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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유적답사 자료집 2010. 6. 20 (日)
국내 주자 유적지를 찾아서-전남 곡성, 화순지역
1. 谷城鄕校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곡성읍 읍내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성출봉 기슭의 교촌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규모는 큰 편이며, 조선시대인 1570년(선조 3)에 세워졌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수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서쪽 4리에 있다고 하며, 생원·진사들의 강학소였던 사마재가 향교와 별도로 1537년(중종 32)에 세워졌다. 이로써 중종 이전에 향교가 세워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뒤 1597년(선조 30)에는 정유재란 때 파괴된 곡성현이 남원부에 합속되자 향교의 기능이 정지되기도 하였다.
1607년에 다시 곡성현이 복현되어 이전의 모습을 찾았고, 1619년에 향교를 다시 고쳐 임진왜란의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하였다. 이어 1648년에 관찰사, 현감, 곡성 유림들의 노력으로 향교를 중건하였고, 1685년(숙종 11)에도 중수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내삼문, 전사청, 교직사, 문간채(고사) 등이 있으며, 전학후묘의 형태로 놓여 있다.
대성전은 전퇴를 두지 않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양박공면에 바람판을 두었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장대석 1벌대 쌓기로 된 기단 위에는 막돌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를 놓고 창방으로 결구시켰다. 창방 위로는 기둥 사이마다 꽃받침을 1구씩 두었고, 공포는 행공담차를 두어 외부로 1출목을 낸 2익공식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5량 형식이며, 창호는 전면 중앙 3칸은 쌍여닫이 빗살문이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은 전면에만 판생문과 세로 판벽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개방하였으며 2층은 장마루로 된 대청이다. 구조는 5량집이며 공포는 쇠서를 내지 않은 무익공식이다.
2. 道東廟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시대인 1676년(숙종 2)에 안호(安皓)가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시조인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과 성리학의 창시자인 송나라의 주자(朱子: 1130∼1200)를 모시기 위하여 오곡면승법리에 묘각을 건립하고 안향의 영정 진상을 이안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 묘각을 도동사라고 하였다.
그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2년 도내의 유림들과 안씨종문(安氏宗門)이 협의하여 지금의 자리인 오지리로 옮기고 주자를 북벽으로 하고 안향을 동벽으로 하여 복설하였다.
도동묘에 모셔진 안향은 고려시대의 학자로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으며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주자는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한 유교 학자이다.
현재 사당에는 주자와 안향의 초상화(120cm×80cm)와 용의 모습을 나타낸 향로, 술잔 등이 있고, 지방의 유림들이 해마다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지낸다.
3. 谷城道東廟安珦影幀
곡성 도동묘에 소장되어 있다.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 영정(국보 제111호)을 이모한 작품으로 1660년에 제작하였다. 후손 안응창이 영정 모사를 주관하였는데, 기존 영정에 당대 거유들의 찬문을 덧붙여 후손으로서의 자긍심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영정은 붉은색 옷에 검은 복두를 쓴 모습의 상반신만 묘사하였는데, 얼굴을 악간 돌려 왼쪽을 향한 우안 구분면으로 의습의 필치가 유약하고 군데군데 끊긴 흔적이 있다.
영정 윗부분에는 김상헌(1570∼1652), 신익성(1588∼1644), 이경석(1595∼1671), 홍서봉(1572∼1645) 등 당대 대표적인 문인들의 찬문이 덧붙여져 있다. 이 찬문들은 영정을 모사하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앞서 지은 찬문들을 영정을 모사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44호로 지정되었으며, 순흥 안씨오지리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초명은 유(裕),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를 공부하고 돌아와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널리 제자를 양성하였다.
4. 谷城道東廟─晦軒實記木板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오곡면 오지리 전동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도동묘(전라남도문화재자료 29)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와 회헌 안향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사당엔 주자와 안향의 초상화(120×180cm)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향토술잔 등이 있다.
