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반세기 넘는 역사를 간직한 동네가 있다. 성북구 정릉 3동, ‘정든마을’이 그곳이다.
‘정든마을’은 1950년대 지어진 부흥주택과 70년대 지어진 한옥이 공존하는 곳이다. 부흥주택은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을 목적으로 정부가 주도해 지은 일종의 공공주택으로, 2층짜리 집 두 채가 한 집처럼 붙어 있는 구조다. 아파트 단지가 될 뻔했던 정릉 3동은 지난 2012년, 부흥주택과 한옥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도시재생 지역으로 선정됐다. ‘마을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공공에서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개인이 주택을 리모델링하여 주거환경을 보전·정비·개량하는’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이후 주민 모임이 마을 가꾸기에 나섰고, 2년 전엔 주민들의 사랑방인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도 문을 열었다. 시설의 부지 매입비용과 건축비는 서울시가 지원했지만, 공간 관리비 등 운영비는 주민이 직접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든마을’은 주민 모임이 주체가 된 ‘마을공동체’의 모범 사례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초기부터 앞장서 활동해 온 정든마을 주민공동체운영회 대표 김정선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정든마을 주민공동체운영회 대표 김정선 씨
인터뷰는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을 따라 곧게 뻗은 골목길을 들어가면 나타나는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에서 진행됐다.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은 지난 2017년 8월 14일 문을 열었다. 시설을 세우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김정선 씨는 “시설을 세우기 전 골목을 보수하고, 꽃을 심고 담장을 꾸미는 등 환경 개선 활동이 먼저 이뤄졌다”며 시설의 역사를 설명했다.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정든정’과 마을 표지석도 그때 세워졌다.
오래된 부흥주택을 고쳐 사용하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은 안전진단에서 문제가 발견되며 신축으로 변경됐다. 설계에만 20차례가 넘는 회의가 필요했다. 김정선 대표는 “회의는 의견 불일치를 확인하고 논쟁하는 과정”이라면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자주 필요하다”고 했다. 느리고, 또 힘들기까지 한 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보다 많은 사람이 만족할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
주민들의 의견이 설계에 반영된 덕에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은 작지만 알차게 구성돼있다. 면적은 109㎡(약 33평) 정도에 불과하지만, 3층 건물에 공간만 6개나 된다. 1층엔 어르신 사랑방과 커뮤니티 공간이 있고, 2층과 3층에 걸쳐 무인 카페와 사무실, 도서관이 있다. 다락방은 아이들의 놀이 공간으로 활용된다. 김정선 씨는 “천장의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내부가 통유리로 이뤄져 있어 커튼을 걷으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며, “건물 작아 관리비가 적게 나오고, 공간이 알차 다른 마을에서 탐방도 많이 온다”고 설명했다.
‘정든마을’의 활동은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시설을 활용한 프로그램만 해도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 활동과 틈새 돌봄, 어르신들을 위한 실버체조와 수묵화 강좌, 월 1회 영화 상영회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목요일엔 주민공동체 운영회의 정례회의가 열린다. 마을 가꾸기 활동도 현재진행형이다. 매달 1일엔 마을 청소가 이뤄지고 있고 지난 6월엔 벽화도 다시 그렸다. 마을밥상을 열어 주민들과 먹거리를 나누고 마을 장터나 축제에 참여해 팝콘과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기도 한다. 지난 5월엔 정릉3동 주민들이 힘을 합쳐 개최한 정릉천 개울장에 참가해 20여만 원의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수익은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의 유지관리비로 사용된다.
축제에 참여해 판콘과 아이스크림을 판매 중인 모습
‘정든마을 주민공동체’는 주민들이 조성한 마을기금으로 시설 유지비와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장터 참여 수익 외에도 시설 대관 및 마을 탐방비, 대표의 강연료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김정선 씨는 이러한 수익 활동에 대해 “마을 기금 마련과 더불어 주민의 참여를 촉진해 공동체의 활동성을 높이려는데 목적이 있다”면서 “명분을 가지고 자주 만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마을공동체의 필수 요소”라고 했다.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정선 씨는 ‘소통’과 ‘참여 활성화’를 꼽았다. 둘 다 늘 어렵지만 가장 보람된 일이고 대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다. 김정선 씨는 “대표가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 공동체는 발전할 수 없다”면서, 외부 활동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서울시 전체 마을 대표들의 모임과 같은 각종 협의회 회의 등에 참여해 마을을 알리고 운영에 관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며 마을 사랑이 더 깊어졌다는 김정선 씨는 곧 마을 탐방 지도가 완성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소설가 박경리 씨가 토지 3부작까지 쓴 곳이 바로 여기 정든마을 입니다.”,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탐방프로그램을 만들고, 정든마을의 역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예요.” 마을 탐방 지도 제작에는 부흥주택이 하나둘 다가구 주택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 앞에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문제의식도 반영됐다.
지난 9월 2일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에서는 8월이었던 개관 2주년을 축하하는 조촐한 마을밥상 자리가 있었다. 40여 명이 참석해 비빔밥을 나누며 마음도 함께 나눴다. 예부터 담장이 낮아 이웃 간의 정이 넘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처럼, ‘정든마을’의 풍경에는 키가 작은 집과 오래된 골목, 이웃 간의 만남이 있다.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든마을’의 정겨운 풍경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희망한다.
정든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 개관 2주년 마을밥상 자리
[출처] 역사와 현재가 더불어 정다운 ‘정든마을’|작성자 서울마을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