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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1-12절, 세례 요한의 죽음
[1-5절] 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 . . .
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이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단강 동쪽의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아들들로는 팔레스틴 북동쪽의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다스렸던 헤롯 빌립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던 헤롯 아켈라오가 있었다.
전에 헤롯[헤롯 안디바]은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헤롯 안디바의 처음 아내는 아라비아의 아레타스 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롯은 처음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나님의 사람 요한은 헤롯의 이 잘못을 용감하게 바로 지적하였고 그 지적 때문에 그는 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하였으나 무리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마가복음 6:19-20에 보면, 실상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고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 악인들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그들의 말과 여론을 더 두려워한다. 일반 대중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는 자를 그 나라의 왕과 왕후가 죽이려 했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었다.
[6-8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 . . .
헤롯은 생일을 맞아 잔치를 하였다. 사람들은 자기 생일을 축하하며 잔치를 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감사함이 없는 생일 축하는 무의미하다. 불경건한 자의 생일은 복이 아니고 지옥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일이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생일 축하는 의미와 가치가 없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였다. 헤롯은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로 허락했다. 헤로디아의 딸은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허세(虛勢)로 한 자기의 맹세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요한을 미워하여 옥에 가두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9-11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 . . .
왕은 근심하였다. 그것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고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그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헤롯은 공의의 판단과 처리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사람 요한을 죽이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요한의 목은 잘리웠고 그의 머리는 소반에 담겨 왔다. 사람의 독한 미움과 복수심은 기어코 이런 끔찍한 일을 만들고 말았다. 사람은 만물보다 더 악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옥중에서 목베임으로 그 생을 마쳤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한을 위해 작정하신 생애의 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결코 수치가 아니고 영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을 것이며, 의로운 순교자의 죽음 후에는 영광과 큰 상급이 있다.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 . . .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고하였다.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그를 따른 제자들이 있었다. 메시아가 오셨으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는 얼마 동안 중첩되었다. 요한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이 죽은 후부터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이제 한 시대는 갔고 한 시대가 왔다. 세례 요한의 시대가 끝났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
우리는 헤롯의 악행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음행하거나 간음하는 자,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또 우리는 인간의 생애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됨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세례 요한처럼 순교로 생을 마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작정하셨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오직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13-21절, 5병2어(五餠二魚)의 기적
[13-1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 . .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옥에서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으셨고 헤롯이 자기를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는 소식도 들으셨을 것이다. 그는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셔서 따로 빈들에 가셨다. 무리들은 그가 어디 계신다는 말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그를 좇아갔다.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구약교회는 부패되어 있었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같이 근심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의 신적 능력으로 그들의 병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15-18절]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 . . .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나아와 말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저녁시간이 이미 지났지만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날 교인들과 달랐다. 제자들도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제안하지 않았고, 단지 식사시간이니까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말하였다.
그 방황하며 갈망하는 무리를 위해 주께서는 자리를 피하거나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 양식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말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다(요 6:8-9). 그 떡 다섯 개는 그 무리들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그 많은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었다.
[19-21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 . . .
주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축사한다’는 원어(율로게오 eujlogevw)는 ‘감사한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음식물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주었다. 사람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주님의 떡 기적은 겨우 배고픔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고 무리에게 배부름을 주는 것이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다. 즉 장년 남자만 약 5천명이었다. 원문에는 ‘약’(호세이 wJsei;)이라는 말이 있다(KJV, NASB).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는 만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숫자이다. 그 많은 무리들이 그 저녁에 놀라운 떡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이 일에 산 증인들이었다.
본문의 내용은 분명히 떡 기적이다. 그것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문자적으로 떡 기적 사건이었다. 본문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 만 명 이상을 먹인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떻게 한 알의 씨가 수천 혹은 수만 개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신비한 법칙에 의해 그렇게 된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신이시다(욥 42:2). 예수께서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으로 사셨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떡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둘째로, 떡 기적은 하나님께서 영육의 양식을 풍성히 공급해주실 수 있음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세계의 생물들을 기르시고 먹이시는 섭리자이시다(시 104:25-29). 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마 6:11).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3).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인 성경의 풍성한 교훈과 육신의 양식인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실 것이다.
22-33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22-24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 . . .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그는 무리를 보내신 후에 육신적으로는 피곤하셨을 것이지만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고 그는 아마 여러 시간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산에 혼자 계셨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으나 기도하기를 힘쓰셨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는 길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다. 24절에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라는 구절은 헬라어 전통본문에는 “바다 가운데 있어”라고 되어 있다(KJV). 갈릴리 바다는 타원형 바다인데, 남북의 직경은 약 21킬로미터 즉 합정동에서 안양까지이며, 동서의 직경은 약 11킬로미터 즉 합정동에서 뚝섬까지인 큰 바다이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거센 바람과 흉흉한 물결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전날 놀라운 떡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그 기적의 감격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던 때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 바다는 항상 안정이 없다. 세상은 항상 안정이 없고 평안과 환난이 번갈아 찾아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이다.
[25-27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 . . .
밤 사경(四更) 즉 새벽 3시부터 6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는 밤새 산에 계셨고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는 어려움 당한 제자들을 위해 급히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실 수 있으시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질렀다.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잠시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센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당하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신 것이었다.
[28-31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 . . .
그때에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청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 소박한 베드로의 믿음의 요청을 거절치 않으시고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잠시 바다 위로 걸었다. 그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어본 자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걷지 못하여 ‘거센’(전통본문)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며 외쳤다. 예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시며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성도가 세상의 어려운 현실만 보면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며 시험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32-33절]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바른 고백이었다. 제자들을 돕기 위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자.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경의 진실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또 어려운 일이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과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자. 제자들을 위해 물 위로 걸어서라도 오셨듯이, 주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오실 것이다(사 41:10; 43:1-2).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산 기도와 철야기도를 힘쓰신 것을 본받아, 연약한 육신을 가진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자.
34-36절, 옷가에 손대는 자들을 다 고치심
[34-36절]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 . . .
그들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고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육신에 병든 자들도 많이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그 불쌍한 여인만이 아니고,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15장: 마음의 더러움
1-9절,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
[1-6절]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 . .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위생적으로 좋은 일이다. 또 장로들의 교훈은 존중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따르는 것이 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은 그렇게 비난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간치 못하고 자기들의 전통에 맞지 않으면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더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부모님에게는 안 드려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의무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훈이나 교회의 교훈은 이처럼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주께서는 이 지적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이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명하는 것은 해야 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성경이 침묵하는 문제에 대해 독단적이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이며 최종적 권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과 교훈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지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7-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겼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는 증거는 그들이 자신들이 만든 규칙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키고 폐지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은 외식자들의 종교생활이었다. 그것은 헛된 종교생활이었다.
사람의 전통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가? 예수께서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성경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알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자. 주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친히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이 진리를 예증하셨었다(마 4:4).
10-20절, 사람을 더럽히는 것
[10-14절]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 . . .
주께서는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문제이다. 위생적 문제는 죄 문제와는 다르다.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은 위생적으로는 좋지 못하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영적 세계에는 두 종류의 씨 뿌림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그는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나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가짜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그에게는 중생의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없다.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결국 뽑힐 것이다. 그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또 엄격한 진리 앞에 뽑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때에 뽑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 엄격한 진리의 교훈 앞에 실족하는 자는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른 말씀 앞에 실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5-20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 . . .
베드로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카르디아 kardiva, heart)은 인격의 중심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새 생명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한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다(겔 36:26).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마음(heart)의 변화는 무엇보다 생각(누스 nou'" mind)의 변화를 포함한다. 구원받은 자는 여실하게 그 생각이 변한다. 전에는 사람이 그 생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나,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롬 7:23, 25; 12:2; 고전 2:16; 엡 4:23). 그의 생각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고 죄악되고 불결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위생상 불결일 뿐이지, 사람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럽히지는 못한다.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 즉 마음의 성결을 사모하고 그 성결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21-28절,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1-22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나가셔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북서쪽 국경지역이다. 그 지역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수 13:6).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말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마가복음 7:26에 보면, 그는 헬라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주여’라고 불렀다(22, 25, 27절). ‘주여’라는 말은 신적인 호칭이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예수님은 신적 메시아로 믿었다고 보인다.
그 여인은 예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딸은 귀신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23-26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 . . .
예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자, 제자들은 와서 요청하였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자기를 도우실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들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영적 특권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친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으셨다(출 19:5-6).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치 않는 이방인들은 도덕적으로도 인간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27-28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 . . .
그 여인은 자존심이 몹시 상할 만도 한대 다시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방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여자는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그 시각 그의 딸이 고침을 받았고 건강의 회복을 얻었다. 이 기적은 다시 한번 더 예수께서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주셨다. 그는 인간의 영육의 질병, 곧 심신의 문제를 고쳐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자. 가나안 여인의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각종 질병들에 걸린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또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간절히 주께 구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또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이다.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나아와 간구하였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올 때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것이다.
29-31절, 각종 병자들을 고치심
[29-3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 . .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떠나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환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회개와 죄사함의 영혼 구원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육신적 질병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종 병자들을 데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말하고 불구자는 건전하게 되고 절뚝발이는 걸으며 소경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양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24는 그가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고 기록한다. 마태복음에서만 언급된 질병의 종류들을 보면, 4장에 귀신들린 병, 간질, 중풍병, 8장에 나병, 열병, 9장에 혈루병, 소경, 벙어리, 12장에 손 마른 병, 그리고 15장에 절뚝발이와 불구자 등이다. 이런 질병들은 오늘날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신경외과, 피부과, 내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치료는 거의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병 치료의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표이었다. 복음서들을 읽는 자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하며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무리들은 그가 각종 병환자들을 고치시는 기적들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을 잘 적용하여야 한다. 우선, 성경의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가지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무리하게 영해(靈解)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주관적으로, 임의적으로 영해(靈解)하는 것은 불건전한 해석이 된다.
또 역사를 그대로 오늘 현실에 적용하여 오늘날에도 성경의 기적들이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오류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고(마 10:1), 사도시대에는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집사들도 기적을 행했고, 일반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주어졌다고 보인다(고전 1:7; 12:28-30).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 고침의 기적들은 그 후 신약교회에 계속 존재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사도시대에 주신 외적 기적들의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 데 있었다(히 2:3-4). 마치 모세오경이 기록된 이후, 모세에게 주셨던 것 같은 기적들이 그 후시대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사도적인 기적들의 필요성이 그 기적들이 정통교회들에서 사라졌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눅 16:31). 전도와 교회 확장의 기독교회 2천년 역사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뿐이다. 외적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기적, 즉 중생의 기적, 내면적 변화의 기적, 영적 성장의 기적이다. 이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외적인 기적과 내면적인 기적이 항상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하다. 외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내면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외적 기적들을 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내면적 기적은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서나 풍성하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단지 육신적 질병의 치료가 아니고, 영혼의 구원, 믿음, 회개, 영적 성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기적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믿음과 회개와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현실에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9절, 두 번째의 떡 기적
[32-3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제자들은 말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34-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 .
예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부이었다. 떡 일곱 개는 턱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떡 일곱 개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셨다. 인간 예수님은 믿음이 충만하셨다. 그의 충만한 믿음은 그의 신성의 도우심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으셨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으로 인하여 믿음 충만함을 가지셨다.
그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시고 축사하셨다. 그 앞에 놓인 떡과 생선, 그의 손에 들린 그 음식은 그 큰 무리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떼어 주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 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음식은 그의 손에서 신기한 팽창을 하였다. 주께서 떼어 주시는 행위는 확실히 몇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마침내 온 무리를 다 배불리 먹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간의 육신적 필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필요가 넘치게 충족될 때까지 그리고 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7-39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 . . .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 먹은 자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4천명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셔서 마가단[막달라](전통본문) 지경으로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또 한번 밝히 증거되었다. 남자만 4천명이니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아마도 만 명 이상은 되었을 그 무리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의 일이었다. 예수께서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는 이 성경의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4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 . .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사상이 서로 달랐으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사탄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히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족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낼 것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증거들은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나병과 중풍병, 소경과 벙어리와 앉은뱅이 등 많은 병자들의 치료, 죽은 자를 살리심--이것들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지 못했다.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 . . .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다.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였다. 이런 자들은 참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주께서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은 없으셨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표적은 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삼일 간 무덤에 있으실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만에 다시 사심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또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다.
5-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5-10절]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 . .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님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떡 기적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임을 주께서 다시 확증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는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믿으려 하는 자는 믿을 만한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지 못할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11-12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로 알지 못했고 자기 의(義)를 의지하고 자랑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도 많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외적 규례들을 중시하고 더 중요한 내면성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고, 또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하였다. 당시의 부유한 고위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 교훈은 누룩같이 퍼져나가는 힘이 있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잘못된 교훈, 이단, 율법주의, 형식주의의 교훈, 혹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의 교훈은 참된 경건을 해치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디모데후서 2:17에는 잘못된 교훈을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에 비교하였다. 그것은 조기 발견, 조기 치료치 않으면 온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분별하여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 . . .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이며 요단강의 발원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전통본문)고 물으셨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그는 다시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선지자, 제사장, 왕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전하시는 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며, 교회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왕이시다.
