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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의 새 전망
(Letty M. Russell 著)"을 읽고-
들어가는 말
New York의 East Harlem 프로테스탄트 교구에서 14년간 목사와 교사로서 사역한 저자의 경 험과 W.C.C의 전도 연구위원회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의 산물인 이 책은 기독교 교육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다소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이요 유익한 정보였다. 이에 본서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내용에 대한 소감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러셀은 자신의 경험의 신학적 반성으로 두 가지 시야를 얻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신앙자는 이 세상을 "장미빛 색안경"을 통해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믿음의 눈이란 성서적 시각과 관점 내지 시야로서 이것으로 심판과 용서의 양쪽을 볼 수 있다. 즉,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계를 조망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세계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일부분으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는 눈이다. 또 하나의 시야는 증인 공동체의 생활은 일치(unity)이라는 점이다. 교회안의 교육은 교회생활의 전체 속에 포함된 것으로 증인공동체 장에서 분리될 경우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증인공동체내의 일은 신앙적이든 불신앙적이든 모두 기독교 교육의 양육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그녀의 경험은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새로운 측면을 제시한다. 교회회중의 구조라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사명 즉, 선교활동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이며, 여기서 기독교 교육은 이 참여의 초청을 감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인 역사적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는 현실세계이며, 선교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이해와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의 선교구조 역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Ⅰ. 기독교 교육 :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
제 1부 에서 현재의 기독교 교육이 '자녀에게 빵대신 돌을 주고 있다'는 현실비판에서부터 출발한 저자는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기 위한 길들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기독교 교육의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사유물화 되었다는 것이다. 즉, 1780년 Robert Raikes의 주일학교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19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쳐 최근의 주일학교를 비롯한 기독교 교육은 항상 교회의 관심사로서의 자리를 지켜오면서도 고작해야 시대의 문제나 교회발전을 위해 그리고 사회의 도덕적 상황에 대한 "작은 반창고"로서의 역할 밖에 감당치 못했다. 결국 번번이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의 빵이 아니라 "돌"에 지나지 않았다 (마 7:9-11)고 한다.
기독교 교육에서 잘못된 두 번째 것은, 기독교 교육을 교회생활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해서 결국 교회의 통일을 부정해버린 일이라 한다. 그 동안 교육적인 효과라는 이유로 혹은 관리상의 능률성이란 관점에서 구획을 그어왔으나, 교회는 결코 특수한 지적 훈련의 장으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증인 공동체로서 교회는 여타의 상황과는 달리 어른, 아이,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존재와 양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육을 사유화하고 있는 한, 교회는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의 일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개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회에 예속하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기에 교회도 또한 이것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사는 곧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지어주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단지 교사일 뿐만 아니라 교육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분명히 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교육의 장에서 교회의 교육적 역할은 교사가 되는 일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 모든 자들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일하는 자로서 거기 참여하는 일이다. 만일 기독교 교육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과 관련 짓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부분도 역시 그 사랑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눅 11:13). 기독교 교육은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구획화되자 마자 벌써 기독교 교육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활 안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이란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를 통해서 참 인간성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의 과업에 참여케 하도록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우리 자신도 참여할 수 있기 위한 방법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의 선교는 즉시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교육이며, 다시말해 선교 즉, 복음을 선전한다는 것은 그대로 복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를 교육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이란 한 개의 독립한 범주는 아니다. 그것은 정녕 복음 그 자체의 일부이다.
변천하는 세계를 장(場)으로 하는 기독교 교육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과정과 변화의 세계"라고 본다. 세계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이며, 그것은 세계가 바야흐로 위기와 변동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고, 세계는 사건이 인간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며 인간이나 국가나 하나님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세계이다. 저자는 류웬(Leeuwen)이 그의 저서 "세계 역사 속의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한 용어를 인용하여 테크노크라시(기술 지배)의 세계관와 로고스적인 그리이스 세계관 그리고 소위 과학적인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기술지배 현상은 운명적인 필연은 아니며 시간과 역사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이 현실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세계와 자유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을 참 인간되게 하고 진실하게 책임을 짊어지는 주체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계적인 목적에까지 시야를 넓게 보는 일, 그러면서 모든 인간에 의해 날조된 이데올로기들을 끊임없이 부정해 가는 일이라 한다.
