,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테라와다 불교)였다. 당시 백성들은 끊임없는 정치적 부패와 제국의 쇠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물질적 풍요나 권력이 아닌 정신적 안식을 제공해주는 종교적 귀의에 열성적이었으므로, 이러한 변화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주6) 그리하여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에서 상좌부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16세기 이후 서서히 잊혀져 갔지만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앙코르 지역의 사원들 중에서도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이 사원이 보존된 데는 부분적으로는 그 해자(성 둘레로 깊은 연못을 파 적의 침입을 막는 시설)가 정글의 침식작용을 막아준 덕분도 있다.(주7)
이 사원을 최초로 방문했던 서양인 중 한 사람이었던 포르투갈 수도사 안토니오 다 막달레나(Antonio da Magdalena)는 1586년에 이곳을 찾았다. 그는 이 사원에 대해, "이곳은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로,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그 탑들과 장엄물 및 부조들은 오직 천재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다.(주8) 하지만 이 사원은 앙리 무오(Henri Mouhot)의 여행기가 출판된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서구세계에 잘 알려지게 된다. 이 프랑스 탐험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사원들 중 하나는 솔로몬의 사원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견줄만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나란히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만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나 로마가 우리에게 남겨준 어떠한 것보다도 위대하며, 이 국가가 현재 속해 있는 미개한 세계에 대해 서글픈 대비점을 던져주고 있다."(주9)
(지도) 시엠립 시내와 앙코르 유적공원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맨 아래쪽의 분홍색 시가지가 시엠립 시내이고, 가장 북쪽의 커다란 유적군이 "앙코르 톰"이다. 앙코르와트는 이보다 더 남쪽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이 지도 상에서 시엠립 시내와 비교해보면 이들 유적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도 알 수 있다. ☜ 지도확대해보기
다른 서양인 방문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오는 이 사원을 크메르인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고, 그 연대 역시 로마시대와 같을 것으로 잘못 인식했다. 앙코르와트의 진정한 역사는 앙코르 유적지 전체를 청소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양식적 요소들과 금석학적 증거들을 짜맞춰나가는 일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타 고대 유적지에서 통상적으로 발견되는 주방기구나 의상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아, 일반적인 거주지로 사용된 어떠한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은 기념물들 그 자체가 고고학적 증거인 곳이다.(주10)
20세기에 들어와 앙코르와트는 주로 여기에 쌓여있는 흙더미와 초목들을 제거하기 위한 상당한 규모의 복원공사가 요청되었다.(주11) 하지만 이 작업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내전과 크메르 루즈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지되었지만, 그래도 후-앙코르 시대(크메르 제국 멸망 후 시대)의 도굴과 파괴에 비하면 이 시대에는 그다지 많은 피해를 받진 않았다.(주12)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의 상징이며 국가적 자긍심의 주요한 원천이다. 1863년 캄보디아 국기가 최초로 도입된 이래, 모든 정권이 이 사원을 자신들의 국기에 그려넣었다.(주13) 2003년 1월 발생한 프놈펜의 반(反)태국 폭동도 태국 연속극의 유명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를 태국 영토로 주장했다는 헛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주14)
(주3) "Angkor Wat, 1113-1150". The Huntington Archive of Buddhist and Related Art. College of the Arts, The Ohio State University. http://huntingtonarchive.osu.edu/seasia/angkor.html. 2008-04-27 접속.
(주4) Time Life Lost Civilizations series: Southeast Asia: A Past Regained (1995) p.67-99.
(주5) Scarre, Chris editor "The Seventy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p.81-85 (1999) Thames & Hudson, London.
(주6) "Angkor Wat History". http://www.ourworldwonders.com/AngkorWat/History.htm.
(주7) Glaize, The Monuments of the Angkor Group p.59.
(주8) Higham, The Civilization of Angkor pp.1-2.
(주9) Quoted in Brief Presentation by Venerable Vodano Sophan Seng
(주10) Time Life Lost Civilizations series: Southeast Asia: A Past Regained (1995) p.67-99
(주11) Glaize p.59.
