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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로 유감
강릉의 역사 강릉의 옛 이름은 〈하슬라〉이다. 무슨 보컬그룹 이름 같기도 한데 사실은 ‘아침 해’라는 뜻이 담긴 우리말이다. 삼국유사에서 나와 있는 이 지명은 신라시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이후 강릉은 명주, 임영으로 불리웠다. 강릉은 그 이름처럼 해뜨는 마을이다. 해돋이 관광으로 유명한 ‘정동진’은 경복궁에서 볼 때 가장 동쪽에 위치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강릉의 아침해는 언제, 어디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울까?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라보는 일출을 생각하겠지만, 강릉 시내에서 대관령을 향해 펼쳐지는 아침햇살의 그 황금빛 장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특히 우리 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붉은 색깔의 소나무(홍송)숲을 비추는 아침햇살은 맑은 공기 속에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태고의 신비가 간직되어 있다. 앞서 강릉의 옛 이름을 언급한 것은 강릉의 오랜 역사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오늘 날 강릉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맥의 수도였던 강릉,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쟁패기간 동안 고구려와 신라 영토를 오갔으며, 그후 신라의 땅이 되어 신라왕족이 다스리던 곳이다. 후삼국시대에는 명주성의 성주가 당시 미륵이라며 추앙 받던 궁예에게 명주성(강릉)을 그대로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는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하다. 그후 강릉은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지지기반이 되었고 몇몇 사람들은 왕씨의 성을 받기도 하였다. 강릉의 뿌리 강릉시내 강릉여고 옆에는 〈용지각〉이란 유적지가 있다. 고려의 부마 김문환과 그가 아끼던 백마의 전설이 담긴 곳이다. 아마도 고려 공주의 남편 김문환은 쓰러져 가는 고려 왕조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성과 강릉을 오가다가 지금의 용지각에 말을 매어 놓았는데, 공주와 부마의 슬픔을 보다 못한 백마가 연못에 몸을 던져 마침내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이야기다. 고려왕실과 강릉의 관계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유적지는 학산의 〈굴산지지〉다. 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한 이 절은 9대 선문의 하나다. 이 굴산사는 신라시대 이래 강릉의 정신적 지주였다. 아마도 명주성 성주가 궁예에게 명주성을 내준 것도 굴산사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굴산사는 고려말 왕들이 최후 피난처로 선택한 곳이기도 했다. 이성계에게 쫓기던 고려왕족은 굴산사로 피신을 하였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보호지가 이조왕조에 들어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굴산사는 오늘날까지도 당간지주만 덩그라니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굴산사의 창건자 범일은 오늘날의 강릉의 최대 축제인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강릉의 정신은 범일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범일의 불교사상은 강릉 보광리 보현사의 낭원대사 등에게 이어졌으며 우리나라 선종의 전통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릉하면 율곡과 사임당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또다른 인물들도 강릉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떠오를 전망이다. 강릉시민들은 ‘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를 만들어 역사 인물로 가꾸고 있다. 강릉에 연고를 둔 역사적 인물로는 이들 말고도 김시습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을 늘어놓고 보니 강릉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금오신화」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고장이요, 현모양처와 페미니즘을 각각 대표하는 사임당과 난설헌의 고향인 것이다. 