기독교 교육과 이 세상의 일반적인 교육과 그 이념 간의 구획을 긋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이는 첫째, 교회도 역시 이 세상의 일부로서 그 교육적인 생각은 모두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제반 관계와의 다함없는 상호작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육이란 과정은 학교, 가정, 교회 그리고 그 어느 장소에 관계없이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교육의 분야에서 교회의 주요한 책임은 완벽한 교회 교육의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교육제도 속에서 이 세계를 위한 주님의 누룩으로 주께 봉사해 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참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미션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의 초청에 참여하는 일이 곧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 학교 제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유효적절한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기독교 교육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세속교육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되며, 관련 세상분야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상교육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교육은 그 이념의 변화에 주목하게 한다. 그 첫째 변화는 교육자들이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교육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일이다. 즉,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의 유동사회" 안에서 생존할 수 있을 교육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교육자들이 지식의 구조를 규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또한 특정한 학습훈련이 주어지는 것은 미래의 학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기본적인 태도를 학습자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탐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학습은 브루너(J. S. Bruner)의 말대로 "먼저 기능이 아니라 한 일반적 관념을 학습하는 것으로, 그 일반적 관념은 그 후에 따르는 문제를 최초에 습득한 관념의 특수한 사례로 인식하기 위한 기초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브루너의 생각은 "낚시 잡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는 유대인의 교육방법의 적절성을 떠올리게 했다. 세 번째 변화는 프로덕션 팀(Production Team, 생산성 집단:당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임기웅변(ad hoc)으로 형성된 집단)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육활동의 강조이다. 러셀은 이런 집단은 교육의 영역에서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고 적고있다. 곧, 전문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교수법의 문제와 문제해결을 위한 기능집단에 참가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동기를 발견하게 되는 학습활동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기독교 교육 역시 변화와 과정의 세계 속의 교육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또한 교회의 전통적 체질인 구조주의적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기독교 교육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게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제공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분히 율법적인 구조에 젖어있는 한국의 많은 교회(우리 교회를 포함해서)의 현실에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Ⅱ. 기독교 교육의 장(場) : 증인 공동체
신명기 6장의 "쉐마"의 말씀에서 출발한 제 2부에서는 오늘날 기독교 교육이 결국 증인 공동체(Witnessing Community)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을 체험한 자들이 그 기쁨을 말과 행위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축가를 부를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견해에서 시작하고 있다. 또한 이 구속의 이야기는 오직 생활 속에서 리얼하게 체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증인 공동체 없이는 기독교 교육이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저자는 세상 속의 교회를 기독교 교육의 장으로서 이해하고 있으며, 기독교 교육 행위가 "참여"라는 성격을 내포하는 이상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자신의 행위 안에 내포된다고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초청이 주어져 그 의미가 해명될 수 있게 하는 장(場)은 그리스도와 세계 사이의 계속적인 대화라는 구조를 지닌 살아 있는 콘텍스트에 다름 없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증인 공동체가 이루는 역할이 바로"장(場)"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거의 동일 종교집단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지 의구심이 생겼다.
증인 공동체는 반드시 어느 특정한 타입의 교회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마 18:20). 이것은 확실히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와 비슷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 힘있는 구속의 역사를 그들의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 증거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롭게 살아내도록 힘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로 이 증언이 이방의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원심적으로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롬 1:5). 이 증인공동체는 이 세계 안에 자신을 드러낸다. 증인 공동체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할 장소는 바로 모든 인간이 서로 섬기는 필요에서 함께 사는 이 세계이다. 이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이 세계와 자신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또한 기독교 교육의 질과 성패를 좌우하는 고정적인 콘텍스트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1965년에 린(Robert Lynn)이 지적한 대로 "교회가 전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상실하고 참 사명을 망각한 채로 무기력하게 되어 있다는 표상"이 바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육의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 교육이 성립하는 장은 증인 내지는 파송자(missionary)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임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신도들을 정비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고 이 세계에 파견되어 있기 때문에 분래적인 의미에서 미셔너리 즉, 파견자의 공동체이다. 흔히 사용하는 "전도(evangelism)"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에서 모든 사람이 복음의 사실의 현실화를 목표로 하여 교회가 그 생명을 걸고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증언", "파견", "전도"는 교회의 본질과 기능의 전체를 표현하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일치하며, 이는 기독교 교육의 개념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기독교 교육도 역시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참여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교육과 선교의 구별은 다만 관점과 시각의 차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 나에게는 미쳐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증인 공동체의 구체적인 구조나 조직 형태는 다양한 기능과 그 때 그 때 요청되는 임무에 응해서 다양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다원적인 복합 사회에서 사회적인 여러 관계가 이미 단일한 형태로 될 수 없기에 교회의 여러 구조도 다원화의 방향을 잡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고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개개인의 흥미나 필요 혹은 사회 동향에 적응한 방법으로 증언에 임무를 감당하려고 지향하는 한 소위 주거지 형태의 교회(residential congregation)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에 맞추어 몇 가지 기본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위 가족으로서의 교회구조(family structure)이다. 이는 종래의 주거지 형의 교회성격을 띠고 상호 신뢰감과 연대감 아래 각자가 사회에 대한 봉사의 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대응적인 상설 봉사기관형의 교회구조(structure of permanent availability)로 이는 교회의 장기적인 봉사활동을 위한 형태이다. 제 3의 타입은 소위 "기동부대형의 교회구조(task force structure)"로 이는 그때 그때 특수한 요구, 기능, 목적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편성되는 것으로 일정한 임무가 성취되면 해산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다소 보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과연 제2, 제3의 형태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단체이니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그 속에서의 예배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모른겠다.