(주12) APSARA authority, The Modern Period: The war
(주13) Flags of the World, Cambodian Flag History
(주14) The Nation, 2003-1-31, Editor Didn't Check Rumour |
2. 건 축
2.1. 부지 및 평면도
앙코르와트의 지리학적 위치:
13°24′45″N 103°52′0″E / 13.4125°N 103.86667°E / 13.4125; 103.86667Coordinates:
13°24′45″N 103°52′0″E / 13.4125°N 103.86667°E / 13.4125; 103.86667.
앙코르와트는 "사원 산" 개념의 독특한 결합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크메르 제국 국가 사원들의 표준적 모델이다. 이는 인도 "따밀 나두"(Tamil Nadu) 지방의 쫄라(Chola) 및 오리싸(Orissa) 지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앙을 중심으로 회랑들(조각물이 있는 벽들)을 가지고 있다. 이 사원은 신들이 살고 있다는 "메루 산"(Mount Meru)을 형상화했다. 맨 중앙의 오엽배열 탑들은 그 산의 다섯 봉우리들을 표현한 것이고, 회랑들과 해자는 주변의 산악과 대양을 표현한 것이다.(주15) 이 사원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진적으로 배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속인들의 경우엔 가장 아래쪽 지역에만 접근할 수 있었다.(주16)
(사진) 앙코르와트의 전경. 멀리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지형은 인공 저수지인 "서 버러이" 유적이다. 대형확대사진보기 ☞
대부분의 크메르 사원들과 달리, 앙코르와트는 서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글레이즈(Glaize)와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ès)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수랴와르만 2세의 묘역 사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주17) 이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증거는 회랑들에서도 발견된다. 회랑의 진행방향은 힌두교 관련 전문용어로 "쁘라사위야"(prasavya)라고 하는 시계 반대방향의 진행순서로 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순서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바라문교(브라흐만교) 장례절차에서의 제사가 바로 그와 같이 역순으로 진행된다.(주11) 고고학자 찰스 히감(Charles Higham)도 중심탑에서 발견된 한 용기가 장례용 항아리라고 기술했다.(주18) 어떤 이들은 이 용구가 안치된 사체에 큰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고도 주장했다.(주19) 하지만 프리만(Freeman)과 자크(Jacques)는 전형적인 동향 사원들과 다르게 배치된 몇몇 사원들에 주목하고, 앙코르와트는 서쪽과 연관된 위쉬누 신에게 봉헌된 것이란 제안을 하였다.(주15)
엘리아노 만니카(Eleanor Mannikka)는 앙코르와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 사원의 배치와 공간구도, 그리고 회랑들의 배열과 그 속에 그려진 내용들을 고려하면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수랴와르만 2세 치세의 새로운 태평성대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을 내놓았다. 그녀에 따르면, "앙코르와트의 성스런 공간 속에 태양 및 달의 주기측정을 도입함으로써, 이곳을 지배하는 신적 규율이 복도와 회랑들을 신성화시키는 동시에, 왕의 권력을 영속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이곳에 묘사된 천상의 신들도 달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주20)(주21) 만니카의 제안은 학계에서 관심과 함께 회의적 반응도 함께 얻었다.(주18) 이러한 그녀의 입장은 앙코르와트가 별자리인 "프톨레마이오스 자리"(용자리: constellation Draco)를 묘사한 것이라 주장한,(주22) 그래햄 한콕(Graham Hancock) 같은 다른 학자들의 입장과도 다른 것이다.
(주15) Freeman and Jacques p.48.
(주16) Glaize p. 62.
(주17) 원나라의 테무르 칸(Temur Khan: 成宗)이 보낸 사신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 1266-1346)이 1295년에 앙코르에 도착했다. 그는 이 국가의 수장이 사후 탑 속에 봉안되었다고 하며, 앙코르와트를 "영묘"(靈廟, mausoleum)라고 기록했다.
(주18) Higham, The Civilization of Angkor p.118.
