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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승용차 1호, “포니”생산 개시
한국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는 오늘날 한국이 자동차 생산국 대열에서 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시금석이 되었다. 1973년부터 현대자동차의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한 기본계획에 의해 조성된 울산공장에서 1975년 12월 1일부터 생산에 들어간 ‘포니’는 최고속도 140km, 배기량 1238cc, 당시 가격은 228만 9000원이었다. 이탈리아의 명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날렵한 페스트백 스타일의 포니는 첫 생산 50대를 시작으로 1976년 국내 첫 해외 수출을 하는 한편 국내에 본격적인 마이카시대의 문을 연 국산승용차 1호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조 태조 한양으로 천도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한 이래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자 수도를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길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개경은 고려 왕조의 수도였으며 풍수지리설로 보아도 지덕(地德)이 이미 쇠퇴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계룡산, 모악(母岳, 현재 신촌동ㆍ연희동 일대)등의 후보지를 살펴본 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는 상신(上申)에 따라 1394년 9월 27일 (음력 8월 24일)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한양은 도성(都城)과 성밖 10리까지의 지역을 경계로 1395년에 경복궁,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을 건설하고 북은 백악(白岳), 동은 낙산(駱山), 남은 남산(南山), 서는 인왕산(仁旺山)을 연경하는 도성을 축조하였으며 출입문으로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세웠다. 오늘날 서울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ㆍ 태평양시대를 주도하는 국제도시로서 도약하였다.
수원성곽 복원
조선조 성곽 건축 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정조대왕의 애절한 효심이 서려있는 수원성(水原城)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심과 개혁 의지로 축조한 성이다. 원래의 명칭은 `화성(華城)`이며, 1794년에 착공 2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18세기 실학자들의 지혜가 결집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거중기, 녹로, 활차 등 근대과학적인 장비를 개발·사용하여 축성한 수원성곽은 중국, 일본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수원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 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인돌 유적지 세계유산으로 등록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지난 2000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강화·화순·고창의 고인돌 유적은 밀집분포도나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장례 및 의식유적을 만들어냈던 선사시대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한국독립 보장, 카이로선언 발표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1943년 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연합국 지도자간의 회담이 열렸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과 더불어 전황이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자 향후 전쟁 수행과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연합군 정상회담이 이루어 진 것이다.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장제스 3국 정상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일본이 점령한 영토 문제에 대한 회담을 가졌고 11월 27일 특별조항을 포함한 다음의 주요 합의 사항인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① 미국·영국·중국 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대해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한다. ②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③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3국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모든 영토를 박탈함과 동시에 만주 ·타이완[臺灣] ·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驅逐)한다’ ⑤[특별조항]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3국 정상이 합의 서명하고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의 대일본 정책의 확고한 표현인 동시에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는 선언이었으며 훗날 카이로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위성DMB, 지상파 DMB 본방송 개시
2005년 5월 1일, 한국은 일본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성 DMB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지상파 DMB는 2005년 12월 1일 본방송을 개시하여, 현재 KBS, MBC, SBS, YTN, 한국 DMB, 유원미디어 등 6개 사업자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무인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 발사
1996년 12월 4일 발사되어 1997년 7월 4일 약 1억 9100만 km를 비행한 끝에 화성에 도착한 미국의 무인 화성탐사선인 패스파인더호는 우주 로켓 발사 역사상 최초로 착륙에 에어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활동기간은 1화성년(687일)이며, 내부에는 6개의 바퀴가 달린 탐사 로봇 소저너(Sojourner)가 탑재되어 있다. 소저너의 활동기간은 당초 1주일로 예상하였으나 6주 이상 활동하였다. 이 소저너가 탐사활동을 할 때 패스파인더는 초미니 기지 겸 지상관측소 역할을 하게되어 있다. 즉 지구로부터 받은 명령을 소저너에 전달하며, 소저너로부터 탐사자료를 전송받아 지구로 전송하도록 되어 있다. 활동기간 중 1만 장 이상의 화성표면사진과 4백만 가지 이상의 화성 대기, 기상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약 두 달 가량 활동하면서 착륙 지점인 아레스밸리스 평원이 3백만 년 전쯤 발생한 홍수로 인하여 침식작용을 받은 사실 을 통해 물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소저너의 화학분석을 통하여 규산염을 다량 함유한 암석과 유황이 풍부한 암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과거 화산활동 또는 화성의 지각변동 가능성 예측을 제시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발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이 일본의 힘을 이용해 청에 의존하려는 민씨 중심의 세력을 물리치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이른바 `갑신정변`이었다. 본래는 이날 열린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안국동 별궁에 방화한 후 척신들이 왕이 있는 궁궐로 급히 돌아갈 때에 이들을 모두 암살할 참이었다. 그러나 방화 계획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은 즉시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하며, 일본군의 호위를 청해 경우궁으로 국왕을 모셨다. 이들은 이어 궁으로 들어오는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등 사대당 일파를 살해하고, 다음날인 5일에 각국 공사-영사들에게 신정권의 성립을 통고했고 6일에는 새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원세개가 이끄는 2천명의 청국군이 출동해 일본군을 패퇴시키자 정변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군에 의해 피살됐다. 이로 인해 청-일 양국의 한국쟁탈전이 더욱 격화됐다.
