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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스크랩 사후의 생명2 - 칼융
범명 추천 0 조회 72 12.12.06 12: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왔다. 야간 열차 속에서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서는 슬퍼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이상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즉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 나는 마치 결혼식이 행하여지고 있는 듯한 댄스 음악과 웃음소리, 그리고 유쾌한 담화의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날의 꿈이 주고 있었던 사나운 인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유쾌한 댄스 음악이라든가, 유쾌한 웃음소리 가운데서 완전히 슬픔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슬픔에 압도되어 가려는 순간에는 나는 또 다시 유쾌한 멜로디에 끌려 들어가 버리곤 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따뜻함과 기쁨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감정 사이를 이리저리 계속 오락가락했다.

이와 같은 역설은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때는 자아의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혹은 어떤 때는 마음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죽음은 파국이다 즉 죽음이란 사악하고 비정적인 힘이 인간의 생명을 끝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잔인성의 무서운 영혼이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려 해도 무의미하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잔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도 한층 더 잔인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버릴때 남아 있는 자는 죽음의 차디찬 정적인 것이다. 그 곳에는 이미 관계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다리는 일격에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장수할 만한 사람이 장년기에 목숨이 끝나고, 쌀벌레 같은 존재가 끈질기게 오래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피할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들은 죽음의 잔인성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실제적인 경험에 너무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자비심이 많은 신도, 정의도, 친절도,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죽음은 기쁜 것으로 여겨 질수도 있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결론이며, 결합의 신비인 것이다. 영혼은 잃어버린 반을 얻게 되며, 전체성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이스의 석관에는 이러한 기쁨의 요소가 춤추고 있는 소녀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으며, 에토라스칸의 무덤은 연회에 의해서 이러한 요소가 나타나 있다. 신앙심이 두터운 카바라교의 랍비, 시몬 벤 죠카이가 죽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의 결혼식을 축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만령절이면, 무덤에 피크닉을 가는 습관이, 많은 종교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습관은 죽음이란 참으로 경하해야 할 사실이라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1922년 9월에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케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아버지에 관한 꿈으로서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1896년에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의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이때 아버지는 마치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 온 것처럼 다시 꿈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젊어진 것 같았고 그 용모로 보아 부성적 권위는 사라져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서재로 안내하고 지금까지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서 기뻐하고 있었다. 또한 아내와 아이들을 아버지에게 대면시키고 집을 구경시켜 드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나는 이 무렵에 출판되었던 마음의 형태에 관한 나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아버지가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분명히 아버지는 무언가를 나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확실히 느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삼가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튼 내가 심리학자이므로 결혼의 심리에 대해서 상담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혼의 복잡성에 대해서 장황한 강의를 하려고 했으나, 그때 잠이 깨어 버렸다. 그 꿈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꿈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1923년 1월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나는 그 꿈의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양친의 결혼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것은 시련과 고난과 인내의 확인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분 다 많은 부부들에게 있을 수 있는 전형적인 실패를 저질렀던 것이다. 나의 꿈은 어머니의 죽음의 예보였다. 왜냐하면 이 꿈에 있어서 아버지는 26년 동안의 부재 후에 다시금 결혼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 심리학자인 나에게 결혼문제에 대한 최신의 지식을 들으려 했던 것이다. 분명히 아버지는 그 무시간의 상태에 있어서보다 훌륭한 이해를 가질 수 없으므로 변천해 가는 시간의 이익을 얻고 있으며, 또한 결혼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몸에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 중의 어느 누군가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꿈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 꿈의 주관적인(내적인) 의미를 관찰함으로써 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나는 그 꿈을 예상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죽음 전에 꾸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더 깊어지는 공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무의식은 그것의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의식보다는 훨씬 더 좋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의식은 그것이 획득할 수 있는 감각의 지각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사후의 생명에 관한 신화를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꿈에 의한 빈약한 암시라거나, 또는 무의식으로부터의 자연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이들 암시에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둘 수가 없으며, 증거로서의 가치도 역시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화적인 확충법의 적절한 기초로서 쓸모가 있다. 