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온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와 주인이신 하나님께 외아들이 계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옷만 바꿔 입으신 것이 아니고, 두 구별된 인격이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啓示)된 만큼이 이러하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면서,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한 고백이 복되며 그의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의 귀를 여심으로써만 가능하다(행 16:14).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여성명사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3:11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 또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는 성경의 바른 진리와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온 세계에 세우셨고 오늘도 세우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음부’(陰府, 하데스 a{/dh")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며, 지옥은 죄인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집이다. 그러나 주께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게 되었다. 죄가 제거됨으로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극복되었다. 무덤과 지옥의 권세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19-20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주께서는 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복을 주는 자로 이해했던 것 같다. 주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사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자.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고 성도들은 성경의 바른 지식 안에서 그 복음과 진리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무덤과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생과 천국의 복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또 우리는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도자는 그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분발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자.
21-28절, 자기 부정을 가르치심
[21-23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 . .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책망하여](KJV, NASB, NIV)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으나 그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그를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여 칭찬을 들었지만, 지금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충고는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가 죽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독생자가 인류를 위해 죽는 것이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 가치관, 명예, 자존심,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라는 뜻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다. 사형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가서 거기에 달려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그의 제자들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리라[찾을 것임이니라].” ‘그것’은 ‘자기 목숨’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주께서는 두 가지 목숨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숨이다. ‘목숨’이라는 원어(프쉬케 yuchv)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뜻도 되지만, 또한 ‘영혼’이라는 뜻도 된다.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자기의 영혼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자기의 영혼을 찾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때 영생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때 영생할 수 없고 도리어 둘째 사망(계 21:8)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목숨이다.
성도의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길은 주께서 가신 길과 비슷하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 그는 죽음으로 죄인을 위한 영생의 길을 여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를 위하여 죽으면 확실히 부활할 것이다.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의 ‘제 목숨’을 ‘자기의 영혼’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KJV, NASB, NIV).
본절은 육신의 목숨에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얻은 자라도 그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본절은 영혼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적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만, 비록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어 지옥에 던지운다. 그러므로 수십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불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영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27-28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 . . .
주께서는 또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유익이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이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갚을 것임이니라].”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은 그의 재림 때이다(마 24:30; 살전 4:16). 그때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날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다(롬 2:6-7).
예수께서는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다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두 목숨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는 육신의 목숨도 귀한 것이므로 잘 관리해야 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한 것이므로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고 성령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 생명을 주셨다(요 5:24; 10:28; 11:25-26; 롬 5:18; 요 3:5; 딛 3:4-5). 또 그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순종으로 유지된다(롬 6:22). 성경은 우리에게 죄 지으면 죽는다고 여전히 경고한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살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딤전 6:11-12). 그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살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17장: 변화산 사건
1-8절, 변화산 사건
[1-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 . . .
마태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한다.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바로 앞부분의 예언대로, 그때 세 제자들이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시는 영광을 미리 보았음을 증거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었다. 영광의 주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5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 . . .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운 인물이었다. 그 두 분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한다고 본다.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들었다고 증거했다(벧후 1: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6-8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 . . .
제자들은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는 나아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신성의 영광의 나타남은 짧은 시간 동안만이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의 반복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그 믿음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9-13절, 엘리야가 먼저 왔음
[9절]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 . . .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은 참된 믿음을 위해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오용치 않도록 주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의 신적 영광과 기적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이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또 믿으려 하는 자에게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이런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확실한 표들이 된다.
[10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 . . .
제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 즉 당시의 성경학자들은 말라기 4:5-6의 예언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한 선지자가 나와서 대중들을 회개시킬 것을 예언한 것이다.
[11-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 . . .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다.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은 사람의 윤회(輪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시대의 상황을 거슬러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선지자가 왔다. 그가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15-17에 증거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했던 천사는 말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오실 자가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여 임의로,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대우하였다. 대중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알아보는 분별력, 공경심, 순종심이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앞선 자가 증거했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 눈과 열린 귀를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따를 것이다. 동일한 인물에 대하여 또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 두 부류는 나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쪽에 속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자.
14-21절, 간질병 아들을 고쳐주심
[14-16절]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 . .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였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신적 능력을 인정하였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 그는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당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그들이 그를 고칠 수 없었다. 열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지만(마 10:1), 무슨 까닭인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 . . .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을 고치려는 제자들도,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당사자들도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본문 20절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다.
마가복음 6:3-5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며 그를 배척했으므로,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었다.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한다(눅 13:11의 경우도). 귀신이 나가자 그 아이는 병이 나았다.
[19-20절]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믿음이 없기 때문이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다. 주께서는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4:12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나, 주님을 믿는 자가 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며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성경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21절] 그러나 이런 유(類)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본문).
전통적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원본의 본문이 확실하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29의 전통본문에도 나온다. 주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셨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에서 강청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8에서 그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하시며,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한 과부의 비유에서도(눅 18:1-8) 낙심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외면하시겠는가, 그가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특히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자. 본문의 이 사람은 자기 아들의 질병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렸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 자녀의 문제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진 분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 나가자. 주 앞에 엎드려 겸손히, 간절히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알자. 주께서는 간질병을 꾸짖으셨다. 귀신을 복종시키셨다. 불치의 병들도 고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가 병의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학적 방편을 감사히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가 허락지 않으시면 의학적 방편도 효험이 없을 것이다. 그가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유익하다. 그가 허락하셔야 우리가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우리 자녀들의 평안도, 우리 사회의 평안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자(마 7:7-11; 요 14:13-14).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기도와 금식으로 아뢰자. 주께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통적 헬라어 본문과 옛날 영어성경(KJV)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확실히 성경 원문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인간적 해결책이 없어보일 때 우리가 끈질긴 기도, 강청의 기도, 결사적 기도를 올려야 함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비상한 때에는 금식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자.
22-23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언하심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 . .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고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24-27절, 반 세겔 세금을 내심
[24-26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 . . .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였다. ‘반 세겔’이라는 말(디드라크몬 divdracmon)은 ‘두 드라크마’라는 뜻의 단어이다. 이것은 성전 봉사를 위한 세금이다. 출애굽기 30:11-16에 보면, 이스라엘의 20세 이상된 모든 사람은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하였고 그 금액은 회막 봉사에 쓰게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주께서 내신다”고 대답했다. 그는 주님이 세금을 안 내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자신과 주님의 돈주머니가 비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답은 주께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그가 당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의 지식은 인간의 제한성을 초월한다. 그는 전지(全知)하신 자이시다. 그는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타인에게니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관세(텔로스 tevlo")는 소득세, 통행세, 관세를 가리키고, 정세(켄소스 kh'nso")는 인두세나 주민등록세를 가리킨다고 한다(BDAG).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세금, 특히 성전세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전세가 면제될 자는 바로 그이다. 이 말씀에서 그가 암시하는 바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의 아들이며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증거이다.
[27절]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 . . .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게 하셨다. 그는,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세금을 내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주께서는 가난하게 사셨다. 그때 그에게는 한 세겔도 없으셨음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주머니도 비었음이 분명하다. 부요하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후 8:9).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작은 손해도 보기를 싫어하는가?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은 이 사건은 실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바다 속에 물고기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다. 그것은 그의 전지하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린다는 것도 놀랍다. 그는 그 물고기를 보셨고 그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가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신적 속성과 능력으로 되어졌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다시 한번 더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14절, 겸손을 가르치심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 . .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쭈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크다’는 원어(메이존 meivzwn)는 ‘더 크다’ 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KJV, NASB, NIV).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 속에 있는 교만, 세상적, 육신적 명예심이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주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교만한 자는 높은 자에게는 아첨하고 낮은 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마 25:31-46) 이 진리를 좀더 자세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그의 형제들, 곧 그의 종들과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며,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며, 또 그의 이름을 가진 소자(小子) 하나의 영접 여부가 영원한 구원과 멸망을 나누며, 의인과 악인, 영생에 이를 자와 영벌에 던지울 자를 나눌 잣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표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영접하며 서로를 섬겨야 한다.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범죄케 하는 것이 큰 죄가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경고가? 남을 범죄케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즉 남을 살리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 우리는 남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말과 행위로 남에게 참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한다든지 술취하고 음란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불구가 때때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깨닫자.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버려야 했을 지체, 뽑아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아니니이까?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 . . .
주께서는 또, “삼가 이 소자(小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절]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
전통본문에는 11절에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이 있다.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제자된 우리도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을 범죄케 하여 그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이가 심각한 신앙적, 도덕적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거절하거나 업신여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고 권면하여 그를 구원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3-7의 ‘잃은 양의 비유’와 비슷하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린 한 영혼이라도 우리의 실수로 인해 범죄하게 하고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 . . .
예수께서는 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 어린아이나 청소년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교회에서 큰 자는 형제를 섬기는 자이다.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했다(롬 12:10).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들은 어린 신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한 영혼, 한 어린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15-20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전통본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되게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교회 생활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사람의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책망]하라.” 개인적 책망 혹은 충고가 첫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문제를 남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이것은 또 우리가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정죄하고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내포한다. 우리는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 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충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참된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이 내포하는 바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 . . .
주께서는 또,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도록 해야 한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 . . .
주께서는 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회중 앞에서 판단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즉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는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될 것이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킨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 . . .
또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1-35절,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22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 . . .
예수께서 형제의 범죄에 대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교훈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에게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24-27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 . .
그 임금이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다.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이었는가? 한 달란트는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6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3억 6천만원이며, 일만 달란트라면 약 3조 6천억원이 된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었다.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였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말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 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주께서 하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것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이었다.
그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했지만 실상 그 빚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 . . .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달라. 갚으리다”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 . . .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신약교인들은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 . . .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교훈을 주셨다. 용서는 우리가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2).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1-12절, 이혼에 대하여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올라가셨다. 그의 갈릴리 중심의 사역이 끝났다. 그에게 남은 사역은 유대 지방에서,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일들이다. 큰 무리가 그를 좇았고 예수께서는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3-6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 . .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말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주께서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결혼시키셨다.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라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7-8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 . . .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이혼법을 들어 반문하였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법에서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에르왓 다바르 ר ת)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솸마이파는 그것을 부부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와 음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하였으나, 힐렐파는 그것이 남편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였다고 한다. 후자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혼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결혼 제도의 뜻과 다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이다. 결혼 서약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이 그 서약을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혼란한가?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 . . .
주께서는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합당한 이혼은 상대방이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이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정(情)을 통한 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분노는 정당성을 가지며 그 경우 이혼이 허락된다. 그러나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또 그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부당한 재혼을 정죄한다. 즉 부당한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부당하게 버린 자나 버리운 자와의 재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 후에는 재혼이 가능하다고 본다.
[10-12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 . . .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독신(獨身)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은 “그것이 주어진 자들 외에는”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고자(鼓子)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심리적으로 결혼을 원치 않는 자들이다. 또는 궁중의 내시들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고자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고전 7:7).
그러나 이 말은 받을 만한 자들만 받을 수 있다. 독신주의는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보통 결심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독신생활이 결혼생활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결혼도, 독신도 복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그 어느 쪽도 복되지 않을 것이다.
13-15절,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
[13-14절]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 . . .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고 말했다(눅 18:15).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오늘날도 믿는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예배 모임에 참석시킬 뿐 아니라,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귀찮게 여겨 그들을 꾸짖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다고 증거하였다(막 10:14).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책망을 받을 만하다. 주께서는 또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모든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나,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아이들은, 아직 신앙고백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 나올 수 없고 천국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용납되고 환영을 받는다. 그들은 참으로 천국백성으로 간주될 만하다. 여기에 구약시대로부터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던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보인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외인들이 아니고, 언약 안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그들이 커서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15절]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셨다. 마가복음에는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증거되어 있다(막 10:16). 그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와 교회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요 부족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영접하자.
16-22절, 한 부자 청년의 질문
[16-17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 . .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누가복음은 그를 ‘한 관원’이라고 말했다(눅 18:18).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달려와 꿇어앉아 말했다(막 10:17). 아마 많은 사람이 있는 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지함과 열심을 보인다. 전통본문에 보면, 그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관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전통본문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선한 선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선한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내용을 반복하신 것뿐이다. 레위기 18:5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들은 우리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롬 3:19-20).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된 후 그리스도께로 인도된다(갈 3:24).
[18-22절]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 . .
그 사람이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십계명 중에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들을 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죄성은 계명을 지키려 할 때, 또 지키려 할수록,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의(義)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 청년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전통사본에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어 있다. 이 청년은 상당히 착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막 10:21).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요청은 그 청년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이었다. 그의 문제는, 그가 그의 물질적 여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또 그가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는 비교적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가난할 때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본문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는 착하고 진지하고 유망해 보였지만, 속에는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의 말씀을 참으로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애착의 극복 없이는 사람에게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들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섰다.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영생의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섰다.
23-30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쓰였고 그것들은 ‘영생’(16절)과 ‘구원’(25절)과도 동의어로 쓰였다. 주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그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보인다. 물질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다.
[25-26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 . .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놀라며 말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욥도 부자이었지만(창 13:2; 26:12-14; 욥 1: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물질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예’ 하고 대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물질적 부요는 신앙과 영적 성장과 성화에 걸림돌이 된다.
[27-29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 . . .
그때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백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마 4:20, 22).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절]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께서는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첨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이방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믿기 시작한 자라도 믿음생활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16-30절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뜻이며 어느 시대나 변함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자.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우리가 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 버려야만 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마 10:24-26),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눅 14:33). 주의 말씀대로,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다(마 13:22).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이다.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1-16절, 포도원 품꾼 비유
[1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 . . .
