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월드컵 경기장은 한밤중인데도 대낮같이 조명을 받아 그 웅장한
자태를 늠름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경기장 주위는 수 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차량을 통제하는 교통경찰의 호각 소리가 요란했다. 어디선가 풍물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내 마음은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어릴적 시골 소장터에 서커스가 들어
왔을 때 가슴 설레며 보러가던 바로 그 흥분이 다시 몰려 오는 듯
했다.
월드컵이 개막한지 어느새 열흘이 넘었고,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
한 가운데 있지만, 이곳 대전에서는 오늘에서야 첫 경기가 열렸다.
스페인-남아공.
스페인은 몇년 전 내가 가 보았던 바로 그 나라가 아니던가?
투우와 플라멩코의 나라. 피카소와 돈키호테,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끄는 그 매력으로 인해 나는 남아공 보다 강팀이지만
스페인을 응원하는 것으로 이미 마음 속에 정해 놓고 있었다.
경기장 출입구엔 사람들이 소지품 검사를 받느라 줄을 늘어서 있었다.
비행기 탈 때와 비슷한 수준의 보안 검사를 받고 그곳을 통과했다.
좌석을 찾아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일시에 시야에 들어 오는
스펙터클한 광경!
파아란 잔디와 웅장한 경기장, 그리고 수만의 관중. -- 이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압도해 왔다.
거대한 한장의 양탄자 같이 잘 가꿔진 잔디는 강열한 조명을 받아
차라리 파스텔톤으로 빛나고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 만나기로 했던 여행사 사장님들과 우리 직원들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좌석이 이어져 계속되지 않고
몇명씩 구역이 달리 배정되어 있었던 것. 결국 나는 여행사 사장님
한분과만 같이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시작 10분전.
두나라 국기가 들어 오고, 꼬마들의 손을 잡은 선수들이 우뢰와 같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이어서, 선수 소개와 양국 국가 연주.
8시 30분. 주심의 호각 소리와 함께 드디어 경기는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마치 힘이 남아도는 망아지처럼 파란 잔디위를 이리 뛰고,
저리 내달았다.
아! 그런데 선수들의 유니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인가?
특히, 붉은 티셔쓰와 곤색 하의를 입은 스페인 선수들은 바로
늠름하고 잘생긴 11명의 투우사였다.
초록색 파스텔톤 잔디위의 원색 유니폼, 그리고 투우사같은 선수들!
땀에 젖어 축 처진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아니라, 방금 새로산 양복을
때깔나게 차려입은 신사같은 선수들이었다. 비록 노란 상의와
녹색하의의 남아공 선수들은 대부분 흑인이어서인지 스페인 선수같진
않았으나, 어쨌든 tv 를 보며 느끼지 못했던 너무나 역동적인
원색 그림이었다.
tv 로 보던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경기장을 내려다 보는 넓은 시야이다.
우리가 가진 육안이 이렇게 시야가 넓다니.. 공을 가진 선수만
보이는 게 아니라, 멀리서 딴짓하는 골키퍼도 보이고, 자빠져서 아픈
다리를 만지며 일어나지 못하는 태클 당한 선수도 보인다.
그리고, 수만 관중이 다 보인다.
나도 포함된 관중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볼거리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가졌는지 조차 잊어 버리고,
좁디 좁은 tv를 통해서만 이 세상을 보아왔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점점 더 편협해 지고, 자기와 주위 밖에 모르는 좁디 좁은 공간만을
생각하며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옆을 보아도 더 큰 세상이 보이거늘....
경기는 결국 3 : 2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나라 경기는 아니었지만, 골이 많이나 관중들을 시종 즐겁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나라 모두를 응원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약체인
남아공쪽으로 응원의 무게가 실렸다.
관전을 하면서, 경기뿐 아니라 응원 그 자체까지 즐기는 수많은 관중의
성숙한 관전 태도를 보면서, 우리 국민도 이젠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월드컵은 진행중이다.
우리에겐 아직 점령해야 할 첫 16강의 고지가 남아있고, 아울러
주최국으로서 최선을 다해 손님을 모시고 월드컵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치루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