즉 그것들은 엄밀한 지성에다 그 생명력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신화적인 상상이라고 하는 중개적인 세계를 절단해 버린다면 마음은 교조주의적인 경고성의 먹이가 되고 만다. 또 한편 이들 신화의 근원과 너무 많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약하고 피암시성의 강한 마음에 대해서는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있어서 막연한 암시를 실체적인 지식과 착각하기도 하고, 또한 단순한 환상을 본질로서 착각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저 세상에 관한 널리 펴져 있는 하나의 신화는 재생을 중심으로 한 관념과 이미지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 우리들 서양에 있어서 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오랜 지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는 어떤 나라에 있어서는-인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우리들처럼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생각하며, 또한 영적인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 재생의 관념은 보다 더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양 있는 힌두인은 우리들이 그들과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러한 것은 문제 삼지도 않는다. 동양의 정신에 따르자면 삶과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영원한 수레바퀴가 목표도 없고 종말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서 무한의 연속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지식을 달성하고, 죽은 후에는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불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표라는 관념이 생긴다. 다시 말해 지상의 존재의 극복인 것이다. 서양인의 신화에의 희구는 시작과 목표를 갖는 진화적인 우주론을 필요로 했다. 서양인은 정적이며 자제적인, 그리고 사상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단순한 종말을 갖는 우주론에 반역했던 것이다. 동양인은 반대로 이와 같은 영원한 윤회와 타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이 세계의 성질에 대해서 현대의 천문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인 일치가 존재하는 이상에는, 전세계적인 공통의 감정은 있을 수 없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단순한 정적인 우주의 무의미함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세계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서양인은 생각한다. 동양인은 그러한 가설조차도 필요치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인은 세계의 의미를 완성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데 반해서, 동양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 자신 가운데에 의미의 충족을 획득하려 하고 있다(불타에서).

나는 양자 모두 옳다고 말하고 싶다. 서양인은 너무나 외향적이며, 동양인은 너무나 내향적이다. 전자는 의미를 투영하고 또한 의미는 대상 가운데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후자는 자기 자신속에서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의미는 내부나 외부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재생의 관념은 카르마의 생각과 분리할 수 없다. 결정적인 문제는 인간의 카르마는 개인적인 것인가, 혹은 어떤 것인가 라는 점이다. 만일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라면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은 전생에서 달성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연속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가 않고 탄생과 동시에 비개인적인(보편적인)카르마가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면, 카르마는 전혀 개인적인 연속성 없이도 재생하는 것이 된다.

불타는 그 제자들로부터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인가를 여러번 질문 받았었다. 그때마다 불타는 질문을 피해버리고 그 문제와는 대결하지 않았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존재의 환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불타는 말했다. 불타는 그 제자들이 탄생과 노년, 그리고 죽음의 인연의 쇠사슬, 또는 업고의 인과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카르마는 나의 전생의 생활의 결과인지, 혹은 나의 조상의 행위의 결과 즉 조상의 유산이 모두 나 자신에게 계승된 것이 아닌지, 나는 확실한 대답을 알 수 없다. 나는 조상의 생명의 결합으로써 그들 생명을 다시 육체화한 것이 아니겠는지? 혹은 과거에 있어서 하나의 특정한 인간으로서 존재했다가 내가 이제야 해결을 찾아 낼 수 있을 때까지 그 동안 생명의 진보를 성취한 것은 아닐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불타는 대답을 얼버무렸던 것이다. 불타 스스로도 확실하게 대답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나는 과거에 살아 있었으며 대답할 수 없는 문제와 직면했었다. 따라서 나에게 주어졌던 일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성취한 일은 나와 더불어 계속된다-이것이 바로 내가 상상하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성취했던 일은 나 자신과 함께 가지고 간다. 마지막에 가서 내가 빈 손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불타가 제자들에게 무익한 사변에 의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한것도 이와 같은 생각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생명이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는 사실에 있다. 혹은 반대로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서 던지고 있었던 그 질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전달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세계가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 의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력하고, 또한 곤란과 투쟁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는 초개인적인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들이 전념했으며, 또한 대답할 수 없었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파우스트의 결말에 해결이 없다는 데 대해서 깊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혹은 니이체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문제, 즉 기독교인이 상실해 버렸던 생명의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의 문제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또 이와같은 도전적인 수수께끼를 제출하고 있는 것은 나의 아르만이나 프랑트계의 조상들의 쉴사이 없는 보오탄 헤르메스일지도 모른다.

