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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트위터에 남긴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영원히 76er 일 것이고, 그의 은퇴식을 환영하고 기념해준 모든 식서스 팬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그가 밝힌 은퇴후 첫번째 계획은, 그동안 "cheat" 해온 그의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특히 그의 첫째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짝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은퇴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답다, 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는 여전히 성장중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평생을 망나니의 이미지로 살아온 그 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가질 때에나 가지지 않을 떄에나 늘 조금씩 성장해 오고 있었어요. 다른 이들보다 두배는 더 커보이는,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한 느낌의 그의 눈동자처럼 그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영악하게 살아가기에는 너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을 수도 있고, 악한 무리들의 꼬임에 너무 쉽게 넘어가버릴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가,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 와서, 이제는 다 커버려 아버지를 증오할지도 모르는 그의 딸에게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를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공식적으로 밝힌 은퇴 후 계획은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은퇴라면 받아들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2. who is that kid?
제가 NBA 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건 초등학교 (전 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만..) 6학년때 짝꿍으로 한 친구를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때까진 저도 마이클 조던이나 매직 존슨 정도만을 알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죠. 그 친구는 소위 부자 동네라고 일컬어 지는 평창동에 살고 있는, 진짜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잘 닦여진 농구 코트가 있었고, 그 친구는 매주 주말 친구들을 불러 함께 농구를 하고 미리 녹화를 해 놓은 AKFN 에서 토요일 오후마다 해주던 NBA 게임을 함께 보면서 열띤 토론을 하던, 농구광이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초대를 받았고, 저는 그의 책장에 수북히 쌓여있던 비디오테잎들을 공짜로 빌려 와 여러 게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돌아가며 녹화를 뜨는 그룹에 속해 저의 순번이 되면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녹화를 해 달라고 성화를 부리던 아이가 되었죠.
당시 우리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크리스찬 레이트너를 좋아했고, 이후 드래프트된 케빈 가넷이 우상이었습니다. 물론 페니 하더웨이와 라트렐 스프리웰도 좋아했죠. 멋있잖아요. 그렇게 중학교때까지 모래 바람을 실컷 들이마시며 교복을 입은 채로 해가 질 때까지 농구를 하면서 멋진 레이업폼을 갖고 말리라 다짐했던 시절을 보내고 저는 밤 열시까지 매일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 했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NBA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습니다. 열심히 챙겨보는 수준은 아니었고, 아침마다 해주던 NBA 중계를 쉬는시간에 친구들과 보면서 수다를 떠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이 마이클 조던과 불스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저만 혼자 유타 재즈나 인디애나 페이서스같은 언더독 팀들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레지 밀러가 이끌던 당시 페이서스는 진짜 매력적인 팀이었죠. 릭 스미츠, 안토니오/데일 데이비스, 제일런 로즈, 마크 잭슨.. 조금 시기가 이르긴 하지만 샬럿 호네츠를 좋아했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알론조 모닝, 래리 존슨, 허시 호킨스, 보그스..
아무튼, 그렇게 3년동안 NBA를 거의 보지 못하고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제가 당시 다니던 대학교 도서관 1층에는 '도라지'라고 불리우는 -도서관 라운지의 줄임말입니다- 작은 카페테리아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생뚱맞기도 한 일인데, 그곳에는 구형 브라운관 TV가 있었어요. 입학 후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와중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고, 복학생 형아들부터 저같은 새내기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조그만 텔레비젼 앞에서 모두가 경이로운 눈빛과 미친듯한 환호성으로 응원했던 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Allen Iverson 이었습니다.
그가 48분동안 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일종의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공식 신장은 6-0 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작을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키가 딱 저만한 선수가 2미터가 넘는 선수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게임당 30점을 퍼붓는 모습을 보는 일은, 단순한 환호가 아닌 그 이상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해 아이버슨은 MVP를 수상했고 팀은 파이널까지 진출합니다.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게 패배할 때까지 식서스의 모든 게임을 그 카페테리아의 작은 TV를 통해 지켜봤습니다. 많은 새내기들이 그러하듯이 저에게 수업은 뒷전이었어요.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성적은 학사경고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전 제가 그 이후 NBA를 다시 보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그 플레이오프만큼 처절하고 아름다운 과정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지 밀러가 이끌던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1라운드 시리즈.
빈스 카터가 이끌던 토론토 랩터스와의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 시리즈.
그리고 '빅3'가 버티던 밀워키 벅스와의 컨퍼런스 파이널.