(주19) Scarre, Chris editor "The Seventy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p.81-85 (1999) Thames & Hudson, London
(주20) Mannikka, Angkor Wat, 1113-1150
(주21) Stencel, Robert, Fred Gifford, and Eleanor Moron. "Astronomy and Cosmology at Angkor Wat." Science 193 (1976): 281-287.(Mannikka, nee Moron)
(주22) Transcript of Atlantis Reborn, broadcast BBC2 1999-11-4. |
2.2. 건축양식
앙코르와트는 "고전 크메르 건축양식"(혹은 "앙코르와트 양식")의 주요한 예이자 그 양식 자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12세기의 크메르 건축은 벽돌이나 홍토(laterite)보다는 사암을 주된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데 매우 숙련되어 있었고 확실성도 보여주었다. 대부분 눈에 보이는 부분은 사암 블럭으로 건축했고, 외벽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만 홍토를 사용했다. 블럭과 블럭을 연결해주는 접착제에 대해서는 천연 수지나 소석회(slaked lime) 같은 재료들이 제안되었지만, 아직 분명하게 확정짓지는 못하고 있다.(주23)
무엇보다도 앙코르와트는 그 설계상의 조화로움 때문에 칭송을 받고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건축과 계속해서 비교되어 오곤 한 것이다. 20세기에 앙코르와트의 보존을 담당했던 마우리스 글레이즈(Maurice Glaize)에 따르면, 이 사원은 "균형감을 위해 기념비적 호소 요소들을 억제하고 그 비율을 엄밀히 배열함으로써 어떤 고전적 완벽성을 획득했다. 이 사원은 힘과 통일성, 그리고 건축양식의 한 업적"이라고 한다.(주24) 건축적인 측면에서 이 사원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포함한다.
(1) 첨두아치형(ogival): 연꽃의 새순 모양으로 만든 탑들.
(2) 반-회랑식(half-galleries): 통로를 넓게 만들어 줌.
(3) 굴대형 회랑(axial galleries): 담장의 연결.
(4) 십자형 테라스(cruciform terraces): 사원의 주축을 따라 형성하고 있음.
전형적인 장엄물(장식물)로는 신장("데워따"[devatas] 혹은 "압사라"[apsaras]라고 부름)과 회랑들, 벽공벽에 그려진 수많은 화환장식과 서사적 장면들이 있다. 앙코르와트의 조상(彫像)들은 이전 시기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다 정적이고 덜 화려해 보수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주25) 디자인 상의 또 다른 구성요소들은 약탈과 시간적 경과로 인해 파괴되었다. 여기에는 탑들의 금장 외벽과 회랑의 일부 금장 조상들도 포함되며, 목조로 된 천장판과 문들도 파손되었다.(주26)
앙코르와트 양식은 바이욘 사원 시대로 이어졌지만, 이때에는 양적 측면이 강조되어 질적 측면이 종종 희생당하곤 했다.(주27) 이 양식의 사원들로는 번떼이 삼레(Banteay Samré) 사원, 톰마논(Thommanon) 사원, 짜오 서이 떼워다(Chao Say Tevoda) 사원과 앙코르 지역의 초창기 사원인 "쁘레아 삐투"(Preah Pithu)도 여기에 속한다. 또한 앙코르 지역 바깥에서는 "벵 미얼리어"(Beng Mealea) 사원 및 파놈 로웅(Phanom Rung) 사원과 피마이(Phimai) 사원의 일부분들도 여기에 속한다.
