羊의 가죽이 호랑이 가죽의 문채가 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한 두 城을 수복한 것은 나의 처음 품은 뜻이 아니고
자리 한 장의 좁은 땅 治安한 것이 어찌 명예 되겠는가
조국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감히 이 몸을 軍幕에 드러내어
胡敵을 물리쳤으나 이 어찌 나라에 입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 될 것인가?
- 제1군단장 시절 김종오 장군의 애국 충절시-
상기의 시는 6.25 전쟁 초기 춘천 대첩의 명장 김종오(1921~1966) 장군의 시이다.
여기서 말하는 호적은 중공군을 말하는데, 이 분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의 주역 9사단장이자 춘천대첩의 주인공 김종오 장군이다.
이 시에서 백마고지 전투의 그 치열함과 진정한 충국의 소회를 담고 있다.
6.25 전쟁은 역사학도로서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순수한 전사로서의 측면 외에도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웠던 조선의용대 출신과 광복군 출신 그리고 일제하 지식인(학병, 사관생)으로 일본군으로 싸웠던 이들이 6.25라는 모순 속에서 다시 적과 동지가 되어야 하는 전쟁의 비정함을 느끼기도 한다.
춘천 대첩이란 6.25전쟁 초기 1950.6.25~6.30까지 춘천 일대에서 우리 국군 6사단과 북한 인민군 2군단과의 전투에서 궤멸적 승리를 가져온 사건이다.
이 방면의 승리가 중요한 것은 북한이 조기에 전격적으로 수도 서울을 점령하여 유리한 상태에서 협상을 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궤멸시키려는 의도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춘천‧홍천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공산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공산군의 진공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서, 중, 동 3방면의 병진 작전이 좌절된 것이다(임진왜란 때의 이순신의 수군의 승리-일본의 수륙병진 좌절을 연상케 함).
흥분한 북한군 수뇌부는 무리하게 타 방면의 군대까기 동원해서(남진한 부대를 위로 끌어서까지) 6사단을 공격했지만, 자랑스런 6사단은 건재 상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일사불란하게 퇴각한 후 7.4~.7.7충주에서 또 하나의 승리인 동락리(대화리) 전투를 이끌어 북한군의 진격을 지체시켰다.
이 전투에서 400명의 국군이 적을 800여 명 사살했고, 포로 90여 명, 차량 60대, 장갑차 3대, 소총 1,000정, 박격포 35문, 기관총 47정, 포 12문 등을 노획한 반면 아군은 경상자 1명뿐인 대승리였다. 노획된 무기를 1점씩 UN으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라는 증거품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각 연대가 38도 분계선상에서의 충돌을 통한 전투와 후방지역에서의 공비격멸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얼마간의 전투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병사들의 자질이 우수하였던 것이며, 특히 병력 및 장비가 열세함에도 불구하고 하천선방어와 산악지대의 지형을 최대로 이용하여 방어의 주도권을 장악한데 있었다.
이 대목 역시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병들을 연상케 한다. 6.25 발발 직전에도 3.8선 주변은 전쟁의 징후가 엿보였다. 그럼에도 군수뇌부들은 댄스 파티나 하는 해이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서부전선 개성 방면 쪽은 북한군 최정예 조선의용군 출신의 방호산이 이끄는 6사단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공교롭게도 남북한 모두 6사단이 승리의 주역이다.
그러나 우리의 6사단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참호를 파고 단내가 날 정도로 (포격)훈련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모든 승리에 의해 우연은 없다. 손자의 말대로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끌어당기는 유비무환이 승리의 원동력이다.
이러한 준비의 지휘한 것은 6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7연대장 임부택 장군의 혜안인 것이다. 이 두 장군은 이후에도 각각 백마고지 전투와 용문산 대첩을 이루어냈습니다.
특히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의 용문산 전투에서 제6사단은 무려3일간에 격전끝에 2만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3천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았기에 중공군 총사령관은 전쟁 당시 이렇게 말했다,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제 7연대를 괴멸시켜라! 그것만이 우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장군의 위력을 짐작케하는 외침이다
개인적으로 같은 백씨이지만 백선엽 장군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조직을 잘 운영해 나가는 탁월한 능력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전투 능력은 평균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예로 개전 초기 개성 방면 1사단장으로 무참히 깨진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흔히들 낙동강 전투 하면 다부동 전투를 많이 생각하는데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화력이 뒷받침되었고 거의 육박전 형식의 전투로 너무 많은 희생을 낳았다.
그러나 8사단과 6사단 임부택 대령이 이끈 영천-신령 대첩은 10여일간의 필사의 공방전끝에 최소의 희생(50여명 전사) 으로 이루어 낸 진정한 대첩이다.
역사란 알고 보면 재미있다. 진정한 명장은 충군애국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고 보잘것 없는 상황에서도 신념을 가지고 준비된 자세로 승리를 이끌어내었으며 승리에 또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러니 이러한 명장들은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는 못한다. 통치자에게 잘보이고 허풍이나 떠는 정치적 군인들만이 출세하고 자기의 이름을 드높일 뿐이다. 백선엽 (1920년생)장군이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33세에 육군 대장).
비슷한 연배의 김종오 장군이나 임부택(1919년 생)이 참모총장으로서 전군을 지휘케 했다면..... 역사는 가정이 없다지만...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