특히 허균은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 불교와 기독교의 세계를 탐색하였으며 그의 실천적 학문은 계습사회 타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허난설헌은 오늘날 21세기의 철학적 이슈인 페미니즘을 몸소 실천하였던 여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천재남매의 생각은 오늘날의 철학적 화두인 ‘화해론’, 그리고 ‘에코 페미니즘’을 이미 400년 전에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시도를 이 땅 강릉에서, 강릉시민의 힘으로 일으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연인의 도시 강릉 강릉은 연인의 도시다. 신라시대에는 그 유명한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이 그의 남편 순정공을 따라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 때는 아마 화창한 봄날이었을 터. 동해안 절벽에 피어있는 꽃을 꺾어 달라는 당대 최고의 미인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장면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주빛 바윗가에 잡은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꽃을 꺽어 바치겠나이다. 신라의 향가 ‘헌화가’의 땅이 바로 강릉이다. 천년 로맨스의 고장인 것이다. 수로부인은 경주에서 강릉을 향해 오던 길에 용왕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때 수로부인을 구해 내는데, 그 노래가 바로 ‘구지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약 머리를 안 내놓으면 내 너를 구워 먹으리 이러한 수로부인의 역사적 장소가 오늘날 강릉에 재현되어 있다. 구지가와 헌화가의 전설이 어려있는 ‘헌화로’가 그곳이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들이 강릉 정동진의 해안도로인 ‘헌화로’를 찾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엔 수로부인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안내문 하나 없다. 몇 년 전에 강릉 정동진에는 해안도로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한 방송사가 주관하여 그곳의 기암괴석과 도로 이름을 공모한 바 있었다. 그때 우연히 방송국에 들러, 그곳 사람들에게 수로부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 PD가 “그럼 이 해안도로의 이름을 헌화로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길래 ‘좋네요’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헌화로’라는 이름이 도로 이름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방송국의 PD가 내 설명을 듣고 생각해 낸 것인데 응모자 이름은 나로 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나는 새로 난 도로를 구경조차 못했는데. 그 도로 이름을 지은 사람이 되었고, 졸지에 유명한 작명가가 되어 버렸다(얼마 후 연곡의 어떤 분은 그가 신축한 모텔의 이름을 좀 지어달라고 나에게 부탁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내가 무슨 작명가라고)! 감사패를 받으러 시상식장이었던 도로 개통식에 찾아갔다. 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해안도로는 생겨서는 안 될 도로였던 것이다. 내가 강릉에 와서 가장 많이 간 곳인 정동진 포구였다(현재 정동진 기차역이 있는 관광명소에서 꼬불꼬불한 길을 약 10여분 넘어 가면 바로 정동진 포구다). 이곳은 주변이 바위로 둘러있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모래가 아닌 조약돌로 된 해변이 있어 아름다운 포구였다. 아뿔싸, 그 조약돌 해안을 없애고 그 위로 길을 내고는 넓고 황량한 해안도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이런 길을 만들었는가? 이 조약돌 해안을 살리면서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해안에서 가장 특색있고 아름다운 포구가 사라졌다.
내가 이 예를 든 것은 하슬라의 꿈이 서린 도시 강릉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온통 망가지고 있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정동진의 그 아름다운 포구를 없애고 멋없이 덩치만 큰 해안도로를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개발이다’, ‘이것이 관광자원이다’ 심지어 ‘환경친화적 개발이다’라고 뻔뻔스럽게 강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오늘날 하슬라의 꿈을 앗아가는 자들이요, 강릉을 망친 자들임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토지․자본․노동이 아니라 이미지가 생산재이며, 무한재라던 공기․물이 유한재이자 경제재임을 간파하는 앨빈 토플러의 글 한 조각 읽어보지 못하였다고 해도 좋다. ‘지속 가능한 개발’의 의미를 모른다고 해도 좋다. 희귀하기 그지없는 조약돌 포구를 없애고 길을 만드는 것이 어떤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그 상식 이하의 정책결정이 어찌 강릉뿐이겠는가! 강릉은 수로부인의 천년 로맨스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홍장’이라는 기생과 부사 박신의 로맨스가 경포호수 주변에 담겨있는 장소다. 