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지지기반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에 대한 농심함양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4-H회 육성을 위하여 실제 학생을 지도하고 있는 교사들이 우리 보다 앞서가고 있는 외국의 4-H활동 상황과 육성기법을 습득하여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4-H를 위한 외국의 4-H지도자 및 단체와 우의증진, 정보교류, 국제적 견문 확대, 학교4-H활동프로그램 자료수집, 조직운영실태 등을 알아 보고자 해외 연수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금년 처음으로 4박 5일간 대만 해외연수를 계획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4일
오후 3시부터 한국4-H회관에서 4-H지도교사 해외 연수단(20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이영래 회장님의 격려말씀과 이원갑 사무국장님의 지도교사 해외 연수사업 설명을 해주셨다. 대만에 대한 일반정보 및 4-H지도교사 해외 연수에 대한 개요와 각 조의 주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탐구·조사하여 평가회를 갖기로 했는데 5조로 편성하였다.
A조- 연수진행, 각종 자료수집, 연수과제 총괄
B조-대만 4-H의 지도육성조직의 전반적인 조직체계
C조-대만 학교4-H회의 조직운영 및 활동프로그램, 육성방법
D조-대만 4-H육성지도자(Volunteer leader)의 분류와 역할 및 활동 내용
E조-대만의 사회, 문화, 청소년 및 농업 이라는 주제를 갖고
2000년 8월 15일
국제김포공항에서 CX421편 비행기에 09시35분에 탐승하고 09시 50분에 이륙하여 1,485Km (922mile)를 고도10,700m(3,500feet) 속도 887Km/h로 오전 11시 55분에 대만에 무사히 도착했다. 짐을 찾는 시간이 거의 1시간이나 걸려 12시 45분에 타이뻬이현(縣) 송산에 있는 국제 中正(장개석)공항을 나왔다. 한국4-H지도교사회의 피켓을 들고 있는 안내원 담자붕(譚子鵬)과 4健會자원봉사자 곽미아(郭美娥)양을 볼 수 있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글자를 보니 더욱 반가웠다. 잠시 후 2층 버스를 타고 중산(孫文:쑨원)고속공로로 2시간 정도 타이뻬이 시내 중심가로 이동했다. 차창 밖의 경치들은 영화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 재현되었고 우리나라 승용차 마티즈, 프라이드, 엑센트, 소나타 등이 외국의 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리는 모습이 참 좋았다. 또한, 오토바이를 탄 남녀노소 모두가 헬멧을 착용하고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시내버스를 도로 중앙에서 승하차하도록 되어있고 버스전용도로에서는 역으로 주행하도록 하여 승용차와 택시 등은 전용버스도로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한 점이 우리나라와 달랐다. 한국인이 운영하고있는 장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려하는데 1년에 2회 있는 민방위 훈련이 실시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아오던 것이라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대만 사이에도 이념이 달라 우리나라와 같이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는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 1시55분에 타이뻬이 시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기륭시립 백복중학교(基隆市立百福中學校)를 방문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동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동 중에도 3번이나 소나기가 왔다. 우리가 도착한 학교 정문에 장개석의 동상이 있었고 현관에는『 환영 한국사건회 교사방문단 리교지도(歡迎 韓國4健會 敎師訪問團 校指導)백복중학전체사생경상8.15(百福中學全體師生敬上 8.15)』라는 글귀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방문단에게 각 교실과 실습장을 보여주었다. 이동중 비가 오는데 학교에서 우산을 준비해 우리에게 빌려 주었다. 작은 곳에 배려하는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학교는 4-H회원들이 목공반, 원예반, 환경반, 가정반으로 나뉘어 월, 수, 금요일 오후에 본인이 속한 반에 가서 실습을 한다고 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일은 환경반에서 수질 정수기를 만들어 이용하여 비단잉어를 기르고 원예반은 자투리땅을 이용하여 학교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을 하고 화장실에도 꽃을 길러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가정반은 수를 놓은 것을 화장실 벽에 게시하는 일 등이 참 좋게 느껴졌다. 