주께서는 천국이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다니엘 2:44에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다(골 1:1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벧전 2:9). 포도원의 집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것은 포도원에 일할 품꾼들을 구하기 위해서이었다. 추수 시기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나 시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구한다. 이른 아침은 시대적으로는 신약시대 초기를 가리키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가리킬 것이다.
[2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 . . .
포도원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며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포도원의 일은 포도열매를 따는 것이다. 성도의 일은 교회에 들어와 우선 자신의 영적 성장을 힘쓰는 것이다. 그는 예배에 잘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봉사의 일을 힘쓰고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헌금도 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다.
한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가리킨다. 품삯이라는 표현은 마치 구원이 행위의 대가(代價)처럼 들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9). 주인은 일방적으로 품꾼들을 불렀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포도원에서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온종일의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단 한 시간만 일하고서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3-7절] 또 제3시에 나가 보니 . . . .
주인은 또 제3시 즉 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갔다. 주인은 제6시 즉 정오와, 제9시 즉 오후 3시에 또 나가 그같이 했다. 그는 제11시 즉 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게으르게](전통본문)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고 대답했다.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네가 상당하게 받으리라(전통본문)”고 말했다.
오후 3시나 5시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루종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한 자들이었다. 오후 3시나 5시는 시대적으로는 신약교회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포도원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게으르게 노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시점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포도원인 교회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가리킨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아직도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평생 허송세월하다가 생을 마치겠는가고 물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이제라도 자신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고 청년들뿐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말씀하신다.
[8-9절]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 . . .
오후 6시쯤이 되면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마친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고 말했다. 제11시 즉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1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 주인은 참 후한 사람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천국과 영생을 가리켰다.
이 말씀은 천국과 영생이 인간의 수고의 대가(代價)로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주의, 공로주의 관념은 성경 전체의 진리에 반대된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미달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만 또 오직 그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롬 3:21-24).
[10-12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 . . .
먼저 온 자들이 품삯을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들은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며 말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앞장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부름받은 열두 제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는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에 비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받는 품삯은 약속된 한 데나리온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 모든 품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로주의적 사고방식에 역행한다. 주께서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영생과 천국이라는 동일한 선물을 주실 것이다. 먼저 믿는 자에게나 나중 믿는 자에게나 동일한 천국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름받은 시대나 나이를 관계치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면 된다.
[13-15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 . . .
주인은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처사는 공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은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에 늦게 온 자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또 포도원에 늦게 들어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었다.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 . . .
주께서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이방인들, 먼저 일꾼된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또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신입교인들을, 먼저 일꾼된 자들은 오래된 교인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햇수보다 진지함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전통본문에는 16절 끝에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초청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많지 않다.
1-16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포도원에 빨리 들어가 일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예배 모임들에 힘써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교회를 분별하여 소속하고 그 교회에 충실한 교인이 되고 그 교회의 모든 집회들에 참석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며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감사하며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자. 이방인이며 의가 없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충성하자.
17-19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 예언하심
[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20-28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
[20-21절]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 . . .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자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 하고 물으셨다. 그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어머니들 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욕심이 보인다. 자기와 자기 자녀들이 남들보다 더 나은 자,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이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요 헛된 명예심이다. 그것은 부패된 허영심이다. 사람이 이런 세상적 욕심을 제거하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그러나 성도는 이런 욕심을 품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22-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은 말하였다. “할 수 있나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명예는 세상적 욕심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의 명예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방식, 곧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방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주의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중심은 그 점에서 순진했던 것 같다. 십자가의 고난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은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심 자체가 올바르거나 선하지 못하다.
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그런 유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집권자’는 통치자들, ‘대인’(大人)은 고위 관리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인 것 같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주께서는 그런 유의 권위를 부정하신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아,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교회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불의와 거짓, 그리고 교만에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려 한다면, 그런 곳에는 아무 싸움이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 . . .
주께서는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그의 교훈의 무게를 더하셨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부수적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우리의 목숨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29-34절, 소경들을 고쳐주심
[29-30절]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 . . .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마을이다.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은 불쌍한 소경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들리는 소문을 통해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 . . .
무리들은 그 불쌍한 소경들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동정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경들이 고침을 받는 데는 예수님 측근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자들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거리였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더욱 소리질러 말하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께 나아가는 자는 사람의 방해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32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소경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주께서는 이전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가르치셨다. 그때에나 지금에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또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33-34절]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 . .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중언부언하지 말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또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민망히[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사랑과 능력이 함께할 때 치료와 구원이 가능케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치료받은 그 소경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다.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1절,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3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 . . .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이었다. 주께서는 그의 전지하신 눈으로 그 나귀 새끼를 보셨다. 또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보인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4-5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 . .
마태는,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스가랴 9:9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한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고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주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것도 어미에게 의존하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 왕국처럼 외적 영광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복음이 있다. 어떤 비천한 자들도 예수께로 나아올 수 있고 그는 그들을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6-7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 . . .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자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옷을 그 위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해서였다. 주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안장도 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주께서는 자기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나귀 한 필도 없으셨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셨던 그가 지극히 가난한 자가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분명하다.
[8-11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 . . .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뇨?”라고 말하자, 무리가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치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거하며고 그를 찬양케 하셨다.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 중 다수는 변절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변태무쌍한 인간의 마음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사 2:22).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12-17절, 성전을 깨끗게 하심
[1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 . .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해 쓰여야 할 거룩한 곳인데, 그곳이 불의의 이익을 얻는 매매의 장소로 악용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이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이름 아래 자기의 이익을 노리는 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자들과 결탁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일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는 가련한 종교가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하여는 동정하였으나,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노하셨다. 주님은 온유하며 겸손하시지만, 종교의 타락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 . .
주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주님의 종교 개혁은 종교가 성경의 본래의 가르침대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였다. 성경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처소라고 가르쳤다(사 56:7).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성전 종교가 예배자들의 주머니의 돈을 교묘히 긁어모으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야만 된다.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이 그러하였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도 그러하였다.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오직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격노하고 동정심을 보이지 않으시던 주님이지만, 성전에서 그에게 나아온 소경과 절뚝발이들에게는 긍휼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 주께서는 뻔뻔스런 악인들에게는 노하셨지만, 도움을 구하는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셨다.
[15-1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 . .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들 곧 병고침의 기적들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였다.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는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많이 드러내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분노하였다. 사실, 메시아를 영접해야 할 저 지도자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동원하여 주를 찬송케 하셨던 것이다.
18-22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예수님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물질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그런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 . . .
예수께서는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셔서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
복음서들은 때때로 사건을 간략히 증거한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자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었고, 그 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고 성전을 깨끗게 하셨다. 매일 저물 때마다 그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이 지나갈 때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마태복음은 이틀 간의 사건을 한 사건처럼 간략히 증거했다. 그러면 여기 ‘곧’이라는 말은 저주를 선언한 지 여러 날이 지나지 않고 하루만에라는 뜻이 될 것이다.
시장하신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마가복음에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고 증거하였다(막 11:13).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의 증거가 있다. 인간 예수님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는 멀리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이셨다(히 4:15).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풀이셨는가?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하였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20-22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 . . .
제자들은 보고 이상히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주께서는 이 일을 통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가르치셨다. 죽기 위해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또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의 형틀을 지실 그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교훈하며 격려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교훈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기적들을 주심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놀라웁게 전진해 왔는지! 복음 사역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 장애물들은 극복되었다. 때로는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였지만, 복음 전파의 대행진은 꺾이지 않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한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지만, 회개와 변화는 언제나 기대한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강건케 하시고 자기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23-32절, 권위의 근원을 질문함
[23-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 . .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말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 것이었다. 이것은 믿어보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했다기보다 비난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했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되받아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의 위선의 악을 드러내셨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증거한 예수님도 인정치 않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치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죽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이었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8-30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느니라.” 헬라어 전통본문에는, 맏아들이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 가겠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31-32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 . . .
주께서는 계속,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헬라어 전통본문은 여기서도 첫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를 상징하였고, 맏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하였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나 요한이 옳은 길을 외칠 때 회개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자부하였지만,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따라 회개하지도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인가? 겉으로만 종교적이게 보이고 내면적으로 주님과 먼 위선자들이 아니고, 외적으로 죄인처럼 보이나 내면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그의 긍휼을 바란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이었다.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그리고 입술의 고백보다 실생활의 열매가 더 중요하다.
33-46절, 포도원 비유
[33-39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은 구약교회 즉 이스라엘을 가리켰고(사 5:2), 포도원을 만든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농부들 즉 포도원 소작인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교회를 위탁받은 일꾼들이다.
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열매는 구원의 열매, 즉 의와 거룩의 삶이다. 주인의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의롭고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영접하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더 보내셨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도 그러하였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기는커녕 도리어 예루살렘 밖에서 죽일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40-43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貰)로 줄지니이다.”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 곧 위선적 지도자들을 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으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으나 그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기이한 일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의롭고 선한 행실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가지는 신약교회가 그것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44-46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 . . .
예수께서는 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돌에 비교하셨다(단 2:34-35). 이 돌은 구원의 돌이며 심판의 돌이다. 완고한 자도 이 돌 위에 떨어지면 심령이 부서지고 이 돌이 악인 위에 떨어지면 그를 부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그를 잡고자 하였으나 무리를 무서워하여 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리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1-14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1-3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 . . .
예수께서는 다시 비유로 대답하셨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앞장의 포도원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앞의 비유에서 요구하시는 바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이지만, 여기에서 주시는 바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혼인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예수님은 왕자로, 천국은 왕자의 혼인잔치로 묘사되었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가리키며, 먼저 초청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은 그들은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싫어하였다.
[4-5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 . . .
주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왕은 한번 더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이것은 왕의 인내요 친절이었다. 이번에는 잔치의 풍성함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초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왕의 초청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고 왕의 초청에 대한 멸시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멸시하는 것이다.
[6-7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초청을 받은 자들이 그 초청을 멸시하며 자기 일들을 보러 가버렸을 뿐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은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이것은 좀더 악하였다.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초청을 싫어하고 경멸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복음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악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이것은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가리켰을 것이다. 이방의 군대들은 하나님의 징벌의 몽둥이였다.
[8-10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기쁘고 즐거운 메시아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처음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 사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있다. 드러난 악인이든지 비교적 선한 자이든지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초청을 받아 교회로 나아온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11-14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임금이 손[손님]을 보러 들어올 때에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아무 말이 없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사야 61:10이 말한 ‘의의 겉옷’이다.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하였다(롬 13:14; 갈 3:27).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 사람들은 누가 예복을 입었는지, 누가 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금방 드러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예복은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단지 교만과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거절하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에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예수의 의를 힘입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지옥에서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을 것이다.
15-22절, 세금 문제에 대한 질문
[15-7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 . . .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였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하였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듯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장점들은 저 악한 자들의 편에서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그들은 계속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님께 질문할 만한 문제이었을 것이다.
[18-22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백성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었다.
주님의 대답은 시험을 피하는 지혜로운 대답이셨던 것 같다. 그는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그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므로 그 나라의 규범들을 지켜야 한다. 헌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성경은 특히 소득의 십일조와 첫열매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聖物)이라.” 잠언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러나 성도는 또한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나라의 규범도 지켜야 한다.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그것은 나라가 정한 납세의 의무를 포함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23-33절, 부활에 관한 질문
[23-2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 . .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질문하였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당시 합리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8은,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곧 불신앙이요 이단이다. 그들이 언급한 형제 결혼의 법은 신명기 25:5-6에 규정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한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거하려 하였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관념이 이 율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29-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전통본문)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는 격한 책망의 어조로 하지는 않으셨으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이 비성경적 오류임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해하다’는 말(플라나오 planavw)은 ‘잘못되다’는 뜻이다. 오류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용할지라도 힘이 있으셨다.
부활의 부정은 무엇보다 성경 진리에 반대되었다. 구약성경은 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이사야 26:19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하며,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또 부활의 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으시다. 인간에게는 부활이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
또 결혼관계는 이 세상에 국한된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 이 점에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같다. 천사의 세계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인간에게 더 이상 자녀의 출산도 필요 없고, 육체의 정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바른 지식이 아니었다.
[31-33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무리들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사실상, 죽은 자의 부활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라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만 존재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옛날을 기억하는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불멸적 존재로 만드셨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으나, 구원은 당연히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내포하였다. 사람이 죽고 만다면, 창조와 구원은 무의미할 것이다. 부활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결코 죽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불멸적 영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가 아니다. 인간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의인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장차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영광스런 인간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요 성도의 소망인 것이다. 성도들은 죽어도 장차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34-40절, 큰 계명들
[34-35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 . .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다.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이라고 표현했다(막 12:28).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들은 그 수가 많다. 그 많은 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문제이었다.
[37-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 . . .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신명기 6:5의 말씀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신명기 6:4부터 인용하셨다고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여호와]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여호와]시라”는 말씀이다. ‘목숨’이라는 말은 신명기 본문에 ‘영혼’(네페쉬 שׁ)이라고 되어 있다. 또 신명기에는 ‘네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의 첫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혹은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39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 . .
예수께서는 또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법은 레위기 19: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8-10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하였다.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께서는 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런 율법적 내용만이 아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나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41-46절,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41-42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 . .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다윗의 자손[아들]이니이다.” 그들은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43-44절]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 . . .
