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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사랑방
반 박자의 싱그러운 쉼표처럼
정진권 선생님과의 대화
대담 : 홍억선(본지 주간)
기록 : 강여울(시인쪾수필사랑문학회 회원)
사진 : 신영애(소설가쪾수필사랑문학회쪾디카450 회원)
혜화동 놀부집
4월 21일, 정진권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혜화동 놀부집’은 생각보다 찾기가 쉬웠다. 국내외 인사들의 방문이 꽤나 잦은 식당인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유명인들의 사인이 든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실내는 민속박물관인가 싶게 옛 물건과 사진들로 치장을 해 놓았고, 고가구를 놓아 안방처럼 꾸민 크고 작은 홀이 여럿이었다. 시간이 아직 이르다며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오셨다. 투명한 안경을 쓰신 선생님은 부드럽고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셨다. 자리에 앉으시면서 선생님은 김규련 선생님의 안부부터 물으셨다. 대구의 문인들 중에 가장 친분 있는 분이 김규련 선생님이라고 하셨다. 기록을 담당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동행한 두 문우들과 인사를 나누며 “웬 노처녀들이야?” 해서 단박에 함박웃음을 피워놓으셨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였고, 가야금 뜯는 소리와 창 소리가 어우러져 낮고 허스키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삼켜질까 위태로웠다. 상이 들어왔지만 선생님께서는 식사는 나중에 하시겠다며 술잔을 들어 권하셨다. 근황을 여쭈며 요즘도 탁구를 치시는지 여쭤 보았다.
― 일주일에 두어 번 쳐요. 한 번은 김시헌 선생님하고 치고 또 하루는 최병호 씨와 쳐요. 정기적으로 가는 곳이라?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 수필 강좌가 있어요. 이론과 합평을 겸한 수업인데 지난 주에는 야외 수업을 했어요. 과천에 있는 청계산으로 갔는데 봄꽃도 피고 좋았어.
― 다른 지방에도 더러 가십니까? 대구에도 한번 오시지요.
― 서울을 거의 벗어나지 못해요. 삼 년 전에 뇌출혈로 고생을 좀 했거든. 수술을 아주 적기에 한 덕에 지금은 건강해요. 그래도 외국을 다녀온다든지 먼 길 나서는 것은 조심이 돼요.
하나 더하기 하나
― 고향은 충북 영동이야. 중학생 때 전쟁이 나서 옳게 공부를 못했어. 전쟁 동안 산골짜기 친척집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일도 거들고 그랬어요. 그러다 영동고등학교에서 신입생 모집을 해서 원서를 냈지. 중학교 3학년을 못 다녔으니 졸업장도 없었어. 마침 정원 미달이라 합격을 했어.
고등학교 삼 년 동안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다 일등을 했어.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다 좀 하는 편이었지. 그래 축구도 일등, 공부도 일등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은 물론 다른 학교 선생님들도 다 나를 알아보고 그랬지.
― 사람은 어릴 때 기를 살려 줄 필요가 있어요. 나는 시골의 가난한 집, 구 남매의 맏아들이었는데 서울대에 시험을 친다는 것은 그 당시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 미리 알았다면 기죽어서도 시험을 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부모님은 나는 무슨 시험이든 치면 다 합격한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아. 그때 집안 형편도 있고 해서 육사, 경찰대, 공주사대를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아버지께서 육사나 경찰대는 안 된다고 했어요. 공주사대를 가려니 학비는 없어도 된다고 했지만 먹고 자는 하숙이 문제였지요. 그때 어머니께서 조금 더 고생을 해도 서울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먼 친척집이 서울에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두 아들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공짜로 있으라 했어. 그래서 그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며 작은 방에서 셋이서 생활하는 데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그러다가 어머니 친구분의 소개로 가정교사로 들어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공부를 못했을 거야. 시골 학생이 서울에서 공부하기는 힘들었어. 전쟁 직후라 다들 어려웠거든.
문득 선생님의 작품 「아내론」이 생각나 어떻게 사모님을 만났는지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은 술잔을 비우시더니 만면에 그윽한 미소를 피우셨다.
봄비 아련한 강둑에 연둣빛 잔디가 고왔다. 키 큰 상수리나무 숲은 푸른 잎새마다 햇빛이 눈부셨다. 시나브로 낙엽 지는 호젓한 산사, 산에 들에 쌓인 흰 눈 위에 환한 달빛 부서지는 들길, 내가 나직이 노래를 부르면 아내도 조용히 따라 불렀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곧 결혼을 했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다음은 힘든 세월.
