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소개 권정생 (1937 ∼ ) 동경에서 태어나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1969년 <강아지 똥>으로 기독교 문학상,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작품에는 모두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또렷한 역사의식이 가득차 있다. 지금은 안동에서 동화를 쓰고 계신다.
#대표 작품 소개 <강아지 똥>, <하느님의 눈물>, <바닷가 아이들>, <몽실언니>, <초가집이 있던 마을>,<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도토리 예배당 아저씨>, <사과나무밭 달님>, <한티재 하늘 1,2>, <우리들의 하느님> 시집으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등이 있다.
#『점득이네』내용 소개 점득이네는 만주에 살다가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오려 하다가 아버지를 소련군의 총에 잃게 된다. 이 일로 점득이는 소련군이 미워진다. 어렵게 외갓집이 있는 모과나무골에 살게 되지만, 사는 일이 여의치 않다. 어느 날, 외사촌 형 승호는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집을 나가고, 그 일로 외갓집은 곤란을 겪게 되고 외숙모는 그만 병이 나고 만다. 어머니와 모과나무골을 떠나 장터마을로 이사오게 된 점득이네는 부모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해 할머니와 살고 있는 판순이네와 같이 살게 된다. 판순이와 종대, 탄실이와 장대성 목사도 알게 된다. 어려운 형편에 서로 돕고 살던 그들에게도 전쟁의 바람이 불어 닥친다. 외숙부는 승기를 데리고 북으로 가고, 승호는 잡혀죽고, 그 충격으로 외숙모도 죽는다. 남은 승숙이도 인민군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흰 옷을 입혀 강둑에 모이게 했는데, 갑자기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이들을 학살한다. 어머니와 판순이 할머니, 종대가 죽고, 점득이는 눈을 잃게 된다. 이 일로 미군도 미워진다. 장목사의 주선으로 천사원이라는 고아원에 가게 된 점득이와 점례, 판순이는 고아원장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점례와 판순이는 석탄 장사를 하고, 점득이는 노래를 불러 생계를 꾸린다. 53년 7월 휴전이 되자 고향에 가려던 그들은 휴전선 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판순이는 국밥집 주인이 되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시위에 참가한다. 점득이와 점례는 여전히 고향에 가지 못한다.
#시대적 배경 해방 이후부터 휴전이 되는 시기까지가 주요한 시대적 배경이고, 판순이와 재회하게 되는 시기는 1980년대로 예상됨.
#나누고 싶은 이야기 - 점득이네가 압록강을 건너서 만난 할머니의 말씀 ("해방되었다면 왜 아라사 놈이 사람을 죽이는 거야. 이젠 왜놈대신 아라사 놈들이 조선을 차지한 거요. 이남은 미군이 차지했고. 주인이 바뀐 거지.") - 해방이후 일제청산은 왜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인가 - 장목사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 국군이나 미군의 양민학살 (www.dongbuic.org, kilsp.jinbo.net) - 천사원의 원장처럼 사회사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학생운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는 시위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만약 판순이와 점득이가 서로 알아보았더라면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권정생 동화의 한계와 우리가 할 일
권정생은 우리 어린이 문학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든 좋은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권정생 동화에도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는 그 내용이 중요한 만큼, 읽기 쉽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권정생 동화 가운데 몇몇 작품은 주제나 소재는 좋으나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아쉽다. <점득이네>나 <초가집이 있던 마을> 같은 소년소설과 '오누이 지렁이'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 '남쇠와 파란눈의 아이' 같은 단편동화들이 그렇다. <점득이네>와 <초가집이 있던 마을>은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어린이들이 쉽게 읽지 못하고 주제를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점득이네>에서 미군 비행기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폭격을 해 점득이 어머니가 죽고 점득이가 장님이 되는 부분만 봐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알 수 없게 사건이 일어난다. 역사에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고 해도 동화에서는 그 원인과 결과가 어린이들 처지에 맞게 잘 나타나야 어린이들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단편동화 '오누이 지렁이'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지렁이까지도 동화의 주인공으로 헀다는 것이 참신하지만 어린이들이 주제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기 힘들게 썼다. 