이 세 시리즈동안 아이버슨이 당한 부상은 당시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최소한 열군데가 넘었던 것 같은데요, 승부욕이 무척 강했던 당시 아이버슨이 게임을 걸러야 할 정도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토론토와의 시리즈에서는 학사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결장을 택했던 빈스 카터와의 쇼다운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었죠) 그런 그는 끝까지 참고 버티며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결승에서 현격한 팀간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게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파이널이 끝나고 이 카페를 검색해 들어와 가입하게 되었으니, 아이버슨이 저와 이 카페를 연결시켜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저는 그렇게 식서스를 1년 더 응원하다가 식서스와 비슷한 수비 중심의 팀컬러에 식서스보다 더 팀웤을 중시하던 피스톤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다가 그만(..)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등병 시절 각 잡고 소리로만 티비를 보던 시절 피스톤스가 레이커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전역 후 04-05 파이널을 보면서 피스톤스의 팬이 되었습니다.
3. an icon
전역 후 본격적으로 농구를 좋아하게 됨과 동시에 제 생활은 무척 바빠졌습니다. 복학생의 생활은 하루 하루가 힘겹죠. 수업 들으랴, 스터디 하랴, 취업 준비 하랴,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하랴..군대를 나오면 쇠도 씹어 먹을 줄 알았는데 군대 밖의 세상이 몇배는 더 힘들더라구요. 당시 유일한 낙은 농구를 함께 좋아하던 친구와 가끔 공을 들고 농구장으로 가서 실컷 땀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농구 후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가지고 와서 벤치에서 하염없이 시시껄렁한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당시 힙합을 좋아하던 친구와 저는 아이버슨이 리그에 끼친 문화적인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는 어느 시전부터 흑인 문화의 상징처럼 대중에게 인식되어 왔습니다. 버지니아에 있는 햄튼이라는 작은 마을의 한 볼링장에서 17살이던 그와 친구들이 벌인 소동은 이미 그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빌 시먼스가 기획한 ESPN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연작 30 for 30 <No Crossover> 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내가 소녀의 머리를 의자로 치는 정신나간 짓을 하리라고 생각하느냐" 며 강하게 항의한 이 사건은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이 천재적인 재능의 한 소년의 미래를 걱정케 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농구는 참 개인적인 팀 스포츠이지요. 자칫 모순되게 들리기도 하는 이 표현은 현대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들중 유독 농구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는 신체적인 능력이 다른 모든 노력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이기도 합니다. 또한 농구는 현존하는 인기 구기 종목들중 가장 적은 인원이 코트 위에 들어서는 스포츠이며, 한 선수와 다른 선수가 공간에 대한 배분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과 수비 모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유일한 스포츠이기도 합니다. 즉 선수 한 개인의 능력이 경기 내용과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스포츠라는 뜻이 되겠지요. 게다가 농구는 전체 스포츠를 통틀어 한 선수의 신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종목이기도 합니다. 클로즈업이 매우 용이한 실내 스포츠이고, 어깨부터 시작하는 팔 전체와 무릎무터 시작하는 다리 전체가 그대로 노출되는 유일한 종목입니다. 자연스럽게 관중과 시청자는 농구를 보면서 선수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이버슨이 등장하기 전까지,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와 함께 NBA 의 상품화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선수 개인을 통해 상품화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신발이었습니다.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나와야 하는 농구 경기에서 사실상 스타 선수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농구화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물론 조던이 왼쪽 팔뚝에 차던 아대는 <슬램덩크>등에서 그대로 재현되기도 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경에서 한해서 행해졌고, 나이키라는 거대 기업이 전세계적인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농구화였습니다.
아이버슨은 콘로우라는 헤어스타일과 힙합스타일의 의상, 그리고 슬리브라는 게임 장비를 트렌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온 몸을 장식하고 있던 문신들은 이제 리그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갖는 장식품이 되었구요. 아이버슨은 자신의 몸으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농구선수로 기억될 수 있을 겁니다. 콘로우를 통해, 패션을 통해, 문신을 통해 그는 코트 위에서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냈습니다. 그가 유행시킨 이러한 표현들은 대기업에서 상업화하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이지요. 때문에 스턴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레스 코드를 설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대기업이 아이버슨의 힙합 패션을 상업화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면 스턴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르브론 제임스는 최근 인터뷰에서 오직 마이클 조던과 앨런 아이버슨만이 그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조던이 농구 내적인 측면에서 그러했다면 아이버슨은 제임스의 농구 외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비단 제임스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았고 현재 리그의 주인이 된 세대들은 아이버슨을 보며 꿈을 키웠을 겁니다. 그가 흑인 문화의 아이콘으로서 존재하면서 흑인이 대부분인 리그에서 비로소 흑인의 주체적인 문화적인 컨텐츠로 그 리그를 다시 재정의내리는 것을 보면서 컸을 겁니다. 그는 조던 이후 NBA 의 '공기' 를 바꾼 최초의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제임스와 다른 선수들의 주변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는 문제아였습니다. 드래프트 당일 '덩치' 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공기를 이상하게 만들었고 "그의 주변이 수상하다" 는 걱정스러운 말들을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practice?" 사건으로 모든 이들이 그에게 게으른 천재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었으며, 실질적인 은퇴 이후 댈러스 매버릭스의 NBDL부터 시작하는 복귀 프로그램을 거절함으로써 여전히 콧대가 높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개 석상에서 눈물을 스스럼없이 보이는 순수한 어린아이기도 했습니다. 감독과의 불화는 그의 미성숙함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세상과의 소통에 서툰 어린아이의 어리광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의 스피드가 죽어 버리고 그의 발이 땅에 붙어 더이상 움직이지 않으며 키가 큰 장신 수비수들 머리 위로 페이드어웨이 샷을 성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도 여전히 코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멍청하고 오만한 천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농구를 그저 사랑했고 농구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산 고지식한 소년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4. see you again.