화장실이라기 보다는 휴게실과 같이 깨끗하고 안락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 여름방학동안이라 전체학생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몇 명의 학생이 나와 교실에서 자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드니에서 열리는 올릭픽에 태권도가 정식 종목임을 알려주며 태권도를 소개하고 태권도 열쇠고리를 주었다. 기회가 되면 한국의 국기원에 한 번 와서 보라고 했다.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를 했다. 마침 이 학교 교장은 과거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분이어서 더욱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연수단은 교실에 들어가 준비된 녹차. 팥빙수, 수박, 참외와 롱엔(龍眼 : 용안)이라는 과일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씨앗이 정말 용의 눈과 같은 모습이었다. 방학중인데도 선생님들이 학교에 나와 우리들을 환영해주고 대접해주는 그들의 얼굴과 몸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마음은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봉지에 담아주는 그 학교의 교사들 모습에서 고향에 계신 할머니 마음과 같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한국4-H연맹 이원갑 사무국장님과 4-H교사협의회장 박진규 선생님이 한국에서 가져온 하회탈과 인삼차를 증정하였다. 인삼차가 좋다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오후6시에 연수단은 국립대만대학교 농업보급학과 류칭룽(劉淸榕)교수를 만났다. 그는 대만4健會(4-H회)비서장으로 근무하며 62세의 덕이 많아 보이는 분이었다. 인사말에서『멀리서 온 친구가 더 반갑다! 비가와 먼지를 닦아 내어 깨끗한 곳을 오시도록 한 비가 고맙다.』라는 중국속담을 하며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교수 전용실에 녹차, 과자, 빵, 대만4건회자료 책자와 4건회 노래테이프, 봄의 노래테이프를 준비해 놓았다. 대만 4건회에 대한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고 질의 응답시간을 갖었다. 1952년 대만 4건회를 창립하고 농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토록 하여 농촌발전을 유도하고 9세부터24세까지 4건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본인도 현재 4건회 자원 봉사를 하면서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손자손녀들이 8명이나 되지만 아직도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일할 수 있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다음달에 발행되는 4건회 출판물에 한국4-H교사방문내용을 게재한다고 했다. 그들의 4건회 표시는 녹색바탕에 흰색글씨로 수뇌심신(手腦心身)이라고 써있는데 우리나라의 지덕노체와 같은 뜻이었고 녹색은 생명과 영원히 항상을, 흰색은 순결과 평화, 네 잎 클로버는 "행운, 사랑하는 마음, 건강, 활발"을 상징하고 있었다. 대만 4건회의 좌우명은 "정익구정(精益求精)"이었으며, 회원들의 공약으로 "지성을 다하며 나 개인을 위하며, 우리 가정을 위하며, 4건회를 위하며, 우리의 고향을 위하며, 우리국가와 세계자유국가를 위하며, 우리들의 훈련에 참여하여 봉사함에 있다. 4건회의 철학은 민주를 강조하고 자치정신을 기르며, 대자연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것은 취하여 지식으로 하고 생활환경에서 창조하며, 자기의 적극적인 인생관을 갖는다. 라고 되어있었다. 유칭룽 교수에게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더니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한다. 비록 국교는 단교되었지만 농심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똑같다며 대만을 찾아준 한국4-H교사협의회 선생님들께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한국의 하회탈과 인삼차를 전해주었다. 매우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한국4-H회와 대만 4건회의 민간교류가 잘 이루어 질 것이라고 느끼며 우리들도 민간대사가 되어 최선을 다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저녁은 사천요리를 먹고 강화대반점(康華大飯店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에 몇 선생님들과 도교사원을 보러 갔다. 9월1일부터 1학기 입학계절이 시작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향불을 피워 이마에 대고 소원을 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좋은 글귀가 있어서 적어왔는데 내용은 『讀好書 說好話, 行好事 』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음료수와 간단히 먹을 것을 사러 갔다. 다행히 틈틈이 공부한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2000년 8월 16일
다음날 아침 도원현 귀산향 농회(桃園縣 龜山鄕 農會)를 방문하였다.