저자는 여기서 교회의 구조형태에 관한 유연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증인 공동체의 멤버쉽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저 쪽에서 부른 초대, 즉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 자신의 일하심에 기초를 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로 참가자 측의 개인과 전체의 문제로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실현하는 방향이 기본적으로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참가자의 조직 형성은 그리스도와 그의 일하심에 응답하려고 뜻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궁극적인 헌신을 명료한 것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참가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과의 연대를 원하는 그들의 의지를 존중하는 길을 여는 일이 되는 것이다. 넷째, 이런 증인 공동체의 규율은 그 집단들의 개별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필요에서 육성된다. 또한 다양한 형태를 지닌 증인 공동체에 있어서 교육적인 과제 또한 다양화(a variety of shapes)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족구조로 이해되고 불리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시대의 인종, 성별,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남녀와 노유가 한 "하나님의 가족"으러 결합되는 근본적인 장소가 된다. 신약성서에서 "집(oikes)"은 특히 "하나님의 한 집안, 혹은 가족"으로 교회적인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는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적인 소집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의미로 명확히 파악되어 있다. 이는 결코 특정한 가족 단위와 즉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전혀 차별이 없기에 그 멤버가 되기 위한 특별한 패턴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의 성격은 각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기에는 친족일가는 물론 일꾼이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이른바 대가족 제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안 내지 가족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형성하는 특이한 소집단이며,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오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하나가 되어 있기에 계급이나 인종의 차별대우 등은 일절 있을 수 없었음이 확인된다(갈 3:27-28)는 것이다. 여기선 한국 교회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별성과 계급구조가 떠올라서 기분이 상했다.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도 차별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이 생각난 부분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현대에 있어서 가족적인 형태의 증인공동체는 구조상으로 신약성서의 오이코스와 유사하지만, 이것이 사회전체의 구조를 그대로 대표하는 것 같은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가족" 개념과 즉각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현대사회에 있어서 오이코스적인 구조를 가진 타입의 증인 공동체를 첨가해서 다시 몇 개의 보충적인 형태, 그것도 때에 따라서는 가족적 타입과 대립하는 구조를 갖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는 서서히 개인을 기본적인 단위로 하는 집단의 성격을 띠게 되고, 가정 생활은 실질적으로 세속화되어 소위 그리스도교적인 제사의식도 차츰 쇠퇴해 갔다. 그런데 1500년경 까지는 사회가 안정하고 교육이 보급됨으로써 사회생활의 주요한 무대인 가정 생활의 회복이 이루어져서, 다시 가족이라는 이념 그 자체가 변용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생겼다. 사실 루터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며, "손과 입을 가지고 복음신앙을 고백하기 원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선 가정 교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열심히 권고했다. 그 뒤 산업혁명의 시대를 거쳐 프로테스탄트 전체로서는 대개 중산계급의 가정 구조와의 사이에 자기 동일화를 시도했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소위 핵가족은 단지 두 개의 기본적인 기능, 즉 어린이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한 사회화의 기능과 성인들을 사회 대중 속에 정당하게 자리잡게 하는 안정화의 기능 주에 어느 한 쪽 또는 쌍방을 충분히 다하는 한에 있어서만 유효성을 지닐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의 다원화 현상에서 가족적인 타입의 구조를 갖는 증인 공동체라는 것은 일정한 거주지역에서 생활하는 남녀노소를 봉사의 일을 위해 소집함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하는 교회적인 교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가족적 구조의 형태의 특질이란 무엇인가? 러셀은 먼저, 교회 그 자체가 한 가족으로 서서히 성장하고, 그 결과 서로의 사이에 공감과 신뢰가 오가며 거기에 희망이 생기는 일을 들고 있다. 그래서 모든 자가 아마도 그 생애에서 처음으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의 깊은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점에 있다고 본다. 중요한 특질은 그 자체가 바로 한 가족처럼 기능하며 항상 사랑과 신뢰로 충만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서로 돕고 회목하고 함께 일하고 또 때로는 사랑에 의한 상호비판이 행해지는 것이다. 진실한 공감과 작은 모임의 역할은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양육과 훈련의 과정의 의미라는 것이며, 생활을 통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는 성인교육도 교회학교 교육과 마찬가지로 준비되어야 한다. 교회의 생활이 곧 기독교 교육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에 안타까웠다.