2008년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나왔습니다. 콜로라도의 덴버 주변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겨우 생활에 적응해 가던 2008년 가을, 천시 빌럽스와 앨런 아이버슨의 트레이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저는 당시 피스톤스를 응원하고 있었고, 덴버 주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의 대학원 친구들이 트레이드가 발표한 날 아침 저에게 안부를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아이버슨과 저는 다시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덴버에서의 아이버슨의 커리어를 설명하는 방법은 사실 그리 풍부하지 않습니다. 2001년 우승 실패 이후 식서스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덴버로 이적한 아이버슨은 팀을 1라운드 이상으로 올려놓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04년 우승 이후 완만한 하락세를 타고 있던 피스톤스 역시 변화를 원하던 차였고, 그렇게 양 팀의 니드가 맞아 아이버슨이 파란색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콜로라도가 고향이었던 빌럽스는 이적 후 팀을 컨퍼런스 결승까지 올려 놓음과 동시에 여러가지 다양한 사회 활동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반면, 피스톤스로 이적한 아이버슨은 플레이오프에서조차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멤피스와 필라델피아를 떠돌다가 리그 생활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에게 어쩌면 피스톤스는 커리어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나쁜 존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만약 덴버에 조금 더 머물러 있었더라면, 팀 성적과는 상관없이 조금 더 길고 안정적인 커리어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니폼을 팔기 위한 영입" 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멤피스로의 이적과 "desperate move" 라는 평가를 받았던 필리로의 복귀 모두 그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이버슨의 경기를 실제로 한번도 보지 못한채 그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저를 NBA 로 다시 불러들인 장본인이자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를 실제로 꼭 한번 보고 싶었지만, 바쁜 생활과 이적등의 영향으로 그를 경기장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지는 못했네요. 그가 코트 위에서 얼마나 빠른지, 또 얼마나 작은지, 한 경기에 몇번이나 코트 위를 나뒹구르며 쓰러지는지는 그의 경기를 직접 보고 온 친구의 목격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은퇴 후 아이버슨의 씀씀이나 재정 상태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걱정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사실 이 걱정은 현재까지 유효한 것 같아요. 그는 좋은 환경에서 안정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대학에 와서 존 톰슨을 만나면서 비로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적 성장은 어쩌면 성인이 된 뒤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전세계적인 미디어의 관심 속에서 보낸 지난 십몇년동안 그는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부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미리 가정에서 다 배우고 들어 오는 것들을 그는 세상과 부딪혀 가며 배워야 했습니다. 아버지 뻘인 존 톰슨이나 래리 브라운과 언성을 높이고 싸우면서 비로소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자신에게 진짜 농구를 하게 해준 은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연습을 필요없고 단지 자신의 재능만으로 세상과 겨루려 했던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커리어를 마감했고, 그만의 방식으로 삶을 배워갔습니다.
그래서 전 그가 비로소 겸손이라는 미덕을 배웠음을 확인한 댈러스로부터의 제안에 대한 거절이 담긴 트윗이 반갑기도 했습니다.
'나의 행동들이 NBA로부터 나를 빨리 은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주어진 다른 기회에 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이런 트윗도 했죠.
그의 입 (=손끝) 에서 "humbled" 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길고 긴 세월이 필요했으며 얼마나 긴 길을 돌아 와야 했을까요. 어쨌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앞을 내다 보고 있습니다. 그 기회가 더이상 NBA에서의 커리어가 아닐지라도, 그는 행복해 할 겁니다. 소원해진 자신의 딸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감사하는 중년의 사내가 그의 미래 모습이라면, 저는 그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5. so long, the answer.