정문에 환영왕림(歡迎 往臨)이라고 크게 써 붙어 있었다. 귀산향 농회에 대해 비서 팽광영(彭光榮)이 소개를 해주었고 농회의 역할에 대해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을 갖었다. 대만의 자원 봉사자들과 가정지도원 마국영(馬國英)양이 점심을 준비해 놓았다. 한국식 김밥, 김치를 담았는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맛있다고 했더니 5명의 아주머니와 한국의 배추김치 담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한다. 김지영 선생님과 함께 우리나라 김장김치 담그는 방법과 저장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열심히 받아 적으며 고맙다고 했다. 다음에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배운대로 만들어 대접한다고 했다. 잠시 후 마국영 양으로부터 노리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질그릇 만드는 흙으로 2개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원 봉사자 중 대만대학교 의대생과 정치대학 영어학과를 다니는 이-잉 여학생도 있었는데 우리들이 만드는 것이 서투르니 옆에 와서 만들어주고 설명해주며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 잠시 후 전기오븐에 넣었다. 120℃로 20분간 가열하면 완성된다고 한다. 한국4-H지도교사협의회 방문을 알리기 위해 대만케이블TV기자와 聯合報기자, 지방신문 기자가 와서 열띤 취재를 하였다. 우리들이 노리개를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사진을 찍고 비디오 촬영을 하였다. 귀산향 농회에 우리나라의 하회탈과 인삼차를 전했다. 그들도 수산명차(壽山名茶)를 선물로 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오후에 용담(龍潭 :Lung tan)의 소인국(小人國)에 가는데 차창 밖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농부가 있었다. 여기는 연간 3모작이 가능하며 겨울이 없고 평균기온이 높아서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한다. 잠시 후 도착한 소인국은 우리나라의 에버랜드와 비슷하나 각 나라의 유명한 건물이나 물건을 축소하여 미니왕국을 건설하였다.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 스핑크스, 미국의 우주선 발사장소, 우리나라의 비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다른 나라의 대표적인 건물과 물건을 축소하여 소인국을 만들어 외화벌이를 하는 아이디어는 우리나라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오는 길에 대만민속공연을 보았다. 어릴 때 보던 접시돌리기, 단지 돌리기, 칼 던지기, 항아리에 들어가기 등을 시범으로 보였는데 이들은 전통민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 8월17일
아침 일찍 일어나 대만의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은 운동을 하며 여유 있게 지내고 있다 거리의 아파트나 건물의 색깔은 낡아 보였지만 대만의 기후가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색을 칠하여도 쉽게 퇴색되고 대만사람들은 겉치장보다는 내부에 신경을 쓰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식주(衣食住)인데 대만사람들은 식의주(食衣住)로 산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식당에 가면 음식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최소한 8번이나 12번 정도 나온다 식사시간도 보통 2시간에서 3시간 정도로 여유있는 만만디 정신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들은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식사시간이 소요되어 성격이 급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대만사람들도 "빨리 빨리, 미리미리"라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였다. 오늘은 양매(陽梅)에 있는 서매국민소학(瑞梅國民小學)를 견학하였다. 4평 크기의 실습포장이 여러 개 있었는데 반별로 희망하는 4-H회원이 가지, 고추, 수세미, 상추 등을 재배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렇게 재배를 하여 봄으로서 자연과 친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학교 교장 엽유홍(葉劉弘)은 자원 봉사자들이 교통정리, 도서관 관리, 환경보호를 하며 학부모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학교 소개서, 녹차와 과자를 나누어주었다. 마침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보니 한국인 이현주(李鉉周)주부였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이번에 1학년으로 입학한다며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니 정말 기쁘다며 눈물을 보였다. 대만의 허정옥(許晶玉)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국어교과서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나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책을 구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양매진(鎭) 農會 민국89년(서기2000년) 제일차 4건회 간부 연계성과전 행사에 참석하였다. 300평 규모의 실내강당에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녹차와 샌드위치를 주며 양매농회 이사장은 "9월 1일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농업을 가르쳐 후일에 사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지도한다"며 양매농회에서는 수공반, 웅변반, 원예반을 운영한다고 한다. 