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당고개와 전주 성황당.hwp
새주소에 치여 없어진 서낭당고개
전주 풍남초등학교와 전주고등학교 사이 진안네거리에서 인후동 도매다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서낭당고개라고 했었습니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겨운 지명 이었던 서낭당고개는 전주시가 만든 새주소에 치어 사라졌습니다.
서낭당고개는 전주의 성황당(城隍堂)이 자리한 기린봉 줄기가 뻗어 내린 자락을 넘나드는 고갯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은 시내버스 낙수정 종점에서 군경묘지를 지나 더 올라가면 전주팔경승(全州八景勝), 기린토월(麒麟吐月)의 동천(洞天)에 있습니다.
성황당 샘에서 내린 낙수정 물은 동문네거리를 지나면서 마당재 물과 만나 노송천을 이루고, 전주시청 앞으로 흘러 한국은행 옆에서 모래내와 만나 금암천이 되어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전주천으로 들어갑니다.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은 지금 김부대왕(金傅大王)과 두 왕비, 왕자, 공주 등 오체(五體)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지만, 어찌하여 전주에서 신라 경순왕을 제사 하게 됐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천손민족(天孫民族)인 우리 겨레는 상고시대부터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등 하늘에 제사를 드려왔는데,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면서 사찰(寺刹)과 문묘(文廟)에 밀려나고, 서울에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이 세워지고, 각 고을마다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하던 솟터(蘇塗)가 성황사(城隍祠)로 바뀐 것입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고려(高麗) 문종(文宗) 9년(1055년) 함경남도(咸鏡南道) 선덕진(宣德鎭)에 성황신당(城隍神堂)을 두어 봄, 가을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의 설립 기록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高麗) 신종(神宗) 2년(1199년)에 전주목(全州牧) 사록겸장서기(司祿兼掌書記)로 부임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제신문(祭神文)이 실려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전주부(全州府) 사묘조(祠廟條)에 이규보(李奎報) 몽험기(夢驗記)가 기록돼 있어, 고려(高麗) 말기(末期)부터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이 있었음은 확실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태조(太祖) 2년(1393년)에 송악(松嶽)의 성황신을 진국공(鎭國公)으로, 화령(和寧), 안변(安邊), 완산부성(完山府城)의 성황신은 계국백(啓國伯)으로, 진주(晉州)의 성황신은 호국백(護國伯)으로 봉(封)한 기록이 있습니다.
전주성황신(全州城隍神)은 나라와 고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깍듯이 모셔졌으며, 풍운뢰우(風雲雷雨)와 국난(國難) 그리고 수화병재(水火病災)가 있을 때는 서낭당고개 넘어 인후동(隣后洞) 동초등학교(東初等學校) 뒤편에 있는 여단(厲壇)에서 성황당(城隍堂)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액(扼) 풀이 제사(祭祀)를 드렸습니다.
숭유정책(崇儒政策)을 편 조선조(朝鮮朝) 내내 각 고을의 성황당(城隍堂)들이 유가(儒家)들의 억제(抑制)를 받아왔고, 경술국치(庚戌國恥) 후에는 일제(日帝)가 전국의 성황당(城隍堂)을 모두 훼철(毁撤)했으나,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 만은 몇 차례 자리를 옮기기는 했어도, 사우(祠宇)와 위패(位牌)가 그대로 유지돼 왔습니다.
가장한국적인전통문화도시 전주에는 국보1호인 숭례문(崇禮門)의 모범인 전주남문(全州南門)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문화재인 성황당(城隍堂)의 모범도 전주성황당(全州城隍堂)임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성황당(城隍堂)이 여단(厲壇)까지 내려 뻗은 산줄기의 서낭당고개를 되살렸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