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행성 스강나하르
제1편
- 서막 -
지구 최후의 날
지구, 영원한 암흑에 잠기다.
인간의 잠재의식에는 ‘선(善)’과 함께 ‘악(惡)’도 엄연히 공존하고 있다. 선이 나 이외의 타인에 대해 베풀고 욕구를 인내하는 것이라면, 악은 타인으로부터 빼앗고 욕구를 억제치 못하는 본능인 것이다.
악은 선에 비해 극히 유동적(流動的)이고 파상적(波狀的)이며 격동적(激動的)이다. 선이 소극적이고 그 파장이 은근할 정도로 미약하다면 악은 적극적이며 그 파장이 가히 파괴적이다.
1.
서기 2010년 이래, 지구의 자연생태계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더욱 조직화된 인간의 무계획적인 개발로 인한 파괴행위로 급속히 황폐화되었으며, 그 결과 대부분의 원시수림이 소멸되고 자연엔 고등식물군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동물이나 조류들도 그 개체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감소하여, 그들 동식물을 보려면 동물원이나 식물원, 생태공원을 찾아가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
오염은 육지뿐만 아니라 너른 바다까지 잠식하였다. 온갖 중금속이 함유된 산업용폐수와 생활하수가 걸러지지 않고 계속 바다로 유입되면서 비소나 수은, 카드뮴, 납 등 중금속으로 인해 수많은 어패류들이 사라지고, 적조가 급속히 확산되어 대양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뿐만 아니라 해저 깊숙이 매몰한 다량의 핵폐기물로부터 방출된 방사능으로 마침내 바다는 정화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음은 물론 그 자체마저 거대한 오염물질로 전락하였다.
환경의 오염으로 농작물의 수확과 가축의 수효도 해마다 큰 폭으로 감소하고 대체식량의 생산도 한계에 이르러, 인류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굶주림에 의해 또는 원인도 규명할 수 없는 온갖 질병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특히 기형아의 출산이 부쩍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아이 낳기를 두려워하였으며 그로인해 기형아들은 낳기가 무섭게 산 채로 태워버리거나 땅에 묻거나 하는 것도 큰 문제 거리였다.
더군다나 0.3%에도 못 미치는 극소수의 신귀족층이 전체 경제력의 84.6%를 장악함으로써, 빈부의 격차는 그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 신귀족층은 자신들만을 위한 신낙원(新樂園)건설을 암암리에 추진하는 한편, 60억을 넘어선 인류의 개체수를 5억으로 줄여 그들을 노예화하겠다는 엄청난 음모마저 획책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절대다수의 하층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굶주림과 질병, 절망 속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형편이 되었다.
서기 2020년 이후, 마침내 우려해오던 대기권의 오존층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환경론자에 의해 오존층의 붕괴로 인한 가공할 피해를 예상하여 인류에게 숱한 경고를 보내왔지만, 그에 대한 재앙은 미처 손 쓸 겨를 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걸러지지 않고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유해광선파장과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방열, 방광 처리한 특수복을 온몸을 감싸듯 입지 않고서는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어 생활에 큰 불편을 겪기 시작하였다.
지표면의 온도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대기 중의 수분이 대부분 증발하면서 지구의 열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구촌 곳곳이 고온 건조한 기후로 대형화재가 빈번해지고, 초원이나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해갔다. 남북극의 빙하가 급속히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육지의 상당부분이 물에 잠기게 되었으며, 그러한 바닷물에 의한 침수현상은 갈수록 심해져 대부분의 육지가 바닷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다.
과거 인류가 이루어 낸 수많은 시설과 주거지역이 바닷물에 수장되는 비극을 초래하였으며, 그나마 침수되지 않고 남아있던 육지마저 예기치 못하게 거듭되는 해일, 태풍, 홍수, 지진, 고온건조 등 기상이변과 신종변이바이러스 창궐 등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사람 사는 곳마다 약탈과 살상행위도 끊이질 않아 그 아비규환이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렇듯 지상이 사람 살 곳이 못되자 대부분 재벌이나 권력층으로 구성된 신귀족층은 지하 몇 백 미터 깊숙이 지하도시를 건설하여 그러한 재앙을 피해 숨어들었다.
인간들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해 왔던 그들 신귀족층이 모두 지하로 잠적해 버린 지상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기존의 법질서와 체계마저 완전히 붕괴되어 약육강식의 세계, 인륜보다 생존이 우선인 세계, 즉 지옥이나 다를 바 없이 변해 갔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굶주리고 병든 인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폭력과 약탈, 살상이 난무하지만 모든 국가의 공권력은 그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인류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하는 것은 유전자변이에 의한 기형인간들의 속출이었다.
