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서남포럼 2008-5-14
캄보디아의 비극: 끝나지 않은 이야기
신 윤 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작년 11월 20일, 크메르루즈 정권이 자행한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민족학살”에 대한 진실과 책임을 밝히기 위한 인권법정(공식명칭: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이 첫 재판을 열었다. 도익 동무(Comrade Deuch 또는 Duch)로 알려졌던 뚜올 슬렝 감옥소의 책임자 까잉켁이유(Kang Khek Ieu)가 신청한 보석 신청 사유를 듣기 위한 심리로서 정식 재판은 아니었으나, 그 설치 여부를 둘러싸고 10년 이상을 끌어 온 인권법정이 드디어 문을 연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 법정에서 변호인은 도익이 “비록 구타를 당하거나 고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재판도 없이 오랫동안 구금된 것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인권 개념에 기반한 법리를 펴 기가 막힌 방청객들로 하여금 분노와 야유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야만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 무려 28년 1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익은 그를 10년 간이나 찾아 다닌 사진작가 던럽(Nic Dunlop)에게 자신은 “공산당을 위한 기술자”에 불과했으며, “구속된 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는 당의 원칙”에 따라 갖가지 도구와 방식을 이용하여 고문을 하여 허위자백을 받아 낸 뒤 그 자백한 내용을 근거로 “닭을 죽이듯이 … 목을 썰어 죽였다”고 고백했다.(주1) 7년 뒤에 행한 다른 인터뷰에서도 “어떠한 대답도 죽음을 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온 자는 아무도 목숨을 구할 가능성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하여, 뚜올 슬렝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들러 ‘사진을 찍고 등록을 한 뒤,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허위 자백으로 피살의 근거를 남겨 놓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였다.(주2) 도익의 부하들은 “자백”을 한 “죄수”들을 밤에 쩡엑(Cheong Ek) “킬링필드”로 끌고 나가 “총알을 아끼기 위해 무릎을 꿀리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이들이 처형되는 동안 도익은 멍석 위에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주3) “민주캄푸치아”에는 ‘인간성’(humanity)이 실종되고 말았다.
1979년 1월 크메르루즈가 국경지방 산속으로 쫓겨난 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행방이 묘연했던 도익을 찾아 낸 것은 캄보디아 경찰이나 군인이 아니라 젊은 아일랜드인 사진작가 던럽이었다.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10대 때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우연히 캄보디아의 정글에 묻힌 옛 사찰들과 파헤쳐 놓은 킬링필드의 사진을 접한 던럽은 흡사 마법에 홀린 듯 영광과 치욕, 문명과 야만이 교차하는 캄보디아에 빠져 들었다. 스무 살이 되던 1989년에 캄보디아에 첫 발을 디딘 그는 10년 동안 전국을 돌며 야만의 시대가 남긴 흔적을 그의 라이카 사진기에 담았다. 그 동안 그는 언젠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 빛 바랜 도익의 흑백 사진 한 장을 항상 배낭 속에 간직하고 다녔다. 그러기를 10년, 1999년 초 어느 날 서부지역에 위치한 삼롯(Samlot)에서 도익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항삔(Hang Pin)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도익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였고 미국난민위원회(ARC: American Refugee Committee)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척 여러 사람들의 사진 들 중에 그의 독사진도 찍어 방콕으로 돌아 온 던럽은 폴폿이 죽기 전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기자 테이어(Nate Thayer)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시 삼롯으로 자신을 찾아 온 도익과 테이어 앞에 도익은 “당신들이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주4)