이런 교회의 성격상 지도자로서 목사는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이 또하나 흥미롭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性)이 아니라, 당사자의 적성 유무, 또 가족으로서의 친됴의 심장부가 될 의지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권위적인 태도가 아닌 기능적 의미에서 권위를 갖고 함께 수고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상호비판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모계구조 교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남녀노소 간에 차별이 없으므로, 교육의 과정은 각자가 각기 좋은 은사를 살려 타인을 위해 섬기도록 하는 "상호교육"의 책임이 존재하며, 이같은 공동학습의 접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족교회"는 다음의 몇 가지 그 구성요건이 적용된다. 첫째로, 그 지역이 사람들의 주거의 현장인 동시에 생활의 장인지를 살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그 멤버가 서로 도와가며 건전한 상호비평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규모를 작게 하고, 모두가 모였을 때, 낯선 사람이 하나도 없게끔 화친하는 관계가 실현되고 있는가의 여부도 음미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스스로 포용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기평가해야 한다. 끝으로, 가족 타입의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는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진지한 심경에서 받을 각오가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목회자들의 자질을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교회 내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 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다원화된 사회구조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증인 공동체의 모양도 다양해진다. 이렇게 다양해진 증인 공동체에서의 교육은 그 형태에 관계없이 그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소집되고 인간의 참 휴머니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정비되고 훈련됨을 목적으로 하는 "증인 공동체"라는 점 이외에는 전혀 자유로우며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대응적 구조중에서 상설 기관으로서 교회는 요구되는 조건이 있다. 먼저 일정한 "장소"가 필요하다. 즉 사람들이 언제나 수시로 이용할 수 있을 유효한 대응 기관이 상설되어야 한다. 또한 그 성격상 봉사의 제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그 구성은 많은 경우 복수일 것이 바람직하다. 봉사자의 팀으로서 교회는 결코, 봉사 대상자를 자기 집단으로 끌어 모아들이는 일을 꾀하지 않고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적인 구조형태는 반드시 일정한 "장소"를 점유하지 않으며, 관심의 중심은 오히려 직면하는 문제 그 자체에 향해져 있어서 구성원들은 전체 에너지를 그것을 위해 투입한다고 한다. 기동적 구조를 가진 집단은 항상 복수멤버로 구성되지만, 그들의 목적의 실현을 위해 소수의 숙련된 전문가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교회의 기동적 그룹은 항시 사회의 누룩으로 작용하여 모든 불의와 인간소외의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방향을 찾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명에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일단 사회 스스로가 그 기능을 자기 힘으로 담당할 수 있게 되면 교회 그룹은 해산하거나 적어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가, 그후에는 주의 깊은 파수꾼이 되어 대힌 일을 맡은 정부나 다른 사회 기관들이 완전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조력함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사회구원의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진정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고 사회구원에 대한 기독교 교육의 입장을 정리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러셀은 증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여러 구조는 그 자체가 매우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 교육의 장으로서의 여러 교회의 구조들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교육과정의 구조는 월등히 대화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한다. 교육의 방법은 참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며,교육의 목적은 성서가 말하는 의미의 자유의 축하잔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장소는 증인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녀는 프랑스의 떼제(Taize)공동체 등 미국과 유럽의 몇몇 공동체와 기관들의 예를들고 있으나, 한국적 현실에서 적용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을 교회 내의 교육으로만 한정짓고 싶어하는 우리의 시각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Ⅲ. 기독교 교육의 구조 : 대화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에서 그 실마리를 찾은 러셀은 이런 대화야말로 기독교 교육의 구조 혹은 형태라고 주장한다. 