내가 조상의 생명의 결과로서 느끼기도 하고, 또는 전생의 개인적인 생명의 획득된 카르마로서 느끼고 있는 것은 하나의 비개인적인 원형이며, 또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을 무겁게 억압하고 특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몇 세기에 걸쳐서 발표해 온 삼위일체와 그것의 여성원리와 대결, 혹은 악의 근원에 대한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는 그노시즘의 질문에 대한 대답, 또 달리 표현하자면 기독교 식의 형상의 불안전성 등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는 원형인 것이다.

나는 또한 한 개인의 과업에 의해서 하나의 의문이 세계에 제출되고 그 사람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예를 들자면 나의 의문의 제출방법이나 그 대답이 만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누군가 나의 카르마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혹은 나 자신-이 보다 더 완전한 대답을 주기 위해서 재생해야만 할 것이다. 세계가 그와 같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한 나는 두 번 다시 재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이러한 일에 흥미를 가지며 갱신된 일에 적절하게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 필요하게 될 때까지 나는 수백년 동안 평화로운 휴식의 권리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평생 동안 성취했던 과업을 다시 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가 생길때까지 한참 동안 휴식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르마의 문제는 어느 개인의 재생이나 영혼의 윤회등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역시 분명치가 않다. [자유 분방한 마음을 가지고] 나는 재생에 관한 인도의 교의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경험 가운데에는 어딘가에 어떤 방법으로서 재생을 나타내는 권위있는 어떤 징후가 있지 않을까하고 찾아 보았다. 물론 서양에 있어서는 재생에 대한 신앙이 상당하게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는 그렇다고 이것을 증거로서 들지는 않겠다. 신앙이란 신앙의 현상에 대한 증명은 될 수 있을지라도, 신앙되고 있는 내용 자체의 증명은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경험적으로 분명히 나타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징후에 대해서 예리한 관찰을 계속해 왔으나 이 점에 대해서 확증을 줄 수 있는 것은 2, 3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나 자신의 경험 가운데서 사망한 나의 친지들의 재생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은 일련의 꿈을 관찰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그와 같은 꿈과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할 만한 기초가 없다. 이와 같은 관찰은 주관적이며 독자적인 것이므로, 그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고 그 이상은 탐구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의 배후에는 재생에 대한 확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약간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명이 <피안>에 있어서도 계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심적 존재 이외에는 다른 존재 양식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생명은 공간이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적존재, 특히 우리들이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내적인 이미지는 저세상의 생명에 대한 신화적인 모든 사변의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저세상에 있어서의 생명을 이미지의 세계에 있어서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 저세상이라든가 사자의 세계가 위치하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저 세상의 생명은 노년의 마음의, 생명의 논리적인 연속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묵상이나 내성, 또는 내적인 이미지는 인간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노인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확실히 이 사실은 노인의 마음이 목적이 되어 활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손을 쓰는 것이 늦어 병이 너무 악화된 후 약을 써 보았자 때는 너무 늦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늙으면 회상을 마음의 눈으로 확대하고 과거의 내적 및 외적인 이미지 속의 자신을 확인하고 묵상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저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를 위한 준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철학이란 죽음에의 준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꼭 같은 마찬가지 사실이다.