《회헌실기》 목판은 여기에 보관된 것을 비롯하여 전후 4차에 걸쳐 간행되었다. 현재 목판은 초각판 47판과 중각판 32판이다. 권수에는 서문이 있고 이어 목록이 있는데, 목록제(目錄題)는 ‘문성공실기’로 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유상(遺像)이 보인다. 초각과 중각은 자체의 단정함에서 차이가 크지만, 목판의 특징은 대체로 초각본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목판의 크기는 가로 53.5㎝, 세로 23㎝이다. 반곽의 크기는 가로 17㎝, 세로 22.5㎝이다. 반면은 10행, 한 행에 22자씩 있다. 판심부에는 어미가 없고, ‘문성공실기’라는 서명과 장수 표시만 보인다. 목판은 재질이 가벼운 목재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판 과정에서 판재를 얇게 재단하여 매우 가볍다.
마구리를 만들 때에는 대개 중앙부에 구멍을 파내는데, 여기에서는 홈을 내어 끼우게 되어 있다. 판각시기는 초각판은 안경석이 발문을 지은 1766년과 같은 해에 착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각판은 조사과정에서 안중섭의 생존시 을사년 1845년에 중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문인이자 유학자인 안향(1243∼1306)의 시문집 『회헌실기』 를 간행하기 위한 목판으로, 영조 42년(1766) 죽계서원에서 간행한 초간본 목판 55매와 고종 22년(1845)에 간행한 중간본 목판 32매 등 총 87매이다.
안향은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 감찰어사, 좌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다녀오면서 주자학의 학풍을 보고, 주자 관련 서적을 베껴오고,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그를 일러 ‘동방의 주자’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성’이며, 여러 서원에서 그를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그의 영정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목판은 판각과정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 인쇄사 측면에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현재 전남 곡성의 도동묘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문인학자인 회헌 안향(1243~1306)의 사적을 기록한 책(회헌실기)의 간행을 위한 목판으로 1766년 간행한 초각판과 1845년 간행한 중각판 32판 등 87판이다. 결판이 없고 판각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가치가 있다.
5. 安珦先生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을 유(裕)라고 부르다가 향(珦)으로 개명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따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을 처음 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옮기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어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75년(충렬왕 원년)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외방으로 나갔을 때에는 미신타파에 힘썼다. 이후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고 독로화(禿魯花-토루카)로 선발되었다. 또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는데 이 해에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가 낭중(郎中)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곧 고려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1304년(충렬왕 30)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고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에 죽었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6. 德陽書院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소재한 덕양서원은 고려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2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정유재란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선조36년에 신실이 중수되었으며 현종 6년 이전의 서원 규모로 중건 되었다.
이후 1695년에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5년에 철폐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강당, 동재인 연서재와 신실인 덕양사, 서재인 신덕재, 전사청, 그리고 외삼문, 내삼문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덕양서원 건사사적비와 강당과 연서재의 내부현판 19개가 있으며 출생지인 용산재와 함께 도 지방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곡성(谷城) 읍내에서 동남(東南)쪽으로 5里 쯤 되는 지점에 있는 천덕산(天德山) 아래 금계(錦溪) 위에서 교룡(蛟龍)을 굽어보는 듯한 사우(祠宇)가 있는데, 방명(坊名)은 梧枝(오지 :지금 谷城郡 梧谷面 德山里)요 사우(祠宇)의 액호(額號)는 덕양(德陽)이니, 곧 고려삼중대광 (高麗三重大匡) 태사개국 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향사 (享祀)한 곳이다.
무릇 장절공(壯節公)이 이 고장에서 태어났으므로, 만력(萬曆) 기축(己丑 :宣祖 22 西紀 1589)년에 후손(後孫)인 현감(縣監) 옥(沃)이 관찰사 (觀察使)인 이공(李公) 광(洸) 및 도내향중(道內鄕中)의 내외(內外)
후손(後孫)들과 더불어 서로 합모(合謀)하여 창건(創建)한 것이다.