예수께서는,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주께서는 구약성경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시편은 성도들의 기도의 글들, 즉 찬양, 감사, 고백, 간구의 글들이지만, 주께서 이런 시편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으셨다. 사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장). 그의 사도들도 동일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오늘날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이 가졌던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행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온전케 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는 시편 110:1의 말씀은 메시아의 승천과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에게는 원수가 있다. 그는 사탄이다. 그를 발아래 두는 것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마 25:41). 이것이 사탄에 대한 최종적 형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사탄의 최종적 멸망 때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으실 때이다.
[45-46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 . . .
예수께서는 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메시아의 인성(人性)만 아는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神性)도 알아야 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 곧 다윗의 하나님이시다. 다윗 왕도 메시아 왕국에서는 한 신민(臣民)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다(요 14:9).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6에서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16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믿는 자들은 복되다. 메시아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사람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요 참된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놀라운 예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1-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신 34:1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자의 경건은 죽은 경건이다. 디도서 1:16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말은 들을지언정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 . . .
예수께서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을 자세하게 규례화하는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느끼며 구주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규칙과 규례만 무성해질 것이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그러나 참 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하였다(딤전 4:12). 또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명하였다(딛 2:6-7).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참된 경건은 모범된 행위로 나타난다.
[5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 . . .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6: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신 6:5; 잠 4:23; 딤후 3:5).
[6-7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 . . .
예수께서는 그들이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명예심이요 교만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며 자랑해야 한다.
[8-10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 . . .
주께서는 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Byz syrc 등)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라는 명칭은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본다. 우리들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했다. 영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칭호로 불리는 것은 합당치 않고 또 우리가 이런 칭호를 사랑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 형제 자매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들이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유익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물론, 서로 존경하고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며, 주께서 세우신 교회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도 그러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 . . .
주께서는 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마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본받는 자로서 직분이 중하면 중할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겸손과 섬김은 영적 성숙의 표가 될 것이다.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예수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가 아니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노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8복(福)과 대조적으로, 본장은 위선적 지도자들에 대한 8화(禍)를 증거하였다(전통본문의 14절을 포함하여).
외식자의 한 특징은 천국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천국은 인생의 최대의 목표와 소망이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딛 1:2). 예수 그리스도는 이 천국의 문이시다. 그는 ‘양의 문,’ ‘구원의 문’이시며(요 10:8-9)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요 14:6). 그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사역, 말씀사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신 열쇠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와 예수님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문을 여는 것이지만,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그들은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곧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전통본문에는 14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외식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교묘하게 취하였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천국과 내세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고 땅의 것만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으로 경건한 겉모양을 가졌지만,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였다.
이런 외식자들은 장차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께서는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이 회개치 않음으로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도시나 심지어 옛날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0-24). 죄에 경중(輕重)이 있듯이, 심판에도 경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즉 그의 행위의 죄의 경중대로 합당한 벌을 주신다. 위선의 악은 큰 악이다.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 . . .
주께서는 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자들도 교인수를 늘이는 데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들었는가이다. 참된 회개와 구원이 없다면, 구름떼와 같은 사람들을 모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이다. 참된 신자들의 수의 증가가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외식자들은 쭉정이 운동을 하였고 얻은 교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부패하고 외식하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
[16-22절]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외식자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무엇이 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 제단에 바쳐진 헌금과 예물을 더 중시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물질적 탐심을 헌금이라는 종교적 형식에 감추었다.
성전과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다. 그것으로 맹세함은 곧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으로 맹세함이 된다. 그것은 비록 가난하여 헌금이 없이 행해진 것일지라도 참된 맹세이다. 헌금과 예물은 물론 경건의 표현이다(고후 8:7-8). 그러나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성전과 제단이다. 그러므로 더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시해서는 안 된다.
[23-2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레 27:30).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와 인(仁)과 신(信)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에 일치하게 행함을 의미한다. 인(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신(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선지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미 6:8).
저 소경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었다. 주께서는 십일조 생활을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의와 인과 신을 약대에 비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생활의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여야 하고, 실질이 없는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알아야 한다.
[25-26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부정 不正](전통본문)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저 외식적 지도자들은 외적 성결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탐욕과 부정(不正)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마음의 성결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결이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위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성결은 가치가 작고 위선에 그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3-7에서 말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27-28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단장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다. 이와 같이 외식자들은 의롭고 선한 자처럼 보여도 실상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 우리는 먼저 내면적 성결과 단장, 즉 지어낸 의와 선이 아닌, 진실한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한 의와 선은 장려되지만, 모든 위선과 외식은 단호히 정죄된다. 베드로전서 2:1-2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29-3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므네메이온 mnhmei'on)[혹은 무덤]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저 외식자들은 선지자들을 위하는 자들처럼 행동하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다를 바가 없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위선적 말이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신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3:7과 12:34에서는 ‘독사의 자식들’로 번역되었다. 외식자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마귀의 자식들이다.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듯이, 저 외식자들은 사람들에게 치명적 해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34-3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주께서 선지자들과 지혜자들과 율법교사들을 그들에게 보낼 때 그들은 그들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핍박할 것이다. 주의 종들은 유대인들에게 죽임과 채찍질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기억하고 담대한 마음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의인 아벨로부터 역사상 흘려진 의로운 자들의 피흘림의 절정이 될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 핏값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7-39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 성이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는 황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 회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는 이 세상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1-2에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며 또 아름답게 단장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하였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인류의 복된 최종적 상태, 곧 천국의 소망이다.
24장: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
[1-2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 . . .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나오셨다. 마태복음 21:23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셨고, 본절에 보면 그가 성전에서 나오셨다. 마태복음 21:23부터 23장까지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변론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이다. 특히 23장에서는 그가 유대 지도자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었다. 그가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 제자들은 그에게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왔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누가복음 21:20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가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을 불 태웠을 때에 성취되었다. 그것은 주께서 예언하신 지 약 40년 후의 일이었다.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 . . .
마태복음 24, 25장의 내용은 감람산 위에서 가르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말하였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와,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 물었다.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지만, 비슷한 점이 있었다. 예루살렘 멸망은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그림자이었다.
매튜 풀은 그의 주석에서, 주께서 본장에서 말씀하신 종말 징조들은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들, 제2권 11장부터 제4권에서 확증되는 대로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말하였다. 물론, 본장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각 구절의 해석상 어려움도 없지 않다.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고 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첫 번째 징조는 거짓 그리스도들의 출현이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이다. 마태복음 24:11, 2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13:11-18에서 거짓 선지자의 출현에 대해 예언하였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 . . [저가 모든 사람의] 오른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사실, 사도시대의 말기에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요일 2:18; 4:1-3; 요이 7, 9). 또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뿐 아니라, 교회 역사상 이런 징조들이 나타난 때가 종종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에도 그러하였고, 특히 최종적으로 주의 재림 직전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 마지막 종교적 미혹은 그 어떠한 시험보다도 악하고 치명적이며, 교회들을 혼란시킬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로부터 탈선된 견해나, 그런 견해를 취하는 인물과 집단을 가리킨다. 역사상 로마 천주교회는 매우 거대한, 대표적 이단이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선행과 교회 의식을 구원에 본질적이라고 보며, 또 마리아를 중보자, 보혜사, 기도의 대상, 세상의 여왕으로 높임에 있어서 우상숭배적이다. 19세기 이후 나타난 각종 이단종파들은 마지막 시대의 미혹들이다. 세계적 이단종파들로는 여호와의 증인[왕국회관], 몰몬교[말일성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식교[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SDA], 크리스챤 싸이언스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박태선의 전도관[천부교], 문선명의 통일교, 이유성의 새일교회, 유재열의 장막성전, 정명석의 애천교회, 조희성의 영생교, 김기동의 베뢰아, 이초석의 한국 예루살렘교회, 박명호의 엘리야 복음선교원, 이장림의 다미선교회, 이명범의 레마선교회, 이선아의 밤빌리아 추수꾼, 박윤식의 대성교회[평강제일교회] 등 수많은 이단종파들이 있다. 1986년 4월 30일 현재 한국에 재림주로 자처하는 자가 35명,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자가 12명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미혹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이단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이름으로 전통적 교회들 안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배교와 불신앙에 떨어지게 하였다. 미혹과 이단은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이다.
[6-7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 . .
주께서는 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두 번째의 징조는 전쟁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환상들 중 두 번째 인은 붉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큰 칼 곧 전쟁을 상징하였다. 요한계시록 8, 9장의 일곱 나팔의 환상들 중 여섯째 나팔은 유브라데 강 주위에서의 큰 전쟁, 곧 ‘2만만’ 즉 2억명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에 대한 환상이다. 또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환상들 중 여섯째 대접은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고 아마겟돈(즉, 므깃도 언덕)에서 마지막 대전쟁이 일어나는 환상이다.
역사상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지만,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적 전쟁은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 천만명의 군인들과 수많은 민간인들을, 또 제2차 세계대전은 약 1700만명의 군인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도 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또, 중동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와 이슬람 국가들 간의 갈등이 여전하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중동에서부터일 것이라고 흔히 말하며, 그 전쟁은 아마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역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가장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현대인은 고도로 불안한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7-8절] 처처에 기근과 [온역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주께서는 또 “처처에 기근과 [온역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세 번째 징조는 기근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환상들 중 세 번째 인은 검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흉년을 상징했다. 근대에 들어와 기근은 세계적으로 더욱더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인도 동부 벵갈에 대기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세계은행은 지구상에서 매일 약 7억 5천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네 번째 징조는 온역이다(전통본문). ‘기근들’이라는 원어(리모이 limoi;)와 ‘온역들’이라는 원어(로이모이 loimoi;)는 글자 모양이나 발음이 비슷하다. 온역은 악한 전염병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환상들 중 첫째 대접은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는 환상이다. 또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는 환상이다. 거기에 ‘헌데’와 ‘종기’는 원어에서 같은 단어(헬코스 e{lko")이다.
역사상 수많은 전염성 혹은 비전염성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가득하다. 고혈압, 당뇨, 암 등은 무서운 현대적 질병들이다. 특히 오늘날 성도덕의 문란으로 인해 매독과 임질 같은 성병이 유행하고, 또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AIDS , 후천성 면역 결핍증) 같은 무서운 병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에이즈는 아직도 치료약이 없다 유엔 에이즈계획(UNAIDS)에 의하면, 2002년 7월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명이며, 향후 20년간 약 7천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다섯 번째 징조는 지진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여섯째 인은 큰 지진과 천계에 큰 변동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이다. 또 요한계시록 11:13에는 두 증인이 승천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7천명이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째 대접의 계시는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큰 우박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큰 지진의 위력은 약 1억 8천만 톤의 강력폭약(TNT)과 같으며, 그것은 세계 최초로 투하된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백과사전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대지진들이 더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8개 이상이 되며, 그 중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20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만 꼽아보면, 1908년 이태리 멧시나 7만 5천명 사망,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사망,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14만 이상 사망,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사망, 1935년 인도 쿠에타(지금은 파키스탄 지역) 6만명 사망, 1970년 페루 침보테 6만명 이상 사망,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사망 등이다. 최근의 큰 지진들은 198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이상 사망, 1990년 이란 서북부 카스피해 인접지역 약 4만명 사망, 2003년 이란 밤 지역 4만여명 사망, 2005년 파키스탄 카슈미르 부근 약 4만여명 사망,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 약 10만명 사망 추정, 2010년 1월 아이티 약 14만명 이상 사망 추정 등이다.
전쟁들, 기근들, 온역들, 지진들의 징조는 이 시대가 주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시대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
[9-10절]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 .
예수께서는 또,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여섯 번째 징조는 핍박과 배신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요일 2:18, 22), 신약성경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한 정치적 인물 혹은 세력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저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 불리거나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보다 자신을 높여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느니라”(전통본문). 요한계시록 13:1, 2, 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초대교회 시대의 로마황제, 중세교회 시대의 로마교황은 예비적 징조이었다. 그때 진실한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었다. 20세기 초 우리 선조들은 일본 통치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북 공산당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 세계적 독재자의 출현으로 이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이때 진실한 성도들, 즉 짐승의 표(666)를 받지 않는 자들은 큰 핍박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때 성도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 14:12).
또 이런 핍박의 때에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적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고 믿음을 버리고 오히려 참 성도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들은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며 진실한 성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런 배신자, 변절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신앙 양심을 따라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11-13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 . . .
주께서는 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일곱 번째 징조는 배교(背敎)와 변절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것이다. 많은 형식적 교인들이 참 신앙을 배반하고 변절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주의 재림 직전에 배교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과거에 천주교회가 바른 신앙을 배반하고 멀리 이탈하였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다.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들이 많은 사람들을 바른 신앙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다. 많은 배교자들과 변절자들이 기독교회 속에 들어와 있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개신교회인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등 거의 모든 교파들의 신학교들, 목사후보생들, 목사들의 사상을 부패시키고 있다. 세계의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고의로 포용하거나 자유주의화되어 있다. 세계의 대다수의 주류 교단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해 있는데, 이 단체는 배교적이다. 우리나라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등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이다. 물론 그런 교단들 안에도 보수적 목사들과 교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 교단의 신학교들이 자유주의적이므로 그 교단들은 분명히 자유주의적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와 같이, 21세기 기독교회는 또다시 배교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주의 재림의 징조이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여덟 번째 징조는 불법이 성하는 것이다. 말세 교회의 문제는 교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인 것이다. 교회들 안에 불법과 부도덕한 일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신약성경에 밝히 교훈된 바를 저버리고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고 낙태를 허용하고 동성애를 용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4:34-37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며 율법에 이른 것같이 복종해야 하며 이것은 주의 명령이라고 말하였다. 또 디모데전서 2:11-14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울 것이며 여자의 가르치는 것[목사직]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장로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 이유로 창조의 원리와 범죄에 대한 징벌을 들었다. 또, 출애굽기 21:22-24는 낙태가 살인임을 보이고, 고린도전서 6:9-10은 동성애의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을 증거하였다. 교회는 윤리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아홉 번째 징조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부패될 때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실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참 성도들은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짐승]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께서는 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열 번째 징조는 세계복음화이다. 세계복음화는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세계복음화의 역사이었다. 백년 전에 복음이 아시아의 동쪽 끝부분인 한국에까지 도착하였다. 교회의 남은 사명은 여전히 세계복음화이다. 우리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현대 교회들의 배교적 상황 때문에 낙심치 말고 세계복음화를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 성령께서는 신약교회 안에 오셨고 영원히 거하신다. 그의 능력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포함할 것이다. 로마서 11:25-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문맥상 육신적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 혹은 선택된 충만한 수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본다(촬스 핫지).
