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캄보디아는 어떤 나라인가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의 나라, 캄보디아는 아픈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과거 아물었던 깊은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는 않고 있다. 아직 가난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많은 부자가 있고 짚과 대나무로 만들어진 원시적인 집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적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도시에 세워지고 있다. 캄보디아를 한국의 50년대 혹은 60년대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60년대 한국에는 40층 건물도, 현대식 백화점도 없었다. 60년대에는 이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발전한 나라여서 실제로 68년도에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원조한 나라이다.
캄보디아는 ‘선교’적으로 열린 나라이지만 동시에 닫힌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캄보디아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3대 슬로건이 있다. ‘쁘러떼(나라)’ ‘종교(싸쓰나)’ ‘왕(쁘레 모하크쌋)’ 이다. 공문서 머리에는 이것을 표기한다. 5월 13일은 왕의 생일이어서 3일간 국가 공휴일이다. 여기서 종교란 물론 불교를 말하고 불교가 국교이다. 모든 종교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들어온’ 종교이다. 이 3대 슬로건은 이 나라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국가 이념이어서 기독교나 다른 소수 종교의 입지를 얼마든지 약화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는 것 같은데 성장이 느리고, 보이지 않는 종교적 문화적 저항이 있고 동시에 세속주의가 강하여 많은 젊은이들은 영적인 가치보다도 돈을 추구한다. 이 나라 인구의 70%가 23세 미만의 젊은 층이다. 이들에게 기독교가 얼마나 파고 들것인지가 세계 기독교 선교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영국에서 최근 출판 된 ‘세계기독교지도’에 앞으로 50년 내에 캄보디아와 북한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 성장 추세에 비추어 앞으로도 성장할 것으로 예측한 것 같다. 캄보디아에는 많은 NGO와 선교사들이 있으나 수적으로 단연 한국 선교사가 제일 많고 교회 개척에도 가장 활발하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교회 선교의 책임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캄보디아 역사.
‘캄보디아’란 명칭은 이 나라의 첫 임금인 ‘캄부자’에서 왔다고 한다. 이 나라의 첫 왕국인 ‘푸난’(푸난은 중국어의 扶南, 영어로 Funan, 캄보디아로는 Phnon)왕국의 왕 이름이 ‘깜부’인데 어미에 ‘자’를 붙였다. 여기서 ‘자’(ja)란 탄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른 해석은 ‘캄부’라는 왕의 이름에 나라를 의미하는 -ja를 캄부디아가 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 캄푸치아, 크메르는 발음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하다.(현지인들은 캄보디아란 말을 쓰지 않고 ‘깜뿌찌아’라 발음한다. 한국을 ‘고려’에서 차음하여 ‘코리아’라고 하듯이 ‘캄보디아’는 서양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 나라에는 BC 2,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오래 전에 몬크메르(Mon Khmer: 지금 현지인들은 ‘먼크메르’라고 함)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 첫 왕국인 푸난은 AD 1세기 경 ‘앙코르 보레이’를 수도로 하였는데, 앙코르 보레이는 ‘따께오’ 주 ‘뚤레 바티’(한국의 ‘군’ 정도에 해당)로서 프놈펜에서 직선거리로 동남쪽 약 50킬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동남아 도시들은 해상무역을 위주로 발전하였는데, 당시 푸난은 중국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3세기 중국의 역사서에 이 나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많은 학자들은 푸난 왕국이 3~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말하나 최근 프놈펜 대학 연구소는 1세기로 발표하였다. 푸난 왕국은 캄보디아의 모든 영토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소도시 국가 형태로 소도시 국가끼리 전쟁을 하였다. 푸난의 역사에 대하여서 ‘크메르’ 언어로 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중국인이 기록한 역사 자료에 근거한다. 또 최근에 발견 된 비석이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푸난 왕국의 건국도 신화적인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이 나라 역시 인도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신화의 정확한 구분이 없다. 이것은 동양 문화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본다. 지역 연구나 국가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국제정치학자들이 많이 하는데 그들은 캄보디아도 신화적인 이야기는 있으나 기록된 역사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한다.
