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서 동해쪽으로 남하해 옥계IC에서 5분 거리에 '한울타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복동리.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이 마을에는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29일 오후 마을 정보화센터에서 이갑수 사무장이 기자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농촌을 다니면서 어린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만나 본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 여섯.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한편 도기 제작을 배워 경기도 여주 도기 공방을 다니다 4년 전 귀향했다. 지금은 마을 사업을 추진하는 사무장 역할을 하고 있다.
"저희 아버지가 마을에서 막내였는데, 이장님이 들어오시면서 이장님이 막내가 됐고, 지금은 제가 진짜 막내죠."
축 1. 폐교 활용 농촌체험캠프
한울타리마을에 변화가 생긴 건 박인재 이장(51)이 귀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1997년 폐교가 된 북동분교를 임대해 농촌체험캠프장을 만들었다. 제법 인기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망상해변이 10분, 정동진이 15분 거길에 있고 개발이 전혀 안 돼 청정 그 자체인 계곡도 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SBS<패밀리가 떴다>를 비롯해 방송도 여러 번 탔다. 재방문하는 고정 고객도 늘어났고 이들이 마을 농산물을 구매했따. 이때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이 시작된 셈이다.
폐교를 활용하면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7년에는 영화배급사와 극단을 운영하던 김창연 씨(57)가 귀촌해 영화 필름 박스, 포스터, 영사기 등 자신이 수집해온 영화 관련 소품들을 이용해 '영화'라는 테마로 학교를 새단장했다. 농촌체험 방문자만 2009년 2283명, 2010년 5596명, 2011년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방문객이 3500명으로 줄었지만 매해 방문객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당연히 마을 수입이 늘어났다. 이들이 쓰고 가는 돈만 2010년 기준으로 숙박비만 3400만원 가량. 먹는 데 쓰는 돈이 2000만원이고, 체험프로그램 수입도 876만원에 달했따. 부녀회에서 방문객들 밥을 해주고, 할머니들이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는 체험 선생님이 되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농업 외 소득이 생겼다. 수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방문객들이 사간 농특산물이 800만원 가량. 특히, 이들이 고정고객이 돼서 꾸준히 직접 주문하는 양도 상당하다고 한다.
"마늘장아찌를 냈는데, 맛있다고 하면 그냥 드립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나중에라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면서 전화를 걸어 마늘 좀 보내달라고 합니다."
축 2. 공동 영농
품질을 올리기 위해 친환경농법도 도입했다. 쌀은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하고 밭에서도 제초제는 일절 쓰지 않는다고 한다. 2008년에는 강원도 농업기술원으로부터 '친환경 BEST농업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최근에는 농작물을 다변화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원래 북동 마늘은 유명했죠. 그리고 벼 농사도 우렁이 농법으로 바꾸었고요. 최근에는 임산물을 개발하느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북동리는 산촌이어서 농경지는 55핵타아르에 불과하구요. 전체 면적의 99%인 2542핵타아르가 산림입니다. 이에 개두릅(엄나무순)작목반도 만들고 산채 작목반도 만들어서 송이 버섯, 참나물, 고사리 같은 임산물 생산을 늘리고 있습니다."
'북동 마늘'과 같은 마을 공동 브랜드도 만들었다. 전에는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소주 박스 같은 데 마늘을 담아 보냈는데, 최근에는 박스 2종을 제작해 자체 마을 브랜드를 홍보하고 있다. 자연히 마을 공동으로 품질관리도 한다. 우렁이쌀 같은 경우에는 친환경급식용으로 수매가 됐었는데, 자체 브랜드로 소포장 판매도 확대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요즘 이갑수 사무장은 공동체 영농법인을 만드는 일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 법인 만드는 거 어렵지 않죠. 인감 도장 몇 개 찍어서 법무사 사무실에 가면 금방 법인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섣불리 추진해서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지 않고 빠지는 사람들이 있으면 마을 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짜낸 묘안이 마을회, 부녀회, 장년회, 각 작목반이 공동 출자해서 공동체 법인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 모두가 법인에 참여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 모두가 법인에 참여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법인화 과정이 1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더디더라도 제대로 가야죠."
