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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창조의 악순환-신들메의 천마지맥(주금-철마산)산행기
神話創造의 惡循環 6월에 예정됐던 한강기맥의 처음코스인 오대산 두로봉에서 비로봉, 계방산을 거쳐 운두령 까지의 길을 역으로 비박 산행하려던 것이 폭우로 인해 계방산만 올랐다 내려와 평창의 잠 두-백석산을 대신해 오른 후, 3주만에 한북정맥상의 천마지맥의 일부를 비박 산행 코스로 잡아 금요일 휴가를 내고 시도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전 회원이 모두 참석했다.
우리가 흔히 산줄기를 이야기할 때 대간,정맥,기맥,지맥이란 용어를 쓴다. 支脈이란 용어는 좀 생소하지만 우리가 산행하려는 천마지맥을 예로 들자면 한북정맥상의 운악산을 거쳐 47 번 국도를 넘어서면 수원산이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서파검문소를 건너 가평군과 포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山群을 따라 주금산, 철마산, 천마산, 백봉, 갑산, 적갑산, 예봉산을 거쳐 팔당 댐에 그 끝을 다하는 산줄기인 것이다. 상봉터미날에서 7시 버스를 타고 서파삼거리에서 다른 산꾼 한사람이 우리 일행과 같이 내 려 확인하니 우리와 똑같은 코스를 갈려는 사람이다. 길 건너 할머니순두부집에서 아침을 해결할려는데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산행 후 자주 들러서 막걸리를 먹곤 하던 집이라 으레 문을 열었으리라 예상하고 왔는데 난감하다.
할 수 없이 건너 해장국집에서 식사 후 배낭을 다시 추스리고 산행을 시작한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린 상태에다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아 금방 바지와 등산화가 물에 젖어든다. 사실 이곳은 일부 극소수의 산꾼들만 다니는 곳으로 희미한 산길과 표지기를 의 지하여 가야하는 길이라 조금만 잘못 들어서면 엉뚱한 곳으로 가서 다시 뒤돌아오기를 반복 하는 구간이다. 베어스타운 옆 사기막골에서 바로 주금산을 오르는 것이 대부분이나 신들메 산악회의 항상 '처음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命題 앞에 쉬운 산행코스는 항상 뒤로 물러나 손을 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산행길을 잘못 들어서 몇 번을 헤매다 능 옆으로 난 길을 찾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조금 오르니 울창한 잣나무 숲이 나오는데 누군가가 잣이 주렁주렁 달린 잣나무 의 맨 꼭대기 가지를 꺾어 길옆에 놓아두었다. 지난 밤 비에 가지가 꺾인 것인지..... 잣만 따 서 가지고 갈까하다 '이제 시작인데' 하는 마음에 포기한다. 배낭무게만도 어깨가 뻐근할 지 경인데 저걸 달고 내일까지 갈려니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이다. 나중에 보니 우리 왕회장 배 낭에 비닐이 달려있어 보니 잣이 들어 있길래 물어보니 그 곳에서 따 가지고 왔단다. 대단 한 왕회장. 그래서 우리는 그를 '똥'의 元祖라 부른다. 비가 온 후라 자욱한 안개에 습한 상태라 벌써 땀은 비오듯이 한다.