푸난 왕국의 시작은 인도와 관련된 신화로 시작한다. 캄보디아 전문가인 호주출신의 국제정치학자 ‘데이빗 찬들러’가 전하는 전설을 인용하면, 이 지역에서 출생한 용의 모습을 한 공주가 있었다. 공주가 바다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마침 인도에서 온 ‘카운디나’라는 승려가 마술의 화살로 공주의 배를 맞추었다. 놀란 공주가 결국 인도에서 온 그 나그네와 결혼하게 된다. 공주의 아버지는 사위를 위하여 땅을 덮은 바닷물을 마시어 사위를 위한 나라의 땅을 만들었고 수도를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캄보디아’라고 하였다.
다른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지의 신으로 숭배되는 *나가(Naga) 신의 딸인 ‘소마’라는 여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서쪽(인도 혹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브라만(혹은 승려) ‘카운디나’가 찾아온다. 그는 영들을 숭배하였는데 꿈속에서 만난 신인의 계시로 신궁을 얻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소마의 땅에 도달, 소마의 군대와 전쟁을 한다. 카운디나가 신궁으로 소마의 배를 맞추자 소마는 놀라서 항복하고 그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푸난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신화의 공통된 특징은 인도인이 이 나라에 와서 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푸난 왕국 이후 왕들 이름에 바르만(Varman)이 붙는데 바르만은 *‘산스크리트’어로 ‘보호자’란 뜻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만든 역사 영상물은 달리 말한다. 나가(토지신)라는 뱀 신에서 출생한 ‘사우마’라는 공주가 다른 지역에서 온 왕자와 결혼하여 푸난 왕국을 Phnom에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이것은 프놈펜 대학 연구와 같은 입장이다. 프놈펜 대학연구 논문도 캄보디아와 인도의 접촉을 초기부터가 아닌 AD 3세기부터로 해석한다. 아마도 이것은 인도의 영향을 축소화 하려는 자주정신의 발로로 본다. 다른 사료의 신화는 말레이시아일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미 당시 말레이시아도 인도의 문화권에 있었다. 프놈펜 도시 건설도 불교와 관련된 전설이 거의 정설이 되고 있다. 한 불교도 노 여승이 ‘메콩’강에 떠내려 오는 나무 상자 안에서 다섯 부처상을 발견하여 그것을 모실 절을 지었는데 그 언덕을 중심으로 프놈펜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프놈펜 중심부에 있는 유명한 ‘왓프놈(프놈 사원)’이다. 그러나 푸난 왕국을 건설한 ‘몬크메르’인들이 지금의 캄보디안이 아니라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그들을 주로 중국인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의 골격과 피부색은 아무리 보아도 중국인과는 다르다.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계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티베트’에서 내려온 인종 혹은 남방계의 *‘오스네트리안’으로 해석한다.(다음호 계속)
캄보디아 기독교 선교역사연구
전호진(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 총장)
- 출처: 캄보디아 크리스찬 타임즈(제440호)
*옮긴이 주:
나가(Naga) [인도] 인도의 용. ‘카드루’의 아들들. 뱀의 꼬리, 코브라의 목,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면 밑의 낙원에서 살며 춤과 노래로 매일 지샌다. 빛나는 보석들이 박힌 궁전이 그들의 집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이며 사원 입구에 수호신으로 서 있다.
Naga '뱀'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語.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생기기 以前부터 절대로 죽지 않는 뱀 神, 또는 龍神으로 숭배되었죠.