'독립신문' 4년 만에 폐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한국역사상 최초로 인쇄된 한글 전용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이 창간 4년만인 1899년 12월 4일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한글전용으로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 신문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1896년 4월 7일 창간,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이 발행됐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시대상을 담아내고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민간신문이었으나 정부의 탄압과 수구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고 핵심인물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이날 정부가 서재필에게 4천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했고 이날부터 독립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언론계는 1957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탄생을 기념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선포
국민교육헌장이란, 국민의 윤리와 정신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1968년 12월 5일 대통령에 의하여 반포된 헌장을 말한다.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된 이유는 첫째, 조상의 훌륭한 전통과 유산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 물량적 발전에 비하여 정신적 가치관 사이의 조화로운 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셋째, 국민의 국가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민족 주체성이 결핍되어 있으며, 넷째, 국민교육의 지표가 불분명하여 학교교육에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시대적 ·환경적 여건의 불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구현을 다짐하기 위해 제정했던 법정기념일인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은 12월 5일이었다. 1968년 11월 26일, 여야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국민교육헌장에 동의한 뒤, 같은 해 12월 5일 제정/공포를 거쳐 1969년부터 공포한 날을 기념해 매년 기념행사를 실시하다가 1973년 3월,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정부 주관 기념일로 지정해 행사를 치러왔다. 그 이후, 국민교육헌장이 박정희 정권의 반공 독재교육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초·중·고교 교과서에서도 삭제되는 등 국민의 의식이 바뀌어가고 있어 2003년 11월 27일 20차 개정(대통령령 제18143호) 때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의 애국가(愛國歌)를 작곡한 안익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명성을 높인 안익태(安益泰, 1906.12.5~1965.9.16) 는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 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구니타치 음악 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미국으로 유학간 뒤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로 연주자로 입단해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악단원이 되었다. 또한 1934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1936년 우리 나라 국가인 [애국가] 를 작곡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빈 필, 태를린 필, 로마 교향악단, 부다페스행 교향악단 등 200여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일컬어지며, 대표작으로는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등이 있다. 1957년 문화포상을 수상하였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우정당국은 밀레니엄시리즈 열 번째 묶음으로 지난 2001년 4월 안익태선생과 그의 악보를 담은 우표를 발행한 바 있다.
미키마우스의 아빠, 만화영화 제작자 월트디즈니
미키마우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의 만화영화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어린이의 우상이 된 디즈니(Walt Disney, 1901.12.5~1966.12.15)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져 그의 나이 겨우 7살이었을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8년 창조된 미키마우스는 그해 11월 18일 개봉된 세계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윌리, Steamboat Willie'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미키의 '어리석은 교향악단, Silly Symphony'의 제작기간 동안에 '테크니컬러'가 애니메이션에 도입되기도 하였다. 평생 32번이라는 놀라운 아카데미상 수상 경력의 월트는 1932년에 '꽃과 나무들, Flowers and Trees'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그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1937년 12월 21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로스앤젤레스의 케세이 서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백 5십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으로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 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만화영화 업계의 선구자이고 혁신가이며, 이 세상에 알려진 가장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 중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그는 그의 직원들과 함께 전세계 각국으로부터 일생동안 48개의 아카데미상과 7개의 에미상을 포함하는 950개가 넘는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프랑스 新인상주의 화가, 쇠라
쇠라는 샹파뉴 출신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교육을 받은 그는 파리에서 미술의 기초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879년 군에 입대한 쇠라는 풍경화를 자주 그렸고 전역후 루브르박물관에서 밀레의 그림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1884년 쇠라의 그림이 살롱의 심사위원들에게 거절되자 '독립미술가협회'의 창설위원으로 가담했고 그해 6월에는 이 협회 전시인 앙데팡당전에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출품했다. 색체에 대한 끊임없는 과학적 탐구에 집중하였던 쇠라는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인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5)’를 발표하였고 이후 쇠라의 작품들은 인상파가 이룩한 색체에 대한 원리들은 과학적으로 체계화 시키고 화면에 대한 조형적 질서를 확립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쇠라가 이룩한 업적은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어 탄생한 인상파의 화풍을 더욱 발전시켜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실험 성공
미국 시카고대 실험원자로에서 우라늄 핵분열의 연쇄반응 실험이 성공했다.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페르미(Fermi, Enrico, 1901~1954)의 지도로 행해진 이 지속적 연쇄반응장치의 최대출력은 0.5w에 불과했지만 이 성공은 원자력 이용의 개막을 의미했다. 11월 중순 시카고대 운동장에 실험원자로가 완성되자 천연우라늄과 흑연이 격자모양으로 쌓아올려졌다. 1942년 12월 2일 오후 2시20분 우라늄과 흑연더미는 57층 높이가 됐고 원자로가 마침내 임계(臨界)에 달하자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실현됐다. 실험을 지휘한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계기로 미국으로 이주했고 제2차대전이 발발하자 원폭개발계획(맨해튼계획)에 참여, 원폭제조 연구에 몰두했다.