지금부터는 이름 없는 봉우리를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형태로 그나마 중간 중간 만들어놓은 헬기장의 공터 가 眺望處가 되고 쉼터가 된다. 몇 번 길을 잘못 들고 하여 고생을 하다보니 임도가 나온다. 다행이 몇 개의 산행기를 읽고 온 터라 이 임도를 따라가다 우측으로 들어서야지 임도 따라 가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간다하여 우측으로 난 길을 유심히 보며 간다. 다행이 제대로 들 어서 한참을 가니 널찍한 헬기장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쉬기로 한다. 우리 회장님 벌써 얼려 온 캔막걸리를 한잔 하자며 꺼내란다. 이제 시작인데 어쩌려고 하면서 모두 달려들어 하나 씩을 집어든다. 우선 시원하니 좋긴 좋다. 다시 無名의 봉오리를 수도 없이 넘고 넘으니, 널찍한 防火線이 나타나 길을 잃어버릴 염 려는 없어졌는데 또 다른 難題가 하나 끼어 든다. 다름 아닌 능선상의 방화선이라 나무의 그늘이 없어 억새와 딸기나무가 우리의 키와 나란히 간다. 군데군데 달린 딸기를 따서 먹어 보나 비가 온 후라 물기를 머금어 맛이 영 아니다. 대신 딸기나무의 가시가 우리의 발목과 손목을 잡는데, 반바지를 입은 동지들은 나중에 영광의 상처 아닌 상처가 종아리와 팔뚝에 온통 自害자국처럼 얼키설키 생겨나 나중에는 훈장처럼 사진도 찍고 난리였다. 사실 딸기나 무의 가시보다 더 무서운 게 억새의 잎에 달린 톱날 같은 가시다. 워낙 작아 잘 보이지 않 지만 여린 피부에 긁히면 베이면서 보통 따가운 게 아니다. 어린 시절 소먹이인 '꼴'로 최고 로 쳐주었던 우리 고향에선 '아들메기'라고 불렀던 풀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에서 소를 키 워보며 자랐던 씨끄리와 용팔이는 이 곳에다 소를 끌고 와서 방목을 하면 더없이 좋을 것이 란다. 내가 보기에도 어린 시절에 이 풀을 베려고 지게 지고 높은 산에 올랐던 생각에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또 다른 낭만인 새하얀 억새가 피어날 것이다. 방화선은 근 3km여를 내쳐 있다 개주산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곧장 가 면 개주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측으로 가는 길이다.
다시 끝없는 낙엽 쌓인 길을 가다 보니 처음으로 안내판 같지도 않은 안내판이 나오는데 사기막에서 올라오는 곳이다. 주금산 1.9km란다. 드디어 주금산자락에 접어든 것이다. 다시 까마득하게 보이는 주금산 정상을 향 하는데 곳곳에 암릉이 있어 타고 넘고 우회하다보니, 또 이정표 정상 100m. 조금은 마음이 풀어져서인지 더 힘들어 보인다. 지금까지 100m가 이렇게 멀어 보이기는 처음이다. 주금산 정상. 정상이라고는 하나, 雲霧가 끼어 아랫동네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가서 좌 측으로 난 바위봉오리나 독바위에 올라야 제대로 조망이 된다. 하여간 정상에는 두 개의 정 상석이 서있는데 가평군에서 처음 조그마하게 세운 자리에 올해 5월에 포천시에서 커다란 정상석을 무식하게 세워놓은 것이다. 가평군에서 세운 것을 옆으로 밀어내고 말이다. 분명 떠드리가 작년에 올랐을 때는 가평군에서 세운 조그마한 것밖에 없었단다. 지자체에서 하는 짓이란 그저.....그런 여력이 있었다면 차라리 군데군데 제대로 된 이정표나 해놓을 일이지, 그저 눈에 보이는 생색내는 것에만 신경들을 쓰니. 막 가는 것을 보니 이 곳이 주금산이 아 니라 죽음산이 되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도 해 본다.
사진을 찍고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아 조금 더가니 바위봉오리가 멋지게 서있고 정상에는 우 리 8명 일행이 간신히 엉덩이 붙이고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예전에 무슨 송신 소 시설이 있었는지 세멘트로 만든 단이 있고 옆으로 쇠줄난간이 간신히 매달려있다. 사방 이 틔어있는 곳이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운무가 신선세계에 올라앉아 식사하는 기분이 든다. 금방 구름에 가려 안보이던 계곡과 마을이 어느 사이인가 보이고, 걷히고 몰려오는 구름이 파노라마같이 펼쳐진다. 햇반에다 라면을 끓이는데 깔다구란 날파리들이 집단으로 가미카제 式으로 끓는 물에 뛰어든다. 순식간에 코펠바닥이 새까매진다. 아까운 물을 버리고 다시 라 면을 끓였는데 이것이 오늘 저녁 神話創造 惡循環의 序幕이 될 줄이야. 서둘러 식사 후 독바위에 오르니 안개도 많이 걷히어 내촌면의 내리와 베어스타운이 까마 득히 내려다보인다. 중간 중간 펼쳐지는 조망이 壓卷이다.