내적인 이미지는 내가 개인적인 추억 속에서 헤매이게 되는 것을 방지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노인은 그들 과거의 사건들을 회상하는 일에 너무나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회상 가운데 갇혀 버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회상이 내성적이고 이미지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전진을 위한 후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통해서 이 세계에 들어왔으며, 또한 이 세계로부터 떠나가는 길을 발견하며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세상에 관해서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는 생각은 주로 소망적인 사고나 편견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생각에 있어서 저세상은 즐거운 장소로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명백한 사실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사후에 있어서 우리들은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목장과 같은 곳에 영혼으로서 존재하리라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만일 저 세상에 있어서 모든 것이 즐겁고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우리들과 축복된 영혼과의 사이에는 우호적인 교신이 있게 될 것이며, 또한 태어나기 전부터 선과 아름다움이 우리들 위에 쏟아져 내리게 될 것이다. 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는 이러한, 넘기 어려운 장벽이 존재하는 것 일까? 죽은 자와 만났다는 반수는 적어도 영혼과의 무서운 경험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사자의 나라는 유족의 슬픔에 의해서 교란되지 않는 차디 찬 정적만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대립의 규칙이 전혀 없는 저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일원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세상에도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존립방식에 따라서, 또한 신의 것이리라. 사후에 우리들이 들어가게 될 세계는 신이라든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자연의 전부와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또한 무서운 것이리라. 저 세상에서는 괴로움이 전혀 없으리라고는 나 역시 생각지 않는다. 내가-1944년의 환상에 있어서 경험했던 사실-육체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과 의미의 지작은-이 깊은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는 어둠이 있었으며, 또한 인간적인 따뜻함의 기묘한 정지가 있었다. 내가 도달했던 검은 바위를 상기하기 바란다. 그 바위는 검고 가장 단단한 화강암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태초에 창세의 기초에 있어서는 불완전성이라는 것이 없고 원초적인 결함이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창조에의 욕구라든가, 충족에의 동경 같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신들은 인간이나 창조에 대해서 왜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인연의 쇠사슬이 무한히 계속한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불타는 존재의 고통에 넘친 환상을 부정하고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종말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다.

저세상에도 어떤 종류의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사자의 영혼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 그 한계가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차츰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저 세상>의 어딘가에 세계를 규정하는 필연서, 하나의 결정요인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후의 상태에 종결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창조적인 결정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으나-은 어떤 영혼이 재생하게 되는가를 결정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3차원의 존재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영혼이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저 세상에다 어느정도의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가져다 주었는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어떤 영혼이 어느 단계의 이해를 달성했을 때는 그 이상 3차원의 세계의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즉 보다 더 완전한 이해에 의해서 이세상에 다시 태어나려 하는 희망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그 영혼은 더 이상 세상에 돌아올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 때 이 영혼은 3차원의 세계로부터 사라져 버리고 불교도가 말하는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카르마가 남아 있을 때는 영혼은 욕망으로 되돌아 가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마도 그와 같이 행하면서도 무언가 완성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나에게 삶을 가져다 준 것은 근본적으로는 이해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열적인 욕구였음에 틀림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의 성격 중 가장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끝날 줄 모르는 이해에의 욕구가 의식을 창조하고 그 의식에 의해서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생겼는가를 알고, 그리고 이해 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의 희미한 암시를 연결시킴으로써 신화적인 생각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영원성을 보증받는다고 하는 구체적인 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최대한으로 우리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초월해서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계속되어 간다는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그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가도 우리들은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의견을 형성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면, 마음의 분리 현상으로부터 알게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분리된 콤플렉스가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콤플렉스는 그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격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미친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인격화된다. 이와같이 인격화된 콤플렉스의 현상을 아주 오래 전에 나는 박사 논문 가운데서 논한 바 있다. 이들 콤플렉스를 의식의 연속성의 증거로써 인용하려고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연속성의 가설에 대해서 편리한 것으로서는 급격한 뇌 손상이라거나, 또는 중증의 쇠약에 의한 깊은 허탈 상태가 일어났을 때의 놀라운 관찰 결과가 존재하고 있다.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같이 완전한 의식이 상실이 있으면서도 외계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생생히 살아 있는 꿈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의 자리로서의 대뇌피질은 그때 기능을 행하지 않고 있으며, 그와 같은 현상의 설명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의식의 능력의 주관적인 지속성-예를 들자면 분명히 무의식의 상태에 있었다고 할지라도-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인간인 자아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있어서 지상의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같은 나의 두 개의 꿈 가운데에 제시되고 있다.