[15-18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 . . .
주께서는 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다니엘 11:31은,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다니엘 11장은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력이 꺾이고 그 나라가 나뉠 때 일어날 남방왕(애굽의 프톨레미 왕국)과 북방왕(수리아의 실루커스 왕국)의 전쟁에 관한 예언이라고 본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우상을 가리키고,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이 예언은 주전 167년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4세(일명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제사를 폐지하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이것은 역사상 성취되었으나, 예표적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주의 재림의 징조로 제시되었다고 본다. 로마군대는 주후 66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주후 70년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였다. 주의 재림 직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저 불법[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때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요단 건너편, 베뢰아 지방 북단 펠라로 도피하였다고 증거했다. 집안의 물건이나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재난이 급속하므로 이 세상의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고 급히 피하여야 할 것을 가리켰다고 본다. 누가복음 17:32에 의하면, 주께서는 그때에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비로 멸망하는 그 날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저버리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창 19:26).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명령대로만 살아야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에 매여 있으면 급속한 재난을 피할 수 없다.
[19-20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 . . .
주께서는 또,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은 아이 밴 것과 젖먹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단지 피난하기 어려우니까 화가 있다는 말이다. 결혼은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지만, 결혼에는 심신의 고통도 뒤따르며 환난의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고전 7:26-28). 또 주께서는, 겨울에나 안식일에도 피난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때를 피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21-22절]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예루살렘 멸망은 극심한 환난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그 시대에 식량이 없어져서 여자가 그의 자식을 죽여 먹은 일이 있었다,” “나는 창세 이후로 어느 다른 도시가 이렇게 비참히 고통을 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 세대가 이보다 더 죄악이 충만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도 이런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가리킨다고 본다(계 6:12-17; 8:13 등). 그 환난의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특히 일곱 대접은 극심한 재앙이 될 것이다(계 16장).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 환난의 기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3년 반으로 자주 표현했다(계 11:2; 13:6; 13:5). 이것은 아마도 문자적 기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환난의 기간은 제한되고 짧을 것이다. 그것은 악인들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나 구원받을 자들을 위하여 그럴 것이다. 어떤 이들은 택자들이 환난에 참여치 않고 그 전에 들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환난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므로 피할 길이나 견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9:4, “(다섯째 나팔인 황충 재앙 때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계 16:2도 참조).
[23-25절]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주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다시 강조하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미혹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서는 진리의 기초적 지식들이 필요하지만, 신앙의 성장의 과정에서는 많은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하고 많은 시험과 미혹을 분별하며 이겨야 한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려 한다. 택함받은 성도들은 비록 실패하지 않겠지만 깨어 조심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후서 2:9-10에서,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재림 직전의 징조로 거짓된 기적주의가 유행할 것이며 그 근원은 사탄이고 그 대상과 진짜 피해자는 진리를 거부한 멸망할 자들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참된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모세는 신명기 13:1-5에서 은사주의적 배교를 경고하였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위의 말씀의 요지는, 교회 안에 거짓된 기적운동이 있을 것이며, 그런 기적운동의 본질은 예배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운동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성도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시기 위함이고, 교회는 거짓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바른 교리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된 기적들, 사탄의 활동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교리와 교훈이다. 우리는 기적을 따라가지 말고 바른 교리와 교훈을 따라가야 한다. 무엇이 바른 교훈인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바른 교훈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은 근본주의적 개혁주의로 표현된다. 개혁주의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권주의, 의식주의에 반대하여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은사주의에 반대하며, 성경적 교제의 원리를 지키는 입장이다. 이것이 오늘날 바른 입장이다.
우리는 주의 예언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미리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들의 성실성이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와 말씀 묵상은 우리의 성실한 신앙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자만이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6-28절]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주의 재림은 번개같이, 온 세상에 동시에 알려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느 특정한 산이나 집에 가야만 주의 재림을 대비하거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가 우리의 구원이며 그를 진실히 믿는 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 악인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뜻 같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참 교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회의 혼란이 심하다. 우리는 보다 순결한 교회를 세우고 그러한 교회에 속하여야 할 권리가 있고 또 의무도 있다.
[29-30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환난 전이 아니고 후에 있을 것이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해, 달, 별들은 문자적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섯째 인의 큰 지진 사건이나, 넷째 나팔의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침을 받을 사건의 예언들과 같다. 자연스러운 해석을 버려두고 비유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그때에 주의 재림 자체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주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주의 재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일 것이다.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았던 죄인들은 두려움과 후회가 가득한 마음으로 애곡할 것이다.
주께서는 재림하는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18:20; 28:20). 그러나 사람의 아들로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주께서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6:6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물론 이 말씀들에서 강조된 것은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볼 수 있게 오신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승천 때에 천사들이 증거한 바이었다(행 1:9-11). 그의 재림은 그의 승천의 역순일 뿐이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능력과 큰 영광을 가지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초림(初臨)과 다를 것이다. 그의 초림은 연약한 어린 아기의 출생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고난의 종의 출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다를 것이다. 그는 큰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31절]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 . . .
주께서는 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택자들은 지구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사방에서 하늘로 들릴 것이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증거된 ‘휴거’(rapture)라는 사건이다. 성도들은 그때 하늘로 들리어 기쁨으로 주를 영접할 것이며, 불신앙과 죄악 가운데 살던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움과 후회의 슬픔 속에 버려질 것이다.
[32-33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 . . .
주께서는 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그 잎사귀가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무화과나무 자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어 보인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본문의 뜻 그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움을 알듯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면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알라는 것뿐이다. 무화과나무와 여름은 이 모든 일들과 재림에 비교될 뿐이다.
[34-3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 . . .
주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의 예언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강조하신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주후 70년에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의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주께서는 신약성경의 끝부분에서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세상의 일들은 다 변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확실하다(벧전 1:24-25). 성도는 진실하고 영원한 그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묵상하며 행하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 . . .
주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통본문에는 ‘아들도’라는 말이 없다. 하나님의 뜻은 재림의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사도행전 1:7에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2천년 전에 재림의 시간을 2천년 후라고 알려주셨다면, 많은 이들이 해이해지거나 낙망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 비밀은 성도들에게 유익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이면 그는 멸망의 길을 걷는 자일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듯이, 우리 모두는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거기에만 심판을 피하는 길이 있다.
[40-41절]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이다. 어떤 이는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이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순종한 자들은 하늘로 들리어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죄의 낙을 누리던 사람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42-44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생활이다. 깨어 있는 생활이란 믿음과 순종의 삶, 곧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깨어 있는 성도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고 또 그 믿음에 일치하는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산다. 참 믿음은 거룩하고 선한 삶으로 나타난다.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도둑의 침입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의 추측처럼 주의 재림이 어느 순간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건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는 이 말씀에 앞서 그의 재림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의 재림이 그 징조들 후에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둑이 갑자기 침입하듯이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45-47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종들은 말씀의 봉사자들, 집 사람들은 성도들, 양식은 성경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께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들은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의 직무를 완수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충성하는 자가 지혜자이다. 그들은 주의 백성들을 맡아 때를 따라 영의 양식인 신구약성경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복된 자들이다(잠 25:13). 주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을 맡기실 것이다.
[48-51절]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께서는 악한 종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의 재림에 대해 긴박한 마음을 갖지 않고 주의 재림을 진지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해이하고 거칠어지고 방탕함에 떨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을 진지하게 믿지 않는 자는 경건함과 근심함으로 살지 못하고 거룩과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 것이다. 내세를 소망하지 않는 자는 현실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의 날이 올 것이다. 사람들이 재림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재림의 날이 안 오는 것이 아니다. 재림은 악한 종들에게 무서운 징벌로 임할 것이다. 그들은 내어쫓기며 외식자들로 간주되며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종들이 아니었다. 이 경고는 가상적이다. 참된 신자는 해이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신자라면, 우리는 깨어 있는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믿음과 불신앙,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시며 분리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그 둘 중에 어느 한 쪽에 속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 직전에 여러 가지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거짓된 목사들의 미혹,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핍박, 배교, 불법의 성행, 사랑의 식어짐, 및 세계복음화가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런 징조들의 다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알자.
둘째로, 주의 재림은 확실한 사건이다. 주 예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며, 그때 죽은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를 받아 다 하늘로 들리울 것이다. 그들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하늘에서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에 남은 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통곡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고 소망하며 맞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서나 세상의 걱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잊고 살다가 들리움받지 못하여 애곡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의 삶, 곧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 계명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 말씀의 핵심은 죄를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주의 재림을 대비하여 깨어 있는 삶이다.
25장: 깨어 충성할 것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들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 세 가지 비유들이 나온다.
1-13절, 열 처녀의 비유
[1절]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 . . .
주께서는,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신약교회, 신약성도들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신약교회, 신약성도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과 같다.
유대 나라의 결혼 풍습은 밤에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맞으러 오면 신부의 친구들이 나가서 그들을 맞아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고 한다. 이때 어두운 길을 밝힐 등불이 필요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열 처녀들은 신약성도들을 가리킨 것 같다. 결혼 잔치는 영광스런 천국을 가리켰다고 본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한다(사 54:5; 호 2:19). 신약도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는 정결한 처녀로 비유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말하였고(고후 11:2), 요한계시록 19:7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다”고 말하였다.
[2-4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 . .
주께서는,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말씀하셨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지혜로운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넉넉히 넣어 함께 가져갔다. 등은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가리키고, 기름은 그들이 가진 내면적 은혜를 가리켰다고 본다. 성경에서 기름은 흔히 성령을 상징한다. 성도의 내면적 은혜는 성령의 활동이다.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거하시며 일하신다.
신약 교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과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예수 믿는 모양은 갖고 있으나 성령의 내면적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거룩과 사랑의 행실이 없다. 그들은 형식적 교인들이며 위선자들이다.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들의 소망과 확신은 헛되다.
[5-6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열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 인간편에서 볼 때 주님의 재림은 더딘 것 같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포함하여 열 처녀 모두가 졸며 잤다는 것은 주의 재림 직전에 기독교계 전체가 해이해질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죄성이 있다. 주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8:8).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한 교인들과 종들이 있을 것이다.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났다. 밤중은 환난과 핍박의 때를 암시할지도 모른다. “보라,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는 아마 천사들의 소리일 것이다. 주의 재림이 더딘 것같이 보여도, 그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천사들의 음성을 듣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곧 일어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혜로운 자들은 복되다. 신앙생활은 평소생활이다. 구원받은 새 생명을 가진 자는 평소에 믿음으로 살고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7-9절]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지혜로운 처녀들이 가진 기름은 미련한 자들과 나눠 쓰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자 개인이 받은 구원의 은혜는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나눠 쓰기에 충분치 않음을 보이는 것 같다. 구원은 각 개인의 문제이며 각 개인이 준비해야 할 문제이다. 개인의 구원은 다른 이의 은혜에 의존할 수 없다.
[10-12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신약 교인들 중에는 등과 기름을 예비하여 결혼 잔치에 들어갈 자들이고, 등만 있고 기름이 없어 결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고 요청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들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 두 부류의 분리는 냉엄하였다. 미련한 자들은 주께서 처음부터 알지 못하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택한 양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는 모양만 갖춘 형식적 교인들이며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증명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재림을 믿고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 여기 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삶은 기름을 준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기름은 성령의 내면적 은혜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것의 외적 증거는 진심의 신앙고백과 거룩과 사랑의 실천이다. 그것은 한두 번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평소의 생활을 가리킨다.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과 사랑을 행하는 자가 깨어 있는 자이다. 그러나 무지와 죄악 속에서 육신적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은 영적으로 잠든 자들 혹은 죽은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우리의 구원을 증명해야 한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열 처녀들의 비유의 핵심은 지혜로운 자가 되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오실 것이다. 주께서 자신의 재림을 약속하신 지 벌써 2천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계 1:7; 22:20). 주께서는 한밤중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물론 그는 대환난 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혜로운 종들과 성도들이 되어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형식적 신앙고백이 아닌, 참된 믿음을 가지고 계명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14-30절, 달란트의 비유
[14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 . . .
주께서는 두 번째 비유를 하셨다. 그는,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타국에 가는 주인은 하늘로 올리우실 주님 자신을 가리켰고, 종들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소유를 맡기셨다. 특히 그는 우리에게 영혼 구원과 양육의 일을 맡기셨다. 이것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 비유의 진리이기도 하였다. 주인은 품꾼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말하였는데, 포도원의 일은 교회의 일들이라고 보았다.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 . .