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와 '남쇠와 파란눈의 아이' 같은 작품은 기독교 사상과 우리 역사 현실이 얽혀 있는데 지나친 상징이나 비약이 많아 어린이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표현이나 무거운 주제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몇몇 작품들이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체념이나 절망을 안겨줄 위험이 잇다는 것이다. <점득이네>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보면 우리 민족이 겪어온 역사를 가슴 아파하는 모습만 그리고 현실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은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점득이네>에서 점득이가 장님이 되어 거리를 떠돌면서 통일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나,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서 복식이가 군대에 가면 북쪽에 간 아버지와 총을 겨누어야 한다고 자살을 하는 것은 너무나 절망스럽다. 그러다 보니 남북이 갈라진 현실을 이겨나가서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모습이 힘있게 나타나지 못 한다. 그저 막연히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다. 차라리 <점득이네>에서 씩씩하고 거칠 것이 없는 판순이나, 대학생이 되서 통일을 외치는 그의 아들 한수 같은 인물을 좀 더 살려냈더라면 희망에 찬 앞날을 보여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가지만 더 아쉬운 점을 얘기한다면 권정생 동화는 나오는 사람이 어른이 많고 어린이가 거의 없어 어린이 삶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 한다는 것이다. <사과나무밭 달님>만 봐도 어린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보리 이삭 팰 때' 나 '사과나무밭 달님' '공아저씨' '똬리골댁 할머니' '별똥별' '해룡이' 모두 어른이 주인공이다. 그나마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도 너무 어른스러운 몽실이나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일을 풀어 나가지 못하는 점득이 같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권정생 동화를 어린이들이 더 읽기 힘들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정생은 지금까지 써 온 동화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우리 어린이 문학이 나아갈 새 길을 밝혀 놓았다. 단지 아쉬운 점을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나올 새 작품에 많은 기대를 하기 때문이고 우리 어린이 문학을 이어 나갈 다른 많은 사람들이 권정생 문학을 이어받아 우리 어린이 문학을 제대로 키워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어린이 문학은 더 이상 국적을 잃고 헤매면서 말장난이나 하거나, 어른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꿈이나 꾸는 그런 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가 철저하게 우리 문학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동화 안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또 이런 겨레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린이들이 쉽게 읽고 감동 받을 수 있게 어린이들 처지에 맞게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한두 사람아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곳곳이 바뀌어 어린이들이 어디서나 좋은 동화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어린이들은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동화 읽는 어른》 1994년 6월호
#『아기너구리네 봄맞이』에서 작가의 말 동화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어린이들이 즐겨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나 거짓말을 써서는 안 되겠죠. 거짓말을 만들어 진짜인 것처럼 들려주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저절로 거짓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첫째 재미가 있어야 하지만, 참말을 전해줘야 한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거기에 거짓이 들어가 있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읽지 않고 듣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참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너무도 많은 올가미가 있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나쁜 쪽으로 걸어가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연보