한가지 꿈은 내가 1958년 10월에 꾼 꿈이었다. 그 꿈 속에서 나는 두개의 렌즈의 형태를 하고 있는 금 속처럼 빛나는 원반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집을 넘어서 호수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집 안에서 보고 있었다. 그것은 UFO였던 것이다. 이윽고 또 하나의 원반이 나를 향해서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원형의 렌즈로서 망원경의 대물렌즈와 같은 것이었다. 4,5백미터 지점에서 그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렌즈로서 금속으로 된 하나의 상자-마법의 환등-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6,7십미터의 거리에서 정지했다가 이윽고 똑바로 나를 향해서 날아왔다. 나는 너무나도 놀라는 바람에 눈을 떴다. 반쯤 꿈 속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이 머리에 번득였다. [우리들은 하늘을 날으는 원반이 우리들의 투영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야 우리들은 그들의 투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마법의 환등으로부터 C.G.융으로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것인가....]

이 꿈을 꾸기 이전에 나는 자신과 자아의 문제에 관한 꿈을 꾼 일이 있었다. 그 꿈 속에서 나는 하이킹을 하고 있었다. 구릉의 풍경 속의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태양은 빛나고 나는 광활한 사방을 굽어볼 수 있었다. 이윽고 길가에 있는 작은 예배당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예배당 문이 조금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제단에는 성모 마리아의 상도 십자가도 없었고 대신 훌륭한 꽃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단 앞 마루 위에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한 사람의 요가 행자가 요가 자세로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너무 두려워 두눈을 둥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 저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대해서 묵상하고 있는 인간이로구나. 그는 나를 꿈꾸고 나는 그의 꿈을 꾸었던 것이로구나]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꿈을 1944년의 병 후에 꾸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기도 하다. 나의 자아는 묵상 중에 물러가 버리고, 그리고 나의 지상에 있어서의 형태에 관해서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는 3차원의 존재로 들어가지 위해서 인간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바다속으로 잠수하기 위해서 잠수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존재를 거부하게 될 때 내세에 있어서 자아는 종교적인 모습을 갖게 된다. 이 것은 꿈 속의 예배당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 지상의 형태에 있어서 그것은 3차원의 세계의 사실을 여러 가지 경험하게 되며, 보다 더 위대한 인식에 의해서 자아 실현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가 행자의 상은 나의 무의식의 출생이전의 전체성을 나타내며, 또한 꿈의 경우에 자주 나타나는 바와같이 마음속의 <극동>, 즉 나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소원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마법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요가 행자의 묵상은 나의 경험적인 현실을<투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이러한 인과 관계를 반대로 보고 있다. 무의식으로 부터의 산출물 가운데서 우리들은 만다라, 즉 전체성을 나타내는 원형과 정방형의 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전체성을 표현하려고 할 때는 언제난 우리들은 그러한 상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의 기초는 자아, 즉 의식에 있으며, 또한 우리들의 세계, 빛의 시야는 자아의 초점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우리들은 불명확하고 수수께기에 넘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이 그림자가 많은 형태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들의 무의식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그 자신의 현실을 가지고 있는가를 결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피상적인 관찰자는 자아에다 중심을 둔 가설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엄밀히 조사해 보면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이미지는 의식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 아니라, 그자신의 현실과 자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주변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들 두개의 꿈의 목적은 자아, 즉 의식과 무의식과의 관계의 역전을 빚어내고 있으며, 무의식을 현실의 경험을 하고 있는 인격의 발생원으로서 제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역전은 <피안>의 의견에 의하면 무의식적 존재라는 것이 진정한 것이며, 우리들의 의식의 세계는 일종의 환상이며, 또한 꿈 속에서는 꿈이 현실인 것처럼 특수한 목적에 따라서 만들어진 위장적인 현실이 아닌가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는 동양인의 마야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무의식의 전체성은 모든 생리적 및 심리적 사상의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있어서는 전체성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원리가 있다-이것은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체의 의식화의 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식의 달성이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이 과정의 중심이며, 본질이다. 