주께서는 또,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바로] 떠났더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인은 그 소유를 그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주었다.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조건들, 즉 부모, 가정환경, 유산(遺産), 지능지수(IQ), 재능, 건강, 학력, 조국, 시대 등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롬 12:6-8). 그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주셨지만(눅 19장의 므나 비유), 그러나 각 사람의 재능과 은사를 따라 서로 다른 일과 직분을 맡기셨다.
[16-17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은 열매를 맺는 일이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거함으로 열매를 많이 맺으라고 교훈하셨다(요 15:4-5).
그 열매는 우선 믿음과 순종으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로마서 6:22는,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한다. 또 디도서 2:14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선한 삶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는 일, 즉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요 6:39-40). 그것은 교회에 주신 사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다해 일하며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가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만큼 열매를 기대하신다. 다섯 달란트 주신 자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주신 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충성되이 일함으로 열매를 맺으면 된다.
[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 . . .
주께서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말씀하셨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한 달란트를 사용하여 일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게으른 자이었다. 그는 주께로부터 받은 직분에 충성하지 않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는 그 재능, 그 은사, 그 직분을 그저 묵혀 두었다.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께서는 또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의 재림이 상당히 지체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회계하는 것은 맡기신 일에 대해 결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 대한 심판이다. 고린도후서 5:9-10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했다.
[20-23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믿고 존중하였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충성하였다. 그는 게으름을 피우거나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을 무시하지 않았다. 교만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직 겸손한 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였고 그들에게,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봉사와 선행과 충성에 대해 풍성한 것으로 보상하실 것을 암시하셨다. 천국은 희락이 있는 행복한 곳이며, 충성된 종들과 성도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24-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굳은’이라는 원어(스클레로스 sklhrov")는 ‘엄한, 완고한, 까다로운’이라는 뜻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엄하고 까다로운 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인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했다. 그러나 주인은 실상 그렇게 엄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이 자기의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주면서 장사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종들은 주인의 뜻에 충성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주인을 두려워했고 그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 그는 일하는 수고와 일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 하고 선한 열매를 맺기까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26-29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取利)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주인을 두려워했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게으른 자가 되었다. 사상은 행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생각은 순종과 충성이 없는 삶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있는 자, 곧 바른 지식과 믿음, 충성과 열심, 성령, 거룩과 선의 열매가 있는 자와, 없는 자, 곧 바른 지식과 믿음, 충성과 열심, 성령, 거룩과 선의 열매가 없는 자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있는 자는 더욱 풍족해질 것이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 . .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자에 대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도, 교회에도, 세상에도 유익이 없는 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구원과, 경건과 도덕성의 증진을 위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는 덕스러운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무익한 종이었다. 주인은,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바깥 어두운 데’는 지옥을 가리킨다. 악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의 바깥에 거하게 될 것이며 그곳은 영원한 불못이라 불리는 지옥이다(계 21:8, 27; 22:15).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충성된 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의 소유는 실상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와 같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신 것이며 우리의 구원과 영생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믿고 존중하고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와 직분을 따라, 내가 받은 재능과 은사가 얼마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열심히 순종하고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열심으로 주를 섬기며 주의 명하신 일들에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천국의 즐거움을 기대하자.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들을 칭찬하시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자.
31-46절, 양과 염소의 비유
[31-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 . .
주께서는 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라.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재림주를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다. 그는 신성으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인성으로는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거기로부터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는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것이며, 그는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셔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이다. 열국 심판은 요엘 3:1-2 등에 예언된 바이다. 주께서는 그때에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의 두 부류로 나누실 것이라고 묘사된다. 양은 순종하는 의인들을 상징하고, 염소는 거역하는 악인들을 상징하였다.
[34-36절]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께 복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받은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하나님의 자녀 됨, 천국을 상속받음 등이다. 특히 천국은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유산이며,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 전체의 소망이다.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의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주님을 섬기는 삶으로 묘사하셨다. 그들은 주께서 주리실 때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실 때 마시게 했고, 나그네 되셨을 때 영접했고, 벗으셨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드셨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히셨을 때 와서 보았다. 주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전제하시면서 의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섬겼다고 말씀하셨다. 선행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37-40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은 주님을 직접 섬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들’은 세상에 파송될 제자들 곧 전도자들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0:40, 42에서도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들’은 또 주를 믿는 모든 성도를 포함할 것이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8:5에서는 그를 믿는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41-46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주께서는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염소와 같은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곧 죄 때문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 죄씻음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궁극적 장소는 지옥이다. 그곳은 ‘영영한 불’의 장소이다(막 9:43, 48; 계 20:10). 그곳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들도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했다. 그때 임금이 대답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부활 승천하여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자신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것이다. 주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다. 주의 제자들은 몇 일 후면 온 세계로 보내질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일반 신자들이 주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을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는 것은 천국을 상실하고 지옥에 던지울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전도자들에 대한 태도는 주님께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들이 참된 신자들이라면, 주의 종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정한 자들은 주를 믿는 자가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후,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중요한가? 주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실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의 실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새 계명이 큰 계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죄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는 서로 사랑함을 실천치 않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사는 자요(요일 2:9-11) 새 생명이 없는 자요(요일 3:14-15) 중생치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다(요일 3:9-10).
본 비유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자. 재림의 주께서는 열국을 모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며 의인과 악인을 나누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자. 천국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의인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이며 하나님께 복받은 의인들이 들어갈 영생의 나라이다. 그러나 지옥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며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영벌(永罰)의 장소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가진 전도자와 작은 성도 하나도 귀히 여기자. 양과 염소의 비유의 주된 교훈은 주의 일꾼들, 즉 전도자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를 영접지 않는 것이 주님을 영접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의 종들인 전도자들에게 위로가 되며 성도들에게는 한 의무가 된다. 모든 성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되, 특히 가난한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26장: 잡히심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년여의 사역 기간 중 마지막 주간의 교훈들과 사건들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마태는 21장부터 27장까지 일곱 장을 사용하였고, 또 마가는 11장부터 15장까지 다섯 장을, 또 누가는 19장부터 23장까지 다섯 장을, 또 요한은 12장부터 19장까지 여덟 장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5절, 예수님을 죽이려 의논함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 . . .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 25장에 기록된 교훈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人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유월절 저녁식사를 목요일 밤에 가졌다면, 이 말씀을 하신 날은 유월절 이틀 전, 즉 화요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넘기우실 것이다. ‘판다’는 원어(파라디도미 paradivdwmi)는 ‘넘긴다’는 뜻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주요 절기이다. 유월절에 집 문의 좌우 설주[기둥]와 인방[문 위와 아래에 좌우로 가로지르는 나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의식은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예표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이미 세 차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다(마 16:21; 17:22-23; 20:18-19).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의 신적인 지식을 증거한다. 또 그가 이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들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당황치 않게 하고 또 그들 자신도 장차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각오하게 하심이었을 것이다.
[3-5절]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 . . .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衙門)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기를 민요(民擾)가 날까 두려우니 명절에는 말자고 말했다. 아문(衙門)이라는 원어(아울레 aujlhv)는 ‘뜰’ 혹은 ‘관저’라는 뜻이다. ‘궤계로’라는 원어(돌로 dovlw/)는 ‘몰래, 은밀히’라는 뜻이다(BDAG, NASB).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다(눅 3:2; 요 11:51). 그는 겉으로는 존귀하게 보였겠지만, 실상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악한 자이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죽이기를 공모하였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계획하였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불치의 병자를 고쳐주신 때에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일 것을 의논하였었다(요 5:16 전통본문; 마 12:14). 또 요한복음 5:18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말함을 인해 그를 죽이려 하였다. 또 요한복음 7:7은 그가 그들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2:19는 온 세상이 그를 따르기 때문에, 또 마태복음 27:18은 그들이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죽이려 했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친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까닭 없이 죽이려고 이렇게 악한 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의 교훈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지적하고 성경과 이성에 입각한 공정한 비평을 해야 했었다. 까닭 없이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6-13절, 예수께 향유를 부음
[6-7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 . . .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 시몬은 아마 이전에 나병을 앓았다가 고침을 받은 자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 오셨을 때에 아마 그 날에 있었던 일이고, 예수께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은 나사로의 여자 형제 마리아이었던 것 같다(요 11:1-2; 12:1-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머리에 붓고 또 그의 발에도 붓고(요 12:3)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 향유 냄새는 온 집에 가득하였다. 세상에서 귀한 분들은 값비싼 옷이나 신발, 고급화장품이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단장한다. 그러나 세상에 참으로 값비싼 향유를 발라야 할 분이 계시다면, 그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8-9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 . . .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분을 내며 말했다.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가 3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증거한다(막 14:3-5; 요 12:3-6). 그것은 노동자의 3백일 이상의 품삯에 해당한다. 노동자의 품삯을 하루 6만원으로만 잡아도 그것은 2,100만원의 가치가 되는 값비싼 향유이었다.
그렇게 분노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요한복음 12:3-6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선한 일에 대해 말하지만 실상 위선적이었다.
[10-12절]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 . .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과 말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그가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할 수 있지만, 그를 위해 향유를 붓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지상 생애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자기가 가장 아끼던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고 싶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잡아죽이려 한 그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며 그에게 자기의 귀한 향유를 부어 그의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하였다. 실상 주께서는 그 어떤 향유보다 더 귀한 자기 몸을 깨뜨려 우리를 위해 보배로운 피(寶血)를 다 쏟으셨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 . . .
예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그 여인의 행위가 후시대에도 기억될 만한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구제의 일도 귀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쓴 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쓴 돈은 결코 헛되지 않은 돈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쓰는 시간과 돈과 재능은 결코 헛되지 않다. 주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성체(聖體)를 깨뜨리시고 보혈을 다 쏟으셨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드리자.
14-16절, 가룟 유다의 배신
[14-16절]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 . . .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하였다.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고, 그는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은 30은 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을 가리킬 것이다(NBD). 그것은 마리아가 드린 향유의 값인 300데나리온(막 14:5; 요 12:5)보다는 못했으나 꽤 큰 금액이었다.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 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으나, 다른 한 사람은 120데나리온을 얻으려고 주님을 배신하였다. 이것은 너무 대조적이다. 지식과 무지, 믿음과 불신앙, 충성과 배신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배신하였다. 인간은 심히 죄악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체험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고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다(요 6:64). 그의 불신앙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 그는 도적이었다. 요한복음 12:6은 그가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고 말한다. 그의 돈 사랑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 사탄의 활동이 강하였다. 누가복음 22:3은,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13:27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의 능력보다 크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사람은 누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17-30절, 유월절 저녁식사
[17-19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 . . .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말했다.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의 죽음의 사건, 곧 인류 구속(救贖)의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전 3:1-8).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신 때에 이루신다.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며 유월절 식사를 하면 무교절 첫날이 된다. 그 유월절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하신 후 아마 네 번째로 맞는 유월절일 것이다(요 2:13; 4:35; 6:4).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한 큰 다락방을 빌리게 하셨다(막 14:15; 눅 22:12). 제자들은 주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20-23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 . . .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그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그들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쭈었다. “주여, 내니이까?” 그는 대답하시기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다.
그 유월절 저녁식사는 결코 즐거운 식탁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즉 그의 측근의 제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아주 친하고 신뢰하던 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반하고 그를 대적할 것이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 참여하였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이 분명하다.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빵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으며, 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고 증거하였다(요 13:27, 30).
[24-25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 . . .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셨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바요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며,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6:64에 보면, 주께서는 가룟 유다가 믿음이 없었고 장차 그를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다. 또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주께서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 관계는 심오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둘은 다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회개도, 믿음도, 순종도, 끝까지 주를 따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을 파는 유다가 대답하였다. “랍비여, 내니이까?” 주께서는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도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적인 구주로 믿지 않았음을 보이며 “내니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주께서 그의 은밀한 계획을 모르시리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식과 신적 인격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최종적으로도 구원에서 제외된 불쌍한 영혼이지만, 세상에서도 그의 마지막은 불행하였다. 성경은, 그가 예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마 27:3-5), 또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증거하였다(행 1:18).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불쌍한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지금 자신을 부정하고 믿음과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26-27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 . . .
그들이 먹을 때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다. 그때 사용된 빵은 큰 한 덩어리의 빵이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 곧 최초의 성찬식에 참여하였다(눅 22:21; 요 13:26-27). 비록 그가 그 성찬식에 참여하였지만,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다. 성찬식은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떡을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즙을 ‘내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떡과 포도즙은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주께서는 그 엄숙한 의식에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27은 사람이 주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엄숙히 경고하였다.
[28절]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새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택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들의 수는 매우 많다(계 7:9). 피는 생명이며 속죄의 피가 죄를 씻는다(레 17:11; 히 9:22). 그러므로 속죄의 피가 중요하며 속죄신앙이 중요하다(요 6:53-55). 속죄가 없었다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속죄신앙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구원 신앙이다.
[29-30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의 즐거운 식탁교제에 대해 암시하셨다. 천국에서 우리는 즐거운 식탁교제를 나눌 것이다. 제자들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갔다.