2.3. 특 징
2.3.1. 외 벽
외부의 담장은 가로×세로 1024 m × 802 m에 4.5 m 높이를 가지고 있고, 30 m 폭의 평지로 둘러진 후 190 m 폭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사원의 접근로로는 동쪽에 흙으로 쌓은 제방이 있고, 서쪽에는 사암으로 만들어진 포장도로가 나 있다. 이 서쪽 통로가 주 입구로 후대에 첨가된 것인데, 아마도 목조 교량을 대체하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주28)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는 대문 건물인 "고뿌라"(gopuras)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고뿌라가 규모가 가장 크며 무너진 3개의 탑을 가지고 있다. 글레이즈에 따르면, 이 고뿌라는 사원 중심영역의 형식을 감추는 동시에 반향해준다고 한다.(주29) 남쪽 탑 아래에는 "따 리엇"(Ta Reach)이라 알려진 위쉬누 신의 조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원래는 사원의 중심 신전에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28) 종종 "코끼리 문"(elephant gates)이라고도 불리는 또 다른 양편의 고뿌라들과 탑들 사이로 이어진 회랑은 그러한 동물들의 조각들을 충분히 품을만큼의 공간을 갖고 있다. 이 회랑들은 바깥쪽(서)으로 사각 기둥들을 가지고 있고, 안쪽(동)으로는 폐쇄된 벽을 갖고 있다. 기둥들 사이의 천정은 연꽃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담장의 서쪽 면은 무희들, 동쪽 면은 난간이 달린 창문으로 되어 있는데, 껑충껑충 달리는 동물 위에서 춤추는 무희들과 신장들(devatas)이 새겨져 있다. 특히 남쪽 출입문에는 이 사원에서 유일하게 무희의 치아도 조각되어 있다.
외부 담장은 820,000 m²의 면적을 둘러싸고 있는데, 원래 사원 외부로 시가지가 이어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왕궁이 위치해 있었다. 앙코르 지역의 여타 세속적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들 역시 석재보다는 소실되기 쉬운 자재들로 지어져, 일부 거리의 윤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실되었다.(주30) 이 지역의 대부분은 현재 숲으로 덮여 있다. 350 m 길이의 포장도로가 서쪽 고뿌라와 사원 중심부를 연결하고 있는데, 양편으로 나가(nāga: 전설적 뱀)를 새긴 난간들과 여섯 층으로 구성된 계단들이 도시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방향에 위치한 입구에는, 출입구에서 세번째 계단군 앞에 "서고"(library)라 불리는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서고와 사원 사이에는 연못이 위치하는데, 연못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포장도로와 중심구조물을 연결해주는 십자형 테라스에는 사자상들이 지키고 서 있다.(주31)
(주28) Freeman and Jacques p.49.
(주29) Glaize p.61.
(주30) Freeman and Jacques p.50.
(주31) Freeman and Jacques p.50. |
2.3.2. 중앙 구조물
사원은 도시보다 솟아올라 있는 테라스에 세워져 있다. 세 겹의 사각 회랑이 중심탐을 둘러싸고 있고, 각 회랑은 안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한다. 만니카(Mannikka)는 이 회랑들이 국왕과 브라흐마 신(Brahma), 달, 위쉬누 신에게 봉헌된 것이라 해석했다.(주3) 각각의 회랑은 각 방향에 고뿌라를 갖고 있고, 안쪽의 두 회랑들은 모서리마다 탑을 가지고 있어 중심탐과 함께 오엽배열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 사원이 서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건축선이 후퇴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각 담장과 회랑은 서쪽에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동일한 이유로 서쪽 계단이 다른 편 계단들보다 얕게 배치되어 있다.
가로×세로 187 m × 215 m 규모의 맨 바깥쪽 회랑은 모서리의 탑 대신 덮개구조를 갖고 있다. 이 회랑은 그 구조의 절반 정도를 부벽지지 형태로 사원 바깥쪽으로 배치하여 외부로 개방된 형태를 보여준다. 바깥쪽 회랑이 서쪽의 두번째 외벽과 연결되어 "쁘레아 뽀안"(Preah Poan: 천 기의 부처를 모신 곳 [천불전])이라 불리는 십자형 회랑을 구성한다. 현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지만, 수 세기 동안 이곳을 방문했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순례자들의 공덕과 선행에 관한 여러 비문들이 남아있는데, 대부분은 크메르어지만 버어마어와 일본어로 된 비문도 남아 있다. 회랑에 나타나는 네 개의 작은 안뜰은 원래 이곳에 물이 차 있었음을 보여준다.(주32) 회랑의 북쪽과 남쪽에는 서고가 있다.