다시 돌아 내려와 시원한 헬기장 에서 바라보는 독바위는 또 다른 모습이다. 조금 가다보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커다란 착오를 하게 된다. 지금쯤이면 비금계곡으로 하산하는 길과 종주상의 능선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착각을 해서 능선상의 희미한 길로 들 어선다. 어차피 종주코스는 능선상으로 나있게 마련이니까. 한참을 가다보니 희미하던 길도 완전히 없어졌다. 그리고 내리막 산비탈. 푹푹 빠지는 낙엽을 헤치고 조금 내려가니 도저히 아니다 싶어 뒤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며 산행기를 꺼내보니 조금가면 송전탑이 나오는 데 거기에서 길이 갈라진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떠드리가 한마디한다. '맞아. 송전탑이 있 었지'라고....으이구 이 웬수. 그걸 이제 이야기하면 뭘 하누. 기껏 고생은 다 했는데.....다행이 씨끄리와 용팔이는 우리와 조금 뒤쳐져 따라오다 정 코스로 갔는지 소리를 질러 불러도 대 답이 없다. 한참을 달려 내려가며 소리를 외치니 앞쪽에서 답이 온다. 일단 제 자리에서 움 직이지 말고 기다리라 해놓고 遭遇하니 그 사람들은 우리가 안보여 한참을 앞서간 줄 알고 부리나케 달려갔다는 것이다.
조금 가니 바위 위에 우람한 소나무가 몇 그루 서있는데 그 사이로 진짜 송전탑이 보인다. 비금계곡 갈림길에서 조금 오르면 시루봉이다. 철마산군에 들어선 것이다. 잠시 휴식 후 끝 없는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길을 가다보면 곳곳에 자일이 매여있고 난코스다운 암릉이 몇 군 데 나온다. 시간이 지체되어 조금 길을 재촉하는데 한참을 달려도 철마산이 안 나온다. 사실 철마산이라는 곳이 두 군데로 하나는 787m고 또 하나는 711m로, 787m에는 산정상 표지기 가 하나도 없어 그냥 지나쳐버렸다. 다행이 그 전에 오뚝한 봉우리에 넓은 공터가 있어 광 릉내 방향이 발 아래로 시원스레 펼쳐지는데, 누군가가 이 곳에서 비박하잔다. 하긴 비박하 기에는 좋은 장소이나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는 더 가야 한다. 사실 물도 없어 물을 구할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하기에 무리해서라도 철마산은 지나가야 하는데....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공터에서 저기쯤이 철마산이라고 이야기한던 봉오리가 있었는데 그 곳이 철마산이 맞았고 표지기가 없어 787 철마산은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 곳에서 떠드리는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길로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올라왔다. 조금 내 려오니 길재라 추측되는 고개가 나온다 좌우로 내리막길이 있어 그리 추측했으나..... 지금부 터가 문제이다.