본문 17-30절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헛되이 주를 따르지 말자.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에서 그의 교훈을 받고 그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지만 그를 헛되이 따르다가 마침내 배신자가 되었다. 가룟 유다의 실패의 원인은 그가 돈 사랑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그는 평소에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요 12:6). 우리는 평소에 자신을 부정하고 돈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하자.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참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되자.
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의지하자. 그의 속죄의 피가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이 되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
31-35절, 제자들이 주를 버릴 것을 예언하심
[31-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 . .
예수께서는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며 말씀하셨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주께서 인용하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이었다(슥 13:7). 그는 그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이 그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고 그가 부활한 후 갈릴리로 먼저 갈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께는 신적 지식이 있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언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 그들의 말은 진심의 결심과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무리 좋은 소원과 진심의 고백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적 자신감뿐이라면 그것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심히 연약한 존재이며 인간의 굳은 결심도 매우 연약하다.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꽤 힘있어 보이지만, 죽음의 위협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여지없이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열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용감했던 베드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다(빌 4:13).
36-46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셨다. 겟세마네는 감람산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가셔서 기도하셨던 곳이었다(눅 22:39). 주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증거이었다. 물론 그의 신성(神性)으로도 아버지와 대화하시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가 기도하신 것은 그의 인성을 보인다. 또 그가 잡히시기 전날, 그는 기도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우리가 큰 일이 생겼을 때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37-39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 . . .
그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좀더 나아가셨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최측근의 인물들이었다. 주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그들을 데리고 가셨다(눅 8:51; 9:28). 그는 이 밤에도 그들을 데리고 가셨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며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셨다.
그는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눅 22:41, 44).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켰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육신적 고통뿐 아니라, 택자들의 죄책을 담당하는 영적 고통이 있는 죽음이었다.
그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그는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그는 십자가 고난을 피하기를 원하셨고 마음의 큰 슬픔과 고통 중에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히브리서 5:7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증거하였다.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참 사람이 되셨다(딤전 2:5).
인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여기에 십자가의 심오한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흘리신 죽음으로 우리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은 순종의 정신이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 뜻을 고집하고 관철하고 이루려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기도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선하고 완전하며, 오직 그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써 그의 온전함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8-9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의요 생명이다. 우리도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40-41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 . .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시간]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토 프뉴마 τὸ πνεύμα)[영은] 원이로되[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주께서는 한 시간 동안 기도하셨다. 한 시간 동안 하신 그의 기도의 내용은 단순하였다. 그러나 그 한 시간 동안도,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지 못했고 피곤하여 잠만 잤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영혼은 바른 것을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다. 그러나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길이다. 깨어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기도하지 않을 때 시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도 저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범죄하게 될 것이다.
[42-46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 . . .
주께서는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다시 와 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 번 반복되었다. 그것은 아마 한 시간씩 세 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확신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은 인간으로 지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그것을 지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제자들에게 와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26:36-46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모범을 본받자.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큰 일을 앞두고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아마 3시간 이상 기도하셨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는 얼굴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자기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기도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본받자.
둘째로,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죄와 마귀의 시험과 핍박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성경 읽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에베소서 6:18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싸움을 싸우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47-56절, 잡히심
[47-49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 . . .
그가 말씀하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들과 몽둥이들을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했다. 그는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다. 유다는 위선적 입맞춤으로 주님을 잡히시게 했다. 이 세상에는 돈 욕심, 배신, 폭력이 있다. 그러나 천국은 의와 진실과 사랑의 나라이다.
[50-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 . . .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그러자 그와 함께 온 자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에 한 사람이 손으로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8:10은 칼을 쓴 그 제자가 베드로이며 그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증거하였다. 또 누가복음 22:51은 주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증거하였다.
기독교는 칼을 사용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폭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비슷한 원리로, 기독교는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력을 의지하여 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으로 실천하고 순교적 죽음도 사양치 않는다. 비록 사람들이 볼 때 무력(無力)하게 보일지 몰라도,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53-56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 . . .
주께서는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영(營)이라는 원어(레게온 legewvn)는 6천명 정도의 군인들로 편성된 로마제국의 군대단위를 가리킨다. 열두 영은 7만 2천명 가량의 군인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충분히 많은 수의 천사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힘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니셨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진중에서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쳐서 죽이신 일이 있으셨다(사 37:36).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예수님 잡는 그들을 당장 다 멸할 수 있으셨다.
주께서는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말씀하시고 또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는 성경의 예언대로 잡혀 죽어야 하셨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에 대한 예언과 예표가 많이 있다. 성경의 예언들과 예표들은 성취되어야 했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는 그 예언과 예표대로 죽어야 하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셨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 고백했던 자들이었다(33, 35절). 그러나 그들의 결심과 고백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 도망치고 말았다. 제자들은 비겁하고 연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연약이 아니고 바로 모든 인생의 연약, 곧 오늘 우리의 연약이다. 우리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실패할 것이다.
57-68절, 심문을 받으심
[57-58절]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 . . .
예수님을 잡은 자들은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이미 공모(共謀)하였고 그 새벽에 소집되었다. 그들은 그를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좇아 대제사장의 관저까지 가서 그 결국[결말]을 보려고 그 뜰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다. 그는 그의 고백대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멀찍이라도 그를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주님을 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밤에 그가 주와 함께 깨어 기도했더라면 아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59-61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 . . .
그 새벽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정죄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나라의 최고치리회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거짓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본문은 “거짓 증거를 찾으나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사람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불의하고 마귀적이다. 의로운 판단은 합당한 증거들과 정당한 논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경우와 같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위해 그럴듯한 증거들을 찾는 일은 매우 악하다.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지만 적절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 예수님을 사형시킬 이유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두 거짓 증인이 왔다. 그들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한 적이 있으시나(요 2:19) 그것은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으나(요 2:21)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일 이유는 되지 못하였다.
[62-64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 . . .
대제사장은 일어나 예수께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예수께서는 잠잠하셨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를 어떤 변명으로도 바꿀 수 없음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말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는 그 요청에 대해,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다.
재판석에서 하는 엄숙한 대답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하는 대답은 그러하다. 주께서는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의 메시아 예언으로 대답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공적인 대답이셨다. 그는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안드레는 형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었다(요 1:41). 주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었다(요 4:25-26). 베드로는 대표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었다(마 16: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의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부활을 통하여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5:36, “내게는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일들] 곧 나의 하는 그 역사[일들]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즉 재판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엄숙히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마다 그의 증거를 믿어야 한다. 누가 그 증거를 믿지 않으면서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는 사기꾼이나 미치광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65-66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 . . .
그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다.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그들은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결코 참람한 말이 아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이 그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상,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작정하였다. 공회의 재판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였다. 아, 무서운 세상! 공의의 판결이 시행되지 않는 법정! 이것이 부패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이었다.
[67-68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 . . .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께서는 거짓되고 악한 사람들에 의해 얼굴에 침 뱉음, 주먹으로 침, 손바닥으로 때림을 받으셨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 그렇게 학대와 조롱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밤에 겟세마네 산에서 잡히셨고 유대인의 공회에서 심문을 당하셨고 악한 자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당하셨고 마침내 정죄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엄숙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자. 그것이 구원이 됨을 알자. 또 우리는 고난받으신 주님을 사랑하고 끝까지 그를 따르자.
69-75절,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함
[69-75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여종]가 . . . .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관저 바깥뜰에 앉아 있었는데, 한 여종이 그에게 나아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한 것이었다.
그가 앞문까지 나아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도[전통본문]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맹세하며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또 부인하였다. 그의 잘못은 점점 더 커져 이번에는 맹세하며 부인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하였다. ‘네 말소리’란 그의 갈릴리 억양이나 혹은 그의 떨리는 말투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그는 아마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닭이 곧 울었다. 어느덧 이른 새벽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는 주님께 대한 자신의 큰 잘못과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며 회개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베드로의 잘못은 인간의 보편적 연약성을 잘 증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온전한 순종과 충성이 우리의 진실한 결심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27장: 죽으심
1-2절, 빌라도에게 넘겨줌
[1-2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 . . .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때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고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세운 유대의 총독이었다(눅 3:1).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에게 넘겼다.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그 일을 하였다. 그 악한 자들은 악을 도모하고 실행하기 위해 밤늦게도 이른 새벽에도 분주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까닭은, 그들에게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빌라도가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에 있어서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로마 총독을 이용하였다. 저 타락한 종교인들은 로마 총독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악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웠으나,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악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악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어 모였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3-10절, 가룟 유다의 자살
[3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 . . .
그때에 예수님을 판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 그는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대답하였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유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었을 때는 3년 간 따르던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그 양심이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였다. 은 30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보다 양심의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범죄한 자의 후회와 고통이다.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다. 그는 쓰지도 못할 돈 때문에 주님을 팔아넘긴 헛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당하심을 ‘무죄한 피’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이 배신한 제자까지도 주님의 무죄함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화인맞은 양심을 가졌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죄는 매우 컸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사도행전 1:18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증거하였다. 이 증거는 그의 자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라고 본다.
유다가 자살한 것을 보면, 그의 후회는 회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참으로 회개한 자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즐거이 드린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6-10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핏값이라. . . .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거두며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즉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불렀다. 유대 지도자들의 그 행위는 마치 불쌍한 나그네들을 위하는 것 같은 위선적 행위이었다. 위선자들은 항상 사람들 보는 데서, 그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의와 선과 진실이 없다.
마태는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이 섭리적 사건은 이미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이었다(슥 11:13).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증거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주석가 라이트푸트는 유대인 학자 데이빗 김치의 글을 인용하여 예레미야가 선지자들 가운데 첫 번째 지위를 가졌고 선지서들 중에 첫째에 놓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브라운). 구약의 예언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성취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유다가 던져넣고 간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 성경의 예언은 놀랍게도 성취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예언성을 굳게 믿자. 또 우리는 죄를 후회하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자.
11-26절, 빌라도의 판결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 . .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자 총독이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목을 씌웠다. 그들은 공회에서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고 물었었으나, 이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하였다. 그들은 간교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총독에게 “네 말이 옳도다”(쉬 레게이스 su; levgei")[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증거하셨다. 구약성경은 왕이신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레미야 23: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예레미야 30:9,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스가랴 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그의 질문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에서도,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도 자신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엄숙하게 증거하신 그의 증거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며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12-14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 . . .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고 그가 자신을 변명한다고 변경될 일이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을 것이다. 빌라도는,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그것을 매우 기이히 여겼다.
[15-19절]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 . . .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자였다고 증거한다(막 15:7). 그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예수님은 죄수 바라바와 나란히 석방후보자로 제시되었다.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후보자에 넣은 것은 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사형당할 만한 아무 죄가 없었음을 알았음을 나타낸다. 시기는 욕심에서 나오고 미움과 살인을 만드는 무서운 악이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 여자는 예수를 ‘저 옳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20-2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 . .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선동하고 설득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공의로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든지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로서 백성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실권을 고려하고 행동해야 했다. 백성들의 이런 이해관계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백성의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를 죽이자고 설득하고 선동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총독이 말했다. “너희는 내가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무리는 “바라바로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선동에 설득되어 판단력이 이미 흐려져 있었다. 빌라도는 말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것은 재판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무책임한 말이었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법률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재판관이 사람들의 의견이나 묻고 여론에 이끌려 재판하려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설득된 무리들은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다시 물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증거를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사랑과 거룩과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제시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어떤 악을 행하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이 제시할 아무런 악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더욱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24-25절]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 . . .
빌라도의 미지근하고 무책임한 심문과 재판은 아무 효험이 없었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무리의 외침만이 정의이었다. 이렇게 무법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을 판단치 않고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계산된 작전이었을 것이다. 과격한 데모도 비슷하다. 거기서는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고 오직 소수인의 계산된 선동과 폭력만 있다. 그런 것은 사회를 개선시키기보다 혼란시키고 더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데모는 거부되어야 한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이 ‘옳은 사람’(전통본문)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것은 책임회피의 악을 더하는 말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을 권세도,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요 19:10). 판결은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손을 씻는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백성은 다 대답하였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그 핏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의 형벌을 과연 그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지한 대답대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 보응하셨다. 그것이 처참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이었다.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무섭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해도 때때로 훈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정확한 죗값은 아니지만 죄 때문에 주시는 쓰리고 아픈 과정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상의 길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하였을 때는 즉시 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 . . .
드디어 빌라도는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었다. 사형수에게는 채찍질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지셨다. 그는 정죄되고 바라바는 놓여났다. 예수께서는 저 바라바보다도 못한 죄인이 되셨다. 죽어야 할 죄인은 놓여나고 죽을죄가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셨다.
재판관이 어떤 사건을 판결할 때 여론을 무시하지 말고 참고해야 하겠지만, 여론에 이끌리거나 여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판결은 오직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에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법률적으로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비록 자기 지위가 위태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바른 판결을 내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의 판결은 불의하였다. 빌라도 자신도, 그의 아내도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어느 정도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리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비겁하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그가 그 지위와 권세를 잘못 사용하였다. 그는 의로우신 예수님께 십자가형이라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로 정죄되셨다.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자.
27-31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심
[27-31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 . . .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쳤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로마 군병들, 죄 많은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그들은 희롱을 다한 후 그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며 살자.
32-44절, 십자가에 달리심
[32-34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 . . .