이 곳의 학교4건회는 중학교2개, 초등학교 4개로 컴퓨터반, 원예반, 서예반 등을 운영하며 양매향의 외곽에 있는 학교를 중점적으로 육성 운영한다고 한다. 특히 유급반(9-12세), 초급반(13-16),중급반(17-20),고급반(21-24세)로 조직운영하고 지도자는 농회에서 양성하여 시험에 합격해야 4건회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보다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음은 국립도원고급농공직업학교(농공고)를 방문하였다. 교내의 양쪽에 한국소나무가 7그루 있었는데 우리에게 손짓하는 모습이었고 우리나라 나무를 보니 더욱 반가웠다. 마침 이학교장은 미국에 연수차 부재중이라고 하며 교무주임이 설명을 하였다. 실습보도주임 임진맹(林鎭孟)을 비롯한 20여명의 교사들과 마주 앉아 4건회에 대하여 질의응답을 했다. 이 학교에서는 4H야영 대회, 각 학교4H교사연수회, 4H회 자율봉사연수회, 매년 말에 4H회 평가회를 갖는다고 한다. 4건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계사, 돈사, 포장을 살펴보고 농기계를 살펴보았는데 거의 일본제품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대동"이라는 유명한 회사가 있다고 말하며 값이 저렴하고 질이 좋으니 앞으로 한국제품을 수입하여 사용하라고 부탁했다. 화련(花蓮)으로 가기 위해 대만철도국에서 445元(1元: 한국화폐 약40원)기차표를 구입하여 자강호(自强號 : 우리나라 무궁화급)1057호 1차 29호에 승차했다. 우리분임 C조는 "대만 학교4-H회의 조직운영 및 활동프로그램, 육성방법 "이라는 주제로 의견을 교환하고 요약정리 하였다. 대북(臺北)→두성(頭城 : Tou cheng)→라동(羅東 :lo tung)→동산(冬山:tung shan)→화련(花蓮)역 순서로 가기로 되어 있는데 왼쪽 차창가는 남태평양이 손에 잡힐 듯 파랗게 보이고 우측 창가는 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해안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냇물은 석회가 많아서 깨끗하지 않고 뜨물이 흘러가는 듯 했다. 대만에 와서 알게 된 일이 있는데 이 나라가 시멘트 수출국이라는 것이다. 출입문 옆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롤케익을 주었는데 라동(羅東 :lo tung)역에서 내리기 전에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좋은 대만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이 화련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10분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기사가 연화연 식당으로 안내하여 저녁밥을 먹으며 우리 연수단의 건강과 연수를 무사히 마치자고 건배를 했다. 우리의 숙소인 통사대반점(統師大飯店)611호에 짐을 풀고 화련시 지도를 1장 얻어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음식 문화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난장 터와 비슷했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다를 뿐이었다. 길가에 보도블록이 전부 대리석이다. 어디에서 이 많은 대리석을 구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2000년 8월 18일
오늘은 화련국복국민소학(花蓮國福國民小學)을 방문하여 참관하러갔다. 대만국기가 게양되어있고 교문에 들어서니 정원이 아름답게 정리되어있고 야자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공군 비행장이 옆에 있어 비행기 이,착륙시 소음이 심하여 학교창문을 2중창으로 되어 있었다. 화련시 농회 추광부(花蓮市 農會 推廣部)에 근무하는 가혜연(柯惠娟 :크어 훼이 옌)직원이 와서 우리들을 안내해주었다. 이 학교는 총원 87명 원주민과 한족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소규모학교의 통폐합 문제로 걱정인데 여기는 소규모학교라도 폐교시키지 않고 육성보호 한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옷차림이 검소하게 느껴졌다. 이유를 물어보니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이 가난해서 돈을 아끼고 저축한 일이 민족성으로 되어 화장을 안하고 다니는 동기가 되어 오늘날의 대만국민소득이 17,000불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복도에는 창문이 없고 화분이 놓여 있어서 깨끗하게 보였다. 밖에서 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바로 이곳 화련에 있는 소년들이 야구를 잘하여 유명한 세계 리틀 야구선수들이 양성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각 국에서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학교 인삼차를 안내한 가혜연(柯惠娟)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는 한국화폐 10원,50원,100원,500원짜리 동전을 1개씩주고 설악산 배지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발 3,997m높이의 태노각협곡(太魯閣峽谷)을 보기 위해 출발하였다. 길의 한쪽은 대리석면으로 정과 망치를 가지고 군인들이 1949년부터 공사를 하여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전체길이215Km를 횡단하려면 10시간 이상 걸린다고 하여 시간관계상 43Km만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로 해발 3,150m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안내자는 이 버스기사가 23년 간 이 길을 다녀 아무리 비가와도 눈을 감고라도 다닐 수 있다고 하며 그래도 자만은 금물이라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라고 했다. 