벌써 날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간다. 산 속의 밤은 일찍 오게 마련. 약속장소인 괘라리고개까지는 도저히 무리고 일단 근처에서 비박하기로 하 고 처음부터 비상시 시나리오대로 떠드리,씨끄리, 삐리리 회장이 페트병 2개씩을 들고 물을 구하러 나선다. 우리는 3사람의 배낭을 추가로 메고 비박지를 찾아 다시 앞으로 나간다. 지 금까지의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그럴 듯 하고 완벽해 보인다. 허나....... 일단 어둑해지는 길을 조금 더 달려 넓은 공터가 나와 이 곳에서 비박하기로 한다. 예정은 작은 철마산 전에 헬기장이 있어 그리로 정했지만 작은 철마산이 얼마쯤 남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라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렇고 가뜩이나 무거운 배낭을 2개 짊어지고 올라가자니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기실 배낭 2개 지고 가는 것보다 물 구하러 가는 것이 더 좋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나중에야 고생길이란 것이 들통났지만...... 자리를 정하고 비닐로 텐트를 치고 깔판을 깔고, 일견 다른 팀은 저녁준비를 하는데 물이 없다. 밥은 가능한데 찌개 끓일 물이 없는 것이다. 물 구하러 간 사람 기다리는 것도 한정이 없어 일단 찌개는 포기하고 고등어 통조림의 물에다 김치를 넣고 고등어 김치조림을 만든단 다. 이 것도 새로운 神話創造라고 해야 하나. 700m의 고지대에다 씻은 쌀이라 물이 많이 들 어가는 것을 모르고 평상시 형태로 밥을 하니 설익어 3층 밥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핸드폰이 울리더니 회장님인데 물이 없단다. 아무리 내려가도 계곡은 나왔으나 물이 말랐단 다. 어제까지 비가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서쪽사면은 급경사이고 너덜형태의 바위라 물이 금방 없어지고 반대편의 동쪽 사면은 완경사라 계곡의 물도 풍부한데 나중에서 그런 사실들을 깨우치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무튼 아침까지 한 모금씩 마실 물은 있는 상태라 철수하고 올라오라고 하니 기어코 떠드리 동지가 물을 구해온다며 혼자 내려갔단다. 두 사 람은 올라오고 벌써 사방은 깜깜한데 떠드리한테는 연락이 없다. 핸드폰을 쳐도 받지를 않 고...... 생각해보니 배낭에 진동상태로 매달려있는 것을 모르고..... 설익은 밥에 그럭저럭 밥상형태를 갖췄으나 떠드리 동지가 안 오니 먹을 수가 없다.
기다 리다 먹기 시작한 소주가 벌써 얼큰해져오는데,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끝내리와 시중이가 마 중을 가기로 했다. 일단 컴컴하니 능선 상에 헤어졌던 장소까지만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가 서 소리를 지르니 한참 후에 소리가 들려 오더란다. 脫盡 一步 前이라고.....급히 끝내리 동지 가 내려가다 보니 떠드리 동지가 길옆에서 자고 있더란다. 脫盡해서 졸려 잠깐 누웠다가 잠 이 들어버린 것이다. 큰일날 뻔했던 것이다. 급히 깨워 능선까지 와서 비상식량을 조달하라 고 해 다시 회장이 쵸콜릿 등을 들고 다시 뛰어내려간다. 한참 후에 올라온 떠드리 동지는 바로 밥을 먹는둥 마는둥 바로 잠에 빠져든다.
다시 깨워 술 한잔에 神話를 들어보니 참 대단하고 一見 한없이 바보처럼 보인다. 가다 정 없으면 그냥 올라올 것이지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마을까지 내려가서 물을 떠왔다는 것이다. 캄캄한데. 조그만 랜턴 하나에 의지해서..... 하기야 재작년에도 설악산 서북릉을 종 주하다 물을 구하러 한계령휴게소까지 갔다온 사람이니 그런 예상은 조금은 했지만서두..... 지금은 밤이 아닌가? 하여간 우리는 오늘부터 떠드리 동지의 지금까지 말도 많았던 해병대의 취사반이냐, 운전 병이냐의 말많음에 終止符를 찍고 진정한 해병으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다만 '탈진한 사람 을 맨 가에 재우느냐, 列外시켜 주지 않느냐' 할 때는 취사반 출신 같기도 한데 말이다.