도익은 크메르루즈 정권 몰락 이후 전쟁과 추적을 피해 캄보디아와 태국 간의 국경지대 양쪽을 오가며 자신을 항삔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제조해 내었다. 태국 내 한 난민촌에 은신처를 마련한 항삔은 유엔국경구호조직(UN Border Relief Operation)과 관련된 일을 하며 영어를 배웠고, 곧 미국난민위원회에서 일자리를 구해 월급과 배급까지 받게 된다. “그는 최고의 일꾼으로서 난민촌 사람들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으며, 대단히 지적이었고 난민들을 돕는 데 무척 헌신적이었다.” 급기야는 미국인 침례교 목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되기에 이르며, 던럽의 인터뷰 기사로 그의 정체가 탄로나기 직전에는 과거의 직업인 교사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도익의 개종에 대해서는 순수한 종교적 귀의로 보는 관점이 강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나는 기독교도들이 한 세력이며 그 세력이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게릴라전을 할 때에는, 나는 25세였고, 캄보디아는 부패해 있었으며, 공산주의는 모든 것을 약속하였으며, 나는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주5)
이야기가 너무 돌아 온 것 같다.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의 핵심은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한 지 28년, 내전이 끝난 지 15년이 지나도록, 크메르루즈 지도부에 대한 처벌은커녕 그들의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진실과 책임 소재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원조 크메르인”(original Khmer)임을 자처하며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가학적인 인종주의를 실천한 “형제 제1호” 폴폿은 73세까지 ‘만수’를 누리고 자연사하였으며, 크메르루즈 지도자로서는 홀로 최후까지 저항하다 잡힌 “형제 제4호” “백정”(Butcher) 따목(Ta Mok)은 7년 동안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감옥에 있다가 2006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목과 함께 군부 핵심이었던 “형제 제13호” 께 빠욱(Ke Pauk)은 1998년 훈센에 투항하여 정부군 장군에 임명되었다가 간질환으로 2002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나이 69세였다. 심지어 폴폿에게 계속 의심을 받다 결국 배신자로 낙인 찍혀 처 윤얏(Yun Yat, 문화교육선전장관 역임)을 비롯한 일가족 13명과 함께 집단 사살 당한 국방장관 손센(Son Sen)도 70세까지 살았다.
크메르루즈 정부의 대통령을 지내어 바깥에 널리 알려진 키우삼빤(Khieu Sampan)은 1998년 12월 가장 늦게 훈센에게 투항하였으나 사면을 받아 10년 가까이 평온하게 살다가 인권법정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년 11월에야 구속되었다. 폴폿 다음으로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크메르루즈 집단의 이론가로서 주요 정책에 책임이 있다고 믿어지는 전 공산당 부서기장 “형제 제2호” 누온 치아(Nuon Chea)도 삼빤과 함께 투항하여 자유롭게 살다가, 작년 9월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76세의 삼빤은 구속 당시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으며, 치아는 나이가 84세를 넘어섰다. 한 살 작은 이엥 사리(Ieng Sary)는 그의 처 키우 티릿(Khieu Thirith, 77세)과 함께 가장 일찍 1996년 8월 훈센에게 항복하였는데, 시하누크국왕은 사리가 “수천 명의 생명을 살린 것과 다름 없는 선행”을 했다는 웃기지도 않는 근거를 만들어 그를 사면한 뒤 빠일린(Pailin)주에 대해 자율적 관할권을 가진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이엥 부부도 작년 11월에 구속되기는 했으나, 범죄 사실은 물론이요 학살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일관되게 ‘오리발’을 내고 있다. 유일하게 기독교에 귀의한 도익만이 진실을 밝히겠다고 공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낮으며 오로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뚜올슬렝에 수감된 ‘죄수’들을 처형하라고 최종 명령을 내린 주범으로 폴폿, 누온 치아, 목 등 인터뷰 때마다 다르게 지목하여 혼란을 빚고 있다.
결국 인권법정(ECCC)에 서게 될 사람은 아직도 살아 남은 다섯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실을 제대로 밝혀 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이 법정을 설치하는 데 이미 무수한 시간이 걸렸으며, 장차 2-3년을 견딜 수 있는 예산조차 확보되어 있지 못해, 그 존치 여부조차 불확실한 지경이다. 게다가 캄보디아 정부와 국제연합 간의 타협으로 이루어진 이 법정의 성격과 자율성에 의문이 끊임 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법관들의 능력과 자격에 대한 시비조차 일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재판 전 심리가 시작되었지만 이조차도 시간 지연을 위해 끊임 없이 제기되는 이의신청과 이런 저런 사유의 연기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도익이 두 번, 다른 피고인들은 한 차례 법정에 섰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고 보면, 본(本) 재판은 과연 언제 시작할 것인지, 도대체 개정은 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이 해결된 다음에는 피고인들의 건강과 나이 문제 그리고 협력 의사 여부가 큰 난관으로 떠 오를 것이 뻔하다.