태노각(太魯閣)은 태평양이 보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9km를 더 올라가 장춘사(長春 )에 도착했다. 이름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시원한 폭포수가 3개나 동시에 쏟아지며 물보라를 이루고 아름다운 뒷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 흐르는 협곡의 물소리와 매미소리는 하모니를 이루어 자연이 주는 합창곡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장춘사는 이 도로를 만들다가 희생된 군인 약 350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영혼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단체사진을 찍고 계속 올라가며 수십 길의 협곡을 내려다보니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물은 흙탕물 같았고 석회암지대가 있기 때문에 물 고기류는 살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깎아 세워 놓은 듯한 절벽을 바라보니 너무 높아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연자구(燕子口: 옌 즈 코우)는 자연동굴에 제비들이 사는 곳인데 버스에서 내려 300여m를 걸어가며 보기로 했다. 정말 장관이었다. 물소리하며 병풍같이 서있는 절벽들의 위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과거에 이 길을 만든 병사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오늘날 이 길을 구경하기 위하여 세계각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었는가? 자모교(慈母橋)를 건너가서 사방을 살펴보고 다시 구곡동(九曲洞)을 보기 위하여 버스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400여 m를 걸어 내려오며 사진을 찍고 벽을 만져 보았다. 잠시 후 대리석 공장에 들러 설명을 듣고 어제 밤 의문점이던 대리석 보도블록이 이곳에서 나온 것을 알아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이산의 이름은 옥산(玉山)인데 국영으로 운영하고 대리석을 외국에 수출하며 옥과 비취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공장의 안내자가 말하기를 이곳을 개발하면 현재 대만 인구들이 일하지 않고 420여년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재화다. 나무가 화석이 된 것과 암모나이트 조개가 화석이 된 것을 보며 정말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자연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이곳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가끔 옥과 화석작품을 사진으로 찍으며 30여명이 23년 걸려 만든 용과 옛날 장식장을 살펴보니 너무나 아름답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안내자는 진짜 옥과 가짜 옥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불빛에 비추어 보니 진품의 옥은 가운데부분에 검은 줄이 지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옥의 티라고 한다는 것이고 공기방울이 보이면 이는 진품이 아닌 인공모조품이라고 한다. 색깔은 옅고 투명한 것이 더 좋은 옥이라고 한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줄 칠보열쇠고리를 몇 개 구입했다. 그리고 오늘은 타이뻬이의 삼중시(三重市)로 돌아가는 날이다. 화련비행장으로가 1,430元(한국 돈 약 55,000원)요금을 내고 탑승했다. 60인승(승무원 포함) 비행기이기 때문에 약간의 걱정도 되었지만 아름다운 화련을 뒤로하고 이륙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하늘이 모두 파란색이고 구름 위에 떠 있는 우리들은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아름다운 태평양을 보아 마음도 한층 깨끗해졌다. 오후 3시에 타이뻬이현의 송산 비행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삼중시(三重市)에 있는 유한책임대만성 관실식물운송합작사에 찾아갔다. 과거 한국으로 초근대사(草根大使)로 왔던 임덕국(林德國)과 임태국(林泰國)형제와 그 일행들이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전국화농들의 집합체로 1,200ha는 분재를 1,500ha는 조경수를 기르고 있었다. 주로 이곳에서는 전국의 화훼운수유통,판매,판촉업,정부단체화훼홍보사업 협찬, 조경경시대회주최, 정부정보망구축, 대만의 화훼 산업에서 가장 앞서가는 단체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교육정보교육을 실시하며 전국화농들이 15만원씩 출자하여 총 자산 3,500만元을 만든 조합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350여가지 꽃 종류가 유통되며, 식용 꽃과 화수분 녹차연구를 하며, 앞으로 한국에서 철쭉꽃과 선인장을 수입하여 연구하려고 한다고 한다. 특히, 삼중시의 초근대사들은 200여명의 4건회 회원이 7조(원예,등산,정보처리,민속,음악,요리,촬영)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각 조마다 10회 이상의 작업회의를 해야하며 3회 정도는 경진활동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식충초(食蟲草)가 있었다. 다시 대만 4건회 자원봉사자 곽미아 양이 와서 삼중시 육품시장(肉品市場)으로 가서 안전모와 장화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돼지의 경매과정과 도살 및 보관 방법 등을 보여주었다. 1일 도살량이 3,000마리 정도이며 6년 전부터 소매를 하는데 1일 1만 마리를 판매한 것이 세계기록이라고 한다.