10시간을 넘게 걸은 데다 정신까지 피곤하니 술 한잔도 제대로 안하고 모두 바로 잠자리에 빠져드는데, 나는 억지로 잠을 청해보는데도 잠이 잘 안 온다. 피곤하고 내일을 위해서도 빨 리 잠이 들어야 하는데....어설피 먹은 술 때문인가? 잠시 잠이 들었나 싶은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새벽 2시. 다행이 비닐과 플라이등으로 천막을 쳐놓아 괜찮았는데 조금 지나니 그 사이로 빗물이 떨어져 깔판으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급히 비를 맞으며 씨끄리 동지가 나무를 잘라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운 다. 그 와중에 옆에서 꾸준히 자고 있는 사람. 시중이다. 얼마 전에 高價에 산 비박텐트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모두들 부러워 장만하자고 난리다.
조금 줄어드는 빗줄기에 다시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더 안 오고, 비는 줄창 내리고 (갑자기 '줄창'이란 단어에 옛날 생각이 난다. 한 때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인 박정만의 詩集 '그대에게 가는 길' 중에 詩 '비는 줄창 내리고'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그 서울올림픽을 자기 군사정권 시절 최고의 업적으로 나불대던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한수산필 화 사건'에 연루됐다 하여 중정에 끌려가 있지도 않은 죄목을 모진 고문 끝에 덮어씌우고 그 후유증으로 몇 년을 고생하다 그 화려한 88올림픽 뒷켠 달동네에서 쓸쓸히 혼자 죽어간 悲運의 詩人 박정만. 더욱 더 그가 그립다. 그의 유시 하나 더. 제목: 終詩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속으로.) 빗방울이 나뭇잎에 뭉쳤다가 가끔씩 부는 바람에 다시 비닐로 떨어지니 그 소리가 사뭇 요 란하다. 저 아래 마을에서 올라오는 불빛과 멀리 달려가는 차량소리가 더더욱 집이 그립게 한다. 마누라가 '사서 고생한다'고 하더니..... 다시 눈을 뜨니 새벽 5시가 넘었는데 벌써 四圍가 환하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추워 잠이 깬가 보다. 어깨 부위가 시리다.
다시 침낭을 여몄지만 다시 자는 것은 무리.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니 안되겠다 싶어 '기상'소리로 남들을 깨운다. 누룽지로 죽을 끓여 김치와 먹는데도 그런 데로 넘어간다. 정리 후 다시 철마산을 향해 가 는데 어제의 여독이 덜 풀렸는지 몸이 무겁다. 조금 가니 기어이, 드디어 작은 철마산이다. '철마산(711m)'이란 팻말과 함께 철마부대에서 세운 국기봉과 기념식수 안내판, 그리고 무엇을 묻었는지 몰라도 개봉일이 2013년인 타임캪슐 안내판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추측컨대 2003년에 묻고 10년 후에 개봉이라니.... 그게 무슨 타임캪슐인가. 한심한 것은 기념식수라고 주목을 두 그루 심어놨는데 각각 화강암에다 부대장이 기념식수했다고 계급과 이름을 새겨둔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조망이 좋으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그 기념식수한 나무 잘 자라고 한 것인지 앞의 나무들은 다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무식한 군발이 文化라니..... 한참을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오고 한쪽은 급경사 오름길이다. 우리 산행 시 항상 선두에 서는 사람은 누구든 간에 쉬운 길은 안 간다. 뒷 사람은 푸념을 하면서도 길이 엇갈릴까 봐 서 부지런히 또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드디어 事端이 났다. 어젯밤에 산행 기며, 지도를 많이 출력해 왔는데 밤에 젖은 나무에 불쏘시게하느라 다 태워버려 그야말로 한 장도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예정 코스는 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야 괘라리고개를 거 쳐 천마산을 오를 수 있는데 그만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처음 올라오는 사람을 만나 물이 있는 곳만 물었지 이곳이 어느 방향인지 확인을 안 하고 무작정 내려만 간 것이다. 한시간을 달려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와 다시 사람이 잘 안 다니 는 곳으로 접어든다. 또 다른 神話創造의 始發점이다.