즉 열려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들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복된 소식을 위해 기쁨으로 증거하는 일의 양방을 모두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참 인간으로 변혁하려는 하나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가하려는 데 있어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인 이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러셀은 밝히고 있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대화에 참여할 때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대화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대화러서 그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미션으로 부르는 그리스도의 초청으로서, 증인 공동체가 귀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들을 결단과 헌신으로 이끌어 주시는가를 보여주는 비유로 저자는 누가복음 24장을 들고 나온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첫째, 이 대화가 엠마오의 도상에서 (on the road)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라야 참 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대화는 "이야기하며, 의논하고 있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또한 셋째로 대화라는 것이 자기계시의 사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제자들은 이때에야 믿음의 눈을 뜨게 된다. 끝으로 이 대화가 결국 증언의 행위로 다른 사람의 믿음의 눈도 뜨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의 구조로서 대화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대화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의미를 가지고 교사와 학생들 양측이 한 회화 속으로 이끌려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육에 있어서 참 인간관계는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과 함께 기독교 교육의 대화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기독교 교육의 구조를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이와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성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기초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장비하는 일이 곧 성서연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성서를 연구하는 구조 역시 대화적인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누가복음을 인용하면서 러셀은, 성서학습의 대화적 구조를 설명한다. 즉, 한길 위에서의 대화여야 하며, 공동으로 즉 그룹연구로, 그리고 신앙의 사건을 볼 수 있는 진지함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이러한 성서연구의 대화적 구조가 하나님 이해에 의한 사람이해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대화의 장으로서의 자연적 사회집단은 생산성 집단과 동료 집단이 있으며, 러셀은 이들이 교육적 대화에 있어서 적극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의 동료 집단은 그들의 생활의 중심점으로서 그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는데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교사로 수년간 일해온 나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Ⅳ. 기독교 교육의 방법 : 참여
기독교 교육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가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참여"에서 인간의 평등, 횡적인 관계 속에서의 학습 경험 중시, 인간 지성의 창조적 사고로의 해방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칼빈의 교회는 교육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의 끊임없는 참여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 생활에서는 참여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오늘의 교회가 크건 작건 계층적인 직제조직으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독교 교육의 교사는 참여하는 교사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참 교사이며, 기독교 교육의 교사는 이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증인 공동체가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이라고 한다면, 이 공동체가 곧 그 자체로 가르치는 팀이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녀는 가장 자연스런운 교육 형태로 팀티칭(Team teaching)을 들고 있다. 어떠한 교육 구조의 형태를 취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교의 봉사를 위해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하는 증인 공동체 전체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는 것으로, 이는 최근 한국의 몇몇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공동체교회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주일학교라는 구조적인 틀에 메이지 않고 부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고 성경연구와 봉사활동에도 같이 하는 교회는 목사로부터 유아에 이르기까지 공동으로 서로 서로에게 교사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상호교육의 방법으로서 팀티칭은 특히 동료 그룹 교육의 주요한 부분이며, 미숙한 교사나 어린이들이 자기 나름의 지식이나 경험을 매우 자연스럽게 오늘의 어린이에게 연결시켜 응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모든 팀티칭에 있어서 결정적 요소는 봉사실천을 통한 훈련에 있으며, 여기서는 교사도 배우는 것이다. 또한 팀티칭은 그룹의 계획수립(group planning)을 의미한다고 한다. 팀에 의한 계획수립은 거기 참여하는 각자가 자기에게 적합한 책임을 자진해서 맡는 태도를 촉진시키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경험으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학생들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항목들을 나열한 뒤에 현재 우리가 갖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자원(RESOURCES)들을 점검하여 구체적인 실천계획의 단계들을 설정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물론 교사인 나에게도 많은 것을 얻는 기회였음을 회고할 수 있었다.