올해 2월 영농법인 '북동'이 설립되면 법인을 중심으로 사업들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법인 사업의 한 축은 농촌체험프로그램 등 '마을기업'사업이고, 또 다른 한 축은 농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농업을 위한 '농어촌공동체회사'사업이다.
이렇게 마을이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화합, 공동체 정신이었다. 총 63가구 122명이 거주하는데, 마을 주민들은 마을회를 중심으로 노인회, 부녀회, 장년회 등의 친목 조직은 물론 우렁이 쌀단지, 마늘, 개두릅, 산채 등의 작목반으로 그물처럼 조직돼 움직인다.
마을 소개 자료에 따르면 "주민의 노령화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참여도가 높으며 마을 발전 방향 관련 회의 등 상호 의사소통을 통한 사업에 대한 필요성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인식, 마을 발전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인다"고 돼 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농촌의 단점을 극복하고 주민들이 변화의 물결을 적극 수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귀촌: 정보의 결합
2003년 이후 귀농·귀촌한 가구도 11가구 21명이다. 귀촌자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이장과 마수장인 이갑수 씨 모두 귀촌자다. 특히, 이들의 '젊음'이 마을 만들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갑수 사무장은 "작년 초에는 어르신들을 모셔다 페이스북 교육도 했어요"라며 씩 웃었다.
이 밖에 목공예에 조예가 있는 귀촌자는 마을에 장승을 세웠고, 도기 제작을 했던 이갑수 사무장도 조만간 마을에 도예체험장 문을 열 예정이다. 조만간 화가 한 명 귀촌할 예정이라고 한다.
입소문이 나고 우수사례로 꼽히면서 정부와 짖자체의 각종 지원 혜택도 많이 받았다. 2003년에는 농협중앙회에서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돼 4년 동안 2500만원을, 2005년에는 산림청으로부터 전통숲 복원사업 및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8000만원을, 2007년에는 농식품부로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돼 2억원을, 2010년에는 행정안전부로부터 정보화마을로 지정돼 2억원을 2011년에는 농어촌공동체회사로 지정돼 5000만원을, 친환경BEST시범마을로 지정돼 강원도 농업기술원으로부터 2억원을, 2011년에는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사업으로 5000만원을 지원 받았다.
이 또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열심히 발품을 팔며 지원 조건에 맞게 마을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무장에게 요즘 근심이 생겼다. 곧 마을 공동체 영농법인도 출범하게 되지만, 2012년에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사업이 뚝 끊겼다.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캐묻는 기자에게 이 사무장은 "사후관리 차원에서의 지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단 북동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농촌에 가면 정부가 이것저것 지어준 것들은 많지만 지을 때만 지원해주고 이후 지원이 끊겨 운영이 안 되고 방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 사무장은 "무엇이든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2~3년은 운영자금 정도는 지원해줘야지 낭비성 사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또 한가지 걱정은 인근에 들어설 대규모 공장이었다. 이미 시골 풍경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거대한 한라시멘트 공장이 있고, 곧 포스코의 제련공장도 들어설 예정이다. 이 사무장은 유동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개발 열풍이 마을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농촌체험캠프장으로 쓰고 있는 학교의 경우 교육청에서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데, 공시지가가 오르면서 임대료도 그만큼 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제가 이 학교를 졸업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여기가 '국민학교'였어요. 1학년 부터 6학년 까지 다 있는 그런데 제가 국민학교 마지막 졸업생이었죠. 그 다음해인가 그 다음 다음 해인가에 분교가 됐고, 결국 폐교가 됐죠. 지금은 마을 만들기에 중요한 자산이 됐습니다."
융화: 귀촌의 제1조건
이 사무장은 '귀농·귀촌'에 대해 한 마디 조언을 했다.