괘라리고개로 가는 길은 사람 통행이 별로 없어 길이 잘 안 났으리라는 고정관념 하나만 머릿속에 넣고 가다 보니 점점 길이 없 어진다.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 사방을 분간키 어려우니 어디로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가는 것이다. 가끔 나뭇가지 사이로 앞에 커다란 산이 보이니 저것이 천마산이려니 하고 말이다. 몇 번을 헤매다 물가 쪽으로 내려오니 목탁 소리도 들리고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린다. 일단 은 반가움에 물가로 가서 신을 벗고 일부는 옷도 벗고 목욕도 하고 그 중 일부는 야동(?)도 찍혔다. 일종의 몰카인 것이다. 유통은 안 시키겠지 뭐. 씻고 마을로 내려서니 이런 변이 있나. 이제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내려왔다는 증거가 나타났으니.....오남저수지로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원래 가야 할 길이 저 멀리로 어슴프레 보인다. 어차피 잘못 길을 들었다는 것은 중간에 짐작은 해서 이 곳이 마석의 수동계곡 下流쯤으로 알고 내려왔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一見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때 이른 하산 길에 시원한 캔맥주를 들이키니 그 맛이란..... 감자탕 집에서 점심 겸해서 낮술을 얼큰히 하고 청량리행 버스에 몸을 싣고 한없이 졸다 보 니 상봉터미날이다. 끝내리 동지가 시원한 맥주 한 잔 더 하자며 응달진 곳으로 끌고 가더 니 마트에서 캔맥주에 안주를 준비해 와 산행의 피곤함을 씻고 산행의 뒷 餘談을 한참 쏟아 놓고 다음 산행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한다. 1박2일의 산행 . 비록 미약하나마 그런 데로 산행마침을 전 회원들과 함께 自祝하고자 합니다.
아래는 댓글로 올라왔던 글들입니다.
작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상처라는 이름이다. 그것은 때로 단 한 줄의 글도 못 쓰게 하는 억압의 기제이며, 아주 긴 소설을 쓰게 하는 분출구의 기제이다. 여기서 무섭다는 것은, 상처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할 때 작가 자신이 글을 못 쓰는 직무유기를 인정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을 뜻하고, 나머지 하나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문학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에게 있어서의 상처란 다의적으로 작용하며, 다의적인 의미 중 작가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는 상처를 가장 경계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한다. 정신이 억압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가 먼저 알고 그 억압의 폭력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의 상처든, 상처의 본질이거나 상처의 주변부거나 상처를 입은 계기는 작가에게 어떤 작품의 내연이 되어 독자에게 돌아온다.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시대에 복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속되게 얘기하자면 쓰는 일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작가 한수산에게 있어 가장 큰 상처는 1981년, ‘서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당한 육체적 고문과 그 고문에서 비롯된 정신적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로 볼 때 그가 시국 사건으로 보안사에 불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적어도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 한수산 씨의 필화 사건을 얘기하기 전에, 필자는 1993년 2월 초 작가 한수산 씨와의 인터뷰(당시 필자는 세계일보의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중에 나온 한 가지 대화를 언급해 두고자 한다. 그는 그 때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였는데, 일본에 오래 머물렀던 까닭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을 때 보안사령관이 노태우였다.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작가 한수산은 일본으로 떠날 때 밥그릇 하나 준비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어느 학교에 보내야 할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술회했는데, 그 기간은 1988년 8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4년 3개월이었다(1991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잠깐 귀국한 적은 있다). 그러니까 노태우 정권 5년 임기의 거의 모두를 ‘조국에서의 부재’로써 당시의 책임자에게 항의했던 셈이다. 이것은 작가 한수산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 상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작가가 상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쓴 「진흙과 갈대」의 인물들이 기자 검사 교수 등 일종의 권력 집단으로 설정된 것 역시 작가가 응어리를 푸는 한 방법론일 수 있다.
한수산 필화사건의 전말과 어처구니없는 실상은 정권의 시녀들이 ‘연재중인 소설'’의 부분부분을 문제삼아 연재작가와 연재 지면의 부장, 작가의 문우 등을 집단으로 데려다가 취조하고 고문했다는 데 있다.