MBC(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개국
문화방송으로 불리는 MBC가 1961년 12월 2일 라디오 방송국으로 개국했으며 MBC TV는 1969년 8월 8일에 개국했다. 호출부호는 HLKV-TV, 채널은 11이며 19개 지방국이 있다. MBC 라디오는 음악 FM과 표준 FM으로 나뉘며 하루 24시간 방송한다. MBC 라디오 FM은 1971년 9월 19일에 호출부호 HLKV-FM, 출력 1kW로 개국했으며, 1983년 여의도 스튜디오를 준공하면서 출력을 10kWh로 증강했다. 1974년에 경향신문사를 통합하여 문화방송·경향신문(주)가 되었다가 1980년 초 언론기본법의 시행으로 경향신문사와 분리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 컬러 방송을 개시했다. 1986년 4월 29일 여의도 사옥으로 통합 이전하고 1987년 12월 28일 표준 FM을 개국했으며, 1997년 MBC DSNG 네트워크(M-SAt)를 완전 개통했다. 2000년 7월부터 인터넷을 이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터넷 MBC를 운영하고, 2005년 DMB 본방송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소설가 트웨인
트웨인은 미조리 주 플로리다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태어난 날 핼리혜성이 지구를 지나갔으며 훗날 트웨인은 이를 들어 ‘자신은 핼리해성과 함께 지구에 왔으니 떠날 때에도 핼리혜성과 함께 갈 것이다’하였는데 실제로 그가 죽던 해에 75년 만에 핼리혜성이 지구를 다시 지나가 그 공언은 지켜졌다고 한다. 여섯 형제의 5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집안이 파산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받으며 자랐다. 트웨인이 4살 때 일가는 50 km 정도 떨어진 미조리주 한니발의 미시시피 강가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그곳은 수많은 배의 교통으로 인하여 뉴올리안즈와 센트루이스에 사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이때 그가 살던 마을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훗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많은 부채를 남겨놓고 1847년에 사망하였으며 큰형은 신문사를 경영하였다. 트웨인은 1857년 증기선의 수로안내인 견습공을 통해 1858년 수로 안내인으로 일하였으며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일을 그만두고 북군에 지원 소위로 종군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기자생활과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아일랜드의 풍자작가 스위프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6)를 비롯하여, 풍자집, 일기적인 서간집 등을 남겼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한 후 정치인이었던 W.템플의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스위프트(Swift, Jonathan, 1667~1745)는 이 시기 훗날 풍자작가로서 대부분의 영감을 얻었다. 1694년부터 영국교회의 성직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뛰어난 논객으로서 정치에 관여하여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정적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스웨덴의 발명가 달렌
무인등대의 자동조명을 가능하게 하는 폭발 위험이 없는 가스 어큐뮬레이터의 자동조절기를 발명하여 191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예테보리의 공업학교와 취리히공과대학에서 수학한 달렌(Dalen, Nils, 1869~1937)은 열기 터빈, 착유기 등의 기계를 발명하였으며 1906년 가스 어큐뮬레이터 회사의 기사장을 지냈다. 노벨상 수상 이듬해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나 죽는 날까지 실험을 계속하였다.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