20세기에 저질러진 끔찍한 대학살 사건의 하나인 캄보디아 사태가 잘못하다 그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채 밝혀지지 못한 역사 더미 속에 묻혀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국제적으로든 국내적으로든 정치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베트남과 오랜 적대관계에 놓여 있던 중국은 크메르루즈 집단의 가장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다. 이 범죄집단이 대학살을 자행한 4년 동안 중국은 거의 유일한 대외창구 노릇을 하였으며, 베트남 침공으로 태국 국경 지방으로 쫓겨나 회생 가능성이 희박해 진 뒤에도 끝까지 이들을 지원하였다. 중국보다 더 모순된 캄보디아 정책을 보인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처럼 행동하면서도, 구소련에 대한 냉전적 관계와 베트남에 대한 구원(舊怨) 탓에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크메르루즈 집단과 이 집단이 소속된 민주캄푸치아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란 망명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도록 앞장 섰던 것이다. 미국은 일찍이 베트남 전쟁 중에 호치민루트로 사용되던 캄보디아 영토 상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10만 이상의 목숨을 빼앗아 감으로써, 많은 캄보디아인들을 반미주의자로 만들고 크메르루즈로 조직으로 흡수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아세안은 두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캄보디아의 두 정치집단간의 협상을 중재하고자 하였고, 이들 두 국가 모두와 가까웠던 태국은 크메르루즈 집단을 후원세력들과 이어 주는 중간인(middleman)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였다. 도이머이 정책으로 외국의 자본과 시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베트남으로서는 결국 크메르루즈가 실질적인 세력으로 참여한 망명정부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크메르루즈 집단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그간의 국내적 정치상황 또한 녹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훈센(Hun Sen) 총리와 그 정권에 있었다. 훈센은 과거 크메르루즈 장교 출신으로 1977년 7월 동부지역(Eastern Zone)의 당과 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될 때 베트남 국경을 넘어 탈출한 자였다. 동부지역 한 사단의 사령관으로 있다 역시 탈출한 헹삼린(Heng Samrin)과 수천의 탈주병들을 모아 반크메르루즈군을 결성하였고, 1978년 12월부터 시작된 베트남군에 의한 캄보디아 침공의 선봉에 서게 된다. 훈센은 프놈펜 점령 직후 새로 수립된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의 수상 삼린 하에서 외교장관, 그리고 1985년에는 개칭한 캄푸치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에서는 새로운 수상으로 부상하였다. 평화정부가 수립된 1993년 이후에도 1997년 쿠데타를 성공시켜 권위주의 지도자로 지위를 굳혔다. 첫 선거에서 제1당이었던 왕당파 정당 훈시펏(Funcipec)을 결국 집권 가능성이 없는 제2 내지 3당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하였고, 2006년에는 다른 정당과 연립 없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현재 수상 훈센, 집권당 캄보디아인민당(CPP) 당수 치아 심(Chea Sim), 그리고 하원의장인 헹삼린 등 정권의 실세들이 모두 크메르루즈의 전력을 갖고 있다.
파리평화협상 이후 첫 선거가 실시된 1993년 이후 크메르루즈 지도부가 완전히 붕괴되는 1999년까지 크메르루즈 집단은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헹삼린과 훈센은 다른 정당이나 그 지도자들과 끊임 없이 정쟁을 벌여야 했고, 훈센과 훈시펏은 모두 크메르루즈 세력과 연대하고자 비밀접촉을 시도하였다. 크메르루즈의 지도부와 군사조직이 와해된 1999년 이후에도 이 집단에 속했던 자들은 군부, 행정부, 지방정부를 비롯한 국가와 사회의 요소요소에 자리잡았다. 크메르루즈 지도부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는 이들의 잠재적 저항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훈센 정권이 날이 갈수록 권위주의화하고 있으며, 정치적 부패도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고 있는 점이다. 그는 수류탄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여 사상자를 내고, 반대세력을 정치자금으로 매수하고 형법으로 길들이는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정권 자체가 반민주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인 권위주의 체제이면 인권 문제를 정면에 내세울 수 없고, 부패한 정권이 올바른 정치적, 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캄보디아의 비극’이 끝내 그 진실과 책임 소재를 밝혀내지 못한 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잊혀지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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