대규모의 자연재앙과 도시마다 휩쓸고 지나간 각종 돌연변이전염병의 창궐, 기아와 영양결핍 등으로 63억에 달했던 인류는 불과 2~3년 사이에 절반가까이 희생되었다. 비로소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수장(首長)들과 국가정상들은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멸종과 지구의 종말’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지구적 차원의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일국가로 통합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서기 2021년 10월 1일, 마침내 몰리브, 네팔 등 몇 개 국가를 제외한 190여 국의 정상이 스위스 몽트뢰에 모여 단일국가로 통합하는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명실 공히 초강력연합국가 <유니타스>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당시 미국대통령인 프랑스계 <리처드 말콤>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리처드 말콤은 취임 직후, 전 세계에 전시상황인 1급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정예특수요원으로 구성된 이른바 인간 사냥꾼부대 <헤이븐 밀리터리(HM)>를 배치하였다. 에치엠의 가장 큰 임무는 지구의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중단시키는 것과 치안유지로써, 그에 대한 범법이 인정될 경우 죄질의 크고 작고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
리처드 말콤은 인류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먼저 집단거주체제와 철저한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한동안 개개인의 인격과 권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조치와 규제들로 인류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리처드 말콤에 의한 강력한 통치, 이른바 ‘죽음의 행진’으로 불리는 <리사이클링프로그램>에 의해 지구의 환경은 불과 10년 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리사이클링프로그램에서 이룬 가장 큰 성과는 환경관련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인류의 주거지를 태양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층권 28킬로미터 상공에 2억4천 평방킬로미터의 넓이에 두께 3.2킬로미터에 이르는 인공오존층 <헬로우 파파>를 형성하고, 수몰된 지역의 복원을 위해 2천6백40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인공수막을 설치했다. 그리고 육지와 대양 할 것 없이 만연된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극초자극성(極超磁極性) 순환펌프도 개발되었다.
리처드 말콤은 연합국가 유니타스 대통령에 세 번 연임하면서 잔혹한 철권통치로 인해 인류로부터 숱한 원성을 샀다. 그리고 그 결과 일부 기득세력에 의해 부추김을 받은 일견 영웅심리에 사로잡힌 그의 최측근 이집트계 <압살라 키케르>에 의해 대통령궁 집무실에서 총탄세례를 받고 피살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때가 서기 2032년7월22일 오전11시13분경으로 인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음은 물론 4년 후엔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구의 환경은 리처드 말콤 집권 11년 만에 눈에 띄게 좋아졌다. 빗물을 직접 받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대기권이 맑아졌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모여 들었으며 산야에는 푸른 초목이 되살아났다.
리처드 말콤의 사후, 유니타스 각료회의에서는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32인으로 구성된 원로원 집정제를 도입하였다. 따라서 원로원회의의 영향력은 초법적이었으며, 그에 속한 인사의 명단은 특1급 국가보안으로 처리되어 극히 제한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원로원회의에서는 제4대 대통령으로 러시아계 <알렉산드로 미하일로프>를 선출했고 그해 9월10일 미하일로프는 대통령직에 정식 취임함으로서 리처드 말콤의 임기 잔여기간을 승계했다.
서기 2033년6월18일, 리처드 말콤 유니타스 전 대통령 암살범 압살라 키케르는 사건발생 7개월 만에 안데스산맥 중턱의 한 비밀스런 지하별궁에서 에치엠에 의해 사로잡혔고, 다음날 콜로라도 주 록키 플래츠에 위치한 <아나콘다 특별재판소>의 구치소로 긴급 이송되었다. 재판부는 비공개재판을 통해 압살라 키케르를 산채로 밀랍인형으로 가공하여 영구히 인류에게 공개할 것을 명하였다. 그 형벌이 사형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당시로서는 정식재판을 통해 언도할 수 있는 최고의 극형에 해당하는 형벌이었다.
따라서 압살라 키케르는 자신의 이름과 이력, 죄명을 소상히 밝힌 대형 안내판과 함께 진열된 유리관 속에 벌거벗긴 채 넣어져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두뇌의 일부분과 시각기관, 청각기관만 제 기능이 살아있을 뿐, 그 외 나머지부분은 미이라로 만들어져 아무런 감각을 못 느끼고 꼼짝할 수도 없었다. 오직 보고 듣고 생각만 할 수 있는 시체가 된 것이다.
압살라 키케르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 머리 뒤쪽에 연결된 가는 호스로 미량의 필수영양분이 공급되고 불순물은 여과되게끔 자동혈액순환장치가 설치되었다. 또 깜빡이지 못하는 눈꺼풀로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 위에 설치된 노즐이 7분 간격으로 오르내리며 눈동자에 생리식염수를 분사했다.
압살라 키케르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거나 움직임을 볼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예전과 같았다. 그러니 압살라 키케르의 입장에선 사람들이 바로 코앞에서 욕하고 침 뱉고 윽박지르는 것을 그저 듣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여간 큰 고역이 아닌 것이다.
“이 사람이 대통령을 죽인 아주 나쁜 사람이란다.”
“엄마, 이 사람 진짜 악질처럼 생겼다. 무서워.”
다섯 살쯤 된 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구경나온 듯 젊은 엄마의 설명에 남자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하는 소리였다.
“이런 쳐 죽일 놈 봤나, 네놈이 그래 인간의 탈을 썼을지언정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주독이 잔뜩 든 딸기코를 가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50대 남자 하나가 욕을 퍼붓더니 압살라 키케르의 얼굴에 걸쭉한 가래를 ‘퉤!’ 하고 뱉어내었다. 가래는 그의 얼굴에 못 미치고 대신 유리면에 철썩 달라붙어 조금씩 흔적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인류는 어느덧 평온을 되찾고 조금씩 자유를 누리는 듯했다. 후일 인류 최고의 명예헌장 <노엘>에 헌정된 네덜란드계 <니머라이>박사의 <스퀘어식 대량육질양생법>에 의해 최소의 비용으로 양질의 살코기를 대량생산하게 되고 과일이나 야채 등도 수중에서 재배하는 청정재배방식에 의해 양산됨으로써 인류의 식량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많은 것을 잃었고 또 많은 교훈을 얻은 인류는 그런대로 평정을 되찾은 듯하였다.
- 제2회에서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