숙종(肅宗) 21年(西紀1695) 을해(乙亥)에 본현(本縣) 사림(士林)의 소청(疏請)에 따라 은액(恩額)이 선사(宣賜)되고, 또 복호(卜戶) 삼결(三結)을 내리었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고종(高宗) 8年(西紀1871) 신미(辛未)에 조령(朝令)으로 인(因)하여 훼철(毁撤)되었다가 고종(高宗) 8年(西紀1871) 신미(辛未)에 조령(朝令)으로 인(因)하여 훼철(毁撤)되었다가 순종(純宗)후 갑술(甲戌:西紀1934)년에 본도(本道)에 거주(居住)하는 후손(後孫)들이 탄성하여 복설(復設)하고 매년 음력 2월 8일 중정일에 유림 주관으로 향사를 봉행해 오고 있다.
1981년 지방 기념물 56호로 지정 받았으며 1986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국고 보조로 경내 전 건물을 신축 복원하였다.
7. 龍山壇
高麗開國功臣 壯絶公 신숭겸의 탄생한곳으로 1897년에 유허비를 세우고 1929년 단을 모아 용산단이라고 한다
신숭겸 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호는 장절공(壯絶公)으로써 고려시대 개국 공신임- 원명은 능산(能山)
신라시대에는 이곳 욕내군(곡성현 목사동면 구룡리-현 용산제)에서 출생하였다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몸이장대하고 천성이 용앵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사다운 자질을 갖춤.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을때인 서기 918년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복지겸 (卜智謙)등과 의논하여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임.
태조10년 (서기 927년)가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신라를 돕기위해 대구 팔공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수가 맣은 후백제군에게 호위를 당해 위험한 상황에 이르럿으며 이때 태조와 비슷한 용모를 갖춘 신숭겸 장군이 태조를 대신해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하였음.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한참뒤에 머리없는 공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였고 없어진 머리를 만들어 태조가 직접 제례를 치루고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함. 후 전사한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절을 지어 공의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곳 묘소에 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봉분 셋을 만들었다고 함.
이를 두고 후세에 전해지기를 부인을 함께 합장하였다고도 하나 어느 봉분인지 확인할 수 없어 제향은 중앙의 봉분 앞에서 행하고 있다.
8. 壯節公 申崇謙
태봉 말기 및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하여 왕건의 집에 가서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왕으로 추대하였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고려의 태조로 세웠다.
927년(태조 10) 공산 전투에서 김락,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함께 태조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고, 태조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군대를 통솔하다가 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전사했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춘천시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9. 和順 朱子廟
- 新安朱氏 元祖 朱熹를 모신 朱子廟
- 전남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매년 양력 5월 5일에 향사)
신안(新安)은 중국(中國) 중앙부(中央部), 양자강(楊子江) 하류 및 회하(淮河) 유역의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이다.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중국(中國) 송(宋)나라 신안현(新安縣) 사람인 주 잠(朱 潛)이 고려(高麗) 고종 때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정착(定着)하게 되면서 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잠(潛)은 주 자(朱 子 : 본명은 희, 성리학을 대성한 남성의 유학자)의 증손(曾孫)으로 송(宋)나라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에 자리잡고 살았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元)나라에서 송(宋)의 유민(遺民)을 압송(押送)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綾城) 고정리(考亭里)에 은거(隱居)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移居)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本貫)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案)·나주(羅州)·능성(綾城)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1902년(고종 39, 광무 6)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석면(錫冕)의 상소(上疏)로 선조(先祖)의 본향(本鄕)인 신안(新案)을 본관(本貫)으로 복관(復貫)하게 되었다.