그 뿐인가, 정동진역에는 현대의 로맨티스트로서 ‘모래시계’의 주인공 혜린의 슬픔이 담겨 있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그 정동진은 3류 까페촌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지만. 내가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 기생 홍장 그리고 모래시계의 혜린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관광자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바로 생산재이기 때문이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물결이 자도잔제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 하건마는 어쩌다 우리 왕손은 가고아니 오노매 수로부인과 관련하여 ‘헌화가’가 있듯이 홍장 또한 멋진 시조를 남겼다. 이처럼 홍장의 로맨스가 펼쳐진 경포대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어디 홍장의 시를 새긴 비석이 하나 있는가? (이 글을 쓴 아주 오래 후에 경포대에 가 보니, 거기 홍장암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홍장의 시비〉나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경포대〉를 욾은 부분이 새겨진 비석은 없고 도대체 독립기념비는 왜 그렇게 세워져 있어야 하는가? (역시 이 글을 쓴 지 한참후에 경포대에 올라 보니, 그 뒤에 송강의 비석이 여러개 세워져 있었다.) 어지러운 여관촌은 또 무엇이던가? 경포대에 완충지를 두고 그곳의 바깥 쪽에 위락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 법 한데 그저 야금야금 경포대를 망가뜨렸지 않은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강릉의 상징 경포대에 골프장을 지어 고급손님을 유치해야 한다는 ‘유치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발상이 오늘날 강릉을 지배하고 있다. ‘문화예술도시 강릉’ 이란 캐치플레이즈를 내세우는 오늘날 이 지역 세력가들이나 정책 결정자들 그리고 여기에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언론이 합작하여 하슬라의 꿈을 망치고 있음을 나는 통탄하는 것이다. 좋은 도시의 조건 그렇다면 강릉은 무엇이 남는가? 아니, 강릉이 그렇게 망가졌다고 한다면 왜 강릉에는 아직도 여전히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가? 강릉에 골프장이 있고, 콘도와 편안한 숙박시설, 유흥시설이 있어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광도시의 조건 아니, 좋은 도시의 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세계의 여러 도시를 많이 여행해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본 도시를 통해, 좋은 도시의 조건은 분명 강릉을 개발하여 관광수입을 올리려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좋은 도시의 기본 조건은 〈청결, 친절, 질서〉그리고 <푸르름>이다. 일본의 수상을 지낸 호소가와 구마모토가 현장(縣長)을 할 때 이즈모시의 이와꾸니 시장과 함께 쓴 책 「지방의 논리」를 보면, 문명의 기준은 ‘푸르름’이라 했다. 나는 이러한 조건에 더하여 문화 예술적 미학을 좋은 도시의 조건에 넣는다. 김용옥 교수가 방송강의를 통해 공자의 예술론을 강의하며, 오늘날 한국의 건축이 고건축의 기능과 아름다움만도 못하며 심지어 ‘심미적 분노’를 느낀다는 데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강릉은 유럽인들이, 일본의 정치가들이 문명의 기준이라고 하는 푸르름을 지키기는커녕, 국내에서 유일하게 강릉에만 자생하는 홍송을 수도 없이 없애 버리고 콘크리트 도시를 만들어 버렸다. 율곡선생 또한 〈호송설(護松說)〉이라는 글을 써서 후손들에게 소나무를 베어 없애지 말라고 당부한 그 소나무들을 죽여 없애면서도 매년 성대한 율곡제를 벌이는 이 모순을 보며 나는 도대체 정치가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나는 트럭에 실려 팔려 나가는 강릉의 소나무를 보아야 했다). 이웃도시가 더 잘사는 것 같아 배가 아프고(John's effect), 다른 지역이 더 부자인 것처럼 보이는 이 상대적 박탈감이 어쩌면 하슬라의 꿈을 죽이는 진범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삶의 양이 발전의 지표인 양 내세우는 개발론자들이 이 강릉을 죽이는 공범인지도 모른다. 좋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같은 경제학자의 역설을 몰라도 좋다. 서울 같은 대도시의 그 혼탁한 공기를 며칠만 마셔도 강릉이 얼마나 좋은 곳임을 알텐데 그 가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푸르름이, 청결이, 질서가, 친절이, 이미지가 돈이 됨을 아직도 모르는 것은 오늘날 강릉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하슬라의 꿈 강릉에 살면서 나는 이런 꿈을 꾸어본다. 