안쪽의 두번째 회랑은 양 측면에 위치한 두 서고들과 연결되면서 또 다른 십자형 테라스를 형성하는데, 이 역시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위쪽으로 두번째 층위부터 신장(떼와다)들이 벽에 새겨져 있는데, 단독의 모습부터 4기가 하나의 그룹을 이룬 것까지 다양하다. 이 두번째 층위의 담장은 가로×세로 100 m × 115 m 규모인데, "메루 산"에서 흘러넘친 물이 모여 만들어진 대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주33) 3중 구조의 층위는 각각 안쪽 회랑의 중심탑과 고뿌라들을 향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계층구분 자체가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표현한 것이다.(주34) "바깐"(Bakan)이라 불리는 안쪽 회랑은 한 변이 60 m인 정사각형 구조를 갖고 있고, 각각의 고뿌라와 중심 사원, 그리고 모서리 탑 아래의 부속 신전을 연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회랑의 천정에는 다양한 장엄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사자나 가루다(garuda: 신화적 새)의 머리에 뱀 꼬리를 가진 존재들이 등장한다. 조각이 새겨진 대들보와 완사면이 회랑과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중심 신전 위의 탑은 높이가 43 m로 지상에서부터는 65 m의 높이이다. 여타 사원 산들과는 달리 중심탑은 주변의 네 탑에 둘러싸여 솟아 있다.(주35) 원래 위쉬누 신상이 안치되어 있던 신전 자체는 각 방향으로 열려 있었는데, 상좌부 불교 사찰로 전환할 때 불상들을 새긴 담장이 증축됐다. 1934년 보존담당자 조르쥬 트로우베(George Trouvé)는 중심 사원의 아래에서 구덩이 한 곳을 발굴했다. 이곳은 이미 보물들을 도굴당해 모래와 물만 가득차 있었지만, 지하 2 m 지점에서 황금 잎사귀 하나를 찾아내었다.(주36)
(주32) Glaize p.63.
(주33) Ray, Lonely Planet guide to Cambodia p.195.
(주34) Ray p.199.
(주35) Briggs p.199.
(주36) Glaize p.65. |
2.3.3. 장엄물
(사진) 앙코르와트의 신장(압사라) 부조 대형확대사진보기 ☞
건축 구조물을 통합시킴과 동시에 앙코르와트를 유명하게 해준 요소 중 하나가 회랑의 부조에 조각된 장엄물들이다. 바깥쪽 회랑의 안쪽 벽면에는 힌두교의 서시시인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따>(Mahabharata)에서 유래된 이야기들이 대규모로 조각되어 있다. 이에 대해 히감(Higham)은 "연속적으로 기획된 일련의 석조 조각으로는 알려진 중 가장 최고의 작품"이라 표현했다.(주37) 서북쪽 모서리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가면서, 서쪽 회랑은 <라마야나>의 일화인 랑까(Langka) 전쟁(이 이야기 속에서 라마[Rama: 주인공 영웅]는 라와나[Ravana]를 물리침) 및 꾸루끄셰뜨라(Kurukshetra: 꾸루 벌판) 전쟁을 묘사한다(<마하바라따>의 이야기로 까우라와 족[Kaurava]과 빤다와 족[Pandava]이 공멸하는 이야기). 남쪽 회랑만이 유일하게 역사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수랴와르만 2세의 일대기를 보여준 후 힌두신화에 나오는 32 지옥과 37 천상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글레이즈(Glaize)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지옥에 떨어진 불행한 영혼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대단히 가혹한 고통을 받도록 되어 있다. 타인의 재산에 해를 입힌 자는 자신의 뼈들이 뿌러져야만 하고, 대식가는 두 조각이 나는 고통을 받는다. 쌀을 훔친 자는 배에다 뜨거운 쇳덩어리를 달고 고통받으며, 시와(Shaiva)의 정원에서 꽃을 꺾은 자는 손발톱에 구멍이 뚫렸고, 절도범들은 추위에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주38)
동쪽 회랑에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 중 하나인 <우유 바다에서 불생음료 찾기>(Churning of the Sea of Milk: 乳海攪拌)가 묘사되어 있다.(주39) 여기에는 92기의 아수라들(asuras), 88기의 신들(devas), 큰 뱀인 와수끼(Vasuki)가 위쉬누 신(Vishnu)의 지휘를 받아 "우유의 바다"에서 불멸의 음료를 채취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만니까는 아수라의 수를 91기라고 보았는데, 동지에서 춘분, 춘분에서 하지로 이어지는 날들의 수가 홀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주40) 아수라들을 물리치는 위쉬누 신의 모습은 16세기에 첨가된 것이다.