우리는 단칸 셋방에서 딸 둘을 낳았다. 연년생이다. 우유 한 통 구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두 놈이 번갈아 울어댔다. 그 얼마 후 방 두 칸짜리로 옮겼다. 그리고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중략)
부지런히 달이 가고 해가 갔다. 그 동안 우리도 집 한 칸을 마련했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어느덧 네 아이. 아내의 힘든 세월은 더 힘들게 이어졌다. 이제 이 네 아이들은 시집 장가 다 가서 따로따로 산다. ― 「아내論」에서
― 지난 부활절이 집사람의 일흔 번째 생일이었거든. 내가 고희였을 때는 늙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집사람이 고희라니까 공연히 측은하고 안됐더라고. 공연한 소릴 다하네. (소리 없이 웃으심)
― 처음 만났을 때는 참 고왔지. 논산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토요일마다 영동으로 귀가를 했거든. 어느 날 영동여고에 근무하는 대학 동창이 집에 찾아왔어.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같은 학교 출신이 영동에 있다니까 찾아왔던 거지. 이 친구가 어느 토요일, 탁구를 치려는데 짝이 맞지 않는다며 전화를 했어요. 가 보니 자그마한 사람이 있데. 그래서 짝을 맞춰 탁구도 치고, 저녁도 먹고, 다방에 가서 차도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처녀와 나만 있는 거야. (소리 내어 웃으심) 밤 10시까지 청주를 가야 하는데 말이야. 그 사람 집이 청주거든. 통금도 있을 때인데 말이야. 그렇게 청주를 오가며 주말마다 데이트를 했어요.
선생님께서 사모님의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선생님의 지극한 아내 사랑과 두 분의 여정이 흑백필름처럼 그려졌다. 자식은 부모님을 닮는다고 했던가. 두 분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절이나 힘든 세월이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손잡아 온 모습이 자녀들의 입신(立身)에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 큰딸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서 서울대 어학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어. 그러니까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강사로 있지. 둘째 딸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고 남편은 한신대 교수지. 셋째가 장남인데 자식은 맘대로 못 한다는 말이 꼭 맞아.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회사에 잘 다니다가 어느 날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하는 거야. 그러더니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분가를 했어. 분가를 하면서 며느리가 삼 년 후 돌아온다고 했는데 벌써 사 년째야. 그리고 넷째가 제일 실속 있게 사는 것 같아. 한양공대 컴퓨터학과를 나왔는데 지금 중소기업 차장이거든.
선생님께서는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따라 성당에 다닌 지는 오래되었으나 세례는 삼 년 전에야 받았다고 하셨다. 그 세례명이 아내의 세례명인 ‘베네딕다’와 같은 남성명 ‘베네딕도’라고 하셨다.
수필과의 인연
― 서울사대부고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5·16 직후였지. 그때 어느 잡지에 원고지 20매 분량의 독자란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시론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교육에 관한 에세이를 쓰게 되었는데 어느 날 『현대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온 거야. 청탁을 받고 처음에는 가슴이 뜨끔했는데 청탁서를 자세히 읽어 보고는 김이 샜어. 왜냐하면 ‘비문필인 작품 특집’에 실을 글이라는 거야. 그래 갈등을 했지. 결국 『현대문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에 「弄談調試驗說」을 써 보내긴 했어요. 그런데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어. 글이 본격적 수필이어서 다음호에 ‘문필인 수필‘란에 싣겠다는 거야.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지.
선생님께서는 미리 부탁 드린 대로 일곱 종류의 작품집을 들고 나오셨다. 그 중에 시리즈로 발간된 범우사의『한시(漢詩)가 있는 에세이』 『옛시가 있는 에세이』『한국고전 수필선』『에세이 중국고전』등의 책들이 눈길을 끌었다.
― 범우사와는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 특별한 인연이라기보다 범우사 사장이 ‘수필문우회’ 회원이에요. 윤형두 씨라고 나보다 연배는 적지만 대단한 분이지요. 이분이 어떻게 내가 한시에다 평설을 단 수필들을 보고 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쓰다 보니 몇 권 되었어요.
― 한시를 비롯해서 고전수필에 관한 에세이를 많이 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 한국체대 교수로 있을 때 한문을 가르쳤는데 긴 문장을 이해 못하는 거야. 그런데 짧은 한시를 이용해서 지도를 하니까 잘 알아듣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더라고. 한시를 공부하다 보니 옛날 글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이 다 들어 있어. 선인들의 사상이나 감정, 생활뿐 아니라 나를 다시 돌아보는 살아 있는 문학인 거야.