작가 한수산은 1980년 5월부터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고 있었다. 중앙일보가 그 삼엄했던 1980년에 한수산을 연재 작가로 선택한 것은 작가의 인기, 그리고 한수산의 이름 앞에 붙는 ‘감성의 작가’라는 수식을 볼 때 지극히 ‘현명한’ 결정이었는데 그럼에도 필화로 이어진 것은 당시의 정권이 언론과 작가의 자구 하나하나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재는 1980년 5월에 시작됐지만 한수산 필화사건의 징조가 던져진 날은 1981년 5월 28일이다. 그 때 문화부장을 맡고 있던 비평가 정규웅(문학평론가)은 보안사 소령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수산의 제주도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욕망의 거리』 연재가 300회를 훌쩍 넘긴 무렵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정규웅은 『욕망의 거리』 중에서 군부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 대목을 샅샅이 찾아보았는데, 신문기자의 직감으로 판단하건대 두세 군데 대목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닦으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 그는 지금도 그 수위 복장에 대해서 남모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그는 자신의 그 꼴 같지 않게 교통순경의 제복을 닮은 수위 제복을 여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두 대목은 당시의 집권자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억지 춘향을 만들 여지는 있었지만 30대 여주인공을 내세운 도회적 욕망을 축으로 전개되는 작품 얼개를 볼 때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다 인정하는 한국 남자들의 공통성으로 보나 보안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해서 5월 29일 아침 정규웅 부장을 비롯 당시 손기상 편집국장 대리, 문예중앙 권영빈 주간, 허술 출판부장, 연재소설 담당 이근성 기자가 검은 세단에 태워졌고 작가 한수산은 제주도에서 비행기편으로 압송됐다. 이들 외에 연행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는 고려원 편집장을 하고 있던 시인 박정만이다. 박 시인은 작가 한수산과 1946년 동갑내기 문우인데, 작품에 영향을 미친 문우 이름을 대라고 족치는 보안사 고문관들에게 편집장과 작가의 관계로 알고 지내던 박정만을 말하자 무조건 끌어다가 인정사정 없이 고문했다.
이들이 3박4일, 혹은 4박5일 동안 서빙고동의 대공분실 이른바, ‘빙고하우스’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하며 취조당한 내용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연애소설이나 쓰지 왜 고위층을 비난했느냐는 것이고, 왜 고위층을 비난하는 소설을 쓰도록 사주했느냐는 것이었다. 박정만 시인을 비롯 연행당한 이들은 북한을 다녀오지 않았느냐고, 마치 고정간첩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물론 이 웃지 못할 사건의 관련자들은 차례차례 풀려났지만, 온통 몸이며 정신이며 넝마가 된 상태였다. 작가 한수산도, 시인 박정만도 폭음과 정처 없이 사라지는 ‘행불(행방불명)’로 그 상처를 달래려 했으나 상처는 씻기지 않았다. 작가 한수산은 1988년 5월 28일, 그러니까 보안사의 ‘한수산 수배’가 있은 지 꼭 7년 만에 교보문고에서 만난 독자들 앞에서 절필선언을 한 후 그 해 8월 일본으로 떠났다. 시인 박정만은 더욱 불행한 삶의 자취를 남겼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이후 매일 소주 두 병씩을 비워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던 그가 1988년 10월 2일, 당시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어 개최한 서울올림픽 폐막식 날 화장실의 변기 위에서 그만 숨을 놓아 버린 것이다.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작가와 시인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타국에서의 삶에 뛰어들고, 깡소주의 취기와 맞서면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던 그 시간에 당시의 보안사령관은 올림픽 개최국가의 대통령으로 전 세계에 중계 방송되고 있었다.