총독의 군병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예수를 데리고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요 19:17). 그렇다면 십자가 형틀은 무거웠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혼자 지기에 힘이 드셨던 것 같다. 그의 십자가를 함께 져 줄 그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군병들은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으나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다. 쓸개 탄 신포도주(혹은 포도식초)(전통본문)는 진통제 역할을 해 사형수로 고통을 덜 느끼게 한다고 한다(NBD).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신포도주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그것은 그가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35-38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 . . .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누가복음 24:39-40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상하신 손과 발을 보이신 것을 보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피흘림은 물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 고통은 여러 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요한복음 19:23-24는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제비뽑아 취하였다고 자세히 증거한다. 이것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예언한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다.
군병들은 그런 후 십자가 옆에 앉아 지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붙여졌다. 누가복음 23:38의 전통본문과 요한복음 19:20은 그 죄패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 죄패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증거하였고 그 내용은 온 세계의 각 언어로 알려져야 할 내용이었다.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께서는 강도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 53:12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39-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 . .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며 말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왕이라면](전통본문).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이것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한 시편 22:7-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본문은 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욕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강도는 곧 회개하였다. 누가복음 23:39-43에 기록된 대로, 그는 다른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고, 예수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전통본문)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고 겉옷과 속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고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한 명의 귀한 영혼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또 이 구원의 복음은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45-56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45-46절]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 . . .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였다.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요한복음 19:14는 제6시(그것은 로마 시간 곧 오늘 우리의 시간과 같다고 본다) 즉 오전 6시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15:25는 제3시 즉 오전 9시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가장 악한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노하신 시간을 나타낼 것이다.
제9시 즉 오후 3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크게 소리지르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그것은 육신의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또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영의 고통이었다. 갈라디아서 3:13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다. 인간의 죄의 용서는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멀리할 것이다.
[47-50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 . . .
거기 섰던 자들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웠고, 남은 사람들은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요한복음 19: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증거하며, 누가복음 23:46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택자들의 구속(救贖)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51-54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 . . .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놀라운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 하나는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히브리서 10:19-20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갈 담력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 하나는,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때에 되어진 일들을 볼 때 예수께서 죄가 없는 의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 . . .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이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잡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며 주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있다.
57-66절, 무덤에 장사되심
[57-61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 . . .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다. 마가복음 15:43은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한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이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내어주라 명하였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것 같은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예수님은 이사야 53:9의 예언대로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죄인들이 그 죄값으로 들어가는 감옥과 같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셔서 무덤에 내려가신 것이다.
[62-64절]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 . . .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 즉 안식일이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모여 말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저 유혹하던 자’라고 악평했다. 바울도 자신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하였다(고후 6:8).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오늘날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더 나았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제자들이 후에 그것을 써넣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치 못했다. 그들이 상상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도둑질당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사흘은 그의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헛되게 만드신다.
[65-66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 . . .
빌라도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했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오히려 그의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이 크고 모든 선을 압도하는 것같이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신 채 달리셨고 옷 벗기우는 수치를 당하셨고 모욕과 희롱을 받으셨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낮아지셨다. 그는 바로 우리를 위해 그런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당하셨다(사 53:5-6). 이제 우리가 그를 위해 살고 고난도 받을 차례이다.
28장: 부활하심
1-7절,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증거함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공통적으로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거하였고 여자들이 그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절]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 . .
안식일이 다해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과 때가 분명히 증거되었다. “안식 후 첫날(미안 삽바톤 mivan sabbavtwn)이 되려는 미명(未明)에”라는 원어는 “주간의 첫날 새벽에”라는 뜻이다.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의 첫날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이 되었다. 마가복음 16:2는, “매우 일찍이 해돋은 때에”라고 말한다. 그 시간을 새벽 6시로 본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금요일밤(아마 오후 6시경)부터 토요일 하루를 지나 일요일 새벽까지, 그러니까 정확히는 만 하루 반 그리고 대략적으로는 제3일이었다.
무덤을 보려고 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다. 마가복음 16:1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 세 명을 언급하고, 누가복음 24:10은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고 말한다. 천사들의 증거와 빈 무덤의 확인은 두 명 이상의 여자들이 증거한 확실한 사건이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다. 누가복음 23:55-5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누가복음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여자들의 거룩한 참 사랑과 정성이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극복하고 주님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 상처와 피흘린 흔적을 닦고 썩는 냄새를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지식과 믿음이 얼마나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어떤 상황에서나 성도에게는 최선의 믿음과 사랑과 충성이 필요하다.
[2-4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 . . .
그런데 주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문으로부터]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고 수직하던 자들은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날 두 명의 천사들이 그 무덤에 있었다고 증거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수종자로서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 동원된다. 천사의 모습이 번개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흰 것은 그의 민첩함과 성결함을 보인다.
[5-7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 . .
천사는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천사는 여자들에게 무서워말라고 안심시키면서 세 가지의 내용을 말했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 둘째, 와서 그가[주께서](전통본문) 누우셨던 곳을 보라. 즉 빈 무덤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다. 빈 무덤은 마태, 마가, 누가가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거이다. 셋째,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부활의 소식은 그들에게 예수께 대한 확신과 위로와 힘을 줄 것이다. 즉 부활 사실의 선포, 부활 사실의 근거 제시(빈 무덤), 부활 사실 전파의 사명을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처음 목격자들의 증언, 즉 복음서들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몇 부분들(사도행전, 고린도전서 15장)이 있다. 우리는 이 증거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인하고,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또 그를 만방에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8-10절,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8-9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 . . .
그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려고 가고 있을 때(전통본문),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서 “평안하뇨?” 하고 물으셨다. ‘평안하뇨?’라는 원어(카이레테 caivrete)는 우리말에 ‘안녕하세요?’와 같은 일반적인 인사말이다.
여자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 ‘경배하다’는 원어(프로스퀴네오 proskunevw)는 ‘절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섬겼음을 보인다. 인간 선생에게는 머리를 숙여 인사는 하나 엎드려 절하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 22:8-9에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을 때,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였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에 그의 인성(人性)이 나타나 있다. 주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인성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그의 이 말씀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는가? 그는 우리 주, 우리 하나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신가? 그러나 그는 즐거이 우리의 형제로 자신을 낮추셨다. 모든 진실한 제자들은 주님의 이 겸손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이기려 하지 말고 겸손히 섬기며 서로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다 지방 예루살렘에서도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다른 복음서들이 증거하지만, 그는 그가 부르시고 가르치셨던 그 바닷가, 그에 대한 기억이 그들에게 아직 생생할 그곳에서 그 제자들과 다시 얼마 동안 교제의 시간 가지기를 원하셨다. 사도행전 1:3은, “[예수께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40일 동안의 나타나심과 가르치심은 주로 갈릴리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낙심과 슬픔을 떨쳐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재무장하게 될 것이다. 또 거기서 그들은 주께로부터 전도의 대사명을 받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천사들의 증거를 듣고 빈 무덤을 확인하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은 주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이 아니시고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그들은 또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주를 만나라는 말을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자. 여자들의 빈 무덤 확인을 통해, 또 그들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그를 확신하자. 또 우리는 부활하신 주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알자. 예수께서는 죽어버리신 자가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또 우리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뵈었듯이 성경을 통해 주님을 더욱 확실히 알고 믿고 따르자. 오늘날 주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11-15절, 군병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림
[11-15절] 여자들이 갈 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 . . .
여자들이 갈 때에,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였다. 그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말하였다.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군병들은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므로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
파수꾼들은 그 날 새벽에 되어진 일들, 즉 지진, 무덤돌이 굴려진 것, 천사의 나타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인 무덤의 비었음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보고를 통해 대제사장들에게도 그 사실들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사실을 확인하여 믿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만 하였고, 또 어떻게 하든지 그 새벽의 기이한 사건들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악한 자들은 악한 것을 좋아한다. 죄인에게서 진실한 양심의 일깨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악과 돈은 항상 결탁된다. 돈이면 선생을 팔기도 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 보도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상황이 중대하므로 돈이 많이 요구되었다. 이 긴급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들은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어 그 입을 막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이성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파수꾼들은 무장된 군인들이고 제자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잠 잘 때 도둑질하여 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가? 또 만일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면, 저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능히 찾아내었을 것이다. 또 예수의 제자들은 선생의 시체나 감추어놓고 부활을 외치며 기뻐하고 순교하는 광신적인 사기꾼들이었는가? 그런 생각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과 증거를 후원한다.
총독과 유대 지도자들은 결국 다 세상의 썩어질 것만을 아는 자들이었다.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라면 진실이나 거짓을 상관치 않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죄인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결국 자기의 유익을 위해 진실과 양심을 파는 자들이다.
세상에는 많은 거짓말들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으리라. 오히려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에게 말했던 뱀의 거짓말로부터 시작하여 인류 역사는 거짓말들로 가득한 역사이다. 회개치 않는 악인들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며 자신도 속는다. 거짓말을 진리로 믿고 진리를 거짓말로 배척한다. 참된 지식과 믿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거짓을 추방하고 진리만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리 안에서 살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이서 4절에서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말했고, 요한삼서 3-4절에서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된 것을 감사하며 힘있게 진리 안에서 살자.
16-20절, 전도의 사명을 주심
[16-17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 . . .
열한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아직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곧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 . . .
예수께서는 나아와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다는 뜻일 것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래 신적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이 되신 후에도 그 신적 권세를 행사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이 되신 그는 신적 권세로 옷 입으셨고 신적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요한계시록 5:12-13,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형제로 여기실지라도, 우리는 그를 두려움으로 섬기며 높이며 경배해야 한다.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그것은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와 악령들을 제압하는 권세를 포함한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그의 권세는 물질적 권세도 포함한다. 그는 만물의 통치권을 받으셨다. 이제 온 세상의 유일한 권세자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계복음화의 대사명을 주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명령은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지고 순종되어져야 한다.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너희는.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 열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디도서 1:3,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전도의 임무는 사도들에 이어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나 선교사나 전도사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모든 성도들은, 비록 전도를 위해 파송된 자들은 아닐지라도, 이 일을 위해 정성과 힘을 모아야 한다. 전도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이다.
가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계로 가라고 명하셨다. 전도자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야 한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누가복음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전도는 영혼들에게로 찾아가는 것이다. 오는 사람도 가르치지만, 오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야 한다.
모든 족속으로.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이다. 자기 동네, 자기 나라 사람뿐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다. 주의 명령은 세계복음화이다. 세계복음화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오늘도 그것이 필요한가? 그렇다. 겨우 백 년 전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다. 아직도 세상에는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들, 나라들이 있다고 한다. 세계복음화의 과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내전도자뿐 아니라, 해외전도자가 필요하다.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선교연구소가 필요하고 선교사 훈련원이 필요하다.
제자를 삼아. ‘제자를 삼는다’는 말은 옛날 영어번역에는 ‘가르치다’로 번역하였다. ‘제자를 삼는다’는 말은 누구의 제자를 삼는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므로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제자란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행동을 본받는 자를 가리킨다. 제자를 삼으라는 주의 명령은 누구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인가? 가르치는 자들의 제자인가? 가르치는 자는 선생이 되고 배우는 자는 제자가 되는가?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제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마태복음 23: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고린도전서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세례는 죄씻음과 하나님과의 연합의 표시이다. ‘이름으로(에이스 eij")’라는 말은 ‘이름 안으로’라는 뜻인데, 이것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기에서 영적 연합이란 실체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그러나 생명적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은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 에베소서 2:1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새 생명을 얻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혜택을 받음을 의미하며,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의 복이다. 이 복은 죄씻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제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구원의 복, 특히 죄씻음과 연합을 표시하며 확증한다. 성도가 받는 복이 바로 이것이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도(傳道)는 사실 복음 전파와 세례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주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전도는 일차적인 것이고, 전도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많은 가르침, 곧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 가르침의 주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되었고 해설되었다. 이 말씀은 이제 신약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오늘날 신구약성경은 권위를 가진다. 사도시대 이후에는 목사들의 독자적 권위는 없다. 그들은 오직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신구약성경만이 참된 권위,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이다. 여기에 또한 성경해석의 중요성도 나온다. 우리가 성경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체적 내용과 메시지는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와 각 부분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가르침의 범위는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이다. 편식이 몸에 좋지 않듯이, 진리의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골고루 읽고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도 잘 알아야 하고 윤리적 교훈도 잘 배워야 한다. 교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든 교리들, 즉 성경,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에 관한 모든 교리들을 배워야 한다. 또 윤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십계명의 모든 내용들, 즉 우리 개인과 가정과 사회에 적용할 모든 문제를 배워야 한다.
또 가르침의 목적은 실천이다. 주께서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교훈의 목표인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고 배워야 할 내용과 목표이다.
주께서는 이런 명령을 주시면서 후원과 위로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의 종들에게는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미래의 모든 가능한 낙심과 좌절을 제거해주며 주의 종들이 어떻게 계속 새 힘을 얻게 될 지를 보장해준다.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은 다른 보혜사[위로자, 격려자]로 오신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사명만 부여하신 것이 아니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도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이 사명 수행에 충실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 사실은 그의 부활을 본 자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었고 그 증언들은 성경에 충분히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의 탄생과 교훈과 기적 행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주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눈으로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가 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받자. 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자.
특별히, 우리는 부활하신 주께서 주신 전도의 사명을 다시 확인하자.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의 제자들, 곧 신약교회에 주신 명령이다. 이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 곧 사명이다. 또 이것은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임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보장을 기억하자.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과 같다. 특히 전도자의 길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때문에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낙심치 말고 담대히 말씀과 기도로 진행하자. 왜냐하면 주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옛신앙 김효성목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