그런데 한문 원문을 보고 번역해 놓은 글을 보니 어딘지 어색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자전을 뒤져서 다시 내 나름의 번역을 해보니 퍽 재미가 있어요. 어떤 때는 그렇게 앉아 작업을 하다 보면 다섯 시간씩 훌쩍 지나고 그래요. 감사한 것이 이 나이에 그렇게 몇 시간씩 몰입할 수 있는 일을 가지기가 쉬운 일인가. 참으로 즐겁고 다행한 일이야. 이 즐겁고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도 누렸으면 좋겠다 싶어 계속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한문 관계의 작품집이 많이 나왔어.
짧고도 긴 수필 이야기
― 수필?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워요. 내가 수필이론을 썼다고는 하지만 이론을 쓴 자신이 꼭 그 이론처럼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 끝으로 되어 있다고 했지만 과연 모든 이야기를 시작과 중간, 끝으로만 썼겠어요? 수필을 쓸 수 있으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수필을 많이 읽어서 귀납적으로 성숙한 작품을 쓰도록 노력하면 되지. 집사람이 현대문학 소설을 즐겨 읽어요. 수필은 다 똑같은 얘기라 읽지 않는다고 하고는 내게 미안하니까 “당신 작품은 빼고.” 그래요. 그러니까 수필은 비슷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요. 사는 것이 다 비슷하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최소한 방법이라도 다르게 해 봐야지. 수필은 연구 인력도 부족하고, 작가들은 또 치열하지가 않아서 안타까워.
― 대표작? 얼마 전에『수필시대』에서도 대표작 몇 편을 싣겠다며 「짜장면」,「아내론」,「성당의 세 가지 이야기」를 실었던 것 같아요. 이 세 작품이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어. 특별히 대표작이라거나 애정이 가는 작품을 꼽을 수는 없겠어. 이 작품을 꼽으면 저 작품이 서운해 할 것 같고, 저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작품이 서운해 할 것 같고 그래서 하나를 특별히 지목할 수가 없어요. 어떤 글이든지 그 글을 쓰기 전에 그 글의 소재에 대한 애정이나 감동이 앞서는 것 아닌가? 내가 먼저 어떤 소재에 감동을 하지 않으면 그 소재로 쓴 글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어떤 수필이든 그 소재에 대한 특별한 애정 없이 좋은 글이 써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이것이 바로 내가 어느 한 작품을 편애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할 거야.
선생님의 수필들은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낯설지 않은 소재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선생님의 이러한 섬세한 애정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의 집 정원이 선생님의 글 속에서 갖가지 빛깔들의 합창으로 연주되고 있는 것처럼. 선생님의 글 속에 들어간 모든 소재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독자를 바라본다.
정주환 교수는 선생님의 작품에 이렇듯 공감과 공명의 효과가 큰 것은 “사상에 무리가 없기 때문이요, 논리에 억지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타당하기 때문이요, 생각이 꽃이 피듯 절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밀이 또 있다. 그것은 지식을 과장하거나 교묘히 미화하지 않고 주어진 소재에 유기적인 현상학의 묘미를 곁들인 독창적인 수법이다.”라고 했다.
또 “선생의 사유는 시공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소재는 어디에서나 흐드러지게 존재한다. 평면적인 사건 속에다가 입체적인 구성을 통하여 수필 문학의 문학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하나의 체험을 기하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성을 심화시키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려 감동을 안겨 준다. 그리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어디에나 수필의 소재가 널려 있음을 깨우친다.”고 「鄭震權 선생의 隨筆文學」이라는 글에서 밝힌 바 있다.
― 수필이 문학이라면 허구성 부정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필세계』 지난호 김시헌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보니까 허구는 소설과 같이 지어낸 말이고, 허구성은 상상력에 준하는 그 정도가 좀 약한 것이라 했더군요. 그것은 내 글의 해석에 있어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허구성이라는 것은 정도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띠는 성격입니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하는 시에 나오는 화자는 어릴 적 김소월 자신일 수도 있고, 작가가 생각하는 다른 소년일 수도 있는, 성인 김소월이 창조한 허구의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거든. 이렇게 시에도 시적 허구성이 있고,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희곡도 허구성을 가져요. 이 허구성은 문학이 가지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수필문학도 ‘수필적 허구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 허구성을 어떻게 계발시키느냐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어요. 지금까지 나온 수필 이론들을 보면 나의 허구성 이론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그 이상 더 발전시키지는 못한 것 같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허구는 안 된다면서 왜 허구가 안 되는지에 대한 이론은 확립하지 못하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수필도 문학인데 꼭 사실과 체험의 기록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요즘은 허구 아닌 것이 없다나. (혼자 웃으심) 사실을 기록하는 자서전이 가장 허구가 많다고 그러데. 어떤 이는 신문의 부고란 말고는 다 허구라고 하더군. (다 같이 웃음)
― 수필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치열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수필 이론은 인력도 부족하거니와 치열하지가 않아요. 내가 명지대에 다닐 때 쓴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 『한국 수필 문학론』이에요. 그때는 일 년에 한 편 이상의 논문을 써야 했는데 나는 수필에 관한 논문만 썼어요. 수필논문으로는 이것이 처음인데 오자도 있고 그래요. 그러나 수필이론이 그때의 내 이론에서 지금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수필에서 허구성을 주장하는 측도 그렇고, 반대하는 측도 논고가 빈약하기 그지없어. 내가 아는 시인이 한 명 있는데 그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십 년의 습작 과정을 거치는 것을 지켜봤어요. 수필에도 이론에서나 작품에서나 이런 끈기와 치열함이 있으면 좋겠어. 치열하게 자기 문장을 다듬고 숙성시키는 끈기, 이건 문학을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겠지.