"'딴 거 필요없고 술만 잘 마시면 된다'는 말이 있어요. 좀 과장된 말인데, 마을 주민들과 융화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보통 귀촌에는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한 이들과, 농업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업적 측면에서의 귀촌 두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 중 연고가 있는 마을로 귀촌하는, 이를테면 '귀향'의 경우 융화가 더 쉽다. 하지만 생면부지 마을로 귀농·귀촌하는 경우에는 주민들과의 유화와 소통에 더욱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영화학교 교장인 김창현씨는 50미터 떨어진 곳에 지나가는 할머니에게도 옆에 있는 사람 귀청 떨어지도록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서른 여섯. 이갑수 사무장. 고향 땅이긴 하지만 갑갑하진 않을까.
"소득은 줄었지만 그래도 여기가 낫습니다. 부모님이 계시니 먹고, 자고 등의 생활여건이 마련돼 있고, 주변에 강릉, 동해 같은 도시가 있어서 가끔 친구들 만나러 나가서 소주도 한 잔 하고, 낚시를 좋아하는데 계곡도 있고 바다고 있죠. 손님들 중에 낚시하고 싶다는 분 계시면 모시고 가서 같이 합니다. 도시에 살 때는 산 타고 각종 레포츠 즐겼는데 여기서는 농촌체험학교 진행하다 보면 그게 일상이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돈 버는 건 자기 하기 나름이죠. 도기 공방을 3~4월께부터 운영할 생각인데, 다기도 팔고 차도 팔고 입소문 나면 레스토랑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조금씩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죠."
대도시 요식업은 졸고, 귀촌인은 늘고
몇 해 전부터 귀농·귀촌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베이비 부머세대(1955~1963년생. 약 712만명)의 은퇴가 본격화 되면서 귀농·귀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농식품부 조사에 따르면 대도시 거주 베이비 부머 세대의 66.3%가 농어촌 이주를 희망하고, 특히 13.9%는 5~10년 내 이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남 같은 경우 지난 20년간 귀농·귀촌 인구가 3330가구로 집계됐고, 전북은 지난해 인구조사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권으로의 인구유출보다 수도권으로부터의 인구유입이 더 많은 해로 기록됐다. 반면 대도시 은퇴 자영업자들의 대표적 업종이었던 요식업의 폐업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이들은 어릴 적 농어촌생활을 했고, 아직 고향에 부모님 집과 같은 생활 기반이 있어 귀촌을 하게 되거나,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노후를 위해 귀촌하는 경우로 나뉜다. 주목할 점은 과거 '귀농'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최근에는 '귀촌'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는 것이다.
귀농·귀촌센터 관계자는 "귀농을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큰 도을 들여 시설이나 축사를 짓고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평생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며 처음 2~3년은 소득을 올린다기 보다는 농촌 생활에 익숙해지고 주민들과 친해져 공동체 일원이 되는 정착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농어촌에 산다고 해서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며 "농사가 아니라 자신이 도시에서 쌓은 기술과 전문성을 농촌을 위해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하는게 공동체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귀농·귀촌 환경도 좋아지고 있다. '고령화', '인구감소'로 인해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이라는 '존재론적 위기'에 빠진 농어촌 기초단체들은 귀농·귀촌인들을 농어촌의 새로운 활력소로 인식하고 적극 지원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올해 귀농·귀촌 전문상담사 120명을 양성해 현장실습교육을 하고, 농지·어선·주택 구입·시설건립 등 창업기반 마련을 위해 6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 밖에 '귀농·귀촌 종합센터'를 확대 개편하고 공동 영농·유통·가공, 농어촌 관광 등을 추진할 농어촌 마을 공동 경영체를 선정해 컨설팅 등의 사업을 집중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귀농·귀촌이 20년을 넘어가면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한 전문 지식이 상당히 축적돼 있다는 점이다. 귀농·귀촌에 관한 서적도 풍부한 편이고,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조언을 구할 선배 귀촌인들도 많다.
강릉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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