동양인은 의심할 바 없이 자아에다 신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의 기독교의 생각을 따른다면 자아에 대한 지식은 신을 알기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의문은 그가 어떤 무한한 것과 관계가 있는가 어떤가, 라는 문제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애에 대한 시금석이다. 진실로 문제삼아야 할 것이 무한성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 우리들은 무익한 사실에 흥미를 가제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한 진정으로 중요치 않은 여러 가지 목표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자기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 즉 재능이라거나, 아름다운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세계가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거짓 소유물에 대해서 강조를 한다거나, 또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을 결여하게 되면 될 수록 그의 인생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 사람은 한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한정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 결과로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미 무한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또한 이해한다면 욕망이나 태도는 변화하게 된다. 결국 우리들이 본질적인 것을 구체화하게 될 때만 오로지 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며, 본질적인 것을 구체화하지 않게 될 때는 생명은 낭비되고 만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결정적인 문제는 무한성의 요소가 그러한 관계 속에 제시되고 있는가 어떤가 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무한에의 감정은 우리들이 극한적인 것과 결부되고 있을 때만 달성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극한은 <자아>이며, 그것은 [나는 다만....... 일 뿐이다]라는 경험에 의해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아 속에 우리들이 편협하게 갇히고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과의 연관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에 있어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한정된 것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영원한 것으로서 경험하게 된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의 독자성- 즉 궁극적으로는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들은 또한 무한성을 의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리고 생활 공간의 확장과 합리적인 지식의 증가에 집중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그 독자성과 한계를 의식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의 최고의 도전인 것이다. 독자성과 한계라는 것은 동의어이다. 그 것들 없이는 무한성에 대한 지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결과도, 의식의 달성도 불가능하게 되며, 또한 그곳에는 무한성과의 단순한 망상적인 동일시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집단에의 도취와 정치적인 힘에의 욕망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들의 시대는 이 세상의 일에다 모든 강조점을 옮기고 있으며, 인간과 그 세계를 악마화해 버렸다. 독재자들과 그것이 가져다 준 불행의 현상은 인간이 초지성의 근시안에 의해서 초월성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무의식의 희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전혀 반대의 사실이다. 즉 무의식으로부터 위로 밀어 올려진 내용을 의식화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 무의식을 지속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며, 자아라고 하는 존재의 무의식의 요소와 동일시하는 일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의식을 멈추지 않고 창조해 나간다고 하는 인간의 사명을 회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단순한 존재의 어둠에 빛을 밝히는데 있다. 무의식이 우리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까지도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Great is the power of memory, a fearful thing, O my God, a deep and boundless manifoldness; and this thing is the mind, and this am I myself( St. Augustine, Confessions, Book X, p 213)






샛별   2008-05-15 08:59:55  
올려주신 여러건의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
청림   2008-05-15 13:01:49  
위의 샛별님과 같은 생각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올려주신 일련의 자료들을 통해 다시 한번 '의식과 죽음', '사후의 생명'에 관한 이해와 성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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