교육자의 길
― 선생님의 수필에 사색적이고 감동적인 수필과 함께 교훈적인 동수필과 교육적인 수필이 많은 것은 교육자이신 때문이겠지요. 선생님께서 교직에만 계시지 않고 문교부 편수관으로 지내신 적도 있으시던데.
― 제물포고등학교에서 서울사대부고로 발령을 받아 갔는데 서울사범대 동기생이 셋이나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가 대학으로 자릴 옮겼어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한 친구도 대학으로 가데. 그때는 석사 학위만으로도 대학에 설 수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발령을 받으면서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던 거야. 난 대학원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으로 갈 수 없었던 거지. 그렇게 셋이 있다가 혼자 남으니 쓸쓸하더군.
그런 내 맘을 아셨던지 어느 주말 이응백 서울사대 지도 교수님이 전화를 했어요. 문교부 편수관으로 추천을 했으니 시험을 준비하라 하더군요. 지금의 행정고시와 같은 시험인데 합격을 해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렇게 있다가 대학원을 갔고, 한국체대 교수로 가게 된 거지.
우리 집 뜰 마른 잔디 위에도 가을볕이 환하다. 깎아 둔 곶감이 고들고들 마른다.
“그 떫던 것이 어떻게 이처럼 달까?”
땡감은 떫지만 그 속에는 단맛을 낼 수 있는 어떤 자질(資質)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햇볕과 바람을 통해서 단맛으로 계발된다. 햇볕도 없고 통풍도 안 되는 곳에 깎아 널면 금방 곰팡이가 슬고 맛이 시어진다.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 우리가 이런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여간 큰 행복이 아니다.
―「땡감과 곶감」 전문
문득, 선생님께서는 문단에서 땡감 취급을 받는 수필을 누구보다 먼저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으로 곶감과 같은 쫄깃하고 단맛을 보여 주는 수필을 만드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수필론들은 벌써 이십여 년 전에 선생님께서 펼쳤던 것이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마로니에 공원
식당이 조용해진 것으로 보아 식사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산책을 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앞장을 서셨다.
문예진흥원과 샘터사가 이웃하고 있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선생님께서는 솜사탕 두 개를 사셨다. 솜사탕을 들고 강여울과 신영애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마로니에 공원의 철쭉은 유난히도 붉었고, 김상옥 동상을 비둘기들은 엄숙하게 비켜 날았다.
그 곳에서 몇 컷의 기념사진을 찍고 혜화동 골목으로 선생님께서 또 앞장을 서 걸으셨다. 메밀꽃은 한 송이도 없는데 ‘메밀꽃 필 무렵’이란 주점이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아가씨가 첫 손님이라고 했다. 일행은 선생님께서 채워 주신 동동주잔을 높이 들었다. 강여울은 어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누런 주전자에 담아 오면서 홀짝홀짝 맛보던 그 막걸리 맛이라고 했다.
― 중학교 때 산골로 피난을 갔었잖아. 그때 먹을 것인들 넉넉했나. 잘 먹지도 못하고 땡볕에 나무를 하거나 논일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 그럴 때 외숙모께서 담으신 막걸리를 한 사발 주시잖아. 목은 또 얼마나 타? 그런데 그것을 쭉 들이키면 정말 살 것 같았지. 힘도 솟고, 그 맛은 비교할 수가 없어. 그리고 제사를 지내면 음복을 하잖아. 이래저래 난 술을 참 일찍 배웠어. 담배는 군에 가서야 배웠는데. 연구실에 있으면 말이야 더러 술을 사 오는 친구들이 있거든. 그런데 좀 센스 있는 친구는 살짝 놓고 가는데 어떤 친구는 여럿이 있을 때 주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 다 보는데 혼자 마실 수 없잖아. 그렇게 또 술판이 벌어지는 거지.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그리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술집들도 그렇고, 공부를 하던 기억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나 담배를 피우던,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그립단 말야.