만약 나에게 건물을 없애거나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또 신데렐라의 요술쟁이처럼 지팡이를 휙 저으면 호박이 마차로 변하는 그런 마술이 있다면, 그래서 지금의 강릉을 마음껏 재 디자인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 우선 많은 건물, 특히 ‘심미적 분노’를 느끼게 하는 건물을 없애야겠지. 첫 번째 대상은 강릉의 정책 결정자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강릉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하천을 자연상태로 되살리고, 모든 죽어간 소나무도 다시 되살릴 것이다. 30만 평의 소나무를 없애고 만들어 놓은 경포대 골프장도 없애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옛사람들이 지었던 임영관, 굴산사, 신복사 그리고 허균의 애일당을 복원할 것이다(임영관터는 시청사로 지으려고 땅을 파던 중. 유물이 발굴되어 다행히도 공사가 중지되고, 문화재청에서 임영관을 복원하게 되었다) 용지각, 옥천동 당간지주 등 30여개가 넘는 유적지는 일본 ‘나라현’처럼 완충지를 두고 그곳엔 사슴들을 거닐게 하며, 유적과 현대인의 삶이 하나인 그런 강릉으로 만들어야 되겠지. 경포대 골프장은 다시 소나무 숲으로 복원시키고, 경포대는 차 없는 공원으로 만들 것이다. 호수 주변의 그 어지러운 건축물은 다 완충지역 밖으로 옮겨 버릴 것이다. 남대천 위에는 멋진 단오교를 하나 놓고 공설운동장은 단오공원으로 만들어야 하겠지. 그리고 도심의 주차장은 밖으로 빼내고, 그곳에 북경 ‘시딴(西單)’의 문화공원 같은 공간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또 있다. 오죽헌도 손 좀 봐주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같이 만들라고 지시하여서, 또 육영수 여사가 좋아한다는 그 베이지색 기둥으로 온통 단장하여 성역화한 오죽헌을 옛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겠다. 도대체 이율곡이 이런 성역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독일의 자랑 괴테의 집은 어떤가? 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없어진 〈괴테하우스〉를 시민들이 나서서 거의 완벽하게 그대로 (성역화 한 것이 아니라 괴테가 살던 그대로)복원시켜 놓지 않았나? 물론 강릉을 유럽의 프라하, 잘츠부르크, 러시아의 노보그라드 같은 고풍스런 도시로 만들 수는 없겠지. 그러나 우리 초가지붕의 아름다운 선을 살린 건축물들을 만드는 요술이 내게 있는데, 아니 〈선교장〉같은 고건축물이 아직 살아 있는데, 왜 그 비슷한 개념의 건물들을 못 만들쏘냐? 이런 나의 꿈이 환상일까, 환상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꿈도 없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가능하다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나는 중국에 살며 중국인의 생각을 배웠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우공이산〉의 지혜다. 집 앞의 산을 옮겨야 하는데 그 산을 내가 다 옮기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다. 남들이 비웃으면 어떠냐, 그러나 내가 시작하면, 그 다음 내 아들이, 그리고 손자가…. 이렇게 하여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중국인들은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안되는가? 나는 누군가 강릉을 다시 만들어 낼 지도자가 나와서, 50년 후 아니, 100년 후의 강릉을 설계해 놓기를 애타게 기대한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강릉의 상징 〈임영관〉을 복원하려고 해도 그 앞의 우체국이 커다란 방해물이 된다. 그렇다면 이 우체국은 어디론가 옮겨지고 그 건물이 없어져야 임영관이 살고 강릉의 도시가 살아 나온다. 우체국을 그곳에 짓도록 허가한 고관을 찾아가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마땅하겠지만, 참자, 그리고 30년 후, 아니 100년 후의 강릉을 위해 그 우체국 이전 계획을 세워보자. 우리가 못하면 우리보다 더 훌륭한 후손들이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 도시는 많은 돈을 들여서 이른바 ‘10년 장기발전 계획’을 수립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10년 이상은 못 보는가? 나는 아직 10년 이상의 발전계획이 세워진 도시를 못 본 것 같다.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프랑스 파리는 어떤가? 100년 후의 파리를 내다보고 도시계획을 세운다고 하지 않는가. 100년은 아니라도, 나는 50년 아니 30년 후를 생각하는 발전계획, 도시계획을 세우는 자치단체를 보고 싶다. 문명은 결코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만으로라도 강릉을 지켜내야 한다. 오늘날 강릉은 과거 30년 전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의 강릉이 지닌 경제적 가치만도 못하게 변해 버렸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아침해의 도시 강릉, 하슬라의 그 슬픈 꿈을 나는 오늘도 꾸어 보련다. |
첫댓글 이 글은 새벽들 제3호(복간호)에 기고하신 정인화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