1937년 일본 도쿄 혼마치에서 출생 1946년 귀국. 생활고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짐.모친, 동생과 함께 청송에 있는 외가에서 지냄 1947년 안동에 가족이 다시 모임 1950년 6.25로 가족이 몇 해 동안 흩어져 지냄 1951년 이 해부터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서점 등의 점원 생활을 함 1955년 결핵을 앓기 시작함. 이후 평생 병고를 겪게 됨 1957년 결핵으로 피폐해진 몸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옴 1965년 집을 나와 대구, 김천, 상주, 문경, 점촌, 예천 등을 걸인으로 떠돌다 석달 뒤에 귀가 1967년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해 이 마을교회의 문간방에서 지내며 교회 종지기를 함 1969년 동화 <강아지 똥>으로 월간 <기독교 교육>의 제 1회 아동문학상 수상 1971년 동화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73년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75년 동화 <강아지 똥>(세종 문화사)을 펴냄. 제 1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1979년 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창작과 비평사)을 펴냄 1982년 조탑동 교회 뒤 언덕밑에 작은 흙집을 지어 거처를 옮김 1984년 동화집 <하느님의 눈물>(산하)과 소년소설 <몽실언니>(창장과 비평사)펴냄 1985년 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 동화집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분도출판사), <달맞이 산너머로 날아간 고등어>(햇빛 출판사)를 펴냄 1986년 산문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종로서적)을 펴냄 1988년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과 동화집 <바닷가 마을 아이들>(창작과 비평)를 펴냄 1990년 소년소설 <점득이네>(창작과 비평사)를 펴냄 1991년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를 펴냄 1992년 동화 <짱구네 고추밭 소동>(웅진출판)을 펴냄 1996년 이원수 선생의 전기 <내가 살던 고향은>(웅진출판)을 펴냄 1996년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을 펴냄 1996년 그림책 <강아지 똥>(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을 펴냄 1997년 그림책 <오소리네 집 꽃밭>(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을 펴냄 1998년 동화집 <깜둥바가지 아줌마>(우리교육)를 펴냄 1998년 소설 <한티재 하늘 1,2>(지식산업사)를 펴냄 1999년 동화집 <먹구렁이 기차>(우리교육)를 펴냄 1999년 장편동화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를 펴냄 2000년 동화집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를 펴냄 2000년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웅진출판)를 펴냄 2001년 그림책 <황소 아저씨>(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를 펴냄 2001년 동화집 <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을 펴냄 2002년 <권정생 이야기 1-글모음, 2-문학과 삶>(이철지 엮음, 한걸음)이 나옴
#참고자료
1980년대 학생운동 식민지시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학생운동은 운동의 험로를 개척하며 항상 변혁운동의 첫 자리를 차지해 왔다. 학생운동은 "학생이 주도하는 집단적·조직적·지속적인 사회변혁운동"이다. 학생운동이 일어나는 근본적 이유는 학생들의 정의의 실현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민족적 모순, 경제적 모순, 정치적 모순 등을 해결하는데 첨병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민족모순의 해결을 위한 통일운동, 정치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민주화 운동, 그리고 경제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경제투쟁 운동이 학생운동의 주조를 이뤄왔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서구의 학생운동과는 달리 한국사회의 특수적 역사구조에 대응하는 도전세력으로서 한국사회 변동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운동은 우리 사회의 역사구조의 모순을 파헤치고 바로 잡으려는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인정받아 왔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민중적 사회주의 이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 형태로 구분해 본다면, 반외세민족주의형, 반독재민주주의형, 민중적 사회주의형의 세 가지 이념형으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반외세민족주의 형은 순수한 민족주의정신을 배경으로 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추구하는 민족독립지향의 학생운동이다. 둘째, 반독재민주주의 형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국민의 기본권의 신장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의 모든 원리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현실정치 전반의 비민주적 요소를 비판하고 제거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운동이다. 셋째, 민중적사회주의 형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영향아래 민족의 독립을 계급해방과 결부시켜 그것을 혁명적 방법에 의해 추진하는 방법과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의 인권을 옹호하고 그들의 생활조건과 근로조건을 대중운동을 통해 향상 시키려는 운동이다. 한국 학생운동은 강렬한 민족애 또는 민족주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치열한 선구자적 사명감과 순교자적 지사 정신으로 일관하여 왔다. 