신영애는 메모지를 꺼내더니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그립다’라고 썼다. 선생님과 앉아 있으면 다정한 이야기 강물이 끝없이 흐르는 것을, 그 물살의 반짝이는 은비늘과 가끔씩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개미가 탄 나뭇잎도 볼 것 같았다. 그러나 일행은 시계를 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수필세계』에 해 주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 문학잡지의 생명은 뭐니뭐니 해도 좋은 글을 싣는 것이 우선이지 뭐. 요즘 더러는 등단 장사라는 오명을 듣는 잡지가 있기도 하니 그런 점은 견제해야겠지. 문학상을 만든다면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좋은 글을 쓴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것을 인정해 주고, 작품으로는 좀 부족하더라도 문학사적으로 공헌을 한 사람도 그 공로를 인정해 주는 일명 ‘공로상’ 그런 것도 만들면 좋겠어.
일상의 소재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신선한 생명이게 하는 선생님의 수필들을 떠올렸다. 또, 옛 글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려내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계시는 노고도 생각했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를 떠나 홀로 우리의 문학적 보물들을 발굴해 박물관을 건립하듯 책을 엮어내시는 선생님의 올곧은 정신에 고개가 숙여졌다.
에필로그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향하시는 선생님의 등이 단정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수필로 맘이 풀리지 않을 때 시를 쓰기도 하지만 발표한 적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수필 속에서 만난 선생님의 시 한 단락을 떠올려 보았다.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고 그 중간에 산이 있다.
산에 앉아 하늘을 우러르면 하늘은 아득히 높다.
나는 그 곳에 이르고 싶었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산에 앉아 바닷속을 헤아리면 바다는 아득히 깊다.
나는 그 곳에 이르고 싶었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어차피 하늘은 나에게 너무 높고
어차피 바다는 나에게 너무 깊어,
중간쯤
혼자 앉아서
술이나 한잔 쭉 드네.
- 「산봉(山峰)에 혼자 앉아서」 2연
돌아오는 KTX 안에서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말없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엄청난 속력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마법의 성을 향하여 날개를 편 듯 고요하게 달려 어둠보다 먼저 대구에 도착했다. 마치 선생님과의 만남이 “반 박자짜리 쉼표처럼 싱그러운”(선생님의 수필 「비닐우산」에서 따 옴) 꿈이 아니었던가 싶어 눈을 비벼 보았다. 다음에 선생님을 뵈올 때는 술 한 병을 꼭 챙기리라.
1934년 음력 11월 14일(호적상으로는 1935년 7월 3일) 충북 영동 출생
1954년 영동고등학교 졸업
195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80년 명지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1958년∼1968년 논산농업고등학교(육군 복무), 제물포고, 서울대 사대 부속고등학교 교사
1967년 『現代文學』 11월호에 「弄談調試驗說」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됨
1969년∼1977년 문교부 국어교육 담당 편수관
1978년 3월 11일 ‘한국수필문학진흥회’로부터「제1회 수필문학신인상」받음
1983년∼2000년 한국체육대학 교양과정부 교수,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
1997년 1월 18일 ‘수필과비평사’로부터「제3회 신곡문학상」받음
수필집
『푸르른 나무들에 저 붉은 해를』, 일지사, 1973
『비닐雨傘』, 관동출판사, 1976
『韓國人의 鄕愁』, 문리사, 1979
『中殿과 侍女』, 학연사, 1982
『따로따로 떨어지기』, 한샘출판사, 1990
『열쇠와 자물쇠』, 신아출판사, 1997
『한시(漢詩)가 있는 에세이』, 범우사, 2002
『옛시가 있는 에세이』, 범우사, 2003
『한 수필가의 짧은 이야기』, 수필과비평사, 2005
선집
『짜장면』, 교음사, 2000
『빛깔들의 합창』, 선우미디어, 2001
논저
『韓國現代隨筆文學論』, 학연사, 1983
『韓國隨筆文學硏究』, 신아출판사, 1996
『수필쓰기의 이론』, 학지사, 2000
역해서
『한시를 읽는 즐거움』, 학지사, 1997
『고전시를 읽는 즐거움』, 학지사, 2001
『고전산문을 읽는 즐거움』, 학지사, 2002
『한 수필가의 우리 옛 문학 읽기』, 학지사, 2004
『한국고전 수필선』, 범우사, 2005
『에세이 중국고전』, 범우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