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으려면 도살직전의 온도38℃의 고기를 8℃로 냉장해야하는데 1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 이후 -45℃로 보관하도록 한다고 말하며 1근에 100元(한국 돈 약4,000원)이며 경매과정과 도살과정 등을 설명하던 관계자는 우리단체가 양돈업자였다면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본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러한 과정을 보고싶어도 공개하지 않아서 매우 섭섭했다고 한다. 저녁에 도진찬청(淘珍餐廳)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2분임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대만에서의 성과를 총정리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잠시 후 한국에 왔던 초근대사들 6명과 자유시보 기자 간미주(簡美珠)가 이원갑 사무국장님을 찾아왔다.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며 대만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지난번 타이중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한국4-H후원회에서 2,000불을 모금하여 보내고 초근대사 및 기자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물어 본 일에 대하여 세계 여러 나라 중 유일하게 한국4-H후원회에서만 현금을 모금하여 대만을 도와준 것이라고 회고하며 돈의 액수에 관계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로 보고 형제애를 느끼며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특히, 自由時報 記者 간미주(簡美珠)는 홍콩에서 4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우리들을 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진정한 한국4-H후원회 이원갑사무국장님과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서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어 왔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년의 여기자였다. 저녁 늦게 까지 이야기하고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진정한 의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교훈이 되었다. 내일이면 우리방문단들도 고국으로 돌아간다. 저녁에 그동안의 무사함에 대한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루 밤만 지나면 되는데 벌써 마음은 벌써 우리 집 식탁에 가서 고추장과 된장국을 떠먹고 있었다.
2000년 8월 19일
오늘은 연수 중 유일하게 관광을 하는 날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품화상점(品華商店 :DFS)으로 가는 데 길옆에 기아의 카렌스자동차광고판이 크게 만들어 져 있었다. 이것도 우리나라 국력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했다. 면세점에 도착하여 여권을 보여주고 입장을 하였다. 이곳에서 술을 구입하면 전표만 주어 공항에서 찾도록 하는 일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었다. 나는 옆에서 통역을 해주었다. 값싸고 품질이 좋아 보이는 것을 고르는 선생님들의 모습 속에서 근검 절약하는 생활이 체질화되었음을 느끼며 무척 기뻤다. 다음은 중정 기념관으로 향했다.1975년 4월5일 장총통 서거 후 그에 대한 숭고한 경의와 영원한 그리움을 기리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고 정부에 중정(中正)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요구하여 1976년 10월30일 건립위원회구성,1977년 11월부터 공사 시작하여 1980년 3월말에 완공 1980년 4월 5일 개관하였다. 총면적은 25만평 이고 정문 大中至正의 높이가 30m이고 중산남로를 마주보며 웅장한 기세로 세워져있다. 공원의 둘레는 1,200m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으며 공원 내에는 첨앙대도 (瞻仰大道) 양편에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여의화단( 如意花壇)숲이 무성한 임음대도(林陰大道), 푸른 잔디광장, 운치 있는 오솔길과 크고 작은 동산이 있다. 동산의 남북 양쪽에는 운한지(雲漢池)와 광화지(光華池)2개의 연못이 있고 정원의 건축과 자연환경과 인문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중국 미학의「天人合一」의 정신을 지니고 있어 복잡한 도시생활 속에 있는 시민들의 아늑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중정 중정기념당은 높이가 70m이고 지붕은 뾰쪽한 팔각형이며 남색의 유리 기와로 덮여져있다. 사방의 벽은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기념당 앞의 붉은 색 화단(瞻仰大道 如意花壇)과 조화를 이루어 기념 당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고 있다. 기념 당은 2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층은 문물 전시실,영화관,중정기념도서관,시청각실 및 장총통기념실이 있다. 모두6개의 진열 실이 있는데 관람객들은 관람하는 과정에서 장총통의 일생 및 중국 근대사의 변천과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국의 8대 덕목을 보았는데 忠孝仁愛信義和平이었다. 여기에 손문이 1923년에 쓴「 養天地正氣 法古今完人」글귀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중정기념관은 사회교육기능의 적극적인 발휘와 사회교육 활동의 적극적인 시행으로 대만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휴식처이며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장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2층에는 장총통의 유필로 "윤리 , 민주, 과학"이 새겨져 있다. 