강한 지사정신에 뒷받침된 한국 학생운동은 강렬한 저항정신을 특징으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운동을 전개해왔다. 바로 지난 암울한 시기에 통치권에 대해서 불굴의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속성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 학생운동은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을 통하여 수차례에 걸쳐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거나 이에 큰 타격을 가해왔으며, 정통성, 정당성이 결여된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일으키는 촉매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강력한 권위주의 정권에 돌을 던지고 맨 몸으로 맞서 싸운 자도 학생이요, 철벽으로만 여겨졌던 강고한 외세에 대항해서 민족의 자존을 외친 자도 학생이었다. 그 동안 한국에 있어서 정권의 정통성, 정당성 유무를 판별할 수 있을 만큼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었던 자도 학생이었다. 이러한 숭고한 정신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은 사이비 정통성, 정당성을 거부하는 국민운동의 선봉이 될 만큼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정치과정적, 정신 운동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과 양민학살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 정 구
1. 머리말 한국전쟁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는 틀에 박힌 정답이 있어왔다. 곧, 전쟁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고 전쟁에 관련된 모든 잘못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고, 남한은 희생자에 불과하고 미군과 남한군은 거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담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한완상사건이나 최장집사건이나 {태맥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사건처럼 빨갱이 동조세력으로 몰려 중도하차, 사회적 매장, 법적인 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반인륜적인 범죄적 행위에 대한 진실은 은폐된 채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는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였다. 이 결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문제까지도 은폐하는 자폐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동 티모르에 파견된 한국군에게도 또 이러한 사실이 발생하고 또 은페라는 죄악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2. 전쟁 중의 양민학살에 대한 포괄적 양상 한국전쟁 중에 저지러진 양민학살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포괄적으로 정리해 보겠다. 이를 단계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전쟁'시기인 1948년 2.7구국투쟁에서 6.26전쟁까지의 양민학살이 있었다. 이 전쟁기간은 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 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기간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민항쟁에서 발생하였고 또 유격대소탕전의 과정에서 청천벽력작전을 구사하였으므로 주로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학살을 당하였다.
둘째는 6.25전쟁 초기의 양민학살이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주로 평택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만정권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학살, 노근리나 이리역 폭파사건과 같은 미군들에 의한 체계적 학살, 북한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 토착 공산세력과 인민군에 의한 남한 양민학살(남한 정부의 공식적 발표는 약 129,000명이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수복과정에서 전쟁 중 부역자혐의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등이다. 대체로 남한에 대한 양민학살은 전선이 남쪽 땅에 형성되었던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전선이 1951년 봄 이후는 중부에 전선이 고착되므로 단양의 곡계골과 같은 지역에서도 미군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주로 남한 땅에서의 양민학살 사건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제2전선인 빨치산에 대한 소탕작전 과정에서 저질러진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이다.
셋째는 미군과 남한군이 50년 10월 1일 38선을 월북한 이후 북한을 점령한 역 4-50일 동안 저지른 북한양민에 대한 학살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172,000여명의 학살이 주로 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나 실제의 학살은 미군, 남한 국방군,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저질러졌다.