그는 이제 더이상 코트 위에 없습니다. 그의 플레이에 열광하며 20대를 보내온 저도 어느새 30대가 되었네요. 서른은 스무살과 확실히 다르더군요. 저녁까지 공을 던지고 다음날에 또 농구공을 들고 나가는 그런 체력도 더이상 없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자신만만함은 내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나약함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렇게 제가 늙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 나이만할 때 아이버슨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시 한번 회상해 보게 됩니다. 그는 여전히 코트 위를 맹렬히 질주했고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함을 직감했지만 그 자존심과 에고가 그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었을까요.
30대가 되면서 새롭게 얻은 것들도 많습니다. 20대에는 가질 수 없었던 여유로움과 지혜를 얻었어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는 겸손도 얻었고, 모든 이들에게서는 각기 다른 배울 점이 반드시 있다는, 낮은 자세로부터의 배움으로의 열망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갈길이 멉니다. 아직도 졸업을 하지 못했고, 졸업 후 취직해서 밥을 빌어 먹으며 한 가정을 건사해야 합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나약한 제 자신을 보며 한숨만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포츠를 통해 인생을 배웁니다. 스포츠에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녹아들어 있지요. 우리가 화면을 통해 보는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백만장자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미디어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우리같은 평범한 이들과 다른 삶을 영위하던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부룩하고, 그런 사람들만 모인 작은 코트 위에서 48분동안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인생의 레슨을 배우게 됩니다. 그 교훈들중에는 순수하게 흘린 땀에 대한 소중함도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협력의 가치도 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정신력에 대한 중요성도 있습니다.
제가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켜본 the answer, Allen Iverson 은 결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흔들렸고 매 순간 방황했습니다. 건방졌고, 볼호그였으며, 때로는 수비를 게을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농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선택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며, 그 농구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코트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순간 그 뒷모습이 쓸쓸해보이지 않을 정도의 큰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이제는 그가 없는 코트 위에서 뛰는 젊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저는 여전히 무언가를 배울겁니다. 하지만 아이버슨만이 주는 가르침은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신체적 능력이 극대화되고 이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가장 작은 키로 가장 큰 농구를 했던 그의 은퇴 후 삶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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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부터 멋진 글 감사합니다. AI의 오랜 팬으로써 그의 은퇴가 정말 아쉽게 다가오지만, 정말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선수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던 시간들의 소중함도 동시에 느껴지네요~^^ 추천~!
와...선수에 대한 애정이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일반인의 신장으로 2미터 숲에서 매경기 30득점을 퍼붓는 선수가 또 나올지요.
ps. 밑에서 세번째 단락에 불구하고 오타나신 것 같네요.
아이버슨의 데뷔부터 은퇴까지 본 비슷한 연배의 팬으로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이제는 아버지로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Answer'를 응원하겠습니다.
멋진 글입니다. 단숨에 쭉 읽어내려갔네요.
멋진 글 감사합니다. 예전 저희 향수까지 불러 일으켜 주는 글이네요^^~
십대 때부터 삼십대가 된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떠나가는 것에 많이 슬펐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NBA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능력도 예전같지 않음에도, 그냥 아이버슨이니까 나의 우상이니까 꼭 돌아와 뛰는 걸 보고 싶었어요. 지금 실력이 어떠하건, 리그의 판도가 바뀌고 이제 팀에 큰 도움이 안될지라도 그냥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선수니까. 생각해보면 선수로 좋아했다기보단 마치 아이돌가수를 좋아하듯이 밤낮 미쳐있었는데, 그런 시간마저 모두 추억이 됐네요. 종혁님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애정이 듬뿍 담긴 글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감사합니다.
오 도라지라고 부르는 학교가 우리말고 또잇엇나?? 우린 티비같은거없는데ㅜㅠㅠ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추천!
팬심 가득 담긴 정성어린 멋지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버슨형님이 가족과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으시길!
정말 멋진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새 게이판의 첫글을 누가 끊을 것인가 했는데 종혁님이 장식하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 첫 스타트네요! 좋은 글 정말 잘봤습니다.
돌아오셔서 아이버슨을 배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봤습니다.. 이렇게 한명의 레전드가 떠나간다는 사실이 아쉽네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정이 가던 선수
종혁님이 제 예상과 달리 국민학교 졸업 세대 셨군요 ㅎ
좋은글 잘봤습니다 저도 피닉스, 유타, 필라델피아 이런팀들 응원했었어요. 엘에이와 필리의 파이널때 무톰보와 아이버슨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제 마음속 영웅의 은퇴를 저도 이제 받아들입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오 1층에 도라지라면 왠지 저희 학교 선배님이신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버슨 티맥 힐 키드 많은 선수들이 떠나갔네요 글 잘봤습니다
글 잘보고 갑니다.. 아이버슨.. 저의 우상이기도 했는데.. 마이클조던과 같이...생각해보니 그두명을 우상으로 정했었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