러셀은 참여의 카테키즘이란 용어를 설명하면서, 이는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는 증언과 봉사의 공동체가, 이 대화를 통한 사색에 참여함으로써 각자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이 공동체의 생활 전체와의 관련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물음을 일으켜 가는 것이라고 한다. 다소 생소하고 난해한 이 부분은 공동체, 놀이, 성서라는 세 학습분야를 통해 구체적인 예를 보고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공동체는 학생들이 매일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서의 공동체이며, 그것은 그의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동료집단 및 생산성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이다. 또한 그것은 그가 이 세계와 사회적인 계층에 그와 함께 참여하는 증인 공동체이다. 여기서 봉사와 연대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놀이는 복음의 기능이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갈 5:1)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참여토록 초청하는 것이 된다. 셋째는 성서로서, 참여의 카테키즘이 학생들로 하여금 마치 자기 자신이 성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에도 이런 경험은 이 세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눈"을 소유하게 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말하고 있는 축제와 그후의 연계된 구체적인 "운동(MOVEMENT)"에 대해서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회의적이기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참여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을 형성하신다고 전제한 저자 러셀은, 삶의 스타일을 통한 참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해 감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이나 관습을 어떤 한 스타일 즉 삶의 모습으로 형성해 간다고 한다. 나는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공감과 함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살면서 이 세계 한복판에서 기능적으로 일하기에 적합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을 이루도록 추구해 나갈 때, 우리는 두 가지 위험 앞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이런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개개의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망각해 버리는 위험이다. 이 경우, 단지 관습에 불과한 것이 어떤 종류의 율법이 되며,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종의 모습임이 망각되어 그것이 일종의 우월감을 동반하는 특권의식으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또하나 다른 위험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복종의 형태가 이렇게 세상의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화해 가더라도 복종 그 자체는 결코 변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라는 견고한 관계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생활 형성이 가능하게 된다고 볼 때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상을 나타나고 있는 사도행전 2:42-47의 말씀을 통하여 러셀은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오해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정된 어떤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이해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주님을 증거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교회"라는 포괄적인 주제 밑에 움직이고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러셀의 이해이다. 이러한 삶의 스타일이 목표하는 것은 선교 곧 하나님의 미션이 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기능적이고 행동을 동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러셀은 사도행전 2:42-47의 이해를 바탕으로 누가의 의도를 설명하고자 한다. 초대교회의 삶의 스타일은 곧 선교활동의 스타일이며,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께 향하여 열려진 생활 형태와 이 세상을 향해 열려진 생활형태를 모두 소유함으로써 이 선교적인 스타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형태야말로 크리스천의 삶의 스타일의 원형이라는 이해를 가짐으로써 이 두 초점은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 계속 대화적인 관계를 갖게 한다. 증인 공동체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서와 성례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을 굳이 선택하셨기에 가능했음을 인식한다. 이 때 성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일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활동을 분별해 내고 우리 생활 어느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를 아는 데, 즉 신앙의 눈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진지한 성서연구나 묵상과 토론 등으로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여러 방법, 특히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여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믿음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2개월에 거쳐 개역과 공동번역으로 구약성경을 통독하면서 러셀의 견해가 사실임을 체득했다고 말 할 수 있다.
한편, 러셀은 성례전이 우리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지(告知)와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표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물세례로써 우리를 죄의 지배적인 힘으로부터 해방하고, 떡을 뗌으로써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날에 우리의 새로운 삶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우리를 계속 용서하시며 갱신하신다. 이 두 개의 성례전은 증인 공동체의 예배와 행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과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우리의 응답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은 용서, 자유, 희망 등의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어 우리가 그것을 이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세례의 기원이나 성례전의 오용 등에 대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증인 공동체 생활의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고 하며, 성례전 없는 기독교 교육은 핵심이 빠진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례전이야말로 하나님의 미션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응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례와 성찬의 의미 속에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을 발견해내는 러셀의 설명에서 예전에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참여했던 성례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의 구체적인 행동이 결국엔 나를 비롯한 모든 따르는 자들에게 교육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
구체적으로 러셀은 유아세례와 성찬을 설명한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을 들어내며, 어린이는 그 안에서 교제하며 자라가면서 한 사람의 회원으로 인정되고 양육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능한 한에서 모든 증인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자기를 음미하면서 왜 내가 이 식탁에 참여하도록 허락되어 있는가를 생각할 뿐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볼 때,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한번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생활 스타일에 참여함과 동시에 이 세상을 향해 열린 생활 스타일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이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대화적인 관계에 참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 세계를 향해 열려진 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의 스타일은 이 세상의 변화에 호응하여 변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이 봉사라고 저자는 주장하는 바, 형제들에게 대한 우리들의 봉사 활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의 자발적인 발로일 뿐 아니라, 비뚤어진 사회 안에도 하나님의 고침의 힘이 확실히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의 표상이 된다고 한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봉사의 활동은 봉사적인 재능의 강매가 아니라, 만인의 종이 되기 위해 오신 주님께 대한 복종과 이 세상을 위한 주님의 봉사 사업에의 참여에서 생기는 것이다(빌 2:6-8).