북쪽 회랑은 힌두의 신들과 아수라들과의 싸움을 묘사하고, 바나(Bana)를 물리친 끄리슈나(Krishna)의 승리를 보여준다. 글레이즈는 "이 부분의 장인정신이 가장 질적으로 저하된 것"이라고 평가했다.(주41) 북서쪽 모서리와 남서쪽 모서리의 덮개에는 보다 작은 규모의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 일부는 그 유래를 확인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라마야나>의 일화나 끄리슈나 신의 일대기를 묘사한 것이다.
(주37) Higham, Early Cultures of Mainland Southeast Asia p.318.
(주38) Glaize p.68.
(주39) Glaize.
(주40) Described in Michael Buckley, The Churning of the Ocean of Milk
(주41) Glaize p.69. |
2.4. 건축기술
앙코르와트는 부드럽게 잘 연마된 석재를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고 이어서 쌓았고, 어떤 경우엔 그 접합점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되어 있다. 어떤 경우엔 두 블럭 사이에 장부와 장부구멍을 만들어 이어붙인 것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열장이음이나 중력을 이용한 단순한 배치도 보이고 있다. 아마도 공사를 하는 데는 코끼리들과 야자섬유 밧줄, 도르레와 대나무 비계틀이 사용됐을 것이다. 앙리 무오는 대부분의 블럭이 직경 2.5 cm에 깊이 3 cm의 구멍을 갖고 있었으며, 보다 큰 돌일수록 더 많은 구멍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돌들에 쇠막대기를 이용해 두 돌을 고정시켰을 것으로 추측했고, 또 다른 학자들은 운반을 위해서만 일시적으로 못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크메르 건축양식은 로마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곡선 아치 구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까치발 아치"(corbelled arch)란 독특한 양식을 고안해냈지만, 불안정하여 종종 무너지기도 했다.
이 기념물은 수많은 사암을 사용해 건설됐는데, 이 양은 이집트의 카프레왕 피라미드에 사용된 것과 맞먹는 것이다(500만톤 이상). 이 사암들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40 km 떨어진 꿀렌 산(Mount Kulen)에서 운반해온 것이다. 이 석재의 운반에는 아마도 시엠립 강이 이용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막대한 중량을 견디기 위해서는 전복사고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을 것이다. 현대의 한 공학자는 앙코르와트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되기까지 300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 유적은 수랴와르만 2세가 등극하고 얼마 안 있어 착공되어 그의 사후 얼마 안 있어 완성되었으므로, 불과 40여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풍경 사진들 모음
앙코르와트의 사실상 거의 모든 기둥과 담장, 대들보, 천정에는 조각이 되어 있다. 유니콘과 그리핀, 날개 달린 용이 전차를 끌고 있는가 하면, 코끼리에 올라탄 지도자들과 전사들, 한껏 머리모양을 손질한 무희들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문학에서 유래된 다양한 장면들이 묘사된 회랑이 몇 킬로미터나 이어져 있다. 회랑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의 면적만도 1,000 m²에 달한다. 일부 벽면들에 나 있는 구멍들은 원래 청동 부조판이 위치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대기에는 이러한 물건들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도굴꾼들의 주된 타겟이 되었다.
인도 카주라호(Khajuraho)에서 발굴작업이 있을 때, 석공예가이자 조각가인 알렉스 에반스(Alex Evans)가 1.2 m 크기가 안 되는 석재에 조각을 해보았는데, 거의 60일이 걸렸다.(주42) 한편 로저 홉킨스(Roger Hopkins)와 마크 레흐너(Mark Lehner)는 석회암 채석장에서 12명의 채석공들과 함께 채석 실험을 했는데, 400톤의 돌을 채석하는 데 22일이나 걸렸다.(주43) 그러므로 이만한 양의 사암을 채석, 운반해 조각한 후 설치하는 데는 대단히 숙련된 수많은 장인들을 포함하여 엄청난 노동력이 동원되어야만 한다. 또한 조각을 새기는 기술 역시 이미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발전되어 있었어야함을 전제로 하는데, 크메르 제국이 흥기하기 전인 7세기경의 일부 공예품들은 그러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주44)(주45)
(주42) "Lost Worlds of the Kama Sutra" History channel
(주43) Lehner, Mark The Complete Pyramids, London: Thames and Hudson (1997)p.202-225 ISBN 0-500-05084-8.