넷째는 전쟁이 51년 6월이 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착화됨에 따라 남한에서의 집단적 양민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미군의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수십만의 북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3. 작은전쟁과 양민학살 1) 4·3항쟁과 양민학살 4·3항쟁은 제주도민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통일투쟁이었고, 또 도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특성 외에도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실체 희생자의 80%이상이 무고하게 또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양민학살이라는 특성을 띤다. 2) 여수군민항쟁 앞에서도 밝혔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미군은 48년 10월 중순 여수주둔 14연대 1대대에 제주항쟁의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오후 8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장병의 대다수인 3000여명이 봉기에 참가하고 여수의 좌익들이 인민대회를 열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통치권 행사를 함으로써 단순한 군인봉기가 아닌 민군봉기로 발전하였다. 이에 2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23일 함포사격이 시작되어 한달 동안 육해공군 합동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4. 확대전쟁과 양민학살: 보도연맹, 유격전과 양민학살 이 시기의 양민학살 유형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 학살, 6.25발발시 형무소에 있는 죄수에 대한 집단적 처형, 국민방위군사건, 노근리나 이리역같은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인민군과 토착 공산세력에 의한 학살, 수복과정에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제2전선 주위의 양민학살사건인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 등이다. 1) 보도연맹월 학살 대표적인 양민학살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에서부터 시작된다. 보도연맹은 1949년 11월 28일자 권순열 당시 내무부장관의 담화문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세력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오도돼 반역도당에 가입, 활동했을지라도 대한민국의 충성된 국민임을 염원하고 실천에 옮긴 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관용, 관대하게 용서해 줄 용의가 있음을 언명해 둔다." 보도연맹원 가운데 생자의 한 사람인 우흥원 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무고한 양민이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를 준겠다기에 손도장을 찍었다"("역사기행 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을 가다", {내일신문} 1994. 11. 2, 44쪽). 2) 형무소 수인의 집단 학살 3) 토착공산세력과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한 양민학살 4) 수복과정에서 남한 군인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5) 제2전선주위의 양민학살 사건 정희상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남북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정희상 <이대로는 준을 감을 수 없소 : 6.25정후 민간인 학살사건 발굴 르뽀>, 돌베개 1990) 6) 남한전선에서 미군의 양민학살 6.25전쟁 초기 미군의 남한 땅에서 양민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경상남도 진주출신의 어느 ㄱ 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비군 비행기가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지역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에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양민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초기에는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도 이러한 만행이 체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1950년 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면적인 후퇴를 감행할 때 원자폭탄이 투하된다는 소문을 퍼뜨려 고의적으로 이산가족을 대거 양산하는 등 여러 종류에 걸치고 있다.
지난 14일 거제 제6포로수용소가 있던 용산마을 부근 농지에서 경지정리 작업을 하던 중 큰 병속에 넣어진 채 비옷에 쌓여있는 이들 문서를 발견해 거제군 공보실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가운데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이라는 제목의 편지는 속옷을 찢어 만든 가로 80cm, 세로 1백20cm크기의 광목에 잉크로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는 등의 내용을 적고 편지 끝 부분에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쓰고 있다. 이와 함께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한겨레신문}, 1992년 12월 19일 15쪽).
또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인 도드가 포로들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포로들이 도드에게 요구한 4개 조항 가운데 제1조항이 "폭행, 모욕, 고문에 의한 심문, 혈서의 강요를 중지하고 위협, 학살 독가스와 세균무기 실험중지, 국제법에 의한 전쟁포로의 인권과 생명의 보장"을 제기하고 있어 미군의 범죄행위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암시한다.([중국인이 본 한국전쟁 : 판문점 담판], 한백사 1991)
5. 북한지역 양민학살 1) 미군강점기간 북한 내 학살과 만행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를 보면 40여일 강점기간동안 미군의 지휘, 감독과 직접적인 적대행위에 의해서 아래의 표가 보여주듯이 172,000여명의 북한주민이 학살되었다한다. 이 숫자는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강점기간동안 파괴. 약탈행위도 엄청났었다. 5,000여 개의 학교, 1,168개의 병원 및 정휴양소, 260여개의 극장 과 영화관, 675개의 과학연구기관 및 도서관, 수많은 민간주택, 6개의 박물관, 문화유물 6,709전 약탈, 수십만 톤의 양곡, 60%이상의 전체 집짐승, 안악, 룡강의 국보급 고분 등을 파괴 및 약탈했다고 한다. 2) 전쟁 소강기 북한 영민학살 1951년 초여름부터 전선은 대체로 38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 소강상태란 지상전 전투행위의 소강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공중전과 해상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던 미군의 공습이나 해상함포사격등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선아닌 후방에서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 생업의 현장에 대한 해상. 공중포격에서 북한의 주민들은 살해되고, 생존수단을 파괴당하는 끔직한 전쟁체험을 하였다. 더구나 51년 7월 이후 정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민간인과 비군사 민간시설에 대한 살상과 폭격행위는 계속되었고 정전이 실효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직전까지도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