필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두 개의 후일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문단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이지만, 작가 한수산 씨가 당시의 고문관으로부터 용서를 비는 편지를 받고 감동해 작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1990년대 중반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실상을 소상히 아는 인사가 ‘한수산 필화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후 언급한 것이다. 그 때까지 필화가 빚어진 단초를 모르고 있었다는 그 인사는 필자에게 “당시 그 정도 사건은 보안사 소령 정도는 나서지도 않았다. 아마도 하사쯤이었을 것이다”라고 코멘트했다. 그러니까 정규웅 부장에게 보안사 소령이라며 접근한 사람은 계급을 사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하지만 절대로 우스꽝스럽지 않다. 그들은 차례로 철제 의자에 앉혀진 채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고,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 찜질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작가 한수산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겨웠던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며, 시인 박정만은 시집 『저 쓰라린 세월』의 후기에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라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사망하기 며칠 전에 쓴 「종시(終詩)」에서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고 단 두 행으로 자신의 운명을 읊었다.
작가 한수산은 최근 일본에서의 심층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재일 한국인의 원폭피해 참상을 실화처럼 재생한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 『까마귀』를 냈다. 『까마귀』를 보면서 필자는 이 작품의 태생적인 동기가 작가 한수산의 일본 거주 4년 2개월에서 시작됐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고 지금 신영복 씨의 『엽서』 중 ‘감옥에서는 겨울나기가 오히려 편하다’는 대목을 떠올린다. 그것은, 겨울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덮혀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데 반해 여름에는 사람의 체온이 서로를 밀쳐내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작가 한수산이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필화의 상처로 정신을 덮힘으로써 어떤 상처도 작가를 영원히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장소 : 군 수사기관 지하실
장면 : 군정보원에게 한수산과 박정만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
- 군정보원 : 야, 한수산. <<욕망의 거리>>는 누구 지시로 쓴 거야? 엉?
박정만이야? 정규웅?, 아니면 권영빈? 빨리 바른대로 대지 못해!
- 한수산 :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소.
대한민국엔 표현의 자유도 없단 말입니까? ..(고문을 당하며)으악!
- 군정보원 : 박정만, 네가 시켰지? 소설나부랭이를 쓰려면 거 근사한 거 있잖아.
연애 소설이나 쓰지 않고, 왜 고위층을 비난하고 그러냐구.. 에잇!
- 박정만 : (고문을 당하며)헉, 으으... 우리는 어떤 일도 모의하지 않았소.
단지 편집장과 작가로 만나는 사이란 말이오.
- 진행자 : 당시 군정보부는 이들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발견할 수 없자,
3일 만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후로 한수산 씨는 일본행을 택했고,
박정만의 생활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박정만 : (비틀거리며 걸으면서 독백) 여보.. 난 대한민국처럼 짓이겨졌어.
내 딸 송이야... 세상이 사람을 이렇게도 다치게 하는구나. 으흑흑..
- 진행자 :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를 몸져눕게 했으며,
가정적인 불행이 이어졌습니다. 부인과의 이혼 후,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었고,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하루에 소주를 2병씩 마셔야만 했습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겪은 후 그는 알콜중독으로 망신창이가 된다.
그러나 죽음을 맞기 1년 전
단 20여일 동안 무려 300여 편의 시를 쏟아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인다.
이때 그는 기존의 허무주의를 넘어
현실비판과 참여의 의지를 거침없는 시어로 보여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의 생명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치는 절명의 순간에
接神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러 그 일을 치러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이미 전설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올림픽 폐막식 날인 88년 10월 2일,
노태우 대통령(고문당시 정보사령관, 박정만의 가해자)이
서울 올림픽 폐막식 연설을 하는 시간에
그는 자신의 봉천동 셋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http://kr.blog.yahoo.com/morolovebini/247.html 에서 퍼옴
비는 줄창 내리고
박정만
비는 눈물같이 줄창 내리고
창은 보랏빛으로 젖어 있다.
나는 저 산쪽
외로운 한 사람을 생각하노라.
그대 생은 어디 있는가.
가고 없는 사람은 생각 말고
돌아올 사람도 생각지 말자.
한 떨기 풀잎을 바라보자.
그냥 그 뜻대로 지고
산천도 언제나 조용하게 저물었다.
인간은 다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