(주44) Time Life Lost Civilizations series: Southeast Asia: A Past Regained (1995)p. 67-99,116,117,132,133
(주45) Scarre, Chris editor "The Seventy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p. 81-85 (1999) Thames & Hudson, London |
3. 앙코르와트의 현 상황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인도 고고학 조사국"(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이 앙코르와트의 복원을 담당했다.(주1) 1990년대 이래 앙코르와트에는 보존 노력이 지속되었고, 관광객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사원은 1992년 지정된 "앙코르 세계문화유산"(Angkor World Heritage Site)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의 지정은 기금마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정부로 하여금 유적의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고무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주46) "독일 압사라 보존계획"(German Apsara Conservation Project: GACP)은 신장들 및 여타 부조 장엄물을 파손에서 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약 20%의 장엄물이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는 주로 자연적 침식과 석재의 노후 현상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초창기 복원작업의 잘못에서 발생한 것이라 한다.(주47) 또 다른 활동으로는 무너진 구조물을 복원하는 것과 추가적인 붕괴의 방지 노력이 있다. 일례로 상부 층위의 서쪽 정면의 경우 2002년부터 비계 버팀목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주48) 한편 2005년에는 "일본정부 앙코르 유적 구제팀"(JSA)이 외벽의 북쪽 서고를 복원 완료했다.(주49) 2008년에는 "세계유적기금"(World Monuments Fund)이 <우유 바다에서 불생음료 찾기>(Churning of the Sea of Milk: 乳海攪拌) 회랑에 대한 사업에 착수했다.
이제 앙코르와트는 주요한 관광지가 되었다. 캄보디아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4년과 2005년에 시엠립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각각 561,000명과 677,000명이었는데, 이는 캄보디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이다.(주50) 관광객의 쇄도는 낙서보다 상대적으로 큰 해를 입히지 않았다. 회랑과 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밧줄과 목조 발판이 도입되어 설치되었다. 관광객 증가는 보수 유지를 위한 부수적 재원도 마련해주었다. 2000년도에 앙코르 지역을 통틀어 입장권 판매 세수의 28% 정도가 이 사원 한 곳에서 충당됐다. 현재 보수유지 작업의 대부분은 캄보디아 정부가 아니라 외국 정부가 후원하는 조직들이 담당하고 있다.(주51)
참고자료
- BBC Horizon (4 November 1999). Atlantis Reborn (script). BBC2에서 1999-11-4 방송, 2005-7-25 접속.
- Briggs, Lawrence Robert (1951, reprinted 1999). The Ancient Khmer Empire. White Lotus. ISBN 974-8434-93-1.
- Buckley, Michael (1998). Vietnam, Cambodia and Laos Handbook. Avalon Travel Publications. Online excerpt The Churning of the Ocean of Milk 2005-7-25 접속.
- Freeman, Michael and Jacques, Claude (1999). Ancient Angkor. River Books. ISBN 0-8348-0426-3.
- Glaize, Maurice (2003 edition of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 1993 French fourth edition). The Monuments of the Angkor Group. 2005-7-14 접속.
- Higham, Charles (2001). The Civilization of Angkor. Phoenix. ISBN 1-84212-584-2.
- Higham, Charles (2003). Early Cultures of Mainland Southeast Asia. Art Media Resources. ISBN 1-58886-028-0.
- Hing Thoraxy. Achievement of "APSARA": Problems and Resolutions in the Management of the Angkor Area 2005-7-25 접속.
- Ray, Nick (2002). Lonely Planet guide to Cambodia (4th edition). ISBN 1-74059-111-9.
- University of Applied Sciences Cologne. German Apsara Conservation Project 2005-6-21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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