봉사하는 삶의 방식은 타자와 함께 봉사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배워야한다고 하는데, 이는 나의 대학시절 기독학생연합회에서의 봉사와 교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과 자극과 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겸손과 희생에 대한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증인 공동체의 커다란 유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이 세상을 향하여 열려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삶의 방법, 탐구하는 삶이다.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 크리스천의 삶의 특질이라는 것이 러셀의 주장인데, 탐구하는 삶이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이 세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이 표상들을 탐구하고 현대의 큰 사회적, 정치적 분열, 그들 간에 존재하는 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갭, 평화와 화해를 가져올 길을 발견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런 탐구 가운데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참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의 특질로, 러셀은 먼저 연대성(連帶性)을 말한다. 이 연대성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의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자로서 받아들임으로써 또한 그 상호의존성을 증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경험함으로써 양성되는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시는 분으로, 연대성이라는 특성있는 삶의 방식은 자기 생명을 타자를 위해 바친 이 분에게 복종함으로써 성장된다고 한다. 공동체 안에서는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지고 서로 간의 벽을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데, 이것이 곧 연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다소 공감이 안되지만, 러셀이 주장하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세속성(secularity)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그것은 크리스천의 생활이 인위적으로 짜여지는 종교적 관습의 포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며, 그런 종교적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호의를 획득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일을 막으며, 단순한 습관이나 미신의 노예가 되는 일을 방지하며, 우리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의 선물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 역사의 움직임이나 운명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세속화된 인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현대인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틀에 박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성숙한 세계에 있어서는 증인 공동체의 양상도 성인된 스타일 즉 세속화라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참여하는 모든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라는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명령 받은 임무와 이웃을 향해 항상 생각이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0:23-24).
샬롬(Shalom)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소 중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은 요컨대 이 세계가 희구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개조될 세계에 관해서 의도하고 있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샬롬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평화, 전체성, 중요성, 그리고 번영의 선물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삶의 스타일이 이루어져야 할 모습, 또한 그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는 모습을 지시한다고 본다. 저자 러셀은, 샬롬이 우리들과 하나님, 또 이세상과의 화해 관계를 의마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크리스천 생활의 모든 특질을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형태의 크리스천 삶의 스타일의 근거라 해도 좋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같이 크리스천 삶의 모습을 향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복종이라는 구체적인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렇게 형성된 삶의 모습을 구성하는 개개의 크리스천들의 행위는 결국 그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시키는 것이므로, 그것이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의 고난과 불안, 이웃과의 연대 관계, 봉사라는 방향으로 우리를 횡적인 방향으로 밀어 넓히며, 동시에 우리의 생활과 그 성장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위와 아래"의 관계 즉 종적인 방향으로 우리의 생활을 밀어 넓힘으로써 형성되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설명은 복음적이란 느낌이 들었고, 기독교가 결코 세상을 외면한 개인의 안일함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Ⅴ. 기독교 교육의 목적 : 축하의 잔치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 5부에서 저자는 이 비유가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이른 바 "자유로운 봉사자"가 되지 않으려는 제자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 되시는 분의 이름을 몰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에 봉사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쁜 위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비유의 중심 사상은 "자유"이며,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섬기기 위한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러셀은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유출해내고 있다. 