힌두교 神話와 佛敎에서 나오는 神的인 存在를 말합니다. 半은 인간, 半은 뱀인 모습을 하고 있거나
머리가 5개~7개 또는 9개가 달린 완전한 뱀의 형상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Naga들은 값비싼 보석과 아름다운 장식물로 치장된 궁전이 있는 ‘나가로카’ 또는 ‘파탈라로카’ 라는
地下王國에 살며, 대체로 江, 湖水, 바다, 그리고 우물等 물과 관련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Naga로는 힌두교 創造 神話에 나오는 뱀으로 우주의 大洋에 누워, 그 위에 Vishnu-Narayana를
지지하는 Sesa 또는 Ananta라는 Naga,
‘앙코르 왓’ 부조 중 유해교반에 나오는 우주의 乳海를 휘젓는데 사용되었던 Naga Vasuki,
뱀들의 우두머리 Taksaka라는 Naga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깨달은 장소의 인근 연못(동굴)에 살았으며, 부처가 깨달은 뒤 최초의 공양을 올리고,
불교에서 護法善神의 하나인, Muchalinda라는 Naga가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7일 동안 자기의 몸을 또아리를 틀어 비를 맞지 않게 해준 유명한 Naga입니다.
한국의 龍王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고, 동남아시아의 태국, 특히 앙코르 유적에서, 神들이 살고 있는 天界와 인간들의 세상인 下界를 연결하는 무지개 다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참배도로의 난간 등에 많은 조각상이 이용되었습니다.
- 출처: http://kr.blog.yahoo.com/frontiercam/186
산스크리트어(संस्कृता saṃskṛtā)는 인도의 옛 언어로,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의 경전이 이 언어로 되어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범어(梵語, 브라만에서 왔음)라고도 한다. 사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아직도 학교에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일부 브라만은 산스크리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브라만 [婆羅門, Brahman] : 힌두 바르나 제도에 따르면 브라만은 성직자 계층으로 '영감을 받은(inspired)'이란 의미인 비프라(Vipra) 또는 '두 번 태어난'이란 의미로 드비자(Dvija)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브라민(Brahmin)으로 발음된다.
브라만 공동체의 역사는 베다교, 즉 브라만교의 시작과 함께 출현했다. 이들은 베다 문헌을 근간으로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믿는 종교 자체가 브라만의 전통이 되었고, 베다 문헌이 널리 읽혀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만은 베다 문헌에 의거 진정한 해탈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수행법을 따랐다. 이들은 유일신 사상에 의거했는데 모든 세상이 행복해 질 것이며 세계는 하나라는 원리에 입각했다. 브라만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채식주의자들이다.
역사적으로 브라만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학자, 전사, 사업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일부는 '브라마크샤트리야'라고 하여 전사와 통치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브라만들은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 자이니교, 시크교, 이슬람교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섰다.
193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브라만 계층은 전체 인구의 4.32%였고, 지역별로 우따르 프라데쉬가 9%로 가장 높았던 반면, 남부 따밀 나두와 안드라 프라데쉬가 각각 3%와 2%로 가장 낮은 지역이었다. 현재에도 전국적으로 약 2천개 이상의 브라만 공동체가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크게 남부의 판차 드라비다 브라만(Pancha Dravida Brahmin)과 북부의 판차 가우다 브라만(Pancha Gauda Brahmin)으로 나눠진다.
대표적인 브라만 인물로는 초대 총리였던 네루를 포함하여 노벨상 수상자인 타고르 등이 있다.
오스네트리안: ??? (본문에 영문 표기가 없어서 자료 검색이 어렵습니다.) >>> ‘오스트리안’의 오타가 아닐런지...(-_-;)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_)
@-@ 본문 중 일부분은 이해하기 편하도록 약간의 수정/조정/삭첨 하였습니다. @-@
첫댓글 캄보디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현지에서 발행되는 [캄보디아 크리스찬 타임즈]와 [뉴스브리핑 캄보디아] 등 간행지 일부를 발췌 하거나 현지 교민 웹 싸이트의 글들 중 적당한 내용을 옮겨 올리고자 합니다. 혹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