양쪽의 흰색 대리석벽면에는「 생활의 목적은 인류전체의 생활을 증진시키는데 있고, 생명의 의의는 우주에서 생겨난 생명을 창조하는데 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장총통의 일생을 이끌어온 동력이자 이상이다. 높이 16m,무게 75톤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2개의 문은 매일 아침9시에 열리고 오후5시에 닫힌다. 그러나 공원은 24시간 개방하여 휴식공간으로사용된다고 했다. 오늘은 마침 장총통의 동상 앞에서 군인들이 제를 올리는 시간이어서 살펴보았다. 한국의 의장대와 비슷하고 경건하게 의전행사를 치렀다. 밖에 나오다 보니 대만에서 보기 힘든 한 수녀를 만났는데 세례명은 젬마이었다. 몇 마디 나누며 한국에 유명한 성당이 많은데 한 번 오라고 했다. 아직 외국은 한 번도 나가본 일이 없다고 하며 기회가 주어지만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 방문단은 기념사진을 찍고 대만에서 연수 중 마지막 점심을 사천 요리로 했다. 점심을 마치고 12시 30분에 국립고궁박물관관광을 하기로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가며 산에 있는 아파트를 보았다. 능선을 넘지 않아 산의 아름다운 선이 그대로 살아 있고 자연환경과 어울려 건설하도록 한 한가지 일을 보아도 환경보전활동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안내자에게 대만에 한국가수 중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는지 질문을 했다." 클론 "이 있다고 하며 요즈음 대만의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입장하려면 먼저 카메라를 맡기고 입장해야한다. 입장료는 80元(한국돈 3,200원)이고 단체 20명 이상은 65元이라고 한다. 입장을 하여 1,2,3층을 관람하기로 했다. 처음 商代(은나라)에 처음 화폐가 등장하고 상인이 생김 9층 상아탑을 보았는데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워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는 걸작품이었다. 서태후가 사용하던 찬합은 상아를 얇게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유명하고 1,000년 전 벼루와 연적(宋代)을 보고 2,000년 전 漢代벼루를 보고 소동파(蘇軾:소식)의 벼룻돌을 보며 그의 글 쓰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당3채도기에서 낙타가 보였는데 이는 현장법사가 실크로드에서 낙타를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당삼채도마(唐三彩陶馬)는 AD618-907년에 만들어진 걸작품으로 뽑힌다고 한다.
당사여용(唐仕女俑)은 AD618-907년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든 것인데 양귀비의 모습도 이렇게 생기지 않았나 학자들은 이야기한다고 한다. 볼이 두툼하고 몸은 통통한 편인데 현대의 미인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신라시대 기마 인물형 토기와 금관을 사진으로 전시한 것을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장쩌스가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후퇴할 때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져왔는지 1년 동안 매일 매일 전시품을 바꾸어 전시해도 다할 수 없다고 한다. 오후6시5분 비행기를 타려면 지금 출발해야한다. 지금까지 자원 봉사자로 수고한 곽미아 양이 우리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풍경(風磬)과 소시지를 간식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며칠 간 수고한 그의 눈빛 속에서 대만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오후 5시 35분에 비행장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안내자 담자붕과 인사를 나눈 후 CX420편으로 6시 15분에 이륙하였다. 지금 한국시간은 7시 5분이다. 1시간만큼 젊어졌었는데 빨리 늙어 가는 곳으로 시계시침과 분침을 조절하였다. 하늘에서 본 대만은 태평양에 떠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았다. 하지만 우리 방문단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외롭지만 농심(農心)은 언제나 변치 않는다는 진리를 ... 오후 9시 15분에 김포공항이 눈에 들어왔다. 외국에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우리나라보다 자연의 혜택을 보는 나라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오후 10시 입국수속을 마치고 해단식을 갖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밤 열차를 타고 귀향하며 대만사람들이 진정으로 우리방문단들에게 베풀어준 호의를 생각하며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번 가슴이 뭉클해옴을 느꼈다. 우리4-H교사방문단 모두는 감사한 마음을 대만에 남겨 놓고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돌아 왔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한국4-H후원회 및 농림부,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원에 감사 드리며 우리나라 4-H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리라 다짐해 본다.
대만의 4건회여 영원 하라!
한국4-H여 영원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