즉, 기독교 교육의 궁극의 목적도 한번 그리스도와 만난 자들이 이 같은 자유의 축하연에 함께 참여하여 그 끝 없는 사랑에 충일되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펴고 계신 화해의 사명을 함께 가지고 새롭게 살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전혀 해방되어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혁해 가는 일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 힘있게 일해 오시는 일체의 활동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의 내용은 인간이 자기와 타인에 대한 화해를 얻음으로써 참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의 실천은 이미 한 번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새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러셀은 말하는 바, 나는 여기서 선교와 기독교 교육의 연계성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교육의 전체성 내지 연계성이란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하여도 탁월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축하잔치의 구조에 대해서 저자는 교육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대화적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산 대화로서 구원의 활동과 약속이 역사의 각 사건들을 통해서 실현되는 전 과정을 통해 성립된다고 하며,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우선 예배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사건을 축하하며, 거기에서만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숭상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칭송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봉사의 생활을 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같은 축하의 사건이 타자를 섬기는 일상생활의 한 복판에서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저자는 증인 공동체의 예배 생활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에게 대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생명과 구원의 원천이며 우리들을 모든 공포, 욕망, 제약, 과오로부터 해방하여 참 자유를 얻게 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과거에 알려지고 현재 경험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뻐하며 모여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스천의 공동예배는 거룩한 교제의 잔치이며, 문화의 향연이며, 신앙고백의 축하잔치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의 축하잔치로서의 예배는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키시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는 사실만을 기뻐하며 축하할 뿐이다. 여기서 성찬의 의미는 이미 우리를 한몸으로 부르시고, 차별이나 편견이 없이 서로나누는 사랑의 교제에 대한 환희의 상징이 된다고 한다. 성찬식 뿐만 아니라 실은 교회의 모든 예배 전체가 마치 가정에서의 식사 모임과 같이 형식에만 치우치지 않은, 서로 화친감(和親感)에 넘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은 그 충실화의 방법으로 "교회의 관심사"와 "친교의 악수"를 예시하고 있다. 러셀에 의하면, 예배에다 성스러운 교제의 축하 잔치로서의 의미를 붙이는 가장 중요한 길은 현실적으로 성찬을 지키는 일이며, 교회는 스스로 고유한 사명을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예배에서 성찬의 성례전을 중요시해야만 한다. 이와같은 주장은 예배의식과 현실적인 번거로움의 이유로 성찬을 하나의 행사로 전락시켜 버린 오늘의 한국교회가 재고해야 할 내용이며, 예배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예배는 문화의 축하 잔치이기도 하며, 이는 성육신의 교리가 지닌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문화의 축하 잔치로서 예배는 공동체의 삶이 문화생활과 유리되어 이루어질수 없다는 점과 문화형태가 곧 예배의 매개체가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놓쳐서 안 될 것이다. 이 때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구체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배려가 심사숙고되어야 한다는 것과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의 의미가 차별이나 형식, 의식행위가 배제된 평등하고 균질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예배 전체가 우리들에게 지금 알려져 있는 문화의 풍요함과 깊음을 기뻐하며 축하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치와 함께 자유도 함께 구가함으로써 그것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유효하고도 적절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증인 공동체의 예배가 신앙 고백의 축하잔치라는 것은, 예배가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서 죄의 참회를 하고 신앙의 고백을 공공연히 하는 갱신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의 자격없음을 통감하고 계속적인 용서와 은총에 대해 거의 완전한 환희를 맛보게 되며, 하나님의깊은 자비와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증인 공동체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축하 잔치인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예배 외에 특히 봉사의 생활을 통해서 표현된다. 여기서 저자는 이 봉사의 생활이 말씀에 의한 증언과 함께 기독교 교육의 목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위한 자유의 축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얻음으로써 타인에게 봉사하는 참 기쁨을 체득하지 않는 한, 그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로부터 탈출해서 밖을 향해 몸을 던져 타자를 위해 섬기는 일이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의 성장이란 결국 자기로부터의 자유가 타자를 위한 자유로 비약해서 이상스러운 방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뜻하며, 우리는 모두 간단 없이 반복하여 새로운 출발점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자유의 봉사를 사는 크리스천을 육성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대목표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청을 넓혀, 부르심이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바르게 들려지며 또한 기쁨을 가지고 받아들여지는 일을 위해 소명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본서에서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을 정리하면, 기독교 교육이란 사람들을 참 인간성으로 되돌려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참가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제공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것이 성립하는 자리는 특히 증인 공동체라고 불린다. 이 증인 공동체의 구조는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의 대화의 관계로 특색 지어지며, 거기서 실천되는 교육의 과정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그 목적은 한 마디로 "축하의 잔치"이며, 이는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 현재 이 세사의 한가운데에서 하려 하시는 일을 말에 의한 증언과 사랑에 의한 봉사의 활동을 통해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다. 이렇듯 기독교 교육은 곧 축하 잔치의 교육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의 내용을 축하잔치 이외의 무엇으로든지 변화시키려는 것은 저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려는 기쁜 일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승리의 축하 잔치에서 이미 나누어 주어진 생명의 빵 대신 돌을 주는 행위일 것이다. 나 자신의 신앙이나 우리 교회의 교육이 이와같이 빵을 즐기지 못하고 돌을 들고 괴로워 하는 모습인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으로 이 책을 덮었다.
과목명 : 기독교 교육, 교수님 : 고용수 님
제출자 : 조계영(9331112) 제출 : 1997.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