문헌(文憲)에 의하면 주씨(朱氏)의 본관(本貫)은 신안(新案)·나주(羅州)·능성(綾城)·웅천(熊川)·공주(公州)·전주(全州)·압해(押海) 등 무려 107본(本)까지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신안 주씨(新案朱氏)에서 분파(分派)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로 잠(潛)의 아들 여경(餘慶)이 고려 고종(高宗)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고, 여경(餘慶)의 아들 열(悅)은 원종(元宗) 때 병부 낭중(兵部郎中)으로 충청(忠淸)·경상(慶尙)·전라도(全羅道)의 안찰사(安察使)로 나가 크게 치적(治積)을 올렸으며,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생활이 검소하여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았다.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러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열(悅)의 아들 인정(印長)·인원(印遠)·인환(印還) 3형제는 널리 이름을 떨쳐 신안 주씨(新案朱氏) 가문을 중흥시켰는데, 맏아들 인장(印長)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둘째 인원(印遠)은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역임하였으며, 셋째 인환(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使)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약관(弱冠)도 못되어서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택정(宅正)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덕원(德源)에 유배되어 오자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1679년(숙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이성 현감(利城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이 화(禍)를 입자 그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삭직(削職)되었다가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執權)하면서 복직(復職)되어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몽룡(夢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 군수(金山郡守)로 의병장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牛旨峴) 싸움에서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3룡(龍)으로 불렸다.
그외 중종(中宗) 때 전적(典籍)을 지낸 양우(良佑)와 선조(宣祖) 때 군수(郡守)를 역임한 덕원(德元)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정(정)은 숙종(肅宗) 때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역임하여 경원 부사(慶源府使) 표(杓)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고종(高宗)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을 지낸 석면(錫冕)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인섭(寅원燮)이 이름났으며, 진수(鎭洙)는 신민회(新民會) 강원 대표로서 만주(滿洲)에 독립운동의 기지(基地)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에 공헌하여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모검부장을 지낸 석환(錫煥)과 함께 신안 주씨(新安朱氏)가문을 충(忠)과 의(義)의 가문으로 더욱 유명하게 했다.
10. 晦庵 朱熹先生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瑳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11. 竹樹書院
1986년 9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조광조(趙光祖)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을 배향하고 있다. 1570년(선조 3)에 능성현령 조시중(趙時中)의 협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짓고, 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았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조광조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함께 했던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자연히 만나 서로 의리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유배된 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고 죽자, 양팽손은 몰래 시신을 거두어 화순 쌍봉사 골짜기에 장사를 지내고 마을에 초가집을 지어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그러다가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함께 조정에서는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지은 것이다.
1613년에 중수하였고, 1630년 유림들과 조정의 김장생(金長生) 등이 뜻을 모아 양팽손도 추배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겨우 단 을 마련하여 제향하여 왔다.
1971년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1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趙國朝)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본래의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9년에 동재를,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이 있어 제향(祭享) 구역과 강학(講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12. 靜庵趙光祖先生謫廬遺墟碑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추모하고자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세운 적려 유허비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총높이 295cm이며 귀부의 높이 164cm, 귀부 너비 81cm, 귀부의 두께 29cm, 이수의 높이는 71cm 이다. 1667년(현종 8) 4월 능주목사(綾州牧使) 민여로(閔汝老)가 건립하였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를 뜻하며 1519년 기묘사화로 능성에 귀양왔던 조광조를 추모하고자 세웠다.
당시 능성현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있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었다.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두도 형상만 다듬었다. 비신은 전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고 해서체 종서 2행으로 썼다. 비신 뒷면 상단에 ‘정암조선생추모비’라 전액하고 밑으로는 정암의 유배 내력을 기록하였다.
비문은 의정부우찬성 겸 성균관계주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충청도관찰사 겸 수군절도사순찰사민유중이 전서하고,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이수는 반원형인데 전면에는 쌍룡이 엉키어 있으며 배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이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다.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1982년, 1983년, 1997년에 보수하였으며, 1986년 강당(정면 5칸 측면 2칸)과 영정각(정면 3칸 측면 1칸)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유배 생활을 하던 초가를 복원하여 적려유허비 주위를 정화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뒷날 김종직의 대를 이어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1515년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시키려 노력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를 당해 